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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신앙에서 인격 신앙으로!

마가복음 5: 25 ~ 34

김지철 목사

2009.06.28

여인의 질병은 여인의 마음도 어렵게 하고 있었습니다.
心身一如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와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고, 몸이 건강하면 마음이 평안하게 마련입니다. 몸이 오랫동안 아프면, 당연히 마음에도 깊은 시름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름 없는 이 여인은 유대 가부장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부류의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여인이 앓고 있던 혈루증은 여성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치를 그녀에게서 박탈한 병마였습니다. 이 혈루증이라는 병은 현대적 병명으로는 만성하혈증과 같은 병이라고 여겨집니다.
레위기 15장에는 하혈중인 여성의 부정을 규정한 율법이 등장합니다. 율법의 규정은 이 여인을 항상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규정대로라면, 여인은 다른 누구와 접촉을 하는 것도, 성전이나 공공장소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병 때문에 그 여성은 여성이 누려야할 품위, 가치, 행복과 의미를 잃고,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병 하나로 한 여인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부정하다’고 말하는 수군거림이 날마다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자신과 삶을 함께할 남성을 만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공공장소에 갈 수 없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하루하루가 여인에게 무려 12년이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이 12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사람의 병이 치유될 수 없음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유대 문화에서 ‘12’라는 숫자는 완전한 수를 의미하며 이 여인의 병은 깊을 대로 깊어져서 치유를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병마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이미 치유할 희망도, 기대도 꿈도 가지지 말라는 암담한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또 그녀가 많은 의사를 찾아갔었지만 소용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오히려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12년 동안 그녀가 많은 의사들을 의지해보았지만, 그럼에도 그 의사들은 그녀에게 괴로움만을 더 해줄 뿐이었습니다. 그 괴로움은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그동안 잠시나마 기대를 가지고 의사들을 찾아다녔어도, 어떤 누구도 그녀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고, 그녀는 오히려 더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될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의 가진 것도 다 허비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녀가 아마도 부모에게서 받았을 얼마간의 유산도 많은 의사를 의지하고 찾아다닌 덕분에 다 허비되었습니다. 더욱더 그를 절망시키는 것은 그런 수많은 시도들에도 그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던 까닭입니다.
어떤 인간도 진정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외로웠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그녀가 참으로 필요한 존재라고, 그녀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위로를 받을 수도 없고, 스스로를 부축하고 이끌 원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무기력해지고 더욱 철저히 무능해져서 결국은 절망의 한 가운데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이제 곧 그렇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아직도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완전히 무너져서 더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인데도, 그녀는 무언가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에서 놓임을 얻겠다는 의지도 있었고, 자기가 반드시 치유를 받을 것이라고 소망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오랜 질병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무너지지 않게 추스르고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육신이 깊은 병에 시달려 왔지만, 그녀의 마음까지 무너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상황은 마치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어두운 밤하늘의 별빛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마음은 참 소중합니다. 우리가 별처럼 빛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별이 밝기 때문도 아니고, 찬란해서도 아닙니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살아있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주님께 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노래하는 시가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두움이 마땅하다.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
별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순간은 찬란한 태양이 있는 한 낮이 아닙니다. 별은 오직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을 발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낮처럼 찬란한 지위와 풍요의 한 가운데 있다면, 네온사인처럼 현란한 유혹들 사이에 있다면 우리는 별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어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가야할 방향을 찾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별을 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여기 이 여인은 지금 어둠 속,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그 한가운데서 별들처럼 반짝이는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누릴 생명, 곧 아름다운 자기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별, 이 여인이 끝내 포기하지 않고 기대하는 이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무너집니다.
그녀는 자기 몸의 아픔과 고통에 자기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게 마음을 지켜내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늘 연관되어 있는데, 몸이 아프면, 마음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육체가 억압받고 핍박 받으면, 생각과 꿈들도 멈추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기의 몸의 아픔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외로움과 단절의 고통도 자기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입니다. 몸이 힘들면 금방 게을러집니다. 육체가 고통 받으면 우리의 두뇌는 감각을 스스로 마비하기도 합니다. 곧 몸의 고통은 삶에 대한 마음, 의지 꿈과 생각을 포기하게 하려 합니다. 결국 몸의 고난, 곧 육체의 어려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잊고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런 존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따라왔다가 잠이 든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마음은 원이로구나. 마음은 날 사랑하는구나. 마음은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네 육체가 연약하구나. 네 몸이 피곤해서 지금 잠들었구나. 네가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만 누군가가 너를 협박할 때, 곧 네 몸이 위험하다고 그럴 때 너는 나를 배반할거다.”
곧, 몸이 마음을 장악해서 잠들어 버린 베드로의 현재모습을 보시면서 이내 닥칠 어려움을 베드로가 잘 이겨내기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대는 변화와 성숙의 자리입니다.
기대한다는 것, 소망을 품는다는 말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내 몸을 괴롭히고 내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일들에서, 내 마음을 지켜낸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육체의 고통을 이기고 몸을 지배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보다도 내 마음 안의 기대와 꿈이, 소망과 비전이 내 몸을 이끌고 내 마음을 평안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변화와 성숙의 자리입니다.
이 여인은 깊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기대했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말고도, 이 여인에게는 계속된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또 실패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또 창피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자기 몸이 여전히 병마를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걱정들이 그녀에게 있었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야 할 길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사로잡혀 기대를 잃지 않을 때,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아플 때, 소문이 들립니다. 고통이 있어야 말씀이 들립니다. 잘 안되고 무너질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지금껏 수많은 소문들을 따라서 실패를 했지만, 이 마지막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마가복음5:27)
이미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딘가로 향하여 발길을 옮기시는 중이었습니다. 여인은 사실 무리들 사이에 끼여 있을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를 헤치고 나아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만나보아야겠다는 일념이 그녀를 이끌었습니다. 기대하게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의 뒤로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쪽으로 와서 조용히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여인은 익명으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여인은 자기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저 자기를 괴롭히던 이 몹쓸 병에서 하루 속히 놓임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익명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익명성에는 귀한 익명이 있습니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익명성이 있습니다. 귀한 일을 하고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기 위해 이름을 숨기는 것이 그렇습니다. 혹, 부정적인 익명성도 있습니다. 타인을 핍박하기 위해 자기를 숨기는 익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겸손하게 다가서려는 익명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마가복음 5:28)
여러분, 이 여인의 이 열망과 소원은 얼마나 큽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조심스럽게 손을 대는 그 손길이 얼마나 진지합니까? 만일 이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면, 여인이 뒤에서 다가오는 그 모습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 여인이 점점 클로즈업 되면서, 떨리는 손길과 긴장된 얼굴이 번갈아가며 우리를 긴장시킬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는 순간, 여인의 몸에 생겨난 변화, 곧 병이 고쳐지는 전율이 감격과 함께 요동하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드러내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몸의 병, 자기를 무너뜨리는 이 질병으로부터만 해방되면 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길 바랐습니다. 예수님도 모르시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보십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마가복음 5:32)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려고 제자들에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다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어리둥절합니다. ‘예수님,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지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이 누구냐? 어디 한 두 사람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이 말한 그 수많은 무리들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자기를 사모해서 옷자락에 손을 댄, 그래서 몸의 질병이 치유 받은 인생의 가장 말단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기대를 가진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부르십니다.
여인은 익명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여인이 실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은 자기를 아무도 발견해주지 않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 여인을 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을 돌아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이 부정하다 가까이 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접촉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제 자신이 숨겨진 사람, 익명의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나의 고민, 문제, 아픔과 상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귀하여 여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그 순간 저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어떤 사람도 거절당하거나 포기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은 나를 모르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 여인처럼, 여러분들 하나하나를 사랑으로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는 익명성이라는 벽이 있습니다. 무관심과 익명성이 우리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롭게 하고, 고독하게 합니다. 함께하는 기쁨을 잊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늘 실명, 곧 참다운 나됨이 있습니다. 나조차 아직 발견하지 못한 참다운 나의 진면목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너는 귀한 존재라고 일컬어주십니다.
성경이 오늘의 사건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너는 하나님의 딸이야. 너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기복적인 신앙을 넘어서 인격적인 신앙의 장으로 나와야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인의 신앙은 비로소 인격적이 되었습니다. 처음, 그녀의 소망은 그저 병 고침이라는 기복적인 신앙뿐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녀에게 진정한 구원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신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 만지기만을 원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그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께 기복적으로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우리 딸 대학 입시만 합격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의 이렇게 질병 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 병 고쳐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이 기업에 투자하는데 이것 한번 크게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수많은 기복적인 기도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자기중심적이고 초보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기복적인 답을 얻었다고 해서 삶의 변화가 생기거나 충만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복적인 시작, 초보적인 신앙을 열매 맺게 하십니다. 현실의 암담함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가 절망의 끄트머리에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을 향한 기대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신앙으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육체적인 질병만 고쳐준 것만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까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이 축복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타는 목마름을 지니고 서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리 밝지 못하여 황폐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우리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마가복음5:34)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몸이 연약하고 아파하는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약함과 아픔으로 인해 마음도 쉽게 무너지는 여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대로 나왔사오니, 주님 우리를 받아주옵소서.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며, 치유되심을 믿고 고백을 하오니,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지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사랑하는 딸임을 일깨워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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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 25 ~ 34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34

여인의 질병은 여인의 마음도 어렵게 하고 있었습니다.
心身一如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와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고, 몸이 건강하면 마음이 평안하게 마련입니다. 몸이 오랫동안 아프면, 당연히 마음에도 깊은 시름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름 없는 이 여인은 유대 가부장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부류의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여인이 앓고 있던 혈루증은 여성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치를 그녀에게서 박탈한 병마였습니다. 이 혈루증이라는 병은 현대적 병명으로는 만성하혈증과 같은 병이라고 여겨집니다.
레위기 15장에는 하혈중인 여성의 부정을 규정한 율법이 등장합니다. 율법의 규정은 이 여인을 항상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규정대로라면, 여인은 다른 누구와 접촉을 하는 것도, 성전이나 공공장소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병 때문에 그 여성은 여성이 누려야할 품위, 가치, 행복과 의미를 잃고,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병 하나로 한 여인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부정하다’고 말하는 수군거림이 날마다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자신과 삶을 함께할 남성을 만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공공장소에 갈 수 없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하루하루가 여인에게 무려 12년이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이 12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사람의 병이 치유될 수 없음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유대 문화에서 ‘12’라는 숫자는 완전한 수를 의미하며 이 여인의 병은 깊을 대로 깊어져서 치유를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병마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이미 치유할 희망도, 기대도 꿈도 가지지 말라는 암담한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또 그녀가 많은 의사를 찾아갔었지만 소용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오히려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12년 동안 그녀가 많은 의사들을 의지해보았지만, 그럼에도 그 의사들은 그녀에게 괴로움만을 더 해줄 뿐이었습니다. 그 괴로움은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그동안 잠시나마 기대를 가지고 의사들을 찾아다녔어도, 어떤 누구도 그녀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고, 그녀는 오히려 더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될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의 가진 것도 다 허비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녀가 아마도 부모에게서 받았을 얼마간의 유산도 많은 의사를 의지하고 찾아다닌 덕분에 다 허비되었습니다. 더욱더 그를 절망시키는 것은 그런 수많은 시도들에도 그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던 까닭입니다.
어떤 인간도 진정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외로웠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그녀가 참으로 필요한 존재라고, 그녀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위로를 받을 수도 없고, 스스로를 부축하고 이끌 원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무기력해지고 더욱 철저히 무능해져서 결국은 절망의 한 가운데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이제 곧 그렇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아직도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완전히 무너져서 더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인데도, 그녀는 무언가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에서 놓임을 얻겠다는 의지도 있었고, 자기가 반드시 치유를 받을 것이라고 소망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오랜 질병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무너지지 않게 추스르고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육신이 깊은 병에 시달려 왔지만, 그녀의 마음까지 무너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상황은 마치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어두운 밤하늘의 별빛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마음은 참 소중합니다. 우리가 별처럼 빛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별이 밝기 때문도 아니고, 찬란해서도 아닙니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살아있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주님께 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노래하는 시가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두움이 마땅하다.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
별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순간은 찬란한 태양이 있는 한 낮이 아닙니다. 별은 오직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을 발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낮처럼 찬란한 지위와 풍요의 한 가운데 있다면, 네온사인처럼 현란한 유혹들 사이에 있다면 우리는 별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어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가야할 방향을 찾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별을 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여기 이 여인은 지금 어둠 속,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그 한가운데서 별들처럼 반짝이는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누릴 생명, 곧 아름다운 자기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별, 이 여인이 끝내 포기하지 않고 기대하는 이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무너집니다.
그녀는 자기 몸의 아픔과 고통에 자기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게 마음을 지켜내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늘 연관되어 있는데, 몸이 아프면, 마음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육체가 억압받고 핍박 받으면, 생각과 꿈들도 멈추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기의 몸의 아픔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외로움과 단절의 고통도 자기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입니다. 몸이 힘들면 금방 게을러집니다. 육체가 고통 받으면 우리의 두뇌는 감각을 스스로 마비하기도 합니다. 곧 몸의 고통은 삶에 대한 마음, 의지 꿈과 생각을 포기하게 하려 합니다. 결국 몸의 고난, 곧 육체의 어려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잊고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런 존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따라왔다가 잠이 든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마음은 원이로구나. 마음은 날 사랑하는구나. 마음은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네 육체가 연약하구나. 네 몸이 피곤해서 지금 잠들었구나. 네가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만 누군가가 너를 협박할 때, 곧 네 몸이 위험하다고 그럴 때 너는 나를 배반할거다.”
곧, 몸이 마음을 장악해서 잠들어 버린 베드로의 현재모습을 보시면서 이내 닥칠 어려움을 베드로가 잘 이겨내기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대는 변화와 성숙의 자리입니다.
기대한다는 것, 소망을 품는다는 말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내 몸을 괴롭히고 내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일들에서, 내 마음을 지켜낸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육체의 고통을 이기고 몸을 지배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보다도 내 마음 안의 기대와 꿈이, 소망과 비전이 내 몸을 이끌고 내 마음을 평안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변화와 성숙의 자리입니다.
이 여인은 깊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기대했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말고도, 이 여인에게는 계속된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또 실패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또 창피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자기 몸이 여전히 병마를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걱정들이 그녀에게 있었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야 할 길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사로잡혀 기대를 잃지 않을 때,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아플 때, 소문이 들립니다. 고통이 있어야 말씀이 들립니다. 잘 안되고 무너질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지금껏 수많은 소문들을 따라서 실패를 했지만, 이 마지막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마가복음5:27)
이미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딘가로 향하여 발길을 옮기시는 중이었습니다. 여인은 사실 무리들 사이에 끼여 있을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를 헤치고 나아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만나보아야겠다는 일념이 그녀를 이끌었습니다. 기대하게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의 뒤로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쪽으로 와서 조용히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여인은 익명으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여인은 자기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저 자기를 괴롭히던 이 몹쓸 병에서 하루 속히 놓임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익명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익명성에는 귀한 익명이 있습니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익명성이 있습니다. 귀한 일을 하고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기 위해 이름을 숨기는 것이 그렇습니다. 혹, 부정적인 익명성도 있습니다. 타인을 핍박하기 위해 자기를 숨기는 익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겸손하게 다가서려는 익명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마가복음 5:28)
여러분, 이 여인의 이 열망과 소원은 얼마나 큽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조심스럽게 손을 대는 그 손길이 얼마나 진지합니까? 만일 이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면, 여인이 뒤에서 다가오는 그 모습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 여인이 점점 클로즈업 되면서, 떨리는 손길과 긴장된 얼굴이 번갈아가며 우리를 긴장시킬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는 순간, 여인의 몸에 생겨난 변화, 곧 병이 고쳐지는 전율이 감격과 함께 요동하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드러내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몸의 병, 자기를 무너뜨리는 이 질병으로부터만 해방되면 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길 바랐습니다. 예수님도 모르시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보십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마가복음 5:32)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려고 제자들에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다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어리둥절합니다. ‘예수님,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지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이 누구냐? 어디 한 두 사람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이 말한 그 수많은 무리들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자기를 사모해서 옷자락에 손을 댄, 그래서 몸의 질병이 치유 받은 인생의 가장 말단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기대를 가진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부르십니다.
여인은 익명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여인이 실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은 자기를 아무도 발견해주지 않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 여인을 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을 돌아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이 부정하다 가까이 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접촉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제 자신이 숨겨진 사람, 익명의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나의 고민, 문제, 아픔과 상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귀하여 여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그 순간 저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어떤 사람도 거절당하거나 포기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은 나를 모르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 여인처럼, 여러분들 하나하나를 사랑으로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는 익명성이라는 벽이 있습니다. 무관심과 익명성이 우리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롭게 하고, 고독하게 합니다. 함께하는 기쁨을 잊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늘 실명, 곧 참다운 나됨이 있습니다. 나조차 아직 발견하지 못한 참다운 나의 진면목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너는 귀한 존재라고 일컬어주십니다.
성경이 오늘의 사건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너는 하나님의 딸이야. 너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기복적인 신앙을 넘어서 인격적인 신앙의 장으로 나와야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인의 신앙은 비로소 인격적이 되었습니다. 처음, 그녀의 소망은 그저 병 고침이라는 기복적인 신앙뿐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녀에게 진정한 구원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신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 만지기만을 원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그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께 기복적으로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우리 딸 대학 입시만 합격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의 이렇게 질병 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 병 고쳐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이 기업에 투자하는데 이것 한번 크게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수많은 기복적인 기도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자기중심적이고 초보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기복적인 답을 얻었다고 해서 삶의 변화가 생기거나 충만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복적인 시작, 초보적인 신앙을 열매 맺게 하십니다. 현실의 암담함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가 절망의 끄트머리에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을 향한 기대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신앙으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육체적인 질병만 고쳐준 것만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까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이 축복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타는 목마름을 지니고 서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리 밝지 못하여 황폐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우리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마가복음5:34)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몸이 연약하고 아파하는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약함과 아픔으로 인해 마음도 쉽게 무너지는 여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대로 나왔사오니, 주님 우리를 받아주옵소서.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며, 치유되심을 믿고 고백을 하오니,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지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사랑하는 딸임을 일깨워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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