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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위험합니다
파시즘, 파시스트라고 하는 용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20세기에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준 괴물과도 같은 이념입니다. 때로는 이 파시즘이 전쟁을 일으키고 인권을 말살하면서 수많은 악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더 우월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찬양을 하는 이념이기도 합니다. 파시즘은 애국심을 고양합니다. 그리고 애족사상, 국익 등을 강조하는데 거의 맹목적인 수준으로 예찬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파시즘을 강조하게 될 때 선의의 민족주의나 애국사상과 구별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범인 도조 히데키 치하의 일본제국주의가 파시즘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베니토 무슬리니의 국가주의 또한 파시즘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도 파시즘의 전형적인 형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갔고 인권을 말살한 악한 이념이었습니다.
유태계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히틀러가 나치즘을 선언한 것에 대해서 광기어린 민족주의의 폭행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민족 지도자의 능력은 국민들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고 공동의 적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래서 나치즘은 거대한 공동의 적을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로 나아갔고, 600만의 유태인들을 죽이는 악을 행하기도 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전쟁의 악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악행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주의는 근친상간이며 우상숭배이자 광기이다. 애국심은 민족주의의 예찬이다.” 그는 잘못된 애국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의 문호였던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낮을 때 민족주의의 감정이 가장 강하고 격렬하다.” 수많은 독재자들과 선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주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조종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민족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 가치인 인권, 생명, 자유, 정의,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외국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한 다원화 사회에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시 이해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민족주의’라는 단어에만 매몰된 ‘민족’이라는 용어는 역사의 뒷전으로 서서히 물러가야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이라고 하는 단어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서 묶여집니다. 민족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은 잃어버렸던 국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자리와 경제발전의 토대에 올려놓은 것도 우리의 조상들이 대한민국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응원했던 것도 우리가 같은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민족에 대한 공통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3월 1일, 3.1절입니다. 92주년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1919년 3월 1일로부터 벌써 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권을 빼앗겼던 대한민국의 한 맺힌 슬픔을 전 세계에 토로하면서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민족운동, 애국운동 그리고 신앙운동이 바로 3.1절입니다. 3.1절은 대한민국이 독립민족이요 자주민족임을 온 천하에 보였던 아주 소중한 사건이었습니다. 삼일운동 이후 3개월간의 전국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가 무려 1500회 이상이었습니다. 참가인원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7500명에 달했고, 부상자가 16000명, 체포된 사람이 47000명, 불타 없어진 교회가 47개, 학교가 2개, 민가가 715개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10개교의 여학생들도 이 민족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숫자가 2천명이 넘습니다. 3.1운동은 계층, 지역, 남녀, 연령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종의 시민저항운동이었고 시민혁명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나 일제치하의 고통 속에 있었던 우리의 선배들은 정말 힘들고 아팠습니다.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된다는 슬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없고 민족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슬픔과 아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그 말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은 설레고 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민족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자기 백성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욕심과 탐욕 속에서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의 민족을 보면서 고통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고 우리는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에 불과하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들면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든 토기를 깨뜨려버리듯이 이 민족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천하가 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은 자신만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가득 찼습니다. 폐쇄적인 이기주의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만을 아는 민족주의를 택할 때가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자기 배가 부르고 등짝이 따뜻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풍요는 내 힘과 내 능력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부터 고마움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의 떨림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백성을 택하셨는지를 망각했습니다. 소명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망각한 백성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에 빛을 발하십시오
이사야서는 49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6)
내가 복 받은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복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 받은 것은 한국 교회를 축복하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한민국에 복 주신 것은 우리가 떵떵거리고 뽐내면서 교만하게 살게 하려함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웃나라와 전 세계를 향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을 발하려면 먼저 내 속에 빛이 있어야 됩니다. 그 빛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내 속에 하나님의 빛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성은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편협해집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게 자기의 것만 챙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들을 제사장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편협한 민족주의가 그들의 삶을 붙잡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6)
예언자 예레미야가 답답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제발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마라! 뭔가 조금 가지고 뭔가 조금 이루어졌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흥망성쇠를 지니고 나의 주님임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그리고 예레미야는 8절에서 계속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예레미야 18:8)
아무리 못 되고 악독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면 그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다시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레미야 18:10)
내가 아무리 너희에게 복을 주고 너희를 풍요롭게 하겠다고 말했어도 너희가 악한 것을 행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도로 뺏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요가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풍요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 가정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민족사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이 잘 나간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민족이었는가? 어떤 어둠속에 있었는가? 어떤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이것을 다시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풍요가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축복들을 인생의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무신론적 사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 하나님을 겁내지 않는 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18:12)
그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관두세요. 참견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거예요. 내가 계획한데로 갈 거예요. 내가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간섭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예레미야는 통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와 자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4천년 역사 속에서 이러한 풍요를 누려본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교육의 열기도 주셨습니다. 정보화에 있어서도 우리가 가장 앞장서고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모습 속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능력과 내 힘인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악으로 바꿉니다. 탐욕스럽게 갈등하고 다투고 서로 빼앗으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사가 더욱 얼룩져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구제역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정치인들이 싸움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폭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이 어려운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정치인이면 정치인답게, 경제인이면 경제인답게, 교육자면 교육자답게, 과학자면 과학자답게, 내가 세상의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충성을 다해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라사랑이란 거대한 것을 외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내 삶의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약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18: 5 ~ 12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위험합니다
파시즘, 파시스트라고 하는 용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20세기에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준 괴물과도 같은 이념입니다. 때로는 이 파시즘이 전쟁을 일으키고 인권을 말살하면서 수많은 악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더 우월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찬양을 하는 이념이기도 합니다. 파시즘은 애국심을 고양합니다. 그리고 애족사상, 국익 등을 강조하는데 거의 맹목적인 수준으로 예찬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파시즘을 강조하게 될 때 선의의 민족주의나 애국사상과 구별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범인 도조 히데키 치하의 일본제국주의가 파시즘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베니토 무슬리니의 국가주의 또한 파시즘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도 파시즘의 전형적인 형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갔고 인권을 말살한 악한 이념이었습니다.
유태계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히틀러가 나치즘을 선언한 것에 대해서 광기어린 민족주의의 폭행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민족 지도자의 능력은 국민들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고 공동의 적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래서 나치즘은 거대한 공동의 적을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로 나아갔고, 600만의 유태인들을 죽이는 악을 행하기도 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전쟁의 악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악행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주의는 근친상간이며 우상숭배이자 광기이다. 애국심은 민족주의의 예찬이다.” 그는 잘못된 애국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의 문호였던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낮을 때 민족주의의 감정이 가장 강하고 격렬하다.” 수많은 독재자들과 선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주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조종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민족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 가치인 인권, 생명, 자유, 정의,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외국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한 다원화 사회에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시 이해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민족주의’라는 단어에만 매몰된 ‘민족’이라는 용어는 역사의 뒷전으로 서서히 물러가야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이라고 하는 단어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서 묶여집니다. 민족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은 잃어버렸던 국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자리와 경제발전의 토대에 올려놓은 것도 우리의 조상들이 대한민국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응원했던 것도 우리가 같은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민족에 대한 공통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3월 1일, 3.1절입니다. 92주년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1919년 3월 1일로부터 벌써 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권을 빼앗겼던 대한민국의 한 맺힌 슬픔을 전 세계에 토로하면서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민족운동, 애국운동 그리고 신앙운동이 바로 3.1절입니다. 3.1절은 대한민국이 독립민족이요 자주민족임을 온 천하에 보였던 아주 소중한 사건이었습니다. 삼일운동 이후 3개월간의 전국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가 무려 1500회 이상이었습니다. 참가인원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7500명에 달했고, 부상자가 16000명, 체포된 사람이 47000명, 불타 없어진 교회가 47개, 학교가 2개, 민가가 715개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10개교의 여학생들도 이 민족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숫자가 2천명이 넘습니다. 3.1운동은 계층, 지역, 남녀, 연령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종의 시민저항운동이었고 시민혁명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나 일제치하의 고통 속에 있었던 우리의 선배들은 정말 힘들고 아팠습니다.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된다는 슬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없고 민족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슬픔과 아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그 말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은 설레고 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민족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자기 백성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욕심과 탐욕 속에서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의 민족을 보면서 고통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고 우리는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에 불과하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들면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든 토기를 깨뜨려버리듯이 이 민족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천하가 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은 자신만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가득 찼습니다. 폐쇄적인 이기주의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만을 아는 민족주의를 택할 때가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자기 배가 부르고 등짝이 따뜻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풍요는 내 힘과 내 능력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부터 고마움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의 떨림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백성을 택하셨는지를 망각했습니다. 소명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망각한 백성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에 빛을 발하십시오
이사야서는 49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6)
내가 복 받은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복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 받은 것은 한국 교회를 축복하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한민국에 복 주신 것은 우리가 떵떵거리고 뽐내면서 교만하게 살게 하려함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웃나라와 전 세계를 향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을 발하려면 먼저 내 속에 빛이 있어야 됩니다. 그 빛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내 속에 하나님의 빛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성은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편협해집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게 자기의 것만 챙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들을 제사장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편협한 민족주의가 그들의 삶을 붙잡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6)
예언자 예레미야가 답답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제발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마라! 뭔가 조금 가지고 뭔가 조금 이루어졌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흥망성쇠를 지니고 나의 주님임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그리고 예레미야는 8절에서 계속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예레미야 18:8)
아무리 못 되고 악독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면 그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다시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레미야 18:10)
내가 아무리 너희에게 복을 주고 너희를 풍요롭게 하겠다고 말했어도 너희가 악한 것을 행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도로 뺏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요가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풍요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 가정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민족사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이 잘 나간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민족이었는가? 어떤 어둠속에 있었는가? 어떤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이것을 다시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풍요가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축복들을 인생의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무신론적 사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 하나님을 겁내지 않는 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18:12)
그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관두세요. 참견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거예요. 내가 계획한데로 갈 거예요. 내가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간섭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예레미야는 통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와 자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4천년 역사 속에서 이러한 풍요를 누려본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교육의 열기도 주셨습니다. 정보화에 있어서도 우리가 가장 앞장서고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모습 속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능력과 내 힘인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악으로 바꿉니다. 탐욕스럽게 갈등하고 다투고 서로 빼앗으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사가 더욱 얼룩져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구제역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정치인들이 싸움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폭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이 어려운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정치인이면 정치인답게, 경제인이면 경제인답게, 교육자면 교육자답게, 과학자면 과학자답게, 내가 세상의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충성을 다해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라사랑이란 거대한 것을 외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내 삶의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약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