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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가톨릭 – 예수님의 제자들 4 –

고린도전서 3: 10 ~ 11

김지철 목사

2014.08.17

온 나라가 가톨릭 분위기로 물들고 있습니다.

어제와 그제, 우리 교회 청년들이 신앙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그중에 저와 함께하는 공개적인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휴일에 모든 것을 제쳐놓고 수련회에 온 청년들의 모습이, 신앙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졌고 보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질문의 주제는 산상설교의 ‘팔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복들이 현대인의 가치관과는 충돌하고 있다는 고민이었습니다. 돈과 재물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권력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온유한 자보다는 뭔가에 집중하여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차지하는 것 아닙니까? 등등의 여러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중 한 청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요사이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을 보니 외면적으로 거룩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교황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종교적인 열정을 쏟아내는 것이 아주 멋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의 핵심은, “그렇다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 괜찮은 것 아닙니까?”였습니다. 이 질문은 결국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종교, 진정한 신앙이 무엇일까? 우리가 계속 개신교를 믿어도 괜찮은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오면서 온 나라가 가톨릭의 분위기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국영방송인 KBS까지 124위 시복미사 광경을 두 시간 이상 중계를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톨릭국가인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낮고 가난한 자를 위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장애우들도 만났고, 세월호 사건으로 고통 받는 유족들도 만났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했습니다. 교통수단도 기아의 ‘소울’이라는 작은 차를 탔습니다. 나중에는 카니발도 개조해서 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 좋다’는 생각을 갖게 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또 가톨릭과 개신교 기독교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올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의 전통은 성숙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한 가장 거대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무려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정치·종교 조직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화려함이 있습니다. 혹시 로마에 가보셨습니까? 베드로 성당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티칸 시티는 또 어떻습니까? 그 안에는 좋은 것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2천년 동안의 종교적 내공까지 갖고 있는 집단입니다.
지금껏 266명의 교황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중에서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세 번째 교황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게 여겨지겠습니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고 있습니다. 개혁과 변화,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것에 대한 칭찬이 있는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은 가톨릭교회라는 거대한 종교 우산 밑에 머물고 있음에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개혁되어지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산다는 것입니다. 개혁되어지지 않는 교회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평안하구나.” 하는 삶의 안정된 말을 비판했습니다. 그것이 종교이든, 예배이든, 믿음이든 그리했습니다. 왜냐하면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이 습관화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안정성에 대한 요구보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앙적인 것으로 만족하고 그 외에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할 수 있어야 개혁과 변화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한 청년의 질문처럼 정말 개신교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가야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저로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의 전통은 올바르고 성숙하며, 이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숙한 자리에서 미성숙한 자리로 내려갈 것입니까? 신약적인 자유로운 믿음의 신앙에서 구약적인 율법의 신앙으로 추락할 것입니까? 우리의 개신교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그 자부심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예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톨릭 신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이름을 ‘천주교’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믿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후예자들인 개신교는 그 이름을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기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가톨릭 교인들은 자기의 신앙을 기독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인이 그 이름을 선점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천주교, 가톨릭교, 그리스도교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와 우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가톨릭은 예식과 예전 종교라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말씀의 종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배를 미사라고 부릅니다. 더 정확한 이름은 성체성사(聖體聖事)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나누는 거룩한 행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미사는 성찬예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찬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이는 도구들을 사용합니다. 옷이며 모자, 손에 든 여러 가지 도구, 향을 피우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찬식을 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형식과 예전을 축소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속에 미신적인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물건을 만지면 내가 거룩해진다는 착각을 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같은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것들을 다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케토라고 불리는데, 이태리어로 작은 바가지라는 뜻입니다. 교황은 흰색을 쓰고, 추기경은 진홍색, 주교는 자주색을 씁니다. 이러한 색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직급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계급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직적인 하이라키 구조 속에 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계층적 질서를 요구하는 가톨릭의 구조 자체를 느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라틴어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자국어 미사로 바뀐 것은 제2바티칸 공회 이후인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신도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미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미사를 주관하는 신부들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론은 가능하면 줄이고, 떡을 나누는 성체성사를 미사의 핵심으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성경을 묵상하고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도피생활 동안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아, 직접 말씀을 배워라. 그래서 교회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분별해라.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라!”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해 강조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토가 바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만)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모토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식의 종교, 교회의 예전 전승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있는 개신교의 정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매개자의 역할이 큽니다.

또 다른 큰 차이는 중개자에 관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그리스도와 나, 예수님과 신도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중계자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식이 왜 많아졌을까요? 보이는 물건, 보이는 대상에 신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 행했던 124위 시복 미사에서 ‘복자’로 추대된 이들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내건 사람들입니다. 그 복자 위에 성인의 반열이 있습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얻게 되는 이름이 바로 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지금 교황의 이름도 아시시의 성인이었던 프란치스코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교회 축일표에도 이 성인들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14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행했던 것이 성모승천미사였습니다. 곧 마리아가 승천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승 속에서 별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7세기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셨는지라. 천주께서는 마리아의 육체의 썩음을 원치 아니하사 그를 승천시키셨다”고 말하면서 마리아승천미사를 통해 마리아 숭배사상을 알게 모르게 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교황은 절대 순명해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의 염수정 추기경이 그 앞에서 서약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존경과 사랑의 표시를 넘는 신적인 경외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갖고 있는 교황의 위치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황의 자리만이 그렇게 높은 것입니다.
19세기 레오 13세는, ‘교황은 매우 존엄하고 높기 때문에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치열하게 신학적 논쟁을 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주인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간에 매개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고해성사 모두 성사입니다. 과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 사면권’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르 2세가 1984년에 내린 교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주 신부들에게 죄를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고해성사를 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갖는 의미를 알 수 있는 이러한 글도 있습니다. ‘고해성사란 세례를 받고 난 뒤에 범한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받는다.’
거룩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예식과 예전과 특별한 인간에게서부터 찾으려는 분들은 가톨릭 신앙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고 개인이 직접 예수님에게 나아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개신교 신앙을 찾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은 종교적 형식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한 거룩함의 체험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반면 개신교는 성경말씀을 통한 신자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개종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의 엄숙한 예전을 보면서 스스로 성스럽게 되려하기보다는 성당과 성직자의 성스러움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의 신앙적 표현이 자유롭고 교인들 사이에 교제가 많다. 특히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어서 기쁘다.”
또 하나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7대 성사를 행해야 하는데 여기서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귀속이 됩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선한 행위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진정한 선함이 내게 나타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할 때도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일반 평신도들이 떡을 떼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포도주까지 함께 먹는 것은 거의 어렵습니다. 사제는 철저히 주는 사람이고, 성도는 철저히 받아 먹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성찬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도하는 목회자도 참여하는 성도와 함께 받아 마십니다.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떤 매개자를 두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도 있습니다. 가톨릭은 아직도 가부장적입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엄청난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 예로 아직 여성 사제가 없습니다. 또 여성들은 미사를 드릴 때 미사포라는 너울을 씁니다. 그것은 본래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겠다는 표시인데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바꿔 놓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의미라면, 남자들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남자들은 쓰지 않고, 마치 그것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처럼 변질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진정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왔을 때 왜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에게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동안 지도자들에게 실망했던 마음이 진정한 지도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명량’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1597년에 12척의 배로 130척이 넘는 왜군의 배를 무찔렀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과 용기를 보며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도자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진정한 지도자가 누굴까요?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확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정신적 영웅입니다. 그분이 영적인 영웅입니다. 그분이 온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BC와 AD를 나누신 영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다 작은 영웅들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중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서게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 것을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수를 쳐야 합니다. 가톨릭에 새로운 변화와 개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은 본질을 향해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복음의 핵심을 붙잡고 있는지 물으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500년의 역사 속에서 복음의 진정성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핵심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를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1)

예수 그리스도가 이 터의 주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터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적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교회, 그것을 향하여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먼저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모든 것들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도 예외가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옳아야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오직 그리스도로’입니다. 즉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된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고 낮은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복음의 핵심을 잘 붙잡고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교회의 변화와 개혁의 역사를 지속해야 합니다. 교회는 개혁되지 않으면 썩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망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이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가 될지 기대하기를 원합니다. 그 기대를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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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 10 ~ 11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온 나라가 가톨릭 분위기로 물들고 있습니다.

어제와 그제, 우리 교회 청년들이 신앙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그중에 저와 함께하는 공개적인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휴일에 모든 것을 제쳐놓고 수련회에 온 청년들의 모습이, 신앙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졌고 보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질문의 주제는 산상설교의 ‘팔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복들이 현대인의 가치관과는 충돌하고 있다는 고민이었습니다. 돈과 재물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권력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온유한 자보다는 뭔가에 집중하여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차지하는 것 아닙니까? 등등의 여러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중 한 청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요사이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을 보니 외면적으로 거룩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교황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종교적인 열정을 쏟아내는 것이 아주 멋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의 핵심은, “그렇다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 괜찮은 것 아닙니까?”였습니다. 이 질문은 결국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종교, 진정한 신앙이 무엇일까? 우리가 계속 개신교를 믿어도 괜찮은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오면서 온 나라가 가톨릭의 분위기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국영방송인 KBS까지 124위 시복미사 광경을 두 시간 이상 중계를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톨릭국가인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낮고 가난한 자를 위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장애우들도 만났고, 세월호 사건으로 고통 받는 유족들도 만났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했습니다. 교통수단도 기아의 ‘소울’이라는 작은 차를 탔습니다. 나중에는 카니발도 개조해서 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 좋다’는 생각을 갖게 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또 가톨릭과 개신교 기독교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올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의 전통은 성숙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한 가장 거대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무려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정치·종교 조직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화려함이 있습니다. 혹시 로마에 가보셨습니까? 베드로 성당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티칸 시티는 또 어떻습니까? 그 안에는 좋은 것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2천년 동안의 종교적 내공까지 갖고 있는 집단입니다.
지금껏 266명의 교황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중에서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세 번째 교황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게 여겨지겠습니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고 있습니다. 개혁과 변화,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것에 대한 칭찬이 있는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은 가톨릭교회라는 거대한 종교 우산 밑에 머물고 있음에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개혁되어지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산다는 것입니다. 개혁되어지지 않는 교회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평안하구나.” 하는 삶의 안정된 말을 비판했습니다. 그것이 종교이든, 예배이든, 믿음이든 그리했습니다. 왜냐하면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이 습관화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안정성에 대한 요구보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앙적인 것으로 만족하고 그 외에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할 수 있어야 개혁과 변화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한 청년의 질문처럼 정말 개신교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가야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저로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의 전통은 올바르고 성숙하며, 이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숙한 자리에서 미성숙한 자리로 내려갈 것입니까? 신약적인 자유로운 믿음의 신앙에서 구약적인 율법의 신앙으로 추락할 것입니까? 우리의 개신교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그 자부심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예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톨릭 신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이름을 ‘천주교’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믿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후예자들인 개신교는 그 이름을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기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가톨릭 교인들은 자기의 신앙을 기독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인이 그 이름을 선점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천주교, 가톨릭교, 그리스도교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와 우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가톨릭은 예식과 예전 종교라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말씀의 종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배를 미사라고 부릅니다. 더 정확한 이름은 성체성사(聖體聖事)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나누는 거룩한 행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미사는 성찬예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찬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이는 도구들을 사용합니다. 옷이며 모자, 손에 든 여러 가지 도구, 향을 피우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찬식을 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형식과 예전을 축소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속에 미신적인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물건을 만지면 내가 거룩해진다는 착각을 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같은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것들을 다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케토라고 불리는데, 이태리어로 작은 바가지라는 뜻입니다. 교황은 흰색을 쓰고, 추기경은 진홍색, 주교는 자주색을 씁니다. 이러한 색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직급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계급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직적인 하이라키 구조 속에 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계층적 질서를 요구하는 가톨릭의 구조 자체를 느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라틴어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자국어 미사로 바뀐 것은 제2바티칸 공회 이후인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신도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미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미사를 주관하는 신부들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론은 가능하면 줄이고, 떡을 나누는 성체성사를 미사의 핵심으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성경을 묵상하고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도피생활 동안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아, 직접 말씀을 배워라. 그래서 교회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분별해라.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라!”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해 강조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토가 바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만)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모토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식의 종교, 교회의 예전 전승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있는 개신교의 정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매개자의 역할이 큽니다.

또 다른 큰 차이는 중개자에 관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그리스도와 나, 예수님과 신도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중계자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식이 왜 많아졌을까요? 보이는 물건, 보이는 대상에 신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 행했던 124위 시복 미사에서 ‘복자’로 추대된 이들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내건 사람들입니다. 그 복자 위에 성인의 반열이 있습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얻게 되는 이름이 바로 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지금 교황의 이름도 아시시의 성인이었던 프란치스코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교회 축일표에도 이 성인들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14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행했던 것이 성모승천미사였습니다. 곧 마리아가 승천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승 속에서 별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7세기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셨는지라. 천주께서는 마리아의 육체의 썩음을 원치 아니하사 그를 승천시키셨다”고 말하면서 마리아승천미사를 통해 마리아 숭배사상을 알게 모르게 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교황은 절대 순명해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의 염수정 추기경이 그 앞에서 서약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존경과 사랑의 표시를 넘는 신적인 경외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갖고 있는 교황의 위치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황의 자리만이 그렇게 높은 것입니다.
19세기 레오 13세는, ‘교황은 매우 존엄하고 높기 때문에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치열하게 신학적 논쟁을 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주인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간에 매개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고해성사 모두 성사입니다. 과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 사면권’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르 2세가 1984년에 내린 교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주 신부들에게 죄를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고해성사를 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갖는 의미를 알 수 있는 이러한 글도 있습니다. ‘고해성사란 세례를 받고 난 뒤에 범한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받는다.’
거룩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예식과 예전과 특별한 인간에게서부터 찾으려는 분들은 가톨릭 신앙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고 개인이 직접 예수님에게 나아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개신교 신앙을 찾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은 종교적 형식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한 거룩함의 체험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반면 개신교는 성경말씀을 통한 신자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개종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의 엄숙한 예전을 보면서 스스로 성스럽게 되려하기보다는 성당과 성직자의 성스러움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의 신앙적 표현이 자유롭고 교인들 사이에 교제가 많다. 특히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어서 기쁘다.”
또 하나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7대 성사를 행해야 하는데 여기서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귀속이 됩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선한 행위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진정한 선함이 내게 나타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할 때도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일반 평신도들이 떡을 떼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포도주까지 함께 먹는 것은 거의 어렵습니다. 사제는 철저히 주는 사람이고, 성도는 철저히 받아 먹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성찬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도하는 목회자도 참여하는 성도와 함께 받아 마십니다.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떤 매개자를 두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도 있습니다. 가톨릭은 아직도 가부장적입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엄청난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 예로 아직 여성 사제가 없습니다. 또 여성들은 미사를 드릴 때 미사포라는 너울을 씁니다. 그것은 본래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겠다는 표시인데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바꿔 놓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의미라면, 남자들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남자들은 쓰지 않고, 마치 그것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처럼 변질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진정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왔을 때 왜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에게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동안 지도자들에게 실망했던 마음이 진정한 지도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명량’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1597년에 12척의 배로 130척이 넘는 왜군의 배를 무찔렀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과 용기를 보며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도자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진정한 지도자가 누굴까요?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확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정신적 영웅입니다. 그분이 영적인 영웅입니다. 그분이 온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BC와 AD를 나누신 영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다 작은 영웅들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중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서게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 것을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수를 쳐야 합니다. 가톨릭에 새로운 변화와 개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은 본질을 향해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복음의 핵심을 붙잡고 있는지 물으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500년의 역사 속에서 복음의 진정성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핵심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를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1)

예수 그리스도가 이 터의 주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터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적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교회, 그것을 향하여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먼저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모든 것들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도 예외가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옳아야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오직 그리스도로’입니다. 즉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된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고 낮은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복음의 핵심을 잘 붙잡고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교회의 변화와 개혁의 역사를 지속해야 합니다. 교회는 개혁되지 않으면 썩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망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이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가 될지 기대하기를 원합니다. 그 기대를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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