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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대한민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50년, 100년 전만 해도 어떠했습니까? 대한민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있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국권을 잃어버렸던 시기에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6.25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위해 꽃다운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참전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유신과 군사독재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민주유공자들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필리핀보다도 경제 환경이 열악했던 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 땅에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위해 수고한 산업근로자들과 기업가들, 경제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어두움의 땅에 빛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때까지 복음 때문에 생명을 드린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의 충성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마음 놓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전쟁의 위협에서부터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재조명해 보면,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와 위기가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크게 세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는 지금도 전쟁의 위협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해방 이후 분단된 상태 속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고, 핵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반복된 공갈과 위협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너무 자주 있다 보니 우리는 그것을 심상히 여기고 있지만, 사실 한반도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이 최근에 겪었던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바로 6.25전쟁일 것입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부동 전투에서 숨진 한 학도병이 있습니다. 다부동은 대구 북쪽 22km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습니다. ‘우근’이라는 15, 16세 밖에 안 되었던 이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그는 어머니를 부르며 편지를 썼지만, 이것은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의 전사자가 무려 150만 명이 넘습니다. 부상자는 350만 명입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3천만 명이라고 하면 전체 인구의 약 1/6이 신체적 손상을 입고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산업시설 및 공공시설은 다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자식을 잃어버린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족을 잃은 분들의 부르짖음과 외침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리게 되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대한민국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통일과 민주통일, 평화통일을 위해서 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이 줄어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당면 위기는, 갈등과 다툼이 첨예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말합니다. “얘야, 안보가 먼저지, 경제 성장이 먼저지.” 그러나 자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가 먼저예요. 복지가 먼저예요.” 이 나라의 정치, 사회적인 문제만으로도 부모와 자녀들은 이렇게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의견의 차이를 줄일 수 있고, 또 만날 지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갈등은 이념적인 갈등입니다. 소위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있는 이 이념적 대결은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여당과 야당이 싸우는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당이 찬성하면 야당이 반대합니다. 야당이 찬성하면 여당이 반대합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노사 간의 대결이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대결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 교육현장은 어떻습니까? 선생과 선생들이 갈등하고 있고, 스승과 제자들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꼼수(나는 꼼수다)’라는 방송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전형적인 좌파적 성향의 방송입니다. 한편에서는 이 방송을 들으며 소리 높여 박수를 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혀를 내두르며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꼼수같은 언론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극우적 성향을 지닌 인터넷 사이트, ‘일간 베스트(일베)’가 등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진실성이 사라진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 다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듣고, 보는 순간 ‘이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단적인 좌·우파들의 책임지지 못할 언어가 횡행하고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배설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이야기가 들어오면 금방 당파성을 띄게 되고 무리가 나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여당과 야당의 비율은 강남에 사는 사람의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60대 40, 더 나아가 70대 30, 아마 그 사이일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 안에는 여도 있고, 야도 있습니다. 한쪽을 지지하면 금방 반대세력이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치만큼의 이슈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명백히 정치적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움직이는 힘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인 현실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선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정의의 나라, 공의의 나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새로운 시대가 이 땅에 임했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우파, 좌파라고 하는 말은, 본래 날개 익(翼)자를 써서 우익과 좌익으로 불리던 말입니다. 즉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입니다. 새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새에게는 오른쪽 날개가 있고, 왼쪽 날개가 있습니다. 만약 오른쪽 날개가 새에게 오른쪽으로만 가자고 하고, 왼쪽 날개가 왼쪽으로만 가자고 하면 그 새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서로 싸운다면, 그것은 날 수 있는 새가 아닐 것입니다.
새가 날기 위해서 어디에 힘이 실려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움직이는 힘은 몸통에 있습니다. 즉 새에게는 몸통이 중심입니다. 날개가 몸통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통이 양 날개에 힘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적절하게 쓸 때 새는 날 수 있습니다.
왼쪽 날개 자르고, 오른쪽 날개 자르면 그 새는 무엇이 될까요? 그것은 더 이상 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뒤뚱거리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존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중심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즉, 몸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양 날개가 힘을 얻고 비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이 무엇일까요? 자유와 민주입니다. 공의와 정의입니다.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좌나 우로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분쟁과 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더 근본적인 중심에 서서 필요하면 좌와 대결하고, 때로는 좌를 끌어안고, 필요하면 우와 대결하고 때로는 우를 끌어안으면서 가야 할 목표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자유 대한민국, 민주주의 대한민국,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유와 민주로 통일되는 이 나라에서 참된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목표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 땅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민주의 축복을 누리며, 공의와 정의가 만드는 평화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며 삶의 현장에 나가야 합니다.
이 사회가 진리를 바라볼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다원주의적 사고입니다. 다원주의적 사고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치관을 결정할 때 오직 실용성과 편의성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 내가 그것을 하면 편안한가?’라는 편의주의 사고 속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계는 점점 천박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사모와 물음이 사라지고, 올바른 가치관에 자기 삶을 투자하는 일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가치관이 상실되고, 다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동선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관인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 시대적인 조류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적 투명성의 재고와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일, 그리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더욱 애를 써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그 일들을 감당할 때, 이 시대의 분위기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신앙을 지닌 성도들은 사회 변화와 변혁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899년 3월1일에 발행된 『대한그리스도인 회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많은 고을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백성들이 재물을 빼앗기고 고통 받는 부정부패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는 글입니다. 당시 장로교, 감리교인들은 합해서 기껏해야 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115년 전인 그 때에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15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인의 수는 전체 국민의 0.1%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삶을 계획하고 시대를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체 국민의 20%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경제, 금융인들과 기업가들은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까? 교육자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인권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신앙이란 우리의 삶을 도외시하는 최면제가 아닙니다. 마취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문제와 위기를 더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며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시키고 더 성숙하고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기초입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니엘은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는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 인물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의 세월을 노예처럼 살아가는 자기 민족을 통탄스럽게 지켜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의 생활이 종식됨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바로 다니엘서 9장에 나오는 긴 기도문이 자기 백성의 위기를 보면서 하나님께 드린 다니엘의 기도입니다. 그는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9)
내 공로와 내 뜻이 아니라 이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을 위하여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삶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요청받고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시대의 문제점과 아픔, 슬픔을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한다는 것은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손을 걷어붙이고, 내 발로 현장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배우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직장인입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내가 있음으로 이 직장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정치인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고민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경제인이고 기업가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어떻게 함께 나눌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물으며 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권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이 중심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금방 한쪽으로 몰려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신앙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함께 기억하면서 “하나님, 내가 있음으로 내 가정이 복 받고, 내 직장과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지는 축복의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월 한 달, 우리의 조국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어떤 문제와 아픔이 있는지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마음에 순종하여 모두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니엘 9: 16 ~ 19
16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많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대한민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50년, 100년 전만 해도 어떠했습니까? 대한민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있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국권을 잃어버렸던 시기에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6.25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위해 꽃다운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참전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유신과 군사독재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민주유공자들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필리핀보다도 경제 환경이 열악했던 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 땅에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위해 수고한 산업근로자들과 기업가들, 경제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어두움의 땅에 빛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때까지 복음 때문에 생명을 드린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의 충성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마음 놓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전쟁의 위협에서부터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재조명해 보면,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와 위기가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크게 세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는 지금도 전쟁의 위협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해방 이후 분단된 상태 속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고, 핵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반복된 공갈과 위협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너무 자주 있다 보니 우리는 그것을 심상히 여기고 있지만, 사실 한반도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이 최근에 겪었던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바로 6.25전쟁일 것입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부동 전투에서 숨진 한 학도병이 있습니다. 다부동은 대구 북쪽 22km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습니다. ‘우근’이라는 15, 16세 밖에 안 되었던 이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그는 어머니를 부르며 편지를 썼지만, 이것은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의 전사자가 무려 150만 명이 넘습니다. 부상자는 350만 명입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3천만 명이라고 하면 전체 인구의 약 1/6이 신체적 손상을 입고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산업시설 및 공공시설은 다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자식을 잃어버린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족을 잃은 분들의 부르짖음과 외침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리게 되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대한민국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통일과 민주통일, 평화통일을 위해서 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이 줄어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당면 위기는, 갈등과 다툼이 첨예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말합니다. “얘야, 안보가 먼저지, 경제 성장이 먼저지.” 그러나 자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가 먼저예요. 복지가 먼저예요.” 이 나라의 정치, 사회적인 문제만으로도 부모와 자녀들은 이렇게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의견의 차이를 줄일 수 있고, 또 만날 지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갈등은 이념적인 갈등입니다. 소위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있는 이 이념적 대결은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여당과 야당이 싸우는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당이 찬성하면 야당이 반대합니다. 야당이 찬성하면 여당이 반대합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노사 간의 대결이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대결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 교육현장은 어떻습니까? 선생과 선생들이 갈등하고 있고, 스승과 제자들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꼼수(나는 꼼수다)’라는 방송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전형적인 좌파적 성향의 방송입니다. 한편에서는 이 방송을 들으며 소리 높여 박수를 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혀를 내두르며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꼼수같은 언론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극우적 성향을 지닌 인터넷 사이트, ‘일간 베스트(일베)’가 등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진실성이 사라진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 다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듣고, 보는 순간 ‘이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단적인 좌·우파들의 책임지지 못할 언어가 횡행하고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배설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이야기가 들어오면 금방 당파성을 띄게 되고 무리가 나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여당과 야당의 비율은 강남에 사는 사람의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60대 40, 더 나아가 70대 30, 아마 그 사이일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 안에는 여도 있고, 야도 있습니다. 한쪽을 지지하면 금방 반대세력이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치만큼의 이슈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명백히 정치적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움직이는 힘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인 현실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선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정의의 나라, 공의의 나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새로운 시대가 이 땅에 임했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우파, 좌파라고 하는 말은, 본래 날개 익(翼)자를 써서 우익과 좌익으로 불리던 말입니다. 즉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입니다. 새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새에게는 오른쪽 날개가 있고, 왼쪽 날개가 있습니다. 만약 오른쪽 날개가 새에게 오른쪽으로만 가자고 하고, 왼쪽 날개가 왼쪽으로만 가자고 하면 그 새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서로 싸운다면, 그것은 날 수 있는 새가 아닐 것입니다.
새가 날기 위해서 어디에 힘이 실려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움직이는 힘은 몸통에 있습니다. 즉 새에게는 몸통이 중심입니다. 날개가 몸통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통이 양 날개에 힘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적절하게 쓸 때 새는 날 수 있습니다.
왼쪽 날개 자르고, 오른쪽 날개 자르면 그 새는 무엇이 될까요? 그것은 더 이상 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뒤뚱거리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존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중심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즉, 몸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양 날개가 힘을 얻고 비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이 무엇일까요? 자유와 민주입니다. 공의와 정의입니다.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좌나 우로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분쟁과 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더 근본적인 중심에 서서 필요하면 좌와 대결하고, 때로는 좌를 끌어안고, 필요하면 우와 대결하고 때로는 우를 끌어안으면서 가야 할 목표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자유 대한민국, 민주주의 대한민국,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유와 민주로 통일되는 이 나라에서 참된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목표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 땅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민주의 축복을 누리며, 공의와 정의가 만드는 평화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며 삶의 현장에 나가야 합니다.
이 사회가 진리를 바라볼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다원주의적 사고입니다. 다원주의적 사고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치관을 결정할 때 오직 실용성과 편의성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 내가 그것을 하면 편안한가?’라는 편의주의 사고 속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계는 점점 천박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사모와 물음이 사라지고, 올바른 가치관에 자기 삶을 투자하는 일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가치관이 상실되고, 다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동선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관인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 시대적인 조류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적 투명성의 재고와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일, 그리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더욱 애를 써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그 일들을 감당할 때, 이 시대의 분위기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신앙을 지닌 성도들은 사회 변화와 변혁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899년 3월1일에 발행된 『대한그리스도인 회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많은 고을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백성들이 재물을 빼앗기고 고통 받는 부정부패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는 글입니다. 당시 장로교, 감리교인들은 합해서 기껏해야 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115년 전인 그 때에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15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인의 수는 전체 국민의 0.1%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삶을 계획하고 시대를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체 국민의 20%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경제, 금융인들과 기업가들은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까? 교육자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인권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신앙이란 우리의 삶을 도외시하는 최면제가 아닙니다. 마취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문제와 위기를 더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며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시키고 더 성숙하고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기초입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니엘은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는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 인물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의 세월을 노예처럼 살아가는 자기 민족을 통탄스럽게 지켜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의 생활이 종식됨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바로 다니엘서 9장에 나오는 긴 기도문이 자기 백성의 위기를 보면서 하나님께 드린 다니엘의 기도입니다. 그는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9)
내 공로와 내 뜻이 아니라 이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을 위하여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삶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요청받고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시대의 문제점과 아픔, 슬픔을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한다는 것은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손을 걷어붙이고, 내 발로 현장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배우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직장인입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내가 있음으로 이 직장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정치인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고민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경제인이고 기업가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어떻게 함께 나눌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물으며 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권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이 중심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금방 한쪽으로 몰려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신앙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함께 기억하면서 “하나님, 내가 있음으로 내 가정이 복 받고, 내 직장과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지는 축복의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월 한 달, 우리의 조국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어떤 문제와 아픔이 있는지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마음에 순종하여 모두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