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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 때, 사람은 진정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 말 중 좋은 단어 세 가지를 들자면 뭐가 있을까요? 많은 것이 있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한 ‘믿음, 소망, 사랑’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때로 우리가 비판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소중하고 복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탄식 소리는 사랑을 향한 역설적인 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외롭다는 부르짖음은 사랑할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주위에 없다는 표징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치고받고 갈등하며 다투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 우리 삶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자 사람‘인(人)’자를 보면, 사람 둘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첫 인간 아담을 만드신 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만드십니다. 함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함께 있는 것,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우정이라고 말합니다.
애정과 우정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정은 ‘동성애’와는 다른 것입니다. 동성애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육체적인 욕구, 성적인 욕망을 채워나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성의 관계에서 성적인 욕망이 개입되는 순간, 남자와 여자가 갖는 고유성과 자율성은 파괴됩니다.
사랑과 우정은 같지만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할수록 소유욕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 거야.” 라는 선언을 하게도 됩니다. 그러다가 이런 독점력이 깨지면, 남녀는 서로를 향한 분노를 드러내고 때로는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이처럼 과도한 기대로 매달리는 것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가진 속성입니다.
남녀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하지만, 이 사랑은 갑자기 사나워지고 무례해지기도 합니다. 서로를 향한 인격적인 존중보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육체적인 욕망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무척 다정하다가 어떤 때는 매우 난폭해지기도 하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욕망이 서로 부딪히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파열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심해지면, 하나는 주인행세를 하고 하나는 종처럼 복종하는 관계가 됩니다. 이것은 사랑이라고는 해도 멋진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 전문가들은 남녀가 처음에는 육체적인 열정 때문에 사랑하게 되지만, 그런 사랑만으로는 관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금방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존중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망이 관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정은 서로를 존중합니다. 상대방의 독자성을 인정합니다. 그의 자유로움, 그의 자발성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남녀의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도 내가 한 것만큼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정은 다릅니다. 친하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도 좋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우정은 동등한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여기서의 동등이란, 서로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누군가 누구를 지시하고 누군가 누구에게 복종하는 관계에서는 진정한 우정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애정에는 사랑의 정열, 육체적인 정열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정에는 서로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포용력과 너그러움이 중요합니다. 애정 관계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과장과 과시를 즐겨합니다. 남자는 내가 얼마나 힘 있는 존재인가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려 합니다. 여자는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장점뿐 아니라 약점까지 열어 놓아도 서로가 괜찮습니다. 그래서 우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부드러워지고 더욱 견고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정’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까?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 사람의 좋은 점만 취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독일의 괴테는, 우정은 인간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정원과도 같다고 표현합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산과 강과 도시만 생각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공허하다. 이곳저곳에 우리와 공감하고 일치하는 누군가가, 그와 더불어 고유한 침묵 속에서 삶을 지속해 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람 사는 정원이 된다.”
우정이란 이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열정도 주셨지만, 우정이라는 모습으로 삶을 나눌 수 있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자연만물이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소통, 서로의 삶을 나누는 우정입니다.
애정은 사랑의 열정 때문에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우정은 시간이 걸립니다. 사랑이 얼마나 급합니까? 여유를 주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정은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정은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편하게 숨 쉬게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신혼 초에는 육체적인 열정 속에서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육체적인 열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그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60이 넘은 분들,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교육을 받아 온 분들은 ‘남편은 명령하고 아내는 순종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하는 말에 간섭하지 말라. 당신은 그냥 뒤따라 와야 한다!”는 말로 아내를 윽박질렀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남이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도 들어보고, 남편의 말도 들어보는 것입니다. 60이 넘은 분들의 가슴에 맺힌 상처는 아마 말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친구들에게 가서 뒷담화를 하는 이유도 부부간 대화의 단절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결혼 생활에도 애정과 우정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결혼 생활이 축복이 됩니다. 육체적 결합과 우정이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결혼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존재가 인생의 낙이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말씀을 통해 우정에 대해 생각하고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인생을 바라보는 중심에는 ‘헛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모든 것을 홀로 책임져야 되는 고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는 헛됨을 외칩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전제는 무엇일까요?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 (전도서 4:7∼8)
인생은 ‘혼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해도, 수고해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이란 헛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헛된 것 속에서도 인생의 낙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우정입니다. 친구를 만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도서 4:9)
두 사람이 있으면, 수고하는 중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즐거움과 낙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지장도 함께 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행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축복 받은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이 항상 잘나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넘어지지 않습니까? 때로는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때 친구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전도서 4:10)
여기 조금 생소한 단어가 나옵니다. ‘동무’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동무라는 말을 쓴 이유로, 우리는 이 말을 전부 ‘친구’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우리말에 남아 있는 동무는 ‘어깨동무’ 정도인 듯합니다. 아무튼 성경은, 홀로 있어서 넘어져도 도와줄 동무가 없는 사람에 대해 ‘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와줄 친구가 없는 사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인 것입니다.
삶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친구입니다.
인생은 분명 홀로 갑니다. 마지막에는 홀로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신 작은 기쁨이 우정이고, 친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모든 친구가 다 좋은 친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좋은 친구이고, 누가 나쁜 친구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선 먼저,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기쁨을 함께 나누고, 무엇보다 내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성경에는 친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며 “내 친구다”라고 말씀하신 구절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에게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내 이런 마음을 아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저들이 너무 나쁘구나.” 그러자 아브라함이 나섭니다. “하나님, 의인 50명만 있어도 저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아니, 멸망시키지 않겠다.”, “30명은 어떤가요?”, “그러면 내가 용서하겠다.”, “10명만 있어도 용서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래도 용서하겠다.” 이렇게 서로 대화합니다. 하지만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무너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픈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벗이 무엇입니까? 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친구 된 사람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 (출애굽기 33:11)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로 삼으시고 당신의 속내를 그에게 이야기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칭호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고, 내 이야기를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마음을 열어놔야 하나님과 친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로 파멸로 이끄는 친구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때로 나쁜 친구가 있습니다. 잘나갈 때는 동행을 하다가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사라지고 맙니다. 구약의 외경서 중에 ‘집회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친구는 너의 식탁에는 잘 와서 앉으나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 네가 잘 살 때는 네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네 하인들마저 마음대로 부리다가 네가 망하게 되면 등을 돌려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집회서 6:10∼12)
잘나갈 때는 모여 들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도망가는 사람을 비꼬아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나쁜 친구의 대표적인 인물로, 친구를 파멸로 끌어들이는 이가 등장합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인 암논의 친구 요나답입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사무엘하 13:3)
성경은 그를 아예 ‘간교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거짓말을 함부로 하다, 아주 못되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다 등의 의미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했기에 그렇습니까?
암논은 자신의 이복동생인 다말을 연모하게 됩니다. 친구로서 그 마음을 멈춰 서게 해야 하는데, 요나답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을 얻기 위해 꾀병을 앓고, 다말을 초청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암논은 이복동생인 다말을 겁탈합니다. 이것은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을 분노케 하고, 결국 그는 자신의 형 암논을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에게도 저항하다가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자기도 죽게 됩니다. 다윗의 가문이 풍비박산 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도 나쁜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복음 26:50)
캄캄한 밤중이라 누가 예수님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누가 예수님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서 “친구여” 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셨을 것입니다. “너는 내 친구이지 않니. 그런데 어떻게 나를 파느냐”하는 슬픔이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친구를 삼으면, 그 관계는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욕심과 야망을 채우려고 사람을 만나면,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득과 이득이 만날 때, 잠시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그 목적이 끝나 버리면 서로 반대 길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 자신과 친구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나? 내게는 왜 친구가 없는 걸까?’ 어떻게 해야 친구가 생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좋은 친구가 옆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스스로 잘 지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못 살게 굽니까? 얼마나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초조하게 만듭니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내게 사랑스럽지 못한 모습이 있어도, 내게 약점이 있어도, 그것이 나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나를 사랑하시고, 그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내 얼굴이 펴지고 빛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감사할 줄 알고, 나 자신을 격려하며 자신과 대화하고 화해할 줄 알아야 아름다워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우리에게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는 귀한 사람이야. 너는 하나님의 딸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나 자신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내가 네 친구가 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여 내 목숨을 내놓았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고,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정 그리고 친구. 참으로 멋진 이 말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의 영원한 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어느덧 내가 좋은 친구가 되고, 내 주위에 귀한 친구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내 친구이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우리 삶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도서 4: 7 ~ 12
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진정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 말 중 좋은 단어 세 가지를 들자면 뭐가 있을까요? 많은 것이 있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한 ‘믿음, 소망, 사랑’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때로 우리가 비판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소중하고 복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탄식 소리는 사랑을 향한 역설적인 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외롭다는 부르짖음은 사랑할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주위에 없다는 표징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치고받고 갈등하며 다투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 우리 삶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자 사람‘인(人)’자를 보면, 사람 둘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첫 인간 아담을 만드신 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만드십니다. 함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함께 있는 것,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우정이라고 말합니다.
애정과 우정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정은 ‘동성애’와는 다른 것입니다. 동성애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육체적인 욕구, 성적인 욕망을 채워나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성의 관계에서 성적인 욕망이 개입되는 순간, 남자와 여자가 갖는 고유성과 자율성은 파괴됩니다.
사랑과 우정은 같지만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할수록 소유욕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 거야.” 라는 선언을 하게도 됩니다. 그러다가 이런 독점력이 깨지면, 남녀는 서로를 향한 분노를 드러내고 때로는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이처럼 과도한 기대로 매달리는 것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가진 속성입니다.
남녀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하지만, 이 사랑은 갑자기 사나워지고 무례해지기도 합니다. 서로를 향한 인격적인 존중보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육체적인 욕망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무척 다정하다가 어떤 때는 매우 난폭해지기도 하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욕망이 서로 부딪히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파열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심해지면, 하나는 주인행세를 하고 하나는 종처럼 복종하는 관계가 됩니다. 이것은 사랑이라고는 해도 멋진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 전문가들은 남녀가 처음에는 육체적인 열정 때문에 사랑하게 되지만, 그런 사랑만으로는 관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금방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존중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망이 관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정은 서로를 존중합니다. 상대방의 독자성을 인정합니다. 그의 자유로움, 그의 자발성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남녀의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도 내가 한 것만큼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정은 다릅니다. 친하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도 좋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우정은 동등한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여기서의 동등이란, 서로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누군가 누구를 지시하고 누군가 누구에게 복종하는 관계에서는 진정한 우정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애정에는 사랑의 정열, 육체적인 정열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정에는 서로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포용력과 너그러움이 중요합니다. 애정 관계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과장과 과시를 즐겨합니다. 남자는 내가 얼마나 힘 있는 존재인가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려 합니다. 여자는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장점뿐 아니라 약점까지 열어 놓아도 서로가 괜찮습니다. 그래서 우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부드러워지고 더욱 견고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정’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까?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 사람의 좋은 점만 취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독일의 괴테는, 우정은 인간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정원과도 같다고 표현합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산과 강과 도시만 생각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공허하다. 이곳저곳에 우리와 공감하고 일치하는 누군가가, 그와 더불어 고유한 침묵 속에서 삶을 지속해 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람 사는 정원이 된다.”
우정이란 이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열정도 주셨지만, 우정이라는 모습으로 삶을 나눌 수 있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자연만물이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소통, 서로의 삶을 나누는 우정입니다.
애정은 사랑의 열정 때문에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우정은 시간이 걸립니다. 사랑이 얼마나 급합니까? 여유를 주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정은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정은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편하게 숨 쉬게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신혼 초에는 육체적인 열정 속에서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육체적인 열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그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60이 넘은 분들,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교육을 받아 온 분들은 ‘남편은 명령하고 아내는 순종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하는 말에 간섭하지 말라. 당신은 그냥 뒤따라 와야 한다!”는 말로 아내를 윽박질렀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남이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도 들어보고, 남편의 말도 들어보는 것입니다. 60이 넘은 분들의 가슴에 맺힌 상처는 아마 말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친구들에게 가서 뒷담화를 하는 이유도 부부간 대화의 단절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결혼 생활에도 애정과 우정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결혼 생활이 축복이 됩니다. 육체적 결합과 우정이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결혼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존재가 인생의 낙이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말씀을 통해 우정에 대해 생각하고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인생을 바라보는 중심에는 ‘헛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모든 것을 홀로 책임져야 되는 고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는 헛됨을 외칩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전제는 무엇일까요?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 (전도서 4:7∼8)
인생은 ‘혼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해도, 수고해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이란 헛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헛된 것 속에서도 인생의 낙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우정입니다. 친구를 만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도서 4:9)
두 사람이 있으면, 수고하는 중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즐거움과 낙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지장도 함께 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행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축복 받은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이 항상 잘나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넘어지지 않습니까? 때로는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때 친구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전도서 4:10)
여기 조금 생소한 단어가 나옵니다. ‘동무’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동무라는 말을 쓴 이유로, 우리는 이 말을 전부 ‘친구’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우리말에 남아 있는 동무는 ‘어깨동무’ 정도인 듯합니다. 아무튼 성경은, 홀로 있어서 넘어져도 도와줄 동무가 없는 사람에 대해 ‘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와줄 친구가 없는 사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인 것입니다.
삶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친구입니다.
인생은 분명 홀로 갑니다. 마지막에는 홀로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신 작은 기쁨이 우정이고, 친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모든 친구가 다 좋은 친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좋은 친구이고, 누가 나쁜 친구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선 먼저,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기쁨을 함께 나누고, 무엇보다 내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성경에는 친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며 “내 친구다”라고 말씀하신 구절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에게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내 이런 마음을 아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저들이 너무 나쁘구나.” 그러자 아브라함이 나섭니다. “하나님, 의인 50명만 있어도 저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아니, 멸망시키지 않겠다.”, “30명은 어떤가요?”, “그러면 내가 용서하겠다.”, “10명만 있어도 용서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래도 용서하겠다.” 이렇게 서로 대화합니다. 하지만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무너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픈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벗이 무엇입니까? 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친구 된 사람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 (출애굽기 33:11)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로 삼으시고 당신의 속내를 그에게 이야기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칭호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고, 내 이야기를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마음을 열어놔야 하나님과 친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로 파멸로 이끄는 친구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때로 나쁜 친구가 있습니다. 잘나갈 때는 동행을 하다가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사라지고 맙니다. 구약의 외경서 중에 ‘집회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친구는 너의 식탁에는 잘 와서 앉으나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 네가 잘 살 때는 네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네 하인들마저 마음대로 부리다가 네가 망하게 되면 등을 돌려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집회서 6:10∼12)
잘나갈 때는 모여 들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도망가는 사람을 비꼬아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나쁜 친구의 대표적인 인물로, 친구를 파멸로 끌어들이는 이가 등장합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인 암논의 친구 요나답입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사무엘하 13:3)
성경은 그를 아예 ‘간교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거짓말을 함부로 하다, 아주 못되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다 등의 의미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했기에 그렇습니까?
암논은 자신의 이복동생인 다말을 연모하게 됩니다. 친구로서 그 마음을 멈춰 서게 해야 하는데, 요나답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을 얻기 위해 꾀병을 앓고, 다말을 초청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암논은 이복동생인 다말을 겁탈합니다. 이것은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을 분노케 하고, 결국 그는 자신의 형 암논을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에게도 저항하다가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자기도 죽게 됩니다. 다윗의 가문이 풍비박산 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도 나쁜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복음 26:50)
캄캄한 밤중이라 누가 예수님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누가 예수님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서 “친구여” 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셨을 것입니다. “너는 내 친구이지 않니. 그런데 어떻게 나를 파느냐”하는 슬픔이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친구를 삼으면, 그 관계는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욕심과 야망을 채우려고 사람을 만나면,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득과 이득이 만날 때, 잠시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그 목적이 끝나 버리면 서로 반대 길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 자신과 친구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나? 내게는 왜 친구가 없는 걸까?’ 어떻게 해야 친구가 생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좋은 친구가 옆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스스로 잘 지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못 살게 굽니까? 얼마나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초조하게 만듭니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내게 사랑스럽지 못한 모습이 있어도, 내게 약점이 있어도, 그것이 나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나를 사랑하시고, 그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내 얼굴이 펴지고 빛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감사할 줄 알고, 나 자신을 격려하며 자신과 대화하고 화해할 줄 알아야 아름다워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우리에게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는 귀한 사람이야. 너는 하나님의 딸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나 자신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내가 네 친구가 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여 내 목숨을 내놓았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고,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정 그리고 친구. 참으로 멋진 이 말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의 영원한 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어느덧 내가 좋은 친구가 되고, 내 주위에 귀한 친구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내 친구이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우리 삶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