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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호와, 나를 바라보라! – 모세 이야기 10 –

출애굽기 6: 2 ~ 9

김지철 목사

2017.01.15

누구에게나 거절의 상처가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며 인간관계를 지속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기쁨을 얻고 용기와 격려도 받습니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상처가 우리를 아프게 해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을 닫고 폐쇄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문제는 점점 내 마음이 병들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복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여러 상처 중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상처가 있는데, 바로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경험입니다. 특히 내가 기대했던 사람에게 거절당했다면,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절망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고통도 경험합니다. 때로는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시 일어서기가 힘듭니다.
성경에도 거절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 아들 모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도 나름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인은 ‘아, 뭔가 잘못 됐나 보다.’ 이렇게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께 다시 예배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상처에 마음이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다 상처가 분노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인 첫 번째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 이야기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특별히 사랑했고, 야곱에게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형만큼 사랑을 받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거절당한 야곱의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삶은 거절당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거절의 상처로 아파하는 모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모세의 생애도 거절의 쓰라림을 맛본 상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나일 강가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딸인 공주에게 건짐 받아 화려한 왕궁 생활을 했지만, 입양아였기 때문에 아마 만만찮은 차별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장성해 40세가 되었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생명을 걸 각오로 그들 앞에 나서지만, 누구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거절당한 뒤 그는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목자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바로 왕에게 가라고 하시며, 모세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겠다고 소명하십니다. 모세는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리라 믿으며 발걸음을 뗐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에게 즉시 거절을 당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또다시 모세를 거절합니다. 바로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어떻게 거절했는지를 보십시오. 먼저 바로 왕의 거절입니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출애굽기 5:4)

다른 생각하지 말고 하던 노동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먹고 살만하지 않냐고, 너희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합니다. 이렇게 바로 왕은 모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모세를 거절합니다.

…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 (출애굽기 5:21 중)

모세와 아론을 향해 거침없이 악담을 퍼붓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모세의 지도력에도 반기를 듭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인생을 살았을 건데, 이렇게 등장해서 우리를 고생시키고 죽게 하려는 것이냐’고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는 모세 앞에 닥친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 거절과 상처를 떨치고 다시 일어설 것인가, 아니면 상처 받은 자로서 주눅 들어 또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 것인가?’

기로 앞에서 모세는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분노와 탄식, 거절의 상처가 없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억울해서 분노했고, 때로는 슬프고 화가 나서 탄식했습니다. 이런 아픔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나 이런 아픔과 절망, 분노, 탄식,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분노와 탄식을 새로운 자기 결단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시간이라고 믿으며, 새롭게 인생을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노를 거룩한 분노로, 탄식을 거룩한 하나님의 탄식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넘어서겠다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거부당한 사람인가 봐. 나는 거절당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아.’라며 차디찬 냉소주의를 자신에게 퍼붓고, 타인마저 비난합니다. 그렇게 익명의 도망자로 전락한 모습이 우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사실 모세에게도 이 위기를 극복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은 이 일에 적합한 자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할 일도 아니고 자신은 할 수도 없다고, 그러니 이 일에 맞는 적임자를 다시 찾고 자신에게서는 관심을 꺼 달라고 하나님께 포기 의사를 밝혔습니다. 출애굽기 6장 1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6:12)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리더십이 안 생깁니다. 그들이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자격미달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 모세를 보시는 하나님이 매우 다급하셨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그만둔다고 하면, 하나님의 거대한 출애굽 사역이 끝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 쉼 없이 말씀을 쏟아내기 시작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말씀을 주신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그만큼 간절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야, 물러서지 마라. 냉소주의자와 패배주의자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도 마라. 운명론적인 탄식에 머물러 있지도 마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어가시면서 모세를 다독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로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용기를 더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대략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야, 너를 부른 내가 누군지 기억하느냐? 똑똑히 알거라. 나는 여호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더욱이 이 말씀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이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수차례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십니다. 2절에서 ‘나는 여호와이니라’, 3절에서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 6절에서 ‘나는 여호와라’, 7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8절에서 ‘나는 여호와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반복하시며 하나님은 ‘여호와인 내가 너를 불렀음을 기억하라’고 모세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여호와’라는 발음은 사실 정확한 발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찾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내린 결론이 하나님의 이름의 발음이 ‘야훼’일 것이라고 합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는 네 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를 읽으면 ‘야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입으로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버지 성함을 말할 때, 세 글자를 한꺼번에 말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띄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존경의 의미로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뜻에서 당시 사람들도 이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 ‘엘로힘’ 등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그러다 B.C. 3세기에 들어서는 히브리어 성경이 70인 역 그리스어 성경으로 번역됩니다. 그때 이 ‘야훼’를 그리스어 ‘퀴리오스(주님)’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그분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정확히 어떻게 부르는지 이스라엘 백성도 잊어버렸습니다. 최근 영어 성경을 살펴봐도 ‘야훼’라는 이름 대신 거의 ‘Lord’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 말 번역의 ‘여호와’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번역에서는 ‘야훼’라는 말로 바꿔 넣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장으로 말씀을 전할 때도 설명 드렸지만, 오늘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보통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 번째는 ‘I am who I am.’ 곧,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자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나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하자. 나와 함께 역사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행동하며 성취하시는 하나님, 역사의 주관이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모세에게 하나님이 ‘내가 누구인지 알라’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거듭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앞서가시며 모세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서 건져낼 것이며, 속량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여기서 ‘I will’이란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취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할 것이라고, 아니 모세보다 앞서가서 그를 인도할 것이니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행하실 약속이 세 가지로 전개됩니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유자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이란 약속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 관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필코 이뤄 주시는 분이니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재 삶의 자리가 뒤엉켜 있다 해서 고민하거나 무너지지 말라고, 미래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패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냉소주의적 비판 자세를 털어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처럼 두려움이 있습니다. 거절당한 아픔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에게 거절당할까 봐 겁을 냅니다. 초라한 내 모습, 별 볼 일 없는 내 무능함에 개탄하며 ‘나는 부족해. 나는 불가능해. 아무리 해도 결국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 합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자기 암시가 되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합니다. 최악의 결과만을 생각하고,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 마음의 문을 꽉 걸어 잠그기도 합니다. 실패만을 예상합니다. 때문에 열정을 쏟지 않습니다. 그리곤 실제로 거부당하고 실패하게 되면, 이렇게 자위합니다. ‘내가 예언했지? 난 할 수 없다고, 난 실패하고 무너질 것이라고….’ 이미 스스로를 포기한 것입니다. 시도하지도 않고 도전해 보지도 않고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과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도 부정적으로, 나 자신도 냉소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우리 입술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안 될 걸.”, “소용없을 걸.” “실패할 걸.” 이런 말들입니다. 성공의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에 매몰되면서 현재 내 삶에 안주하려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냉소주의자들입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았고, 무언가 시도도 해 보고 도전도 해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 실패의 경험이 너무 커서 ‘이제 내가 더 하나 봐라. 이제 다시는 도전하지 않아.’ 하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라고 자조하면서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모세에게도 이런 마음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못해요. 말도 못해요. 설득할 수 없어요. 하나님, 왜 날 불렀어요? 내가 못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요!”라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거절당해 봤다고? 네가 실패했다고? 네가 이제 못하겠다고? 모든 용기가 다 사라졌다고? 그래, 좋다. 그런 못난 너 모세를 내가 용서하겠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두려워 마라. 내가 너보다 앞서갈 것이다. 너는 내 뒤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결코 냉소주의자, 패배주의자가 되지 말거라. 나를 의지하며 현실에 부딪쳐 봐라. 내가 너에게 미래의 약속을 이미 보장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 일어서 가라!” 패배의식에 빠져 있던 모세를 하나님이 붙드십니다. 냉소주의에 함몰된 그를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앞서가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그에게 힘을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시다.

예수님도 거절당하신 경험이 있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셨습니다. 치유와 사랑을 베풀었던 민중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을 듣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권력자들에게도 거절당하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동산에서는 하나님께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거절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피를 쏟아내시며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며 거절의 아픔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든 상처와 거절, 버림받음의 아픔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을 그분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향해 당당히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네게 버림당한 경험, 거절당한 상처가 있느냐? 그 모든 아픔을 내게 맡겨라. 그리고 나만 바라보아라. 이제 나와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불러 주시는 그분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며 내 영혼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아 춤을 춰라. 아름다운 이 말씀에 반응하라.’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며 하나님의 손길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와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도 버림당함과 거절당함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손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 냉소주의자처럼 다른 사람이나 조소하면서 도망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은 순전히 우리를 위함이셨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가 하나님과 춤을 추면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라고 외치며 주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산다는 건 버림받고 거절도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말씀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다시 위로와 용기를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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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6: 2 ~ 9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누구에게나 거절의 상처가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며 인간관계를 지속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기쁨을 얻고 용기와 격려도 받습니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상처가 우리를 아프게 해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을 닫고 폐쇄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문제는 점점 내 마음이 병들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복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여러 상처 중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상처가 있는데, 바로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경험입니다. 특히 내가 기대했던 사람에게 거절당했다면,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절망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고통도 경험합니다. 때로는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시 일어서기가 힘듭니다.
성경에도 거절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 아들 모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도 나름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인은 ‘아, 뭔가 잘못 됐나 보다.’ 이렇게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께 다시 예배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상처에 마음이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다 상처가 분노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인 첫 번째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 이야기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특별히 사랑했고, 야곱에게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형만큼 사랑을 받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거절당한 야곱의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삶은 거절당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거절의 상처로 아파하는 모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모세의 생애도 거절의 쓰라림을 맛본 상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나일 강가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딸인 공주에게 건짐 받아 화려한 왕궁 생활을 했지만, 입양아였기 때문에 아마 만만찮은 차별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장성해 40세가 되었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생명을 걸 각오로 그들 앞에 나서지만, 누구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거절당한 뒤 그는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목자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바로 왕에게 가라고 하시며, 모세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겠다고 소명하십니다. 모세는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리라 믿으며 발걸음을 뗐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에게 즉시 거절을 당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또다시 모세를 거절합니다. 바로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어떻게 거절했는지를 보십시오. 먼저 바로 왕의 거절입니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출애굽기 5:4)

다른 생각하지 말고 하던 노동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먹고 살만하지 않냐고, 너희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합니다. 이렇게 바로 왕은 모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모세를 거절합니다.

…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 (출애굽기 5:21 중)

모세와 아론을 향해 거침없이 악담을 퍼붓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모세의 지도력에도 반기를 듭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인생을 살았을 건데, 이렇게 등장해서 우리를 고생시키고 죽게 하려는 것이냐’고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는 모세 앞에 닥친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 거절과 상처를 떨치고 다시 일어설 것인가, 아니면 상처 받은 자로서 주눅 들어 또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 것인가?’

기로 앞에서 모세는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분노와 탄식, 거절의 상처가 없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억울해서 분노했고, 때로는 슬프고 화가 나서 탄식했습니다. 이런 아픔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나 이런 아픔과 절망, 분노, 탄식,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분노와 탄식을 새로운 자기 결단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시간이라고 믿으며, 새롭게 인생을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노를 거룩한 분노로, 탄식을 거룩한 하나님의 탄식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넘어서겠다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거부당한 사람인가 봐. 나는 거절당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아.’라며 차디찬 냉소주의를 자신에게 퍼붓고, 타인마저 비난합니다. 그렇게 익명의 도망자로 전락한 모습이 우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사실 모세에게도 이 위기를 극복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은 이 일에 적합한 자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할 일도 아니고 자신은 할 수도 없다고, 그러니 이 일에 맞는 적임자를 다시 찾고 자신에게서는 관심을 꺼 달라고 하나님께 포기 의사를 밝혔습니다. 출애굽기 6장 1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6:12)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리더십이 안 생깁니다. 그들이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자격미달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 모세를 보시는 하나님이 매우 다급하셨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그만둔다고 하면, 하나님의 거대한 출애굽 사역이 끝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 쉼 없이 말씀을 쏟아내기 시작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말씀을 주신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그만큼 간절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야, 물러서지 마라. 냉소주의자와 패배주의자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도 마라. 운명론적인 탄식에 머물러 있지도 마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어가시면서 모세를 다독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로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용기를 더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대략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야, 너를 부른 내가 누군지 기억하느냐? 똑똑히 알거라. 나는 여호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더욱이 이 말씀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이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수차례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십니다. 2절에서 ‘나는 여호와이니라’, 3절에서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 6절에서 ‘나는 여호와라’, 7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8절에서 ‘나는 여호와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반복하시며 하나님은 ‘여호와인 내가 너를 불렀음을 기억하라’고 모세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여호와’라는 발음은 사실 정확한 발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찾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내린 결론이 하나님의 이름의 발음이 ‘야훼’일 것이라고 합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는 네 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를 읽으면 ‘야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입으로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버지 성함을 말할 때, 세 글자를 한꺼번에 말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띄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존경의 의미로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뜻에서 당시 사람들도 이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 ‘엘로힘’ 등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그러다 B.C. 3세기에 들어서는 히브리어 성경이 70인 역 그리스어 성경으로 번역됩니다. 그때 이 ‘야훼’를 그리스어 ‘퀴리오스(주님)’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그분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정확히 어떻게 부르는지 이스라엘 백성도 잊어버렸습니다. 최근 영어 성경을 살펴봐도 ‘야훼’라는 이름 대신 거의 ‘Lord’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 말 번역의 ‘여호와’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번역에서는 ‘야훼’라는 말로 바꿔 넣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장으로 말씀을 전할 때도 설명 드렸지만, 오늘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보통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 번째는 ‘I am who I am.’ 곧,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자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나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하자. 나와 함께 역사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행동하며 성취하시는 하나님, 역사의 주관이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모세에게 하나님이 ‘내가 누구인지 알라’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거듭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앞서가시며 모세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서 건져낼 것이며, 속량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여기서 ‘I will’이란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취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할 것이라고, 아니 모세보다 앞서가서 그를 인도할 것이니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행하실 약속이 세 가지로 전개됩니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유자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이란 약속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 관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필코 이뤄 주시는 분이니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재 삶의 자리가 뒤엉켜 있다 해서 고민하거나 무너지지 말라고, 미래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패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냉소주의적 비판 자세를 털어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처럼 두려움이 있습니다. 거절당한 아픔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에게 거절당할까 봐 겁을 냅니다. 초라한 내 모습, 별 볼 일 없는 내 무능함에 개탄하며 ‘나는 부족해. 나는 불가능해. 아무리 해도 결국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 합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자기 암시가 되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합니다. 최악의 결과만을 생각하고,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 마음의 문을 꽉 걸어 잠그기도 합니다. 실패만을 예상합니다. 때문에 열정을 쏟지 않습니다. 그리곤 실제로 거부당하고 실패하게 되면, 이렇게 자위합니다. ‘내가 예언했지? 난 할 수 없다고, 난 실패하고 무너질 것이라고….’ 이미 스스로를 포기한 것입니다. 시도하지도 않고 도전해 보지도 않고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과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도 부정적으로, 나 자신도 냉소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우리 입술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안 될 걸.”, “소용없을 걸.” “실패할 걸.” 이런 말들입니다. 성공의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에 매몰되면서 현재 내 삶에 안주하려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냉소주의자들입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았고, 무언가 시도도 해 보고 도전도 해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 실패의 경험이 너무 커서 ‘이제 내가 더 하나 봐라. 이제 다시는 도전하지 않아.’ 하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라고 자조하면서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모세에게도 이런 마음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못해요. 말도 못해요. 설득할 수 없어요. 하나님, 왜 날 불렀어요? 내가 못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요!”라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거절당해 봤다고? 네가 실패했다고? 네가 이제 못하겠다고? 모든 용기가 다 사라졌다고? 그래, 좋다. 그런 못난 너 모세를 내가 용서하겠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두려워 마라. 내가 너보다 앞서갈 것이다. 너는 내 뒤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결코 냉소주의자, 패배주의자가 되지 말거라. 나를 의지하며 현실에 부딪쳐 봐라. 내가 너에게 미래의 약속을 이미 보장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 일어서 가라!” 패배의식에 빠져 있던 모세를 하나님이 붙드십니다. 냉소주의에 함몰된 그를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앞서가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그에게 힘을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시다.

예수님도 거절당하신 경험이 있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셨습니다. 치유와 사랑을 베풀었던 민중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을 듣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권력자들에게도 거절당하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동산에서는 하나님께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거절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피를 쏟아내시며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며 거절의 아픔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든 상처와 거절, 버림받음의 아픔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을 그분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향해 당당히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네게 버림당한 경험, 거절당한 상처가 있느냐? 그 모든 아픔을 내게 맡겨라. 그리고 나만 바라보아라. 이제 나와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불러 주시는 그분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며 내 영혼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아 춤을 춰라. 아름다운 이 말씀에 반응하라.’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며 하나님의 손길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와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도 버림당함과 거절당함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손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 냉소주의자처럼 다른 사람이나 조소하면서 도망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은 순전히 우리를 위함이셨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가 하나님과 춤을 추면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라고 외치며 주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산다는 건 버림받고 거절도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말씀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다시 위로와 용기를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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