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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깨끗하게!

마가복음 1: 40 ~ 45

김지철 목사

2011.06.19

건강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라는 말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의학과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획기적인 치료법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19세기까지 인간의 평균 수명이 43세였다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77세로 곱절가량 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21세기의 한계수명을 150세까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이것은 많은 인간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100세 청춘이라고 하는 인간의 꿈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건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합니다. “건강이란 단지 아프거나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건강이란 신체적(physical), 정신적(mental), 사회적(social)으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이렇게 건강에 대해서 포괄절인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입체적인 건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면세계만 건강할 뿐만 아니라 외면세계의 삶의 관계도 건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몸이 건강한 노숙자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튼튼합니다.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사회적으로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반대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사회적으로도 일정한 위치에서 자기의 삶을 누리고 있지만 몸이 갑자기 약화되고 아파오면 모든 삶의 내용들을 다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매일매일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질병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높습니다. 병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병든 자를 회복하시려는 관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질병에 걸린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두어두는 것에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온전한 모습으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말씀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수많은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을 억누르고 있는 사탄의 억눌림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들을 용서하셔서 우리가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유자요 해방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서만 해방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 또한 귀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기꺼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안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치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치유의 사역의 동참하기를 원하면서도 주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 사역을 하셨는데 우리는 이 치유 사역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2,000년 전통 속에 있었던 몇 가지 요소들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목사가 히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행하는 행위다. 왜 의사의 일을 목회자가 해야 하는가? 목사는 영적인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사가 치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그 몸에 잘 질서 있게 이것을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몸이 생명의 역사가 치유를 행해가는 것입니다. 치유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치유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행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몸의 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과 몸은 함께 갑니다. 인간은 마음 따로 몸 따로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마음의 염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사역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때로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광신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본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영적인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가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체가 치유 받는 신비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치유란 예수님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 제자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왕성해지려는 그 당시에만 일어난 일이지 지금의 시대는 치유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치유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치유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육체를 치유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질병에 걸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구나.’ 그래서 그 질병을 짊어지려고 합니다. 벗어나기보다는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질병을 그저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에 대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픈 것을 등에 지고가려고 합니다. 질병이 십자가가 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 그 자체를 원하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풀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침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치유 사역을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치유 사역을 하다가 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를 할 때에도 치유를 위해서 기도할 때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의 스트레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치유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기 원한다는 그 뜻을 넓히고 알려줄 뿐이지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이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억누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3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기 삶 전체를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것이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나를 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수하면서 그들이 고침받기를 열망했던 사도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치유의 역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병원에 가면 얼마나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까? 목사님들에게 종종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두 명쯤은 앓지 않는 가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혹 우리 주위에 육체의 문제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그것 때문에 하소연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외롭기 때문입니다. 보통 때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다가도 조금만 손이 시리고, 두통이 생기고, 어딘가 상처가 생기면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플 때 옆에 친구가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가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주위의 모든 사람을 내쫒았습니다. 부모까지도 내쫒았습니다. 형제자매 모두 그의 곁에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병이 나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가까이 하는 것을 다 싫어했습니다. 가까이 오면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스스로가 인기척이 들리면 “나는 불결하다! 나는 불결하다!” 하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했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넘어서서 인간이 당하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인 상처, 정서적인 상처, 육체적인 상처의 총체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질병은 크고 작고에 상관없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인격적인 상처를 받습니다. 정서적으로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아파옵니다. 누구나 이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홀로 있기를 바라면서도 홀로 있기가 두려운 것이 질병입니다. 삶의 파산 상태를 경험합니다. 자존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외된 아픔을 가집니다.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를 거부하기 때문에 나도 이 세상을 거부하려는 마음의 분노가 솟아납니다. 이것은 삶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에는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무릎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에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의탁할 자가 없었을 때 그에게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자가 병든 자를 고치셨다고 하더라. 그가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고 하더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더라. 그는 새로운 메시야이다. 예수야말로 이 땅을 구원할 자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삶의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으셔야 합니다. “내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다.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마가복음 1:40)

본문을 보면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절대 항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마음가짐이기도 한데 하나님 앞에 내가 절대적으로 항복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대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인간에게서 절대 순종이 나타나고, 그래야 절대 축복이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절대적으로 항복했다는 뜻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체념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 이외에 어느 것에도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도 항복하지 않고, 내가 어떤 죄에게도 항복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보복하지 않고, 내가 이 질병에도 항복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의 은총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 항복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강력하고 용기 있는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생은 비굴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투 중에 쓰러짐을 택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 속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분투 중에 우리의 삶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를 주신 생명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치유의 하나님을 붙잡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지혜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나갔을까요? 무조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일치시켰습니다.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기도, 지혜로운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대가 하나님의 기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길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그쪽으로 가면 너는 망한단다. 나는 그 길로 너를 인도할 수 없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내가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면 제가 원하는 것을 바꾸게 하옵소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 2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시행하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살겠다고 하면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평하면 불평하는 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피곤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번쯤 할 수는 있어도 2~3번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러냐? 그럼 계속 피곤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평을 합니다. 한번쯤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불평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평생 그렇게 불평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땅에 다녀온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거대합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우리가 가면 죽게 될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침노하셨습니다. “못 들어간다고? 그럼 네 말대로 해주겠다. 너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세월을 보내라.” 그리고는 갈렙과 여호수아만을 들여보내셨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로 우리의 삶을 채우면 삶 전체가 그렇게 도배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긍정적인 사고를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가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긍정보다 더 큰 긍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나병환자가 말합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하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절대적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앞뒤와 모든 것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얘기도 합니다. “하늘을 보니까 하늘도 막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하늘을 뚫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막힌 하늘을 뚫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에게만 항복하십시오.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때 나병환자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귀한 믿음의 축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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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 40 ~ 45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건강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라는 말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의학과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획기적인 치료법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19세기까지 인간의 평균 수명이 43세였다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77세로 곱절가량 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21세기의 한계수명을 150세까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이것은 많은 인간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100세 청춘이라고 하는 인간의 꿈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건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합니다. “건강이란 단지 아프거나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건강이란 신체적(physical), 정신적(mental), 사회적(social)으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이렇게 건강에 대해서 포괄절인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입체적인 건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면세계만 건강할 뿐만 아니라 외면세계의 삶의 관계도 건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몸이 건강한 노숙자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튼튼합니다.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사회적으로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반대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사회적으로도 일정한 위치에서 자기의 삶을 누리고 있지만 몸이 갑자기 약화되고 아파오면 모든 삶의 내용들을 다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매일매일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질병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높습니다. 병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병든 자를 회복하시려는 관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질병에 걸린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두어두는 것에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온전한 모습으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말씀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수많은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을 억누르고 있는 사탄의 억눌림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들을 용서하셔서 우리가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유자요 해방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서만 해방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 또한 귀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기꺼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안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치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치유의 사역의 동참하기를 원하면서도 주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 사역을 하셨는데 우리는 이 치유 사역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2,000년 전통 속에 있었던 몇 가지 요소들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목사가 히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행하는 행위다. 왜 의사의 일을 목회자가 해야 하는가? 목사는 영적인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사가 치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그 몸에 잘 질서 있게 이것을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몸이 생명의 역사가 치유를 행해가는 것입니다. 치유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치유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행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몸의 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과 몸은 함께 갑니다. 인간은 마음 따로 몸 따로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마음의 염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사역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때로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광신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본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영적인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가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체가 치유 받는 신비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치유란 예수님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 제자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왕성해지려는 그 당시에만 일어난 일이지 지금의 시대는 치유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치유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치유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육체를 치유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질병에 걸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구나.’ 그래서 그 질병을 짊어지려고 합니다. 벗어나기보다는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질병을 그저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에 대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픈 것을 등에 지고가려고 합니다. 질병이 십자가가 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 그 자체를 원하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풀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침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치유 사역을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치유 사역을 하다가 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를 할 때에도 치유를 위해서 기도할 때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의 스트레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치유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기 원한다는 그 뜻을 넓히고 알려줄 뿐이지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이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억누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3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기 삶 전체를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것이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나를 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수하면서 그들이 고침받기를 열망했던 사도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치유의 역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병원에 가면 얼마나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까? 목사님들에게 종종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두 명쯤은 앓지 않는 가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혹 우리 주위에 육체의 문제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그것 때문에 하소연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외롭기 때문입니다. 보통 때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다가도 조금만 손이 시리고, 두통이 생기고, 어딘가 상처가 생기면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플 때 옆에 친구가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가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주위의 모든 사람을 내쫒았습니다. 부모까지도 내쫒았습니다. 형제자매 모두 그의 곁에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병이 나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가까이 하는 것을 다 싫어했습니다. 가까이 오면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스스로가 인기척이 들리면 “나는 불결하다! 나는 불결하다!” 하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했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넘어서서 인간이 당하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인 상처, 정서적인 상처, 육체적인 상처의 총체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질병은 크고 작고에 상관없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인격적인 상처를 받습니다. 정서적으로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아파옵니다. 누구나 이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홀로 있기를 바라면서도 홀로 있기가 두려운 것이 질병입니다. 삶의 파산 상태를 경험합니다. 자존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외된 아픔을 가집니다.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를 거부하기 때문에 나도 이 세상을 거부하려는 마음의 분노가 솟아납니다. 이것은 삶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에는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무릎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에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의탁할 자가 없었을 때 그에게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자가 병든 자를 고치셨다고 하더라. 그가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고 하더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더라. 그는 새로운 메시야이다. 예수야말로 이 땅을 구원할 자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삶의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으셔야 합니다. “내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다.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마가복음 1:40)

본문을 보면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절대 항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마음가짐이기도 한데 하나님 앞에 내가 절대적으로 항복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대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인간에게서 절대 순종이 나타나고, 그래야 절대 축복이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절대적으로 항복했다는 뜻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체념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 이외에 어느 것에도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도 항복하지 않고, 내가 어떤 죄에게도 항복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보복하지 않고, 내가 이 질병에도 항복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의 은총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 항복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강력하고 용기 있는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생은 비굴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투 중에 쓰러짐을 택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 속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분투 중에 우리의 삶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를 주신 생명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치유의 하나님을 붙잡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지혜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나갔을까요? 무조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일치시켰습니다.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기도, 지혜로운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대가 하나님의 기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길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그쪽으로 가면 너는 망한단다. 나는 그 길로 너를 인도할 수 없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내가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면 제가 원하는 것을 바꾸게 하옵소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 2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시행하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살겠다고 하면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평하면 불평하는 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피곤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번쯤 할 수는 있어도 2~3번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러냐? 그럼 계속 피곤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평을 합니다. 한번쯤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불평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평생 그렇게 불평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땅에 다녀온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거대합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우리가 가면 죽게 될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침노하셨습니다. “못 들어간다고? 그럼 네 말대로 해주겠다. 너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세월을 보내라.” 그리고는 갈렙과 여호수아만을 들여보내셨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로 우리의 삶을 채우면 삶 전체가 그렇게 도배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긍정적인 사고를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가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긍정보다 더 큰 긍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나병환자가 말합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하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절대적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앞뒤와 모든 것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얘기도 합니다. “하늘을 보니까 하늘도 막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하늘을 뚫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막힌 하늘을 뚫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에게만 항복하십시오.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때 나병환자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귀한 믿음의 축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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