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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물음 3-

마태복음 16: 13 ~ 20

김지철 목사

2012.02.05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첫 번째로 “너희들은 왜 나를 따라오느냐?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찾기 위해서 나를 쫒아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첫 질문 이후 3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3년간 함께했던 제자들에게 막바지 질문을 하고 계신 겁니다. “제자들아, 3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구나.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지?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행동하는 것을 너희가 보았지? 이렇게 나와 함께한 세월이 3년이나 되었는데, 그럼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너희들은 알고 있느냐? 너희들은 왜 나와 함께 있고, 나의 뒤를 따라왔느냐? 너희는 나와 계속 함께할 용의가 있느냐?” 예수님은 자신의 생이 죽음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 때에 제자들에게 무언가 확인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은 떠나고 제자들만 홀로 남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없이 남겨진 그들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근심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만을 보면서 뒤따랐습니다.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귀신이 말 한 마디로 쫓겨났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치유의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이런 기적의 일만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로 사람들을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이야,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참 자랑스럽구나. 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건,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이야’ 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보고 따라온 제자들이, 과연 고난 받는 그 길에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난의 길에서도 담대해 질 수 있을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일관성 있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들을 사명의 사람들로 세울 수 있을지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이 땅에, 이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믿는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험악했습니다. 당시 세상은 종교적 기득권자이고 정치 권력자인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아해야 할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별 볼일 없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들에게 맡겨놓고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인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베드로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넘치도록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7)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잘했다 칭찬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의 고백을 들으니 내 마음이 참 기쁘구나. 그러나 이것은 이성과 지성의 생각으로 나온 고백이 아니다. 이 고백은 이 땅의 누구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생각은 하늘의 생각이고, 하늘의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네 마음 속에 깨우쳐 주신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시적인 고백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지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성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씨름하다 보면 이성적 지식을 뛰어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잘 모릅니다. 나중에 되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어떻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하는 감격스러운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아주 명백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요나의 아들인데 ‘베드로’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시며,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음부의 권세란 ‘하데스의 문들의 권세’, 다시 말하면 ‘지옥의 문들의 권세’입니다. 즉, “죽음의 문들의 권세가 교회의 생명을 막을 수 없고, 교회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가 생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신앙 공동체가 생긴다는 사실을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마지막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교회를 만드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인간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온 천하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 위험했을까요? 당시 기득권자들의 방해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권력자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은밀히 물으셨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어디에서 하셨을까요?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3)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하는 지방이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인 헐몬산 옆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당시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왕은 분봉왕 헤롯 빌립이었습니다. 그는 이 도시를 화려하게 재건하려는 꿈을 품고, 로마 황제였던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곳을 ‘가이사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빌립’과 합하여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칭했습니다. 전형적인 권력자의 모습입니다. 더 큰 권력자와 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황제와 함께 있으며, 그 권력과 친분이 있음을 나타내면서 더 큰 권력을 붙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정치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주님 앞에 나의 전부를 내려놓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황제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냐?”라고 물으시며 제자들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과 지혜, 능력을 그 속에 다 걸기 때문에 쉽지 않고 굉장히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사실을 알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금단의 열매를 예수님께서 슬슬 흔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안식일 법, 정결 예법을 어기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법, 생명을 회복하는 법, 사람을 세워주는 법,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위하여 때로는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정결 예법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나름의 힘은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힘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면서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권력은 그와는 다른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권력 앞에서 결단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독재 국가들은 신앙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독재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하늘에 전지전능한 통치자가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배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권력자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력자들과 독재자들은 신앙을 두려워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왜 그렇게 핍박합니까?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고, 동시에 어렵고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예수님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근심이 있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강하고 바르게 세우지 않으면 남겨진 이들이 굳게 서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많은 근심과 많은 문제들을 좁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지혜를 배워야 됩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질문을 다 멈추고 이 궁극적인 질문 앞에 서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실타래처럼 꼬이고 엉켜있는 많은 문제들, 고민하고 고뇌해도 해답이 잘 안 보이는 인간관계, 내 직업과 내 미래의 불확실성이 나를 곤고하게 만들 때 다시 궁극적인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실존을 걸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모든 근심의 문제들을 내려놓고 이 자리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세상의 다른 문제들을 이겨 나갈 수가 있고, 때로는 그 모든 근심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첫 번째는, 3인칭의 객관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들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 이와 같은 질문에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태복음 16:14)

당대에 위대했던 인물들을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시대를 비판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푼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아합왕 때에 바알 신을 섬기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하여 승리했던 용감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죄악을 가슴에 품고 통분히 여겨 눈물 흘렸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는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예수님은 더 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나가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고, 너희는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꾼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머니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아버지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친구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그때부터 내 신앙 속에서 역동적인 힘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묻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말고, 다른 사람의 생각 말고 네 실존 전체를 걸고 대답해 보아라. 네가 생명을 걸고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 대답해 보아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16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이것은 모든 것을 건 최고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이 메시아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 자기의 삶 전체를 걸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청중’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 종교와 교리, 명예와 권력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모두 다 내려놓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이고, 예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인생의 중심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겠다라는 당찬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축복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 베드로가 이와 같은 고백을 했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소리가 좋긴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이 가슴 아프지만 여기에 초조해하거나 내 삶을 거기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분명 좋은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문, 잡지, TV, 인터넷 수많은 소문들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차단시키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우리의 인생이 단순해집니다. 그래야 인생이 굳세집니다. 우리 생의 목표가 명백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실존을 건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사랑과 정성을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소망입니다. 나의 능력이고 나의 지혜이고, 나의 구원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사이 여론조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선거의 계절이 오면서 정치인들은 여기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심을 사기하기 위해서 악한 말과 거짓말, 욕설을 여기저기 배설물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래야 자기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들쑥날쑥하는 변덕스러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기업가와 교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곳에 딱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적 고통과 혼란은 바로 일관성의 부재에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는 최후의 청중, 최고의 청중, 유일한 청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사라지시고 안 계셔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이 확인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왜 교회 나오느냐? 왜 예배드리느냐? 너는 예배드리면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 모든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진리이십니다. 하늘의 보화시고 하늘의 지혜이십니다. 여기에 내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동안 이것저것 염려하며 근심했던 것들을 잘라낼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내게 주신 삶을 어떻게 누려야 될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청중이고, 최고의 청중이고, 유일한 청중이신 예수님께서 내게 미소 짓고 계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 둘씩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모하는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앞에 서서 담대하게 대답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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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 13 ~ 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첫 번째로 “너희들은 왜 나를 따라오느냐?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찾기 위해서 나를 쫒아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첫 질문 이후 3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3년간 함께했던 제자들에게 막바지 질문을 하고 계신 겁니다. “제자들아, 3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구나.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지?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행동하는 것을 너희가 보았지? 이렇게 나와 함께한 세월이 3년이나 되었는데, 그럼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너희들은 알고 있느냐? 너희들은 왜 나와 함께 있고, 나의 뒤를 따라왔느냐? 너희는 나와 계속 함께할 용의가 있느냐?” 예수님은 자신의 생이 죽음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 때에 제자들에게 무언가 확인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은 떠나고 제자들만 홀로 남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없이 남겨진 그들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근심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만을 보면서 뒤따랐습니다.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귀신이 말 한 마디로 쫓겨났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치유의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이런 기적의 일만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로 사람들을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이야,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참 자랑스럽구나. 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건,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이야’ 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보고 따라온 제자들이, 과연 고난 받는 그 길에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난의 길에서도 담대해 질 수 있을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일관성 있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들을 사명의 사람들로 세울 수 있을지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이 땅에, 이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믿는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험악했습니다. 당시 세상은 종교적 기득권자이고 정치 권력자인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아해야 할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별 볼일 없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들에게 맡겨놓고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인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베드로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넘치도록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7)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잘했다 칭찬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의 고백을 들으니 내 마음이 참 기쁘구나. 그러나 이것은 이성과 지성의 생각으로 나온 고백이 아니다. 이 고백은 이 땅의 누구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생각은 하늘의 생각이고, 하늘의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네 마음 속에 깨우쳐 주신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시적인 고백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지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성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씨름하다 보면 이성적 지식을 뛰어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잘 모릅니다. 나중에 되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어떻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하는 감격스러운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아주 명백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요나의 아들인데 ‘베드로’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시며,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음부의 권세란 ‘하데스의 문들의 권세’, 다시 말하면 ‘지옥의 문들의 권세’입니다. 즉, “죽음의 문들의 권세가 교회의 생명을 막을 수 없고, 교회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가 생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신앙 공동체가 생긴다는 사실을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마지막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교회를 만드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인간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온 천하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 위험했을까요? 당시 기득권자들의 방해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권력자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은밀히 물으셨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어디에서 하셨을까요?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3)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하는 지방이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인 헐몬산 옆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당시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왕은 분봉왕 헤롯 빌립이었습니다. 그는 이 도시를 화려하게 재건하려는 꿈을 품고, 로마 황제였던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곳을 ‘가이사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빌립’과 합하여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칭했습니다. 전형적인 권력자의 모습입니다. 더 큰 권력자와 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황제와 함께 있으며, 그 권력과 친분이 있음을 나타내면서 더 큰 권력을 붙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정치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주님 앞에 나의 전부를 내려놓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황제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냐?”라고 물으시며 제자들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과 지혜, 능력을 그 속에 다 걸기 때문에 쉽지 않고 굉장히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사실을 알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금단의 열매를 예수님께서 슬슬 흔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안식일 법, 정결 예법을 어기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법, 생명을 회복하는 법, 사람을 세워주는 법,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위하여 때로는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정결 예법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나름의 힘은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힘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면서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권력은 그와는 다른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권력 앞에서 결단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독재 국가들은 신앙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독재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하늘에 전지전능한 통치자가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배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권력자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력자들과 독재자들은 신앙을 두려워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왜 그렇게 핍박합니까?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고, 동시에 어렵고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예수님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근심이 있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강하고 바르게 세우지 않으면 남겨진 이들이 굳게 서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많은 근심과 많은 문제들을 좁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지혜를 배워야 됩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질문을 다 멈추고 이 궁극적인 질문 앞에 서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실타래처럼 꼬이고 엉켜있는 많은 문제들, 고민하고 고뇌해도 해답이 잘 안 보이는 인간관계, 내 직업과 내 미래의 불확실성이 나를 곤고하게 만들 때 다시 궁극적인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실존을 걸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모든 근심의 문제들을 내려놓고 이 자리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세상의 다른 문제들을 이겨 나갈 수가 있고, 때로는 그 모든 근심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첫 번째는, 3인칭의 객관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들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 이와 같은 질문에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태복음 16:14)

당대에 위대했던 인물들을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시대를 비판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푼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아합왕 때에 바알 신을 섬기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하여 승리했던 용감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죄악을 가슴에 품고 통분히 여겨 눈물 흘렸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는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예수님은 더 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나가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고, 너희는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꾼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머니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아버지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친구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그때부터 내 신앙 속에서 역동적인 힘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묻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말고, 다른 사람의 생각 말고 네 실존 전체를 걸고 대답해 보아라. 네가 생명을 걸고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 대답해 보아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16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이것은 모든 것을 건 최고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이 메시아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 자기의 삶 전체를 걸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청중’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 종교와 교리, 명예와 권력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모두 다 내려놓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이고, 예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인생의 중심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겠다라는 당찬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축복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 베드로가 이와 같은 고백을 했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소리가 좋긴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이 가슴 아프지만 여기에 초조해하거나 내 삶을 거기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분명 좋은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문, 잡지, TV, 인터넷 수많은 소문들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차단시키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우리의 인생이 단순해집니다. 그래야 인생이 굳세집니다. 우리 생의 목표가 명백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실존을 건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사랑과 정성을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소망입니다. 나의 능력이고 나의 지혜이고, 나의 구원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사이 여론조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선거의 계절이 오면서 정치인들은 여기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심을 사기하기 위해서 악한 말과 거짓말, 욕설을 여기저기 배설물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래야 자기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들쑥날쑥하는 변덕스러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기업가와 교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곳에 딱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적 고통과 혼란은 바로 일관성의 부재에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는 최후의 청중, 최고의 청중, 유일한 청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사라지시고 안 계셔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이 확인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왜 교회 나오느냐? 왜 예배드리느냐? 너는 예배드리면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 모든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진리이십니다. 하늘의 보화시고 하늘의 지혜이십니다. 여기에 내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동안 이것저것 염려하며 근심했던 것들을 잘라낼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내게 주신 삶을 어떻게 누려야 될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청중이고, 최고의 청중이고, 유일한 청중이신 예수님께서 내게 미소 짓고 계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 둘씩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모하는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앞에 서서 담대하게 대답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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