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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계급론’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매스컴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수저계급론’입니다. 2∼30대 대학생과 청년들이 때로는 넋두리처럼 때로는 비아냥거리듯 하는 말로, 들으면 들을수록 어른인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재산에 따라서 자식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확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금수저인지 흙수저인지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계층이 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는 자포자기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덧 단순한 농담의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금수저’라고 말하는지 찾아봤습니다. 부모의 자산이 20억 이상이어야 하고, 그 가구의 연수입이 2억 원 이상이 되면 금수저 집안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자산이 5천만 원 이하이고 가구 연수입이 2천만 원 미만은 흙수저 집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씁쓸하고 슬픈 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돈과 재물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고, 어떤 면으로는 부모의 덕을 의지하려는 젊은이 상이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어렸을 때 ‘꿀꿀이죽’이라고 불리던 것을 끓여 먹으면서도 꿈과 비전을 잃지 않고 결국 이 자리에 서게 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우리는 귀히 여기고 칭찬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이 표현하는 이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을 이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의 역설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건강한 사회가 무엇일까요?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경제적 변화가 가능한 사회, 자기계발이 가능한 사회,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전공과 직업을 택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금수저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열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차별들을 허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 기득권이 가득한 사회적 계급론을 타파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적 평등성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계급론에 사람을 얽어매고 있는 집단이 공산주의 집단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회 개혁을 시도해서 오히려 악한 독재계급을 만들어 놓았고, 개인의 변화와 성숙의 가능성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기독교도 사회의 평등성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세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의 자기 정체성이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신 일이 얼마나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인지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을 받아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라는 인종적 차별성이 없어지고, ‘종이나 자유자나’라는 사회적 계급성이 무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이 부분을 다시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남자와 여자의 차별성까지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종과 주인을 나누고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 차별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진리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기쁨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이런 삶의 내용들을 우리가 배우고 깨우쳐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존재였던 오네시모가 복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흙수저’로 태어난 인물, ‘오네시모’라고 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을 믿고 ‘금수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말하고 있는 계급적인 의미나 돈과 재물의 유무에 따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 즉 영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 자체만 들여다보면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현실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늘 갖게 되는 자존감과 자부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각의 변화가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이 사회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꿈과 비전입니다. 영적인 자의식의 변화가 사회적 삶의 변화까지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쓴 서신 중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단 한 장에 불과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마 AD 60년에서 62년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공적인 편지면서도 동시에 아주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가 바로 이 빌레몬서입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기 전에 빌레몬을 칭찬합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서 1:5)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바울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 이하의 말씀에서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가 볼 때는 종이었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보니까 신뢰할 만한 사람이더라. 네가 그에게 다시 사랑을 베풀어도 괜찮을 존재가 되었단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믿음의 아들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오네시모는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떠나 왔을까요? 도망 나온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부정한 이득을 취했거나 주인에게 손해를 끼쳐서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은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네시모는 ‘이 흙수저 인생 탈피하고 싶다. 종이 아니라 자유자로 살고 싶다!’ 하면서 종의 자리를 탈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주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변화되면서 그는 가슴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사랑을 품은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오네시모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우리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빌레몬서 1:11)
바울은, ‘전에는’ ‘이제는’이라는 시간적인 표현과 함께 ‘무익했는데’ ‘유익해졌다’는 대비 구조로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젊은이였습니다. 도망이나 칠 수밖에 없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그가 이제 ‘나 바울과 빌레몬 네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움’이란 바로 사도 바울을 도운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사역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바울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바울은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아, 너도 나를 통해서 복음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 오네시모도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함께 사역하는 인물이 되었다.”
오네시모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짧은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부르는 호칭을 살펴보면 오네시모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호칭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10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들을 위해 빌레몬에게 간구한다면서 말입니다.
바울이 ‘동역자’라고 말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아들’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디도서 1장 4절을 보면 ‘나의 참 아들 된 디도’라는 표현이 나오고, 디모데후서 1장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디도와 디모데가 얼마나 바울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충성했던 인물들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오네시모를 ‘내 아들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네시모가 진정으로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참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두 번째, 12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합니다. ‘심복’이란 ‘심장’을 뜻합니다. 즉 그가 자신의 심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댄다면 하나는 머리, 뇌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장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뇌를 보호하시기 위해 단단한 두개골로 감싸셨습니다. 심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갈빗대 아래에 있습니다.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갈빗대로 막아 외부에서 충격이 와도 다치지 않도록 심장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대상에게 친밀감을 표현할 때 ‘내 심장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내 심장’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my very heart’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그가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13절에서 그는 ‘빌레몬 대신 바울을 섬긴 자’로 표현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곧 가장 힘들고 연약했을 때 옆에서 떠나지 않고 바울을 도와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일하는 동기가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높은 보수와 인정 때문에 바울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임을 알고 바울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랑으로 섬기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장로님들은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게 기도하시면서 섬기십니다. 권사님들은 예배 시작 전에 오셔서 예배를 준비하십니다. 찬양대원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제직부 부서들, 남선교회와 여전도회 모두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일들을 위해 내 돈을 내고 내 시간을 들여 내 사랑과 정성을 다해 섬기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오네시모도 사도 바울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아, 네가 해야 할 일을 오네시모가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16절에 나타나는 ‘더 이상 종이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입니다. 이미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이고, 우리의 형제요, 믿음의 사람인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오네시모를 칭찬합니다. 그래서 결국 17절에서는 그를 ‘나의 동역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데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빌레몬서 1:17)
“내가 이제 오네시모를 보낸다. 네가 나를 동역자로 여기지 않느냐? 복음 안에서 우리가 함께 일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말고 동역자로 나를 대하듯이 해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에서 자유자로 사회적 신분을 바꿔 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월권이자 무엇보다도 문제해결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대의 노예제도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형제 사랑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느냐? 예수님이 맏아들이 아니시더냐?” 그렇게 믿음의 형제애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사회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시도한 것은 인간의 내면적 혁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믿음의 친구인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거대한 사회적 계급 질서의 하나였던 노예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곳에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니 양반도, 상놈도, 심지어 가장 천대받던 백정들도 교회 공동체에 나왔습니다. 그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역사는 그렇게 점차 이 땅의 사회적 계급들을 타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새 족보 따지면서 네 부모가 양반인지 상놈인지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회적 계급론과 같은 악습들이 믿음 안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계속 못된 인간인데 바울이 그를 배려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는 믿을 만한, 함께 동역해도 괜찮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바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현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번 고정된 생각이 바뀌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릴 때는 비교적 변화가 쉽습니다. 대학생, 청년일 때도 변화를 향한 수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안 변하려고 합니다. 이미 자신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바뀌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적으로 보수적이거나 반대로 진보적인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념 외의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주 진보적인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매도하고 정죄한다면, 그들이 가진 신앙은 가짜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없습니까?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예수님의 따뜻함이,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것을 소망합시다.
오네시모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청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청년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말씀을 배우려고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나의 악한 모습을 잘라 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청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어려웠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네시모는 바울 곁에서 바울을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장과도 같고, 동역자와 친구, 형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주후 110년경 에베소의 감독 이름이 ‘오네시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오네시모였을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종이었고 도망자였고 배신자였던 그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망쳤을 때의 나이가 20대 전후라고 하면, 110년경에는 7∼80세입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멋진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가 누린 최고의 축복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요? 바로 바울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줍니까? 바울이 축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원하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바울이 닮기 원했던 예수님을 함께 닮아가기를 원하면서 바울에게 신뢰받는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뢰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신뢰해도 돼. 그 사람 정말 바르게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의 친구,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빌레몬서 1: 8 ~ 18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수저계급론’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매스컴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수저계급론’입니다. 2∼30대 대학생과 청년들이 때로는 넋두리처럼 때로는 비아냥거리듯 하는 말로, 들으면 들을수록 어른인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재산에 따라서 자식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확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금수저인지 흙수저인지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계층이 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는 자포자기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덧 단순한 농담의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금수저’라고 말하는지 찾아봤습니다. 부모의 자산이 20억 이상이어야 하고, 그 가구의 연수입이 2억 원 이상이 되면 금수저 집안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자산이 5천만 원 이하이고 가구 연수입이 2천만 원 미만은 흙수저 집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씁쓸하고 슬픈 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돈과 재물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고, 어떤 면으로는 부모의 덕을 의지하려는 젊은이 상이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어렸을 때 ‘꿀꿀이죽’이라고 불리던 것을 끓여 먹으면서도 꿈과 비전을 잃지 않고 결국 이 자리에 서게 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우리는 귀히 여기고 칭찬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이 표현하는 이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을 이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의 역설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건강한 사회가 무엇일까요?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경제적 변화가 가능한 사회, 자기계발이 가능한 사회,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전공과 직업을 택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금수저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열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차별들을 허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 기득권이 가득한 사회적 계급론을 타파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적 평등성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계급론에 사람을 얽어매고 있는 집단이 공산주의 집단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회 개혁을 시도해서 오히려 악한 독재계급을 만들어 놓았고, 개인의 변화와 성숙의 가능성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기독교도 사회의 평등성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세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의 자기 정체성이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신 일이 얼마나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인지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을 받아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라는 인종적 차별성이 없어지고, ‘종이나 자유자나’라는 사회적 계급성이 무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이 부분을 다시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남자와 여자의 차별성까지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종과 주인을 나누고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 차별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진리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기쁨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이런 삶의 내용들을 우리가 배우고 깨우쳐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존재였던 오네시모가 복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흙수저’로 태어난 인물, ‘오네시모’라고 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을 믿고 ‘금수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말하고 있는 계급적인 의미나 돈과 재물의 유무에 따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 즉 영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 자체만 들여다보면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현실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늘 갖게 되는 자존감과 자부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각의 변화가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이 사회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꿈과 비전입니다. 영적인 자의식의 변화가 사회적 삶의 변화까지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쓴 서신 중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단 한 장에 불과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마 AD 60년에서 62년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공적인 편지면서도 동시에 아주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가 바로 이 빌레몬서입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기 전에 빌레몬을 칭찬합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서 1:5)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바울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 이하의 말씀에서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가 볼 때는 종이었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보니까 신뢰할 만한 사람이더라. 네가 그에게 다시 사랑을 베풀어도 괜찮을 존재가 되었단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믿음의 아들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오네시모는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떠나 왔을까요? 도망 나온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부정한 이득을 취했거나 주인에게 손해를 끼쳐서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은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네시모는 ‘이 흙수저 인생 탈피하고 싶다. 종이 아니라 자유자로 살고 싶다!’ 하면서 종의 자리를 탈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주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변화되면서 그는 가슴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사랑을 품은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오네시모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우리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빌레몬서 1:11)
바울은, ‘전에는’ ‘이제는’이라는 시간적인 표현과 함께 ‘무익했는데’ ‘유익해졌다’는 대비 구조로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젊은이였습니다. 도망이나 칠 수밖에 없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그가 이제 ‘나 바울과 빌레몬 네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움’이란 바로 사도 바울을 도운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사역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바울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바울은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아, 너도 나를 통해서 복음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 오네시모도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함께 사역하는 인물이 되었다.”
오네시모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짧은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부르는 호칭을 살펴보면 오네시모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호칭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10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들을 위해 빌레몬에게 간구한다면서 말입니다.
바울이 ‘동역자’라고 말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아들’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디도서 1장 4절을 보면 ‘나의 참 아들 된 디도’라는 표현이 나오고, 디모데후서 1장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디도와 디모데가 얼마나 바울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충성했던 인물들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오네시모를 ‘내 아들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네시모가 진정으로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참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두 번째, 12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합니다. ‘심복’이란 ‘심장’을 뜻합니다. 즉 그가 자신의 심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댄다면 하나는 머리, 뇌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장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뇌를 보호하시기 위해 단단한 두개골로 감싸셨습니다. 심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갈빗대 아래에 있습니다.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갈빗대로 막아 외부에서 충격이 와도 다치지 않도록 심장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대상에게 친밀감을 표현할 때 ‘내 심장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내 심장’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my very heart’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그가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13절에서 그는 ‘빌레몬 대신 바울을 섬긴 자’로 표현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곧 가장 힘들고 연약했을 때 옆에서 떠나지 않고 바울을 도와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일하는 동기가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높은 보수와 인정 때문에 바울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임을 알고 바울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랑으로 섬기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장로님들은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게 기도하시면서 섬기십니다. 권사님들은 예배 시작 전에 오셔서 예배를 준비하십니다. 찬양대원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제직부 부서들, 남선교회와 여전도회 모두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일들을 위해 내 돈을 내고 내 시간을 들여 내 사랑과 정성을 다해 섬기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오네시모도 사도 바울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아, 네가 해야 할 일을 오네시모가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16절에 나타나는 ‘더 이상 종이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입니다. 이미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이고, 우리의 형제요, 믿음의 사람인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오네시모를 칭찬합니다. 그래서 결국 17절에서는 그를 ‘나의 동역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데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빌레몬서 1:17)
“내가 이제 오네시모를 보낸다. 네가 나를 동역자로 여기지 않느냐? 복음 안에서 우리가 함께 일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말고 동역자로 나를 대하듯이 해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에서 자유자로 사회적 신분을 바꿔 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월권이자 무엇보다도 문제해결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대의 노예제도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형제 사랑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느냐? 예수님이 맏아들이 아니시더냐?” 그렇게 믿음의 형제애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사회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시도한 것은 인간의 내면적 혁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믿음의 친구인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거대한 사회적 계급 질서의 하나였던 노예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곳에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니 양반도, 상놈도, 심지어 가장 천대받던 백정들도 교회 공동체에 나왔습니다. 그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역사는 그렇게 점차 이 땅의 사회적 계급들을 타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새 족보 따지면서 네 부모가 양반인지 상놈인지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회적 계급론과 같은 악습들이 믿음 안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계속 못된 인간인데 바울이 그를 배려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는 믿을 만한, 함께 동역해도 괜찮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바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현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번 고정된 생각이 바뀌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릴 때는 비교적 변화가 쉽습니다. 대학생, 청년일 때도 변화를 향한 수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안 변하려고 합니다. 이미 자신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바뀌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적으로 보수적이거나 반대로 진보적인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념 외의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주 진보적인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매도하고 정죄한다면, 그들이 가진 신앙은 가짜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없습니까?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예수님의 따뜻함이,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것을 소망합시다.
오네시모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청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청년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말씀을 배우려고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나의 악한 모습을 잘라 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청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어려웠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네시모는 바울 곁에서 바울을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장과도 같고, 동역자와 친구, 형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주후 110년경 에베소의 감독 이름이 ‘오네시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오네시모였을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종이었고 도망자였고 배신자였던 그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망쳤을 때의 나이가 20대 전후라고 하면, 110년경에는 7∼80세입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멋진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가 누린 최고의 축복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요? 바로 바울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줍니까? 바울이 축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원하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바울이 닮기 원했던 예수님을 함께 닮아가기를 원하면서 바울에게 신뢰받는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뢰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신뢰해도 돼. 그 사람 정말 바르게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의 친구,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