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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물음 13-

요한복음 21: 15 ~ 19

김지철 목사

2012.04.15

베드로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트라우마란 천재지변, 전쟁, 화재, 대형사고, 신체적인 폭력 등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후에 나타나는 정신적인 장애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말합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과민반응을 일으키거나 충격의 반복적 경험을 두려워하여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도피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를 낸 사람들은 운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높은 건물에서 화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으려 하고, 어렸을 적에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장성해서도 넥타이를 매지 못하고 심지어 목도리를 두르는 것에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트라우마는 사랑했던 스승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상황을 목격함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었습니다. 직업도 내려놓고, 가족도 포기하고, 3년 동안 오직 예수님을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저 분을 아는데, 저렇게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되는데… 저렇게 선한 분을 이리도 무참히 부숴 버릴 수 있는가!’ 이것은 그의 모든 생각들이 뒤집어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트라우마는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형성됩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제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종의 한 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나는 참 못난 놈이구나, 참으로 나쁜 놈이구나.’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바로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태복음 26:75)

아마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을 것입니다. 슬프고 창피해서,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못한 억울함에서 울었을 것입니다.
저는 수난주간이 되면,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가 쓴 마태수난곡을 한 번씩 들어보곤 합니다. 내레이터를 맡은 테너가수가 매우 높은 톤으로 베드로가 통곡하는 모습을 가슴이 아리도록 처절하게 부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서 베드로처럼 가슴 아프게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베드로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예수님은 상처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기가 싫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지울 수 없는 기억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옛 직업인 물고기 잡는 일에 몰두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있었습니다.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쳤던 자신에 대한 울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조용히 옛 모습으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숨어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모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슬픈 마음을 치유해 주고 새로운 소망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숯불을 피운 장소를 택하십니다. 숯불이 있는 곳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날을 기억나게 하는 장소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 재판의 진행을 알아보기 위해 빌라도의 집에 찾아갔던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숯불 곁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그 아픔의 현장을 재현시키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에서 그를 만나셨을까요? 왜냐하면, 상처는 외면하고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곳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픔의 기억을 덮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면서 장소가 주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장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들고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혹시 가기 싫은 장소가 있습니까? 그곳에 가면 옛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찡그려지는 곳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내가 어떠한 사건으로부터 온전히 치유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억압받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과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상처를 직면하고, 왜 억압을 받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예수님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치유의 역사를 다시금 경험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작을 베드로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장소와 더불어 예수님은 베드로의 옛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부르셨던 이름으로 그를 세 번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거기에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베드로야 다시 시작해 보자. 나를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네가 나를 따라왔던 그 때처럼 다시 시작해 보자. 원점에서부터 출발하자. 어제의 슬픔, 어제의 낙심, 어제의 절망과 배반, 모두 땅에 묻어버리자. 그리고 나와 함께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보자.” 그렇게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너의 자랑도 너의 실수도 모두 내려놓고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언어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괴로웠습니다. ‘이 입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같은 입으로 “나는 예수라는 사람 몰라요!”라고 했으니…’ 예수님을 향해서 저주했던 자신의 입과 말이 베드로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매정하게 부인한 것도,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세 번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알고 있단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네가 나를 보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으면서도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하지만 이제 내가 새로운 기회를 주겠다.”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받으면서 당황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예수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 덜컥 겁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러실까. 나를 안 믿으시나봐. 여전히 나를 문제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거겠지’ 성경은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세 번의 질문, 그것은 베드로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너를 억압하고 있는 언어의 트라우마로부터 내가 너를 해방시켜주고 싶구나. 네가 네 입으로 나를 세 번 부인했으니 이제 네 입으로 세 번 다시 대답해보렴.” 그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질문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

이것은 베드로를 억압하고 있는 말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말들로부터 스스로 고침받게 하시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사람들 보다’ 라는 비교급을 사용해서 질문을 하셨을까요? 예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했던 말들을 기억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들이 나를 다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염두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 제자요? 나보다 못하지요! 그동안 제가 제일 앞장서서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자신있게 말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결코 같지 않은 헌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는 바로 나입니다!” 라고 큰소리 쳤던 것입니다. 물론 그때 베드로의 각오와 결단은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진심을 다해 예수님께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뜨거운 마음 뿐만 아니라 연약함도 동시에 알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0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복음 14:30)

이러한 예수님의 예언에 베드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가복음 14:31)

“제가 죽으면 죽었지, 모든 것을 바치면 바쳤지, 어떻게 이 입으로 일구이언 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베드로는 힘있게 예수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의 근심과 걱정, 탄식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야, 너 그동안 기도 좀 했느냐? 그동안 성전에 가서 재물을 열심히 바쳤느냐? 예배는 빠지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러한 것들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의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삶에 수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신앙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상처를 이 대답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옛날 같았으면 “예수님,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나하고 저 사람들하고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제 충성을 의심하십니까? 저의 결단을 믿지 않으십니까?” 라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결심이 모래성이 무너지듯 힘없이 사라졌던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베드로가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이고 그의 겸손입니다.

… 주님 그러 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15)

예수님은 비교급으로 물으셨지만 그는 비교급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주체어였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주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베드로라면 아마 ‘나’를 내세웠을 것입니다. “내가 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최고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나는 다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내 결심을 뽐낼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 주님이 아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옵소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깨달을 때 영혼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세 번째 트라우마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은 마음과 영혼의 치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세 번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동안 베드로는 이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한 몫을 차지하겠지? 그러면 부자도 되고, 세상에서 출세도 할 테지? 명예를 얻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겠지! 예수 믿으면 이런 복을 받게 될 거야’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늘 자기 문제에 급급하여 그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이제 이웃을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향해서 네 눈을 돌려봐라. 그것이 내 뜻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네 이웃을 사랑해라. 내 양을 쳐라. 내 성도들을 이끌라. 교회를 세우라. 그리고 잊지 말아라. 이것은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양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그의 말을 듣고 삼천 명의 사람이 회개를 했다면, 과거의 그는 “하나님, 나 잘 택하셨습니다. 나 하나님 앞에 쓸 만한 종 아닙니까?” 이렇게 큰소리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명을 깨닫게 되자 가슴이 뜨거워지고 영혼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내가 할 일이 있구나. 내게 주신 사명이 있구나. 나는 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종될 자격이 없는 실패자라고 생각했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할 일을 맡겨주시는구나.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베드로는 주님만을 위해서 평생 살겠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마음을 어둡게 합니까? 무엇이 두렵게 만듭니까? 어떤 장소가 나를 괴롭힙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려하면 만나기도 전에 이리저리 도망갈 생각부터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있는 이 어둠의 트라우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해결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장소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일과 사람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고백을 드릴 때에, 우리를 억압했던 모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 영적인 고민들 모두 다 내려놓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딪쳐 나가십시오. 도전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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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 15 ~ 19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트라우마란 천재지변, 전쟁, 화재, 대형사고, 신체적인 폭력 등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후에 나타나는 정신적인 장애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말합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과민반응을 일으키거나 충격의 반복적 경험을 두려워하여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도피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를 낸 사람들은 운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높은 건물에서 화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으려 하고, 어렸을 적에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장성해서도 넥타이를 매지 못하고 심지어 목도리를 두르는 것에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트라우마는 사랑했던 스승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상황을 목격함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었습니다. 직업도 내려놓고, 가족도 포기하고, 3년 동안 오직 예수님을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저 분을 아는데, 저렇게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되는데… 저렇게 선한 분을 이리도 무참히 부숴 버릴 수 있는가!’ 이것은 그의 모든 생각들이 뒤집어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트라우마는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형성됩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제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종의 한 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나는 참 못난 놈이구나, 참으로 나쁜 놈이구나.’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바로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태복음 26:75)

아마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을 것입니다. 슬프고 창피해서,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못한 억울함에서 울었을 것입니다.
저는 수난주간이 되면,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가 쓴 마태수난곡을 한 번씩 들어보곤 합니다. 내레이터를 맡은 테너가수가 매우 높은 톤으로 베드로가 통곡하는 모습을 가슴이 아리도록 처절하게 부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서 베드로처럼 가슴 아프게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베드로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예수님은 상처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기가 싫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지울 수 없는 기억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옛 직업인 물고기 잡는 일에 몰두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있었습니다.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쳤던 자신에 대한 울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조용히 옛 모습으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숨어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모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슬픈 마음을 치유해 주고 새로운 소망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숯불을 피운 장소를 택하십니다. 숯불이 있는 곳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날을 기억나게 하는 장소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 재판의 진행을 알아보기 위해 빌라도의 집에 찾아갔던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숯불 곁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그 아픔의 현장을 재현시키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에서 그를 만나셨을까요? 왜냐하면, 상처는 외면하고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곳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픔의 기억을 덮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면서 장소가 주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장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들고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혹시 가기 싫은 장소가 있습니까? 그곳에 가면 옛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찡그려지는 곳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내가 어떠한 사건으로부터 온전히 치유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억압받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과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상처를 직면하고, 왜 억압을 받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예수님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치유의 역사를 다시금 경험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작을 베드로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장소와 더불어 예수님은 베드로의 옛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부르셨던 이름으로 그를 세 번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거기에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베드로야 다시 시작해 보자. 나를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네가 나를 따라왔던 그 때처럼 다시 시작해 보자. 원점에서부터 출발하자. 어제의 슬픔, 어제의 낙심, 어제의 절망과 배반, 모두 땅에 묻어버리자. 그리고 나와 함께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보자.” 그렇게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너의 자랑도 너의 실수도 모두 내려놓고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언어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괴로웠습니다. ‘이 입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같은 입으로 “나는 예수라는 사람 몰라요!”라고 했으니…’ 예수님을 향해서 저주했던 자신의 입과 말이 베드로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매정하게 부인한 것도,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세 번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알고 있단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네가 나를 보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으면서도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하지만 이제 내가 새로운 기회를 주겠다.”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받으면서 당황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예수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 덜컥 겁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러실까. 나를 안 믿으시나봐. 여전히 나를 문제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거겠지’ 성경은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세 번의 질문, 그것은 베드로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너를 억압하고 있는 언어의 트라우마로부터 내가 너를 해방시켜주고 싶구나. 네가 네 입으로 나를 세 번 부인했으니 이제 네 입으로 세 번 다시 대답해보렴.” 그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질문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

이것은 베드로를 억압하고 있는 말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말들로부터 스스로 고침받게 하시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사람들 보다’ 라는 비교급을 사용해서 질문을 하셨을까요? 예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했던 말들을 기억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들이 나를 다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염두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 제자요? 나보다 못하지요! 그동안 제가 제일 앞장서서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자신있게 말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결코 같지 않은 헌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는 바로 나입니다!” 라고 큰소리 쳤던 것입니다. 물론 그때 베드로의 각오와 결단은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진심을 다해 예수님께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뜨거운 마음 뿐만 아니라 연약함도 동시에 알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0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복음 14:30)

이러한 예수님의 예언에 베드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가복음 14:31)

“제가 죽으면 죽었지, 모든 것을 바치면 바쳤지, 어떻게 이 입으로 일구이언 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베드로는 힘있게 예수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의 근심과 걱정, 탄식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야, 너 그동안 기도 좀 했느냐? 그동안 성전에 가서 재물을 열심히 바쳤느냐? 예배는 빠지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러한 것들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의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삶에 수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신앙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상처를 이 대답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옛날 같았으면 “예수님,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나하고 저 사람들하고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제 충성을 의심하십니까? 저의 결단을 믿지 않으십니까?” 라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결심이 모래성이 무너지듯 힘없이 사라졌던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베드로가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이고 그의 겸손입니다.

… 주님 그러 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15)

예수님은 비교급으로 물으셨지만 그는 비교급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주체어였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주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베드로라면 아마 ‘나’를 내세웠을 것입니다. “내가 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최고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나는 다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내 결심을 뽐낼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 주님이 아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옵소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깨달을 때 영혼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세 번째 트라우마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은 마음과 영혼의 치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세 번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동안 베드로는 이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한 몫을 차지하겠지? 그러면 부자도 되고, 세상에서 출세도 할 테지? 명예를 얻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겠지! 예수 믿으면 이런 복을 받게 될 거야’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늘 자기 문제에 급급하여 그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이제 이웃을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향해서 네 눈을 돌려봐라. 그것이 내 뜻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네 이웃을 사랑해라. 내 양을 쳐라. 내 성도들을 이끌라. 교회를 세우라. 그리고 잊지 말아라. 이것은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양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그의 말을 듣고 삼천 명의 사람이 회개를 했다면, 과거의 그는 “하나님, 나 잘 택하셨습니다. 나 하나님 앞에 쓸 만한 종 아닙니까?” 이렇게 큰소리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명을 깨닫게 되자 가슴이 뜨거워지고 영혼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내가 할 일이 있구나. 내게 주신 사명이 있구나. 나는 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종될 자격이 없는 실패자라고 생각했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할 일을 맡겨주시는구나.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베드로는 주님만을 위해서 평생 살겠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마음을 어둡게 합니까? 무엇이 두렵게 만듭니까? 어떤 장소가 나를 괴롭힙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려하면 만나기도 전에 이리저리 도망갈 생각부터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있는 이 어둠의 트라우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해결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장소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일과 사람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고백을 드릴 때에, 우리를 억압했던 모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 영적인 고민들 모두 다 내려놓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딪쳐 나가십시오. 도전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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