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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께만 정향된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모험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신앙의 용기가 있는지를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입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나의 삶을 깨뜨려 부수는 게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내 발을 내딛는 것 또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위며, 동시에 용기 있는 자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과 함께 미지의 세계로 한 발자국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지금까지 누려왔던 기득권을 버리는 용기를 갖는 것이자 예수님과 함께 도전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용기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밤 사경쯤이었습니다. 사경이란 새벽이 가까운 밤입니다. 당시 유대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저녁 6~9시를 일경, 밤 9~12시를 이경, 밤 12~3시를 삼경, 새벽 3~6시를 사경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므로 사경이란 동트기 직전의 시간대를 말합니다. 이때 제자들은 갈릴리바다에서 파도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본문 중 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마태복음 14:24)
이때 예수님은 이 배에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복음서는 동일하게 ‘예수님이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때때로 그 만남을 단절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홀로 시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당대의 민중들의 관심과 인기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지우지 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오히려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민중과의 만남을 단절하시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태복음 14:23)
오늘 본문 직전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도 이 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오병이어 기적을 행한 예수님을 향해 민중이 그분을 정치‧경제적인 왕으로 기대하며 환영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민중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도전하는 열정과 용기를 지닌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오늘 제자들이 거센 파도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만이 험난한 파도 가운데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두컴컴한 시간, 새벽 미명에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한 분의 모습이 포착됩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엔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렵고 떨려서 소리치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도전하는 것이고, 모험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언제든 박차고 나설 수 있는지, 예수님이 호출하시면 언제든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당시 베드로가 바로 그 물음 앞에 섰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호기 찬 발언을 그분께 던집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태복음 14:28 중)
“정말 주님이십니까? 나의 스승이십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옵소서!” 이 말에는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과 다르게 살겠다는 베드로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딛고 사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파도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주님이 명령하시면 자신도 그 위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바로 그분께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 이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옵소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호기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도전이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모험적 신앙이 베드로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말과 행위를 보면, 이 모습은 용기라기보다 만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행동이라기보다 미친 짓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마디에 베드로가 물 위로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바다 한복판의 배에서 배 밖으로 발을 내딛는 베드로, 바로 이 모습 자체가 용기 있는 그의 신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이 모습은 모험하는 인간 실존을 나타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용기와 믿음이 베드로의 삶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도 도전하고 모험하는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신앙이란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용기 있게 결단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모험의 인생을 산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 곳곳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일까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자리를 떠나라. 그리고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정말 자신의 본토와 친척을 떠났습니다. 남은 시간을 편안히 살 수 있음에도 그 모든 안락을 버리고 나그네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한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약속과는 다른 그야말로 현실이었습니다. 척박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들었을 때가 몇 살인 줄 아십니까? 75세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5세 이전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75세 이후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바로 그때부터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때로부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기 전, 그는 광야에서 목자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며,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처음에 모세는 자신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말도 잘 못 하고, 용기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하셨습니다. 모세 곁에 아론도 붙여 주시고 능력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말입니다. 모세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 결단은 그의 삶을 내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간의 자기 일상성을 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때 모세 나이도 80세였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모세가 진정한 모세가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인생 전반전을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우리의 인생 후반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그 삶은 ‘모험’이자 ‘도전’입니다.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어려움도 있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그러니 만약 우리가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혹은 오늘의 삶에만 갇혀서 산다면, 새로운 내일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말씀’에 의지해 결단하는 실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험은 많은 교훈을 전해 줍니다. 그는 ‘배’라는 삶의 안전판을 벗어 버립니다. 그리곤 전혀 낯선 곳, 바로 물 위에 섭니다. 어떻게 이 기적이 가능했을까요? 그동안 내가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 놓칠 수 없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자신의 실존 전체를 걸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즉 창조 세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하늘의 지혜가 있고, 인생의 길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새 생명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로 하여금 인생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 중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4:27)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창조주’의 언어입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주님의 언어입니다. 물을 땅처럼 밟고 서신 분, 곧 우리 주님만이 “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하신 말씀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구시길래 내게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요청하라고 하십니까? 당신의 이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이 이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며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태복음 14:29)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고, 그 부름대로 베드로가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앙은 우리의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동반되지 않는 열정은 한낱 신념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베드로도 말씀 없이는 배 밖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배를 벗어나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앙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성을 거슬러 무모한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에 의지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신앙입니다.
인생의 실존적 위기는 인생의 끝 날까지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치유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하자 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물 위에 발을 내딛었는데, 그곳이 마치 마른 땅 같이 변합니다.
그런데 한 절반쯤 갔을까요? 물이란 어떤 곳입니까?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처음엔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 밖으로 나왔는데, 어느 순간 베드로의 눈에 파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자신은 바다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실존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께 이르기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뒤를 돌아봐도, 앞을 보아도 깜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선 자리는 신앙과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믿음과 불신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확신과 의심이 뒤엉켜 있는 신음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베드로가,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서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용기 있게 나와 몇 발자국 걸었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돌아가려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너무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가기까지도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실존의 문제고, 예수님을 믿고 여기까지 온 우리 실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주님 안에 모든 귀한 것이 다 있고, 비밀과 진리와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내 주위의 소용돌이만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게 여전히 탐욕도 있습니다. 거짓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다 착한 사람만 있거나 거룩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불의가 있고 악이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위기가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이 세상의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면 더 잘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내 문제도 더 잘 보이고, 이웃의 문제도 잘 보이고, 교회 문제도, 지도자의 문제도 잘 보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을 가지고 물 위를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앞에 파도치는 현실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가 보였습니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파도보다 더 컸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이 세상의 잡다한 소음보다 더 컸습니다. 그래서 바다 위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예수님보다 더 커 보이는 현상적인 문제에 부딪혀 매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30절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태복음 14:30)
예수님이 믿어도 풍파는 닥쳐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해서 모든 풍파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몰당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환경의 문제가 우리를 매몰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모험이 실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향해 요청한 것입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신앙이란 주님의 음성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안전판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의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안전판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안전판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의 실존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며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그때 우리도 예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내 실존이 위기에 처해 있으니, 주께서 나를 건지소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시 지금 위기에 놓였다고 해서, 혹은 이전의 즐거움이 그리워서, 지금 불안하고 근심 가운데 처해 있다고 해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오히려 다시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시 주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펴고, 다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전해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모험입니다. 그래서 두려움도 생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근심도 생기고 머뭇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직장의 문제입니까? 경제적인 문제입니까? 인간관계의 문제입니까? 우리 속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보다 더 크게 우리를 함몰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이러한 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씀을 펴고 읽는 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고, 주님과 함께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에게도 주님이 다가와 그의 손을 붙드셨습니다. 그 손길에 의지해 베드로가 다시 배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오늘도 주님이 주신 말씀에 의지해 새롭게 도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4: 24 ~ 33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께만 정향된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모험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신앙의 용기가 있는지를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입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나의 삶을 깨뜨려 부수는 게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내 발을 내딛는 것 또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위며, 동시에 용기 있는 자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과 함께 미지의 세계로 한 발자국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지금까지 누려왔던 기득권을 버리는 용기를 갖는 것이자 예수님과 함께 도전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용기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밤 사경쯤이었습니다. 사경이란 새벽이 가까운 밤입니다. 당시 유대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저녁 6~9시를 일경, 밤 9~12시를 이경, 밤 12~3시를 삼경, 새벽 3~6시를 사경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므로 사경이란 동트기 직전의 시간대를 말합니다. 이때 제자들은 갈릴리바다에서 파도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본문 중 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마태복음 14:24)
이때 예수님은 이 배에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복음서는 동일하게 ‘예수님이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때때로 그 만남을 단절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홀로 시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당대의 민중들의 관심과 인기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지우지 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오히려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민중과의 만남을 단절하시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태복음 14:23)
오늘 본문 직전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도 이 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오병이어 기적을 행한 예수님을 향해 민중이 그분을 정치‧경제적인 왕으로 기대하며 환영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민중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도전하는 열정과 용기를 지닌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오늘 제자들이 거센 파도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만이 험난한 파도 가운데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두컴컴한 시간, 새벽 미명에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한 분의 모습이 포착됩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엔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렵고 떨려서 소리치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도전하는 것이고, 모험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언제든 박차고 나설 수 있는지, 예수님이 호출하시면 언제든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당시 베드로가 바로 그 물음 앞에 섰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호기 찬 발언을 그분께 던집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태복음 14:28 중)
“정말 주님이십니까? 나의 스승이십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옵소서!” 이 말에는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과 다르게 살겠다는 베드로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딛고 사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파도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주님이 명령하시면 자신도 그 위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바로 그분께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 이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옵소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호기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도전이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모험적 신앙이 베드로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말과 행위를 보면, 이 모습은 용기라기보다 만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행동이라기보다 미친 짓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마디에 베드로가 물 위로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바다 한복판의 배에서 배 밖으로 발을 내딛는 베드로, 바로 이 모습 자체가 용기 있는 그의 신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이 모습은 모험하는 인간 실존을 나타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용기와 믿음이 베드로의 삶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도 도전하고 모험하는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신앙이란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용기 있게 결단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모험의 인생을 산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 곳곳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일까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자리를 떠나라. 그리고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정말 자신의 본토와 친척을 떠났습니다. 남은 시간을 편안히 살 수 있음에도 그 모든 안락을 버리고 나그네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한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약속과는 다른 그야말로 현실이었습니다. 척박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들었을 때가 몇 살인 줄 아십니까? 75세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5세 이전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75세 이후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바로 그때부터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때로부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기 전, 그는 광야에서 목자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며,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처음에 모세는 자신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말도 잘 못 하고, 용기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하셨습니다. 모세 곁에 아론도 붙여 주시고 능력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말입니다. 모세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 결단은 그의 삶을 내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간의 자기 일상성을 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때 모세 나이도 80세였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모세가 진정한 모세가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인생 전반전을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우리의 인생 후반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그 삶은 ‘모험’이자 ‘도전’입니다.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어려움도 있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그러니 만약 우리가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혹은 오늘의 삶에만 갇혀서 산다면, 새로운 내일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말씀’에 의지해 결단하는 실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험은 많은 교훈을 전해 줍니다. 그는 ‘배’라는 삶의 안전판을 벗어 버립니다. 그리곤 전혀 낯선 곳, 바로 물 위에 섭니다. 어떻게 이 기적이 가능했을까요? 그동안 내가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 놓칠 수 없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자신의 실존 전체를 걸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즉 창조 세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하늘의 지혜가 있고, 인생의 길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새 생명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로 하여금 인생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 중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4:27)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창조주’의 언어입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주님의 언어입니다. 물을 땅처럼 밟고 서신 분, 곧 우리 주님만이 “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하신 말씀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구시길래 내게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요청하라고 하십니까? 당신의 이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이 이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며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태복음 14:29)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고, 그 부름대로 베드로가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앙은 우리의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동반되지 않는 열정은 한낱 신념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베드로도 말씀 없이는 배 밖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배를 벗어나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앙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성을 거슬러 무모한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에 의지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신앙입니다.
인생의 실존적 위기는 인생의 끝 날까지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치유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하자 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물 위에 발을 내딛었는데, 그곳이 마치 마른 땅 같이 변합니다.
그런데 한 절반쯤 갔을까요? 물이란 어떤 곳입니까?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처음엔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 밖으로 나왔는데, 어느 순간 베드로의 눈에 파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자신은 바다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실존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께 이르기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뒤를 돌아봐도, 앞을 보아도 깜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선 자리는 신앙과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믿음과 불신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확신과 의심이 뒤엉켜 있는 신음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베드로가,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서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용기 있게 나와 몇 발자국 걸었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돌아가려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너무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가기까지도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실존의 문제고, 예수님을 믿고 여기까지 온 우리 실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주님 안에 모든 귀한 것이 다 있고, 비밀과 진리와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내 주위의 소용돌이만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게 여전히 탐욕도 있습니다. 거짓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다 착한 사람만 있거나 거룩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불의가 있고 악이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위기가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이 세상의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면 더 잘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내 문제도 더 잘 보이고, 이웃의 문제도 잘 보이고, 교회 문제도, 지도자의 문제도 잘 보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을 가지고 물 위를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앞에 파도치는 현실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가 보였습니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파도보다 더 컸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이 세상의 잡다한 소음보다 더 컸습니다. 그래서 바다 위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예수님보다 더 커 보이는 현상적인 문제에 부딪혀 매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30절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태복음 14:30)
예수님이 믿어도 풍파는 닥쳐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해서 모든 풍파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몰당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환경의 문제가 우리를 매몰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모험이 실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향해 요청한 것입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신앙이란 주님의 음성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안전판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의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안전판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안전판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의 실존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며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그때 우리도 예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내 실존이 위기에 처해 있으니, 주께서 나를 건지소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시 지금 위기에 놓였다고 해서, 혹은 이전의 즐거움이 그리워서, 지금 불안하고 근심 가운데 처해 있다고 해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오히려 다시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시 주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펴고, 다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전해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모험입니다. 그래서 두려움도 생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근심도 생기고 머뭇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직장의 문제입니까? 경제적인 문제입니까? 인간관계의 문제입니까? 우리 속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보다 더 크게 우리를 함몰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이러한 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씀을 펴고 읽는 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고, 주님과 함께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에게도 주님이 다가와 그의 손을 붙드셨습니다. 그 손길에 의지해 베드로가 다시 배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오늘도 주님이 주신 말씀에 의지해 새롭게 도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첨부파일 : [20181125] 2018년 11월 25일 주일말씀 구역(가정)예배 교안.hwp
2018년 11월 2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베드로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29장, 54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14:24~33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1월 2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신앙의 용기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용기이며, 동시에 용기 있는 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지금까지 내가 누렸던 기득권을 버리는 용기를 갖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용기입니다.
설교의 요약
본문은 밤 사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밤을 넷으로 구분했는데, 사경(3~6시)이란 동트기 전의 어둠입니다. 제자들이 밤 사경에 갈릴리 바다의 파도치는 가운데 고생하고 있었습니다(24절).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셨을까?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23절). 그래서 제자들만이 배에 올라 파도치는 바다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26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령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파도치는 바다 한복판에 서기를 원했습니다(28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로 거침없이 그의 발을 내딛었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을 우리의 마음속에 작정하는 용기입니다.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2)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 역시 새로운 모험의 출발을 통하여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라고 하는 삶의 안전판을 버리고, 낯설고 위험한 물 위에 섰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험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안식하라 나다(2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이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시는 하나님 때문에 시작하는 모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없는 신앙은 우리의 상상력에 불과하며 열심은 신념을 벗어나지 않고,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에 머무를 뿐입니다. 베드로도 말씀 없이는 배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 앞에 순종한 베드로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물 위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용기 있게 몇 발자국을 걸었지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습니다(30절). 신앙을 갖는 것은 더 많은 문제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와 생명 되신 줄 알고 배를 떠났지만, 인간의 연약함과 완악함으로 출발했기에 파도가 산처럼 출렁일 때면 더 이상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보다 바람이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 때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신음, 탄식,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기도의 부르짖음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 하지 마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눅9:62).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는 순간,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모험적 신앙이란 두려움이 없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헤쳐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초청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여러분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계십니까? 혼자 있을 때에 나는 무엇을 하는지 함께 나눠보세요.
2. 신앙이란 끝없는 모험의 연속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심하라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환경의 파도가 너무 거칠게 다가오면 무릎 꿇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펴서 일게 하시되,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다시 용기 얻고 시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