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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나의 끝, 하나님의 시작 – 예수의 고난 2 –

마가복음 14: 32 ~ 42

김지철 목사

2016.03.06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지난 3월 1일 소망 수양관에서 청년부 겨울수련회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청년들과 대화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 때’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질문이 많은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는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은 축복입니다. 질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성숙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청년들의 질문 중에 ‘예수님은 100% 온전한 인간이셨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은 참 인간이셨으며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계속해 왔습니다. 왜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 되셨을까요? 인간이 아니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죄’의 문제, ‘죽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타인과 친구가 되기까지 낯을 가립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 낯선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낯가림의 문화입니까? 끼리끼리의 문화입니까? 기득권을 고집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문제를 직접 안고 있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인간인 당신의 몸과 삶에 받으시고 하나님으로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기를 몸으로 안으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음을 앞두고 갈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이 길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습니다. 삼십대 초반에게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쉽게 용납할 수 없는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자리에 들기 전에 이미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모시자고 소리쳤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도 이런 인기를 구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락의 길, 실패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마치 깊이 좌절하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떨까요. 성공하다가 마지막에 실패자처럼 추락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자리에서 무너지듯 내려오게 될 때,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에 빠지기도 하고 육체의 쾌락을 즐기면서 망각 속에 자신의 현실을 묻어 두려고 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때로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공격적이 되어 더욱 파괴적인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모습을 보자 격분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내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괴적이고 공격적으로 반응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경고였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태복음 26:53)

열두 군단의 천군천사를 보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단은 약 육천 명이 되는 조직이었습니다. 열두 군단이면 완전수이기도 하지만, 그 수만 해도 7만 2천 명이 넘는 큰 군대입니다. 그런 큰 군대가 내려와 순식간에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바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기도를 쏟아 내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처럼 보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큰 지표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위기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세 번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첫 번째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였고, 두 번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와 명예가 높아졌을 때였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이었습니다.
공생애의 시작은 예수님의 영적 투쟁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무너뜨린 존재가 누구였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붙잡는 순간에도 사탄은 말씀으로 장난을 치며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의 힘을 받으시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로 인해 무너졌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인기를 얻으셨을 때였습니다. 단기간에 예수님만큼 인기를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인기를 얻게 되셨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안수하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병이어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 앞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왔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교만이라는 인간적인 위기가 닥쳐온다고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대중들과의 단절을 선택하셨습니다. 잘나갈 때, 사람들이 ‘최고’라고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용기 있게 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곳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셔야 했습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명예와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행한 기적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인생에서 올라가는 것이 인생이 힘듭니까?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산을 올라갈 때도 조심해서 올라가야 하지만, 실제로 추락 사고나 넘어짐의 사고는 내려올 때 더 많이 생깁니다. 잘나가던 사람이 마지막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내려가는 것,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을 잘하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붙잡았던 모든 것을 기도하며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 깊은 고뇌 속에서 예수님은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기도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 하나일 테지만, 오늘은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 올인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위기 앞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극복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문제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누가 필요합니까? 친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힘들 때 아내가 필요하고 아내가 어려울 때 남편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어려울 때 부모가 필요하고 부모가 어려울 때 자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기도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를 의지하는 마음조차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중보기도자가 곁에 있어도 결국 마지막은 나 자신의 실존을 걸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열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저기에서 기도할 테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내가 고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한 걸음 더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동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다른 제자들에게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깨어있는 데 실패했습니다. 너무나 피곤했던 것입니다. 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원보다 육체의 피곤함이 더 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돌아오니 세 제자는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면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가복음 14:37)

약간의 탄식과 함께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도 들어간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조차 사랑하는 제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이 겟세마네 동산까지입니다. 거기뿐입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이 혼자 가셔야 했습니다. 결국 기도의 자리는 혼자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마치 야곱이 모든 것을 먼저 보낸 후 얍복 강가에 남아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난은 셀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 옆에서 기도도 해 주고, 위로도 해 주고, 도와도 주지만, 고난은 홀로 지게 돼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되었으니 … (마가복음 14:33∼34)

‘심히 놀라고’ ‘심히 고민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진솔한 기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아가 내 문제를 하나님께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살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직면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극복해야 할 것은 자신과의 투쟁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도 도망가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못 하겠어요. 이 고통을 감내하기가 두렵습니다”라는 예수님의 속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마가복음 14:36)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도망가면 고난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도망가기를 거절해야, 고통에 직면해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도망부터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고통은 더욱 나를 억압하여 때로는 노이로제나 우울증에 걸리게도 합니다.
칼 융이라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동양 사람은 고통을 망각하려 하고 서양 사람은 약으로 달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고통을 기꺼이 짊어질 때만 극복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저분에게서 배웁니다.” 고통을 직면하여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마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통을 피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36)

여기에 반전의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나’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뒤집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을 직면하는 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체념이란 피동적인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고난받기를 수용하십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결단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욕심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가장 큰 신뢰를 담은 단어입니다. 그러한 신뢰 가운데 고난의 수용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감당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기도는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너무 빨리 가르쳐서도 안 되는 기도입니다. 이것으로 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기도가 체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이나 소원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말하게 되면,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된 기도양식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저 못 하겠습니다.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위기를 만날 때,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여러분을 억압하고 아프게 하는 고난과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돈이 없어서 힘듭니다. 하나님, 인간관계에서 늘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없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고 말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토해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가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의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고난을 직면하는 용기이고, 고난의 수용입니다. 체념이 일종의 심리적인 억압에서 나오는 삶의 형태라면, 수용과 용납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내 욕망으로부터 시작했어도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윌리엄 쉐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배는 그러라고 만든 게 아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고통과 고난이 있는 것을 아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생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으라고 배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도 안전지대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부딪치고 직면하고 도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아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고백하면서, ‘제가 이 현실을 직면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부딪쳐 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 같은 자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시옵소서’라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생을 열어가는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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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 32 ~ 42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지난 3월 1일 소망 수양관에서 청년부 겨울수련회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청년들과 대화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 때’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질문이 많은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는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은 축복입니다. 질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성숙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청년들의 질문 중에 ‘예수님은 100% 온전한 인간이셨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은 참 인간이셨으며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계속해 왔습니다. 왜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 되셨을까요? 인간이 아니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죄’의 문제, ‘죽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타인과 친구가 되기까지 낯을 가립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 낯선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낯가림의 문화입니까? 끼리끼리의 문화입니까? 기득권을 고집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문제를 직접 안고 있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인간인 당신의 몸과 삶에 받으시고 하나님으로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기를 몸으로 안으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음을 앞두고 갈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이 길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습니다. 삼십대 초반에게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쉽게 용납할 수 없는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자리에 들기 전에 이미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모시자고 소리쳤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도 이런 인기를 구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락의 길, 실패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마치 깊이 좌절하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떨까요. 성공하다가 마지막에 실패자처럼 추락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자리에서 무너지듯 내려오게 될 때,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에 빠지기도 하고 육체의 쾌락을 즐기면서 망각 속에 자신의 현실을 묻어 두려고 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때로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공격적이 되어 더욱 파괴적인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모습을 보자 격분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내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괴적이고 공격적으로 반응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경고였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태복음 26:53)

열두 군단의 천군천사를 보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단은 약 육천 명이 되는 조직이었습니다. 열두 군단이면 완전수이기도 하지만, 그 수만 해도 7만 2천 명이 넘는 큰 군대입니다. 그런 큰 군대가 내려와 순식간에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바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기도를 쏟아 내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처럼 보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큰 지표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위기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세 번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첫 번째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였고, 두 번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와 명예가 높아졌을 때였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이었습니다.
공생애의 시작은 예수님의 영적 투쟁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무너뜨린 존재가 누구였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붙잡는 순간에도 사탄은 말씀으로 장난을 치며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의 힘을 받으시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로 인해 무너졌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인기를 얻으셨을 때였습니다. 단기간에 예수님만큼 인기를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인기를 얻게 되셨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안수하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병이어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 앞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왔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교만이라는 인간적인 위기가 닥쳐온다고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대중들과의 단절을 선택하셨습니다. 잘나갈 때, 사람들이 ‘최고’라고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용기 있게 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곳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셔야 했습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명예와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행한 기적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인생에서 올라가는 것이 인생이 힘듭니까?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산을 올라갈 때도 조심해서 올라가야 하지만, 실제로 추락 사고나 넘어짐의 사고는 내려올 때 더 많이 생깁니다. 잘나가던 사람이 마지막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내려가는 것,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을 잘하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붙잡았던 모든 것을 기도하며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 깊은 고뇌 속에서 예수님은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기도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 하나일 테지만, 오늘은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 올인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위기 앞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극복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문제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누가 필요합니까? 친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힘들 때 아내가 필요하고 아내가 어려울 때 남편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어려울 때 부모가 필요하고 부모가 어려울 때 자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기도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를 의지하는 마음조차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중보기도자가 곁에 있어도 결국 마지막은 나 자신의 실존을 걸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열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저기에서 기도할 테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내가 고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한 걸음 더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동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다른 제자들에게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깨어있는 데 실패했습니다. 너무나 피곤했던 것입니다. 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원보다 육체의 피곤함이 더 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돌아오니 세 제자는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면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가복음 14:37)

약간의 탄식과 함께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도 들어간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조차 사랑하는 제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이 겟세마네 동산까지입니다. 거기뿐입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이 혼자 가셔야 했습니다. 결국 기도의 자리는 혼자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마치 야곱이 모든 것을 먼저 보낸 후 얍복 강가에 남아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난은 셀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 옆에서 기도도 해 주고, 위로도 해 주고, 도와도 주지만, 고난은 홀로 지게 돼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되었으니 … (마가복음 14:33∼34)

‘심히 놀라고’ ‘심히 고민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진솔한 기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아가 내 문제를 하나님께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살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직면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극복해야 할 것은 자신과의 투쟁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도 도망가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못 하겠어요. 이 고통을 감내하기가 두렵습니다”라는 예수님의 속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마가복음 14:36)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도망가면 고난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도망가기를 거절해야, 고통에 직면해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도망부터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고통은 더욱 나를 억압하여 때로는 노이로제나 우울증에 걸리게도 합니다.
칼 융이라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동양 사람은 고통을 망각하려 하고 서양 사람은 약으로 달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고통을 기꺼이 짊어질 때만 극복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저분에게서 배웁니다.” 고통을 직면하여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마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통을 피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36)

여기에 반전의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나’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뒤집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을 직면하는 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체념이란 피동적인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고난받기를 수용하십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결단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욕심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가장 큰 신뢰를 담은 단어입니다. 그러한 신뢰 가운데 고난의 수용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감당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기도는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너무 빨리 가르쳐서도 안 되는 기도입니다. 이것으로 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기도가 체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이나 소원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말하게 되면,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된 기도양식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저 못 하겠습니다.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위기를 만날 때,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여러분을 억압하고 아프게 하는 고난과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돈이 없어서 힘듭니다. 하나님, 인간관계에서 늘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없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고 말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토해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가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의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고난을 직면하는 용기이고, 고난의 수용입니다. 체념이 일종의 심리적인 억압에서 나오는 삶의 형태라면, 수용과 용납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내 욕망으로부터 시작했어도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윌리엄 쉐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배는 그러라고 만든 게 아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고통과 고난이 있는 것을 아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생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으라고 배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도 안전지대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부딪치고 직면하고 도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아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고백하면서, ‘제가 이 현실을 직면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부딪쳐 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 같은 자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시옵소서’라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생을 열어가는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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