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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꿀 수 없는 사람들 – 모세 이야기 9 –

출애굽기 5:15~6:1:

김지철 목사

2017.01.08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망교회 창립 40주년이자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 교회는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지난 1월 1일, 금년 첫 예배 때에는 어떻게 새롭고 거룩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워지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하면 새로워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님께만 진정한 새로움과 거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출발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우리 마음에 자괴감이 듭니다. ‘아, 나는 작심삼일이구나. 삼일도 못 가는구나.’ 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작심삼일이면 삼일마다 다시 시작하고, 작심일일이라면 매일 아침 다시 예수님과 함께 출발하는 것입니다. 새해에 품었던 소망과 결단을 지속시키는 건,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소중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3:14)

물론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과 달리, 붙잡은 것을 놓치고 변덕쟁이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자신이 혐오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동안 어떻게 가정을 꾸려 왔는가를 되돌아보며, 매일, 매주, 매달 그리고 매년 우리 가정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 왔는지, 처음 가졌던 마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마음을 지금도 지키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처음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처음 이 직장을 내게 허락하셨을 때 얼마나 설레고 기뻤습니까? 직장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지 생각하고, 앞으로의 삶을 기대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같은 자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감복했습니까? 나도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면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리라고 결단한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어렵다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설령 삶이 무너진 것 같다 해도 여기서 다시 하나님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분명 우리 앞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새 출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되는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습관처럼 이런 말을 달고 삽니다. “아, 피곤해. 나는 지쳤어. 짜증이 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더는 싫어.” 바로 이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면 변화의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작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게 왜 어렵습니까? 현재의 평안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울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양가감정이라는 것도 생깁니다. 첫째는 ‘하고 싶다’ 그러나 ‘귀찮다’라는 마음입니다. 이 땅에 새로운 게 뭐가 있겠냐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익숙해 있던 삶에서 탈출하기를 귀찮아합니다. 지금까지 썩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으나 그나마 쉽고 편했다고 자위하면서 도전을 뒤로 미룹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양가감정이 있는데, ‘한번 도전해 볼까’ 하면서도 ‘두렵고 무섭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전보다 더 망가지면 어떡하나, 그렇게 되면 설상가상인데 그냥 이대로 살자.’라면서 도전을 내려놓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심리적 상태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 노예 심리가 발동합니다. 노예근성이 나를 붙잡아 매기 시작합니다. 힘 있는 자들, 권력자들이 백성과 민중을 억압할 때, 이런 노예근성을 작동시켰습니다. 사탄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조종하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 심리, 노예근성을 자꾸만 부추깁니다. ‘너는 이 자리에서 탈출할 수 없다. 너는 그냥 이대로 살아라.’라며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모세 앞에 커다란 두 장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을 탈출하려는 모세 앞에 거대한 장벽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권력자의 장벽, 바로 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동력화 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해야 하는데, 아직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그들은 마치 버려진 민중과도 같습니다. 때문에 모세에게 출애굽을 향한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왕을 대면해 그 장벽을 부딪쳐 나가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해서 뒤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바로 왕에게 가 단판을 지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3절 말씀입니다.

…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 (출애굽기 5:3 중)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그분께 예배드리라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애굽 땅에서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이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애굽 왕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4절 말씀입니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출애굽기 5:4)

꿈 좀 깨라는 것입니다. 허황된 꿈을 꾸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가서 노역이나 하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그는 앞으로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출애굽기 5:17)

‘게으르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즉, “너희들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 없는 백성이 아니냐? 너희들은 본래 무력한 자들이 아니더냐? 그런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시간이 남는가 보구나. 너희들이 할 일이 없어서 예배나 드리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냐?” 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너희가 노예가 아니냐? 너희는 자유자가 아니다. 너희 정체성은 종이고 노예다. 그러니 이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라.” 하면서 그들을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노예의 생각, 노예근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포자기입니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변화와 도전은 노예들의 언어가 아니라 자유인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노예근성이 때때로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습관화 된 무기력증, 세뇌화 된 허무증, 학습된 무력감 등이 찾아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새로운 것을 꿈꿀 수 없다고, 그냥 내가 익숙한 것을 하며 적당히 사는 것이 내 인생이라고 여기며 자유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결단하는 것도 겁내 합니다. 게다가 바로 왕과 같은 사탄의 세력이 그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방해꾼입니다. 거짓말로 이간질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의 노역이 이렇게 많아지고 고통이 커진 게 바로 왕의 탓이 아니란다. 너희의 지도자라고 하는 모세와 아론의 탓이다.”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 있게 선포했을 때도 백성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모세에게 화를 내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노예로 사는 것에 만족하려 합니다. 해방된 존재로 가나안을 향해 나가는 투쟁도 거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가 위기를 겪습니다. 분명히 출애굽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바로 왕이 들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간다고 하면 바로 왕도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바로 왕에게 거절당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위기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노역이 가중되고,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도 사라져 갔습니다. 엉터리 지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백성들의 야유와 조소도 그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심지어 모세를 둘러싼 현실이 더욱 열악한 상태로 치달았습니다.

현명한 지도자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모세는 백성 탓을 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더는 못하겠다고, 다 이스라엘 잘못이라고 할 법도 한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하지 못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도자가 감내하고 홀로 인내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없어도, 오직 한분께 털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사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 내 마음을 그대로 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께 호소하는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애굽기 5:22)

‘어찌하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 항변하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뭡니까? 하나님, 이 백성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게 하나님 뜻이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제가 지도자 못하겠다고 했잖아요. 왜 나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습니까?” 이렇게 대들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모세의 인내심도 한계점에 이르렀습니다. 왜 하필 자신을 택하셔서 이런 위기 속에 몰아넣으시는지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6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출애굽기 6:1)

이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라. 사람이 바뀌는 게 말처럼 쉽느냐? 마음의 완악한 것이 그리 금방 바뀌느냐? 그러나 나 여호와가 바로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네가 직접 눈으로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켜보아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그분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 안에서 새롭게 시작합시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한 지 올해로 15년째입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일까요? 저는 소망교회에 오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복을 누리는 교회,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으로 나가라. 그리고 내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아들과 딸인 것을 알게 하여라.”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분을 얻을 때,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사탄의 종이었던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자유 곧 해방의 역사를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억압된 채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탄식하면서 살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낙담하며 주저앉지 말라고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니까, 자유인이니까 스스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네 스스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독일의 위대한 목사이자 신학자인 본회퍼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히틀러 독재에 저항했던 반나치 운동가였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사랑하는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를 남겼습니다. 신앙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시로, 이후 찬송가로 작곡되어 독일 개신교 찬송가 65장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제목은 독일어로 ‘Von guten Mächten’이며, 한국어로는 ‘선한 능력으로’입니다. 가사의 첫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 곡을 이 시간에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Von guten Mächten(선한 능력으로)

– Dietrich Bonhoeffer(디트리히 본회퍼)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 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아,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어두움 속으로 가져오신 그 초들이
오늘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다시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빛이 밤을 비추고 있음을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고 감동과 희망, 용기를 주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우리에게 닥쳐 올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이미 어려운 일들을 겪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는 길은 하나입니다. 거룩해지는 길도 하나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과 함께 출발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스스로 확인하십시오. 말씀과 함께 시작하겠다고. 매주일 예배드릴 때가 되면 ‘주님, 내가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다시 말씀 위에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면서 일주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명 사탄이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 흉도 볼 것입니다. 우리 결심을 무시하고, 우리를 게으름뱅이라고 변덕쟁이라고 놀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때도 예수님이 내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인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아침에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다시 내 삶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성령님, 이끌어주세요.’라고 간구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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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5:15~6:1: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망교회 창립 40주년이자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 교회는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지난 1월 1일, 금년 첫 예배 때에는 어떻게 새롭고 거룩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워지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하면 새로워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님께만 진정한 새로움과 거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출발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우리 마음에 자괴감이 듭니다. ‘아, 나는 작심삼일이구나. 삼일도 못 가는구나.’ 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작심삼일이면 삼일마다 다시 시작하고, 작심일일이라면 매일 아침 다시 예수님과 함께 출발하는 것입니다. 새해에 품었던 소망과 결단을 지속시키는 건,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소중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3:14)

물론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과 달리, 붙잡은 것을 놓치고 변덕쟁이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자신이 혐오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동안 어떻게 가정을 꾸려 왔는가를 되돌아보며, 매일, 매주, 매달 그리고 매년 우리 가정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 왔는지, 처음 가졌던 마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마음을 지금도 지키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처음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처음 이 직장을 내게 허락하셨을 때 얼마나 설레고 기뻤습니까? 직장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지 생각하고, 앞으로의 삶을 기대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같은 자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감복했습니까? 나도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면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리라고 결단한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어렵다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설령 삶이 무너진 것 같다 해도 여기서 다시 하나님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분명 우리 앞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새 출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되는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습관처럼 이런 말을 달고 삽니다. “아, 피곤해. 나는 지쳤어. 짜증이 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더는 싫어.” 바로 이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면 변화의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작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게 왜 어렵습니까? 현재의 평안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울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양가감정이라는 것도 생깁니다. 첫째는 ‘하고 싶다’ 그러나 ‘귀찮다’라는 마음입니다. 이 땅에 새로운 게 뭐가 있겠냐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익숙해 있던 삶에서 탈출하기를 귀찮아합니다. 지금까지 썩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으나 그나마 쉽고 편했다고 자위하면서 도전을 뒤로 미룹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양가감정이 있는데, ‘한번 도전해 볼까’ 하면서도 ‘두렵고 무섭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전보다 더 망가지면 어떡하나, 그렇게 되면 설상가상인데 그냥 이대로 살자.’라면서 도전을 내려놓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심리적 상태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 노예 심리가 발동합니다. 노예근성이 나를 붙잡아 매기 시작합니다. 힘 있는 자들, 권력자들이 백성과 민중을 억압할 때, 이런 노예근성을 작동시켰습니다. 사탄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조종하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 심리, 노예근성을 자꾸만 부추깁니다. ‘너는 이 자리에서 탈출할 수 없다. 너는 그냥 이대로 살아라.’라며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모세 앞에 커다란 두 장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을 탈출하려는 모세 앞에 거대한 장벽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권력자의 장벽, 바로 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동력화 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해야 하는데, 아직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그들은 마치 버려진 민중과도 같습니다. 때문에 모세에게 출애굽을 향한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왕을 대면해 그 장벽을 부딪쳐 나가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해서 뒤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바로 왕에게 가 단판을 지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3절 말씀입니다.

…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 (출애굽기 5:3 중)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그분께 예배드리라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애굽 땅에서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이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애굽 왕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4절 말씀입니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출애굽기 5:4)

꿈 좀 깨라는 것입니다. 허황된 꿈을 꾸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가서 노역이나 하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그는 앞으로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출애굽기 5:17)

‘게으르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즉, “너희들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 없는 백성이 아니냐? 너희들은 본래 무력한 자들이 아니더냐? 그런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시간이 남는가 보구나. 너희들이 할 일이 없어서 예배나 드리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냐?” 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너희가 노예가 아니냐? 너희는 자유자가 아니다. 너희 정체성은 종이고 노예다. 그러니 이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라.” 하면서 그들을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노예의 생각, 노예근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포자기입니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변화와 도전은 노예들의 언어가 아니라 자유인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노예근성이 때때로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습관화 된 무기력증, 세뇌화 된 허무증, 학습된 무력감 등이 찾아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새로운 것을 꿈꿀 수 없다고, 그냥 내가 익숙한 것을 하며 적당히 사는 것이 내 인생이라고 여기며 자유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결단하는 것도 겁내 합니다. 게다가 바로 왕과 같은 사탄의 세력이 그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방해꾼입니다. 거짓말로 이간질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의 노역이 이렇게 많아지고 고통이 커진 게 바로 왕의 탓이 아니란다. 너희의 지도자라고 하는 모세와 아론의 탓이다.”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 있게 선포했을 때도 백성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모세에게 화를 내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노예로 사는 것에 만족하려 합니다. 해방된 존재로 가나안을 향해 나가는 투쟁도 거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가 위기를 겪습니다. 분명히 출애굽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바로 왕이 들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간다고 하면 바로 왕도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바로 왕에게 거절당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위기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노역이 가중되고,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도 사라져 갔습니다. 엉터리 지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백성들의 야유와 조소도 그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심지어 모세를 둘러싼 현실이 더욱 열악한 상태로 치달았습니다.

현명한 지도자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모세는 백성 탓을 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더는 못하겠다고, 다 이스라엘 잘못이라고 할 법도 한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하지 못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도자가 감내하고 홀로 인내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없어도, 오직 한분께 털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사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 내 마음을 그대로 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께 호소하는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애굽기 5:22)

‘어찌하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 항변하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뭡니까? 하나님, 이 백성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게 하나님 뜻이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제가 지도자 못하겠다고 했잖아요. 왜 나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습니까?” 이렇게 대들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모세의 인내심도 한계점에 이르렀습니다. 왜 하필 자신을 택하셔서 이런 위기 속에 몰아넣으시는지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6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출애굽기 6:1)

이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라. 사람이 바뀌는 게 말처럼 쉽느냐? 마음의 완악한 것이 그리 금방 바뀌느냐? 그러나 나 여호와가 바로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네가 직접 눈으로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켜보아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그분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 안에서 새롭게 시작합시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한 지 올해로 15년째입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일까요? 저는 소망교회에 오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복을 누리는 교회,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으로 나가라. 그리고 내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아들과 딸인 것을 알게 하여라.”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분을 얻을 때,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사탄의 종이었던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자유 곧 해방의 역사를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억압된 채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탄식하면서 살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낙담하며 주저앉지 말라고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니까, 자유인이니까 스스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네 스스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독일의 위대한 목사이자 신학자인 본회퍼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히틀러 독재에 저항했던 반나치 운동가였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사랑하는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를 남겼습니다. 신앙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시로, 이후 찬송가로 작곡되어 독일 개신교 찬송가 65장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제목은 독일어로 ‘Von guten Mächten’이며, 한국어로는 ‘선한 능력으로’입니다. 가사의 첫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 곡을 이 시간에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Von guten Mächten(선한 능력으로)

– Dietrich Bonhoeffer(디트리히 본회퍼)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 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아,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어두움 속으로 가져오신 그 초들이
오늘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다시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빛이 밤을 비추고 있음을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고 감동과 희망, 용기를 주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우리에게 닥쳐 올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이미 어려운 일들을 겪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는 길은 하나입니다. 거룩해지는 길도 하나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과 함께 출발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스스로 확인하십시오. 말씀과 함께 시작하겠다고. 매주일 예배드릴 때가 되면 ‘주님, 내가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다시 말씀 위에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면서 일주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명 사탄이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 흉도 볼 것입니다. 우리 결심을 무시하고, 우리를 게으름뱅이라고 변덕쟁이라고 놀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때도 예수님이 내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인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아침에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다시 내 삶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성령님, 이끌어주세요.’라고 간구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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