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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신뢰, 회복이 가능한가? – 다윗과 압살롬 –

사무엘하 13: 20 ~ 22

김지철 목사

2016.01.17

영조와 사도 세자의 관계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올해는 ‘믿음’, ‘신뢰’라는 주제로 새해 첫 주부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모와 자녀 간의 신뢰,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신뢰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작년에 ‘사도’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 세자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세자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영재라고 불릴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습니다. 차기 왕이 될 것으로 예정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조는 27살의 다 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서 7∼8일 동안 아무것도 주지 않아 굶겨 죽입니다.
왜 영조는 아들을 죽이게 되었을까요?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하나는, 사도 세자의 포악성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여러 명 살해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라는 정파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죽임의 이유보다도 그 두 사람,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도대체 어떤 관계였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서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아버지와 아들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서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게 너무 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조는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아들을 끊임없이 닦달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들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지나치게 컸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행동과 말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자를 더 훌륭한 왕으로 세우기 위한 교육적 열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도 세자에게 그 아버지는 너무나도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사도 세자는 끊임없이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원했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않자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만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이 커짐에 따라 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향해서 미움과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역사가 기록한 대로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조가 손자인 이산, 정조(正祖)를 대하는 태도는 아들을 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웬만하면 받아들였고 웬만하면 칭찬했습니다. 아들에게는 엄하던 아버지가 손자 손녀에게는 무척 자애로운 할아버지가 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된 아들은 이러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내게는 그토록 엄한 아버지셨을까?’

비극의 씨앗은 다윗의 명확하지 않은 태도였습니다.

200년 전에 일어난 영조와 사도 세자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부자지간의 신뢰가 깨지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3000년 전에 일어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다윗과 그의 아들 암논과 압살롬입니다. 다윗은 암논을 잃어버리게 되고, 압살롬과는 원수가 됩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첫째 아들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은 이복형제였습니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말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꾀병을 앓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의 간호를 부탁합니다. 다윗은 별 생각 없이 그것을 허락했으나 그 결과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암논이 자신을 간호하러 온 다말을 능욕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사무엘하 13장 21절 말씀은 그 사건을 한마디로 이렇게 압축시키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1)

그런데 화를 낸 이유와 누구에게 화를 냈는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화를 내는 대상이 명백히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윗의 자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암논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부하를 전장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죄악을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의 그러한 모습을 꾸중하고 징계를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분노는 막연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분노가 섞인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들에게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내지 않을 수도 없었던 다윗은 결국 실수를 하게 됩니다. 암논이 책임지어야 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만 것입니다. 그저 노함의 자리에 멈춰서서 말입니다.
또 다윗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압살롬의 분노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친여동생이 자신의 이복형에게 능욕받은 것을 듣고는 마음속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왜 아버지가 형에게 징계를 안 하시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지? 다말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지?’ 그는 2년 동안 복수의 때를 기다립니다. 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속으로만 분노를 삼키다가 2년 후 왕자들이 양털을 깎는 잔치에서 암논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겁이 나서 그술로 도망가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아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암논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암논에 대한 사랑은 접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셋째 아들 압살롬에 대한 사랑은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가 그리웠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압살롬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압살롬은 외모도 훌륭했고, 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볼 수 없었으니 다윗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2년이 지난 후에야 압살롬은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왔을 때 다윗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아들에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다윗은 훌륭한 임금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아들들의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은 고국으로 돌아온 압살롬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부하의 도움으로 암논이 죽은 지 5년 만에야 압살롬을 만나서 포옹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는 ‘포옹을 했다’ 외의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났지만 그동안의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미 그때 압살롬의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하겠다는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마음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인인 압살롬을 왕으로 세울 수 없으니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야 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압살롬이 반역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복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준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가정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아들과의 관계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큰 약점이었습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자녀 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아들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우리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인터넷에서 한 글을 읽었습니다. 골프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골프와 자식의 비슷한 점이라며 올린 글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도무지 끊을 수가 없다. 두 번째, 끝까지 눈을 떼면 안 된다. 공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지 않으면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잘못 때리면 딴 길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네 번째, 남들에게 자랑할 때는 부풀려 말한다. 다섯 번째, 아무리 고액 과외를 받아도 소용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섯 번째, 18홀을 다 돌면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 자식에게 빗댄다면 18세가 되면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피상적이지만 굉장히 의미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그의 책『인생의 목적어』에 인생의 목적어가 될 만한 소중한 단어가 무엇인지 2,820명에게 물어본 결과를 담았습니다. 가족, 사랑, 나, 엄마 등의 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23위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보고 저자는 아버지 사직서를 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글입니다.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아버지직을 그만두려 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게 감히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아버지라는 사람 맞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아버지 공부를 했어야 했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조금 더 솔직했어야 했다. 나는 무능한 아버지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 이런 비겁한 말을 했다. 때로는 필요 이상의 호통으로 자식들을 제압했다. 아버지의 무능을 감출 수는 있었겠지만 자식들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자식들이 어른이 되는 날을 한참 뒤로 미루게 했다. 아버지가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니었다. 후회한다. 미안하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과 대화를 하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잘 놀아도 준다고 합니다. 참 좋은 아버지라고 하며 아들의 나이를 물으니 ‘두 살’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럴 것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잘 놀아주다가 자녀가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면 서서히 멀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돈을 버는 것도 힘들고, 세상에서 잘나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 얻을 수 있는데 자식 농사만큼은 정말 어렵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입니까?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고,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이고 내 어머니입니다. 그분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의 영웅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은 아들과 딸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없으면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고, 혹시라도 부모님이 나를 놓칠까봐 부모의 손을 꽉 붙잡았습니다. 부모님의 얼굴이 안 보이면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부모님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나는 아빠,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큰소리까지 칩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은 나를 이해하려 한 적이 없다고, 나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 두 팔과 두 다리가 있고, 이만큼 온전하고 건강하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나를 세심하게 돌보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모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때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부모님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우리의 삶의 패턴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되는 연습을 안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처음 되어 보기 때문에, 배우지 않은 채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다윗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윗을 타산지석 삼아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도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아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자유의 남용에 대해 나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둘째 아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일생일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책임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네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첫째 아들 암논이나 셋째 아들 압살롬을 방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처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다윗이 실수한 것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가까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세요. 나를 받아주세요’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이 돌아왔을 때 압살롬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서 아들을 껴안고 누더기 같은 아들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포옹까지는 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용서한 것도 아니고 용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에 압살롬은 아버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용서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거울로 삼읍시다.

아버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에게 표현하세요. 네가 얼마나 소중한 아들인지, 네가 있음으로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었는지 아들에게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 듣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못하는 이유는 아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큰소리를 쳤으면서도 자녀가 나이가 들면 아버지는 자녀들을 무서워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아들이 픽 웃으며 조롱하거나 비난할까봐 겁이 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아버지들은 겁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표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들을 기억해요.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 것이 참 감사해요”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 아들 압살롬의 마음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슬프고 외로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공격당하고 반역당하는, 쫓기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는 우리의 표상이 됩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에게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고 동시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가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네 인생에는 사명이 있다.” 그리고 아들을 자랑하며 인정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시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잘 알아 평생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이른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 받기를 열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나도 행한다”고 선언하셨던 것이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나갈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마음을 표현함으로 가정의 신뢰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이상적인 아버지상과 현실적인 아버지상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부양만 잘해도 ‘좋은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버지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대화하는 아버지, 자녀와 정서적 유대를 지닌 아버지, 자녀 양육에 참여하는 아버지 등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자꾸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게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자주 보지 못하거나 자녀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SNS를 이용하면 됩니다. 말로 하기 힘들면 ‘네가 옆에 있어서 고맙구나. 네가 내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구나’라고 보내 보세요. 저절로 알아지리라 생각하지 마시고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아들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을까봐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표현하세요. “아버지 덕분에 제가 이만큼 자랐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신뢰’입니다. 먼저 가정이 회복될 것이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은 가정에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노력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신뢰, 생명의 신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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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3: 20 ~ 22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영조와 사도 세자의 관계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올해는 ‘믿음’, ‘신뢰’라는 주제로 새해 첫 주부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모와 자녀 간의 신뢰,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신뢰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작년에 ‘사도’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 세자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세자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영재라고 불릴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습니다. 차기 왕이 될 것으로 예정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조는 27살의 다 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서 7∼8일 동안 아무것도 주지 않아 굶겨 죽입니다.
왜 영조는 아들을 죽이게 되었을까요?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하나는, 사도 세자의 포악성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여러 명 살해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라는 정파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죽임의 이유보다도 그 두 사람,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도대체 어떤 관계였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서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아버지와 아들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서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게 너무 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조는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아들을 끊임없이 닦달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들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지나치게 컸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행동과 말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자를 더 훌륭한 왕으로 세우기 위한 교육적 열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도 세자에게 그 아버지는 너무나도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사도 세자는 끊임없이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원했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않자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만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이 커짐에 따라 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향해서 미움과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역사가 기록한 대로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조가 손자인 이산, 정조(正祖)를 대하는 태도는 아들을 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웬만하면 받아들였고 웬만하면 칭찬했습니다. 아들에게는 엄하던 아버지가 손자 손녀에게는 무척 자애로운 할아버지가 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된 아들은 이러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내게는 그토록 엄한 아버지셨을까?’

비극의 씨앗은 다윗의 명확하지 않은 태도였습니다.

200년 전에 일어난 영조와 사도 세자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부자지간의 신뢰가 깨지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3000년 전에 일어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다윗과 그의 아들 암논과 압살롬입니다. 다윗은 암논을 잃어버리게 되고, 압살롬과는 원수가 됩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첫째 아들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은 이복형제였습니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말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꾀병을 앓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의 간호를 부탁합니다. 다윗은 별 생각 없이 그것을 허락했으나 그 결과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암논이 자신을 간호하러 온 다말을 능욕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사무엘하 13장 21절 말씀은 그 사건을 한마디로 이렇게 압축시키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1)

그런데 화를 낸 이유와 누구에게 화를 냈는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화를 내는 대상이 명백히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윗의 자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암논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부하를 전장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죄악을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의 그러한 모습을 꾸중하고 징계를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분노는 막연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분노가 섞인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들에게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내지 않을 수도 없었던 다윗은 결국 실수를 하게 됩니다. 암논이 책임지어야 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만 것입니다. 그저 노함의 자리에 멈춰서서 말입니다.
또 다윗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압살롬의 분노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친여동생이 자신의 이복형에게 능욕받은 것을 듣고는 마음속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왜 아버지가 형에게 징계를 안 하시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지? 다말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지?’ 그는 2년 동안 복수의 때를 기다립니다. 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속으로만 분노를 삼키다가 2년 후 왕자들이 양털을 깎는 잔치에서 암논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겁이 나서 그술로 도망가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아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암논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암논에 대한 사랑은 접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셋째 아들 압살롬에 대한 사랑은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가 그리웠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압살롬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압살롬은 외모도 훌륭했고, 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볼 수 없었으니 다윗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2년이 지난 후에야 압살롬은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왔을 때 다윗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아들에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다윗은 훌륭한 임금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아들들의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은 고국으로 돌아온 압살롬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부하의 도움으로 암논이 죽은 지 5년 만에야 압살롬을 만나서 포옹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는 ‘포옹을 했다’ 외의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났지만 그동안의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미 그때 압살롬의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하겠다는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마음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인인 압살롬을 왕으로 세울 수 없으니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야 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압살롬이 반역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복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준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가정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아들과의 관계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큰 약점이었습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자녀 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아들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우리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인터넷에서 한 글을 읽었습니다. 골프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골프와 자식의 비슷한 점이라며 올린 글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도무지 끊을 수가 없다. 두 번째, 끝까지 눈을 떼면 안 된다. 공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지 않으면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잘못 때리면 딴 길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네 번째, 남들에게 자랑할 때는 부풀려 말한다. 다섯 번째, 아무리 고액 과외를 받아도 소용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섯 번째, 18홀을 다 돌면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 자식에게 빗댄다면 18세가 되면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피상적이지만 굉장히 의미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그의 책『인생의 목적어』에 인생의 목적어가 될 만한 소중한 단어가 무엇인지 2,820명에게 물어본 결과를 담았습니다. 가족, 사랑, 나, 엄마 등의 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23위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보고 저자는 아버지 사직서를 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글입니다.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아버지직을 그만두려 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게 감히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아버지라는 사람 맞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아버지 공부를 했어야 했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조금 더 솔직했어야 했다. 나는 무능한 아버지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 이런 비겁한 말을 했다. 때로는 필요 이상의 호통으로 자식들을 제압했다. 아버지의 무능을 감출 수는 있었겠지만 자식들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자식들이 어른이 되는 날을 한참 뒤로 미루게 했다. 아버지가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니었다. 후회한다. 미안하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과 대화를 하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잘 놀아도 준다고 합니다. 참 좋은 아버지라고 하며 아들의 나이를 물으니 ‘두 살’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럴 것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잘 놀아주다가 자녀가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면 서서히 멀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돈을 버는 것도 힘들고, 세상에서 잘나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 얻을 수 있는데 자식 농사만큼은 정말 어렵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입니까?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고,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이고 내 어머니입니다. 그분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의 영웅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은 아들과 딸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없으면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고, 혹시라도 부모님이 나를 놓칠까봐 부모의 손을 꽉 붙잡았습니다. 부모님의 얼굴이 안 보이면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부모님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나는 아빠,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큰소리까지 칩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은 나를 이해하려 한 적이 없다고, 나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 두 팔과 두 다리가 있고, 이만큼 온전하고 건강하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나를 세심하게 돌보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모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때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부모님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우리의 삶의 패턴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되는 연습을 안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처음 되어 보기 때문에, 배우지 않은 채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다윗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윗을 타산지석 삼아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도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아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자유의 남용에 대해 나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둘째 아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일생일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책임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네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첫째 아들 암논이나 셋째 아들 압살롬을 방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처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다윗이 실수한 것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가까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세요. 나를 받아주세요’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이 돌아왔을 때 압살롬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서 아들을 껴안고 누더기 같은 아들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포옹까지는 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용서한 것도 아니고 용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에 압살롬은 아버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용서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거울로 삼읍시다.

아버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에게 표현하세요. 네가 얼마나 소중한 아들인지, 네가 있음으로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었는지 아들에게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 듣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못하는 이유는 아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큰소리를 쳤으면서도 자녀가 나이가 들면 아버지는 자녀들을 무서워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아들이 픽 웃으며 조롱하거나 비난할까봐 겁이 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아버지들은 겁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표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들을 기억해요.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 것이 참 감사해요”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 아들 압살롬의 마음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슬프고 외로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공격당하고 반역당하는, 쫓기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는 우리의 표상이 됩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에게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고 동시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가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네 인생에는 사명이 있다.” 그리고 아들을 자랑하며 인정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시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잘 알아 평생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이른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 받기를 열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나도 행한다”고 선언하셨던 것이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나갈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마음을 표현함으로 가정의 신뢰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이상적인 아버지상과 현실적인 아버지상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부양만 잘해도 ‘좋은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버지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대화하는 아버지, 자녀와 정서적 유대를 지닌 아버지, 자녀 양육에 참여하는 아버지 등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자꾸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게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자주 보지 못하거나 자녀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SNS를 이용하면 됩니다. 말로 하기 힘들면 ‘네가 옆에 있어서 고맙구나. 네가 내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구나’라고 보내 보세요. 저절로 알아지리라 생각하지 마시고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아들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을까봐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표현하세요. “아버지 덕분에 제가 이만큼 자랐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신뢰’입니다. 먼저 가정이 회복될 것이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은 가정에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노력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신뢰, 생명의 신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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