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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1: 1 ~ 7

김지철 목사

2008.06.15

하나님께서 절망과 탄식의 땅에 웃음을 주시는 때를 기대합니다.

얼마 전 ‘크로싱’이라는 영화의 시사회를 보았습니다. 곧 개봉될 영화로 배우 차인표가 주인공인데 북한의 탄광 노동자로 등장합니다. 보통 가정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렸습니다. 차인표가 임신한 병든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 탈북을 하면서 아내와 아들과 생이별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모습이 곳곳에 나오는 영화입니다. 제목이 ‘크로싱’인 것처럼 엇갈리는 삶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엇갈리는 장면이 계속됩니다.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은 비 내리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참혹한 실상과 탈북자의 애환을 그린 영화로 보기만 해도 나 자신이 이런 고통의 땅 한 모퉁이에 살고 있다는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도 울고 관객들도 울게 되는 슬픈 영화입니다.
분단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통곡입니다. 이런 고난의 땅, 절망과 탄식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웃음을 주실 때가 있을 것이라 믿고 기도합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북녘 땅에서도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가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살다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살기 싫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와 이유가 있겠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라라는 여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불임의 고통을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은 당시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못 갖는 여인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는 여인처럼 여겨졌습니다.
구약에서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도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탄식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한나의 모습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사무엘상 1:10,15,16)

그녀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고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한나와 똑같이 애통했던 사라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천사가 함께 있던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세기 18:10)

이것은 정말 사라가 오랫동안 품었던 소원이고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녀가 너무나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장막 뒤에 있다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어이없는 웃음이었습니다. 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노쇠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내게 도대체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속으로 웃고 있는 사라를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네가 왜 웃느냐? 네게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는데 왜 웃느냐?”
사라는 갑자기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웃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짖굳은 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유머입니다. “네가 웃었지? 네가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인데, 네가 웃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하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라의 아들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사라에게 그동안의 삶의 역경과 불임의 고통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라는 그동안 겪어왔던 삶의 여정이 떠올랐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75세 되던 때였습니다.

“네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소식이 없었습니다. 불임의 고통을 받는 가정과 여인들이 있습니다. 불임은 다른 사람이 쉽게 알 수 없는 정말로 어려운 고통입니다.
한국에도 가임부부 10쌍 중 1쌍 이상이 불임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불임으로 고통 받는 부부가 전체 60만 쌍이 된다고 합니다. 매년 수 만 명 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친하던 친구도 불임의 고통을 몰라줍니다. 아이 낳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공통 화제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자랑하는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누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 집에는 가기도 싫습니다. 점점 더 외로움과 스트레스가 커집니다. 시댁 식구들에 의해서도 무언의 압력이 커져만 갑니다. 이제 불임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문제가 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해야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라는 천사가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했을 때 웃었습니다.

사라에게 이런 불임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때 그녀는 아주 엉뚱하고 자기 모욕적인 생각을 합니다. 사라는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그래도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아들을 줄 텐데 자신이 늙어서 못 낳으면 혹 다른 여자를 통해서라도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몸종이었던 젊은 여인 하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여인이 다른 여자를 남편의 침실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시기와 질투를 참아내면서 하갈을 자신의 침실에 넣었는데 정말로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사라는 처음에는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자마자 종이었던 하갈이 여주인인 사라를 구박하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하다가 남편도 빼앗기고 아들도 빼앗기고 사랑도 빼앗기고 신분도 빼앗기는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다가와 1년 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불가능한 일인데요?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안가요? 내가 내 육체를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일인 걸요? 너무 나이가 들어 생리도 끊어졌는데요? 내 남편도 늙은이가 되고 말았는데요?”
남편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이고 사라의 나이가 90세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겠다고 말씀한 것에 대해 사라는 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좋아서 웃은 것이 아니라 답답해서 웃는 웃음이었습니다. 씁쓸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비통한 심정으로 그냥 웃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웃음 다음에 나오는 웃음입니다. 본문에서 웃은 사라의 웃음은 함박웃음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나도 엄마가 되었다는 감격의 웃음, 기쁨의 웃음이었습니다.
웃음의 종류를 찾아보았더니 수십 가지였습니다. 웃음에는 두 가지 웃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웃음과 긍정적인 웃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웃음은 헛웃음, 비웃음, 코웃음, 키득거리는 웃음인 까투리 웃음이 있습니다. 쓴웃음, 간사하게 아양을 떠는 간살웃음, 억지웃음, 허탈 웃음은 부정적인 웃음입니다. 긍정적인 웃음에는 잔잔 웃음, 미소웃음, 너털웃음, 함박웃음, 기쁜 웃음, 감동 웃음, 얼굴을 힘껏 펴서 크게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허탈 웃음을 함박웃음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라의 웃음은 허탈웃음에서 함박웃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라는 스스로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라 스스로는 어디에선가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창세기 21:6)

사라는 하나님이 자신을 웃기셔서 웃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개그맨이십니까? 하나님이 코미디언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던 자신을 소중하게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의 간증이고 찬송의 고백입니다. 성경에 1절에 한 번, 2절에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기대할 수도 소망할 수도 없던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사라는 믿음의 여인이면서 동시에 의심도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의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심이 하나도 없이 믿게 되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심과 의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의심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기 때문에 거기에 내 삶을 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때로 젊은 시절 의심이 사라져야 믿음의 자리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의심했고, 모세도 의심했고, 다윗도 의심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심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있어서 내 의심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클 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으면서 마지막에 웃을 수가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의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의심을 봐라. 네 믿음도 봐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봐라. 네 인생이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사라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부심을 얻고 웃었습니다.

사라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끝이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벼랑 끝까지 와서 인생에 기쁨이 없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아오셨습니다. “네 인생은 끝이 아니다. 네 인생은 마지막이 아니다. 네 인생은 벼랑 끝이 아니다. 네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네 인생은 소중한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 사실을 다시 가르쳐주셨기에 사라는 기뻤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내가 늙었다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구나. 아들이 없다고 내 인생이 끝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구나.’
사라는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처한 환경과 어려움 때문에 너무 빨리 인생을 포기합니다. 인생이 끝이고 가능성이 없다고 스스로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하다가도 지치면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람들은 지칠 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성취됨을 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약속하신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웃게 될 때 상처가 치유됩니다. 마음속에 웃음이 있고 얼굴에 웃음이 나타나는 사람들은 상처가 없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상처를 치유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얼굴이 우울하고 찌푸려지는 것이 계속되는 사람들은 아직도 상처가 자신을 얽어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내가 웃으면 남도 웃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옛말에 잘 되는 집안의 모습에 대해서 첫 번째 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집이라고 말합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펴서 읽는 소리가 집 밖까지 들리는 것은 부모가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교육에 관심을 보이는 축복받은 가정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집입니다. 어머니가 부지런히 가정을 잘 꾸리는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세 번째, 가정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정이 화평한 집, 사랑이 넘치는 집, 화목한 집입니다.
웃음이란 소중한 것으로 웃음에 관련된 격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낭비한 날이 있다면, 바로 웃지 않고 보냈던 날이다.” 웃음 없이 찌푸리면서 침울하게 보냈던 인생은 쓸데없이 소모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울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이는 야만인이다. 하지만 웃으려고 하지 않는 늙은이는 미련한 사람이다.” 울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이는 문제가 있고, 웃지 않으려는 노인들 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살려고 합니다. 젊은 때는 웃고 즐기다가 나이가 들면 얼굴이 굳어져 침울하고 웃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젊을 때는 우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웃는 훈련을 해야 멋진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당신이 웃음을 짓기 전까지는 어떤 옷으로 치장을 해도 온전히 몸단장을 한 것이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얼굴에 예쁜 화장을 해도 웃음이 없으면 단장한 것이 아닙니다. 얼굴에 웃음이 있을 때 진정한 단장을 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에서 웃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우리가 웃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천국 갈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에 가면 웃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화내고 찌푸리며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웃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기에 있는 우리를 다시 웃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는 정체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고유가와 원자재와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현실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불신과 미움과 갈등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축복해 주셔서 자유와 독립과 민주와 평화와 풍요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약속된 백성임을 믿으면서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서 이명박 장로님을 대통령을 세워주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잘 이끌어주실 것이라 믿으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지혜와 용기가 함께 하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찌푸렸던 얼굴이 펴지고 불안했던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을 주시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평화와 풍요의 약속을 믿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을 보는 자는 지금 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냅 사진에 너무 빨리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신다는 약속을 받아 주어진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과 포기가 아니라 다시 이 땅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고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앞을 향해 나가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현실은 어둡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이 땅, 그리고 이 땅에 지도자로 세운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합니다. 다시 웃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지도자와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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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 1 ~ 7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절망과 탄식의 땅에 웃음을 주시는 때를 기대합니다.

얼마 전 ‘크로싱’이라는 영화의 시사회를 보았습니다. 곧 개봉될 영화로 배우 차인표가 주인공인데 북한의 탄광 노동자로 등장합니다. 보통 가정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렸습니다. 차인표가 임신한 병든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 탈북을 하면서 아내와 아들과 생이별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모습이 곳곳에 나오는 영화입니다. 제목이 ‘크로싱’인 것처럼 엇갈리는 삶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엇갈리는 장면이 계속됩니다.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은 비 내리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참혹한 실상과 탈북자의 애환을 그린 영화로 보기만 해도 나 자신이 이런 고통의 땅 한 모퉁이에 살고 있다는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도 울고 관객들도 울게 되는 슬픈 영화입니다.
분단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통곡입니다. 이런 고난의 땅, 절망과 탄식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웃음을 주실 때가 있을 것이라 믿고 기도합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북녘 땅에서도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가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살다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살기 싫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와 이유가 있겠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라라는 여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불임의 고통을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은 당시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못 갖는 여인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는 여인처럼 여겨졌습니다.
구약에서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도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탄식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한나의 모습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사무엘상 1:10,15,16)

그녀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고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한나와 똑같이 애통했던 사라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천사가 함께 있던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세기 18:10)

이것은 정말 사라가 오랫동안 품었던 소원이고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녀가 너무나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장막 뒤에 있다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어이없는 웃음이었습니다. 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노쇠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내게 도대체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속으로 웃고 있는 사라를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네가 왜 웃느냐? 네게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는데 왜 웃느냐?”
사라는 갑자기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웃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짖굳은 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유머입니다. “네가 웃었지? 네가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인데, 네가 웃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하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라의 아들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사라에게 그동안의 삶의 역경과 불임의 고통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라는 그동안 겪어왔던 삶의 여정이 떠올랐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75세 되던 때였습니다.

“네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소식이 없었습니다. 불임의 고통을 받는 가정과 여인들이 있습니다. 불임은 다른 사람이 쉽게 알 수 없는 정말로 어려운 고통입니다.
한국에도 가임부부 10쌍 중 1쌍 이상이 불임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불임으로 고통 받는 부부가 전체 60만 쌍이 된다고 합니다. 매년 수 만 명 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친하던 친구도 불임의 고통을 몰라줍니다. 아이 낳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공통 화제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자랑하는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누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 집에는 가기도 싫습니다. 점점 더 외로움과 스트레스가 커집니다. 시댁 식구들에 의해서도 무언의 압력이 커져만 갑니다. 이제 불임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문제가 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해야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라는 천사가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했을 때 웃었습니다.

사라에게 이런 불임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때 그녀는 아주 엉뚱하고 자기 모욕적인 생각을 합니다. 사라는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그래도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아들을 줄 텐데 자신이 늙어서 못 낳으면 혹 다른 여자를 통해서라도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몸종이었던 젊은 여인 하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여인이 다른 여자를 남편의 침실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시기와 질투를 참아내면서 하갈을 자신의 침실에 넣었는데 정말로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사라는 처음에는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자마자 종이었던 하갈이 여주인인 사라를 구박하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하다가 남편도 빼앗기고 아들도 빼앗기고 사랑도 빼앗기고 신분도 빼앗기는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다가와 1년 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불가능한 일인데요?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안가요? 내가 내 육체를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일인 걸요? 너무 나이가 들어 생리도 끊어졌는데요? 내 남편도 늙은이가 되고 말았는데요?”
남편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이고 사라의 나이가 90세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겠다고 말씀한 것에 대해 사라는 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좋아서 웃은 것이 아니라 답답해서 웃는 웃음이었습니다. 씁쓸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비통한 심정으로 그냥 웃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웃음 다음에 나오는 웃음입니다. 본문에서 웃은 사라의 웃음은 함박웃음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나도 엄마가 되었다는 감격의 웃음, 기쁨의 웃음이었습니다.
웃음의 종류를 찾아보았더니 수십 가지였습니다. 웃음에는 두 가지 웃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웃음과 긍정적인 웃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웃음은 헛웃음, 비웃음, 코웃음, 키득거리는 웃음인 까투리 웃음이 있습니다. 쓴웃음, 간사하게 아양을 떠는 간살웃음, 억지웃음, 허탈 웃음은 부정적인 웃음입니다. 긍정적인 웃음에는 잔잔 웃음, 미소웃음, 너털웃음, 함박웃음, 기쁜 웃음, 감동 웃음, 얼굴을 힘껏 펴서 크게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허탈 웃음을 함박웃음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라의 웃음은 허탈웃음에서 함박웃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라는 스스로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라 스스로는 어디에선가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창세기 21:6)

사라는 하나님이 자신을 웃기셔서 웃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개그맨이십니까? 하나님이 코미디언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던 자신을 소중하게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의 간증이고 찬송의 고백입니다. 성경에 1절에 한 번, 2절에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기대할 수도 소망할 수도 없던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사라는 믿음의 여인이면서 동시에 의심도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의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심이 하나도 없이 믿게 되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심과 의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의심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기 때문에 거기에 내 삶을 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때로 젊은 시절 의심이 사라져야 믿음의 자리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의심했고, 모세도 의심했고, 다윗도 의심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심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있어서 내 의심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클 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으면서 마지막에 웃을 수가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의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의심을 봐라. 네 믿음도 봐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봐라. 네 인생이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사라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부심을 얻고 웃었습니다.

사라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끝이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벼랑 끝까지 와서 인생에 기쁨이 없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아오셨습니다. “네 인생은 끝이 아니다. 네 인생은 마지막이 아니다. 네 인생은 벼랑 끝이 아니다. 네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네 인생은 소중한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 사실을 다시 가르쳐주셨기에 사라는 기뻤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내가 늙었다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구나. 아들이 없다고 내 인생이 끝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구나.’
사라는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처한 환경과 어려움 때문에 너무 빨리 인생을 포기합니다. 인생이 끝이고 가능성이 없다고 스스로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하다가도 지치면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람들은 지칠 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성취됨을 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약속하신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웃게 될 때 상처가 치유됩니다. 마음속에 웃음이 있고 얼굴에 웃음이 나타나는 사람들은 상처가 없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상처를 치유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얼굴이 우울하고 찌푸려지는 것이 계속되는 사람들은 아직도 상처가 자신을 얽어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내가 웃으면 남도 웃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옛말에 잘 되는 집안의 모습에 대해서 첫 번째 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집이라고 말합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펴서 읽는 소리가 집 밖까지 들리는 것은 부모가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교육에 관심을 보이는 축복받은 가정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집입니다. 어머니가 부지런히 가정을 잘 꾸리는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세 번째, 가정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정이 화평한 집, 사랑이 넘치는 집, 화목한 집입니다.
웃음이란 소중한 것으로 웃음에 관련된 격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낭비한 날이 있다면, 바로 웃지 않고 보냈던 날이다.” 웃음 없이 찌푸리면서 침울하게 보냈던 인생은 쓸데없이 소모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울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이는 야만인이다. 하지만 웃으려고 하지 않는 늙은이는 미련한 사람이다.” 울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이는 문제가 있고, 웃지 않으려는 노인들 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살려고 합니다. 젊은 때는 웃고 즐기다가 나이가 들면 얼굴이 굳어져 침울하고 웃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젊을 때는 우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웃는 훈련을 해야 멋진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당신이 웃음을 짓기 전까지는 어떤 옷으로 치장을 해도 온전히 몸단장을 한 것이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얼굴에 예쁜 화장을 해도 웃음이 없으면 단장한 것이 아닙니다. 얼굴에 웃음이 있을 때 진정한 단장을 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에서 웃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우리가 웃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천국 갈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에 가면 웃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화내고 찌푸리며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웃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기에 있는 우리를 다시 웃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는 정체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고유가와 원자재와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현실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불신과 미움과 갈등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축복해 주셔서 자유와 독립과 민주와 평화와 풍요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약속된 백성임을 믿으면서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서 이명박 장로님을 대통령을 세워주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잘 이끌어주실 것이라 믿으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지혜와 용기가 함께 하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찌푸렸던 얼굴이 펴지고 불안했던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을 주시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평화와 풍요의 약속을 믿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을 보는 자는 지금 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냅 사진에 너무 빨리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신다는 약속을 받아 주어진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과 포기가 아니라 다시 이 땅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고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앞을 향해 나가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현실은 어둡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이 땅, 그리고 이 땅에 지도자로 세운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합니다. 다시 웃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지도자와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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