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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리더십, 사울

사무엘상 15: 16 ~ 19

김지철 목사

2018.06.10

사울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금주 화요일에는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또 수요일에는 광역단체장과 광역의원, 교육감 등을 선출하는 지방선거도 있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공동체에 서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역사와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온유함의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모세의 리더십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나쁜 리더십’의 모델인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은 선한 왕으로 기록되었는데, 초대 왕 사울은 나쁜 왕으로 불립니다. 양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여러 내용 중 세 가지 정도로 사울의 잘못된 리더십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사울은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선으로 시작했으나 악으로 끝맺습니다. 처음에 그의 리더십은 존중 받는 좋은 리더십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좋은 리더십을 유지하고 발전해 나갔다면 큰 축복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졌습니다.
사울 왕은 본래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누가 봐도 지도자감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천하고 하나님께서 간택하셔서 왕이 된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에도 그의 초창기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무엘상 9:2)

외모도 출중하고 건장했으며, 내면적으로도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했을 때도 그는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 같은 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을 잃지 않던 초창기의 사울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지적합니다. “당신의 시작은 겸손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의 모습은 오만하고 불손하다. 당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이다.” 사무엘상 15장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상 15:17)

‘당신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별 볼 일 없다고 느낄 때, 즉 스스로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사울의 처음 모습을 회상시키면서 깨닫고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경고입니다. 사무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9절입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상 15:19)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냐고, 당신이 그래도 왕이냐고, 하늘에 더 크신 왕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냐는 경고합니다. 당신도 힘 있는 권력자이지만 하늘에는 더 크신 권력자, 최고 권력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도자에게 자존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울은 본래 왕이 되려는 생각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당나귀를 잃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면서 얼떨결에 왕으로 추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자존감이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아버지로서의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으셨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존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맡는 모든 역할에서 자존감을 지켜야 넉넉하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타인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아마 사울에게 이 자존감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위한 이익과 탐욕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는 용사였고 힘도 있었지만,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왕인지 칭찬 받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게 얼마나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가 보니,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간 사울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삶의 방향이 변질된 모습입니다. 즉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욕심을 채우는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더 관심이 있게 되면, 그때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는 때입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선물에 매몰돼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이제 그는 위기에 직면할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이 죽은 뒤에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두려워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습니다. 소위 점치는 무당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묻는 사울의 모습, 이는 왕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무너진 인생임을 증명합니다.
혹시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처음보다 좋아지고 있습니까? 역사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이런 전철을 밟았습니다. 처음에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지도자가 있는 것인데, 지도자를 위해 공동체가 도구로 전락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가장으로, 또 부모로서 어떤 모습으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까? 또 직장과 사회에서 내게 맡겨진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습니까? 우리도 사울처럼 실수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실패를 만회해야 합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으면,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처음 사랑은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도 드려도 모자란 마음입니다. 드리면 드릴수록 내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는 사랑입니다.

사울은 좋은 동역자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을 때 두 번째 문제가 생깁니다. 사울 왕도 그랬습니다. 그의 곁에 있던 좋은 협력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네트워킹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회적 인프라가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지도자 홀로 남게 됩니다. 소통이 끊어지고 대화도 단절됩니다. 그러면 명령과 복종이라는 단순 구조만 공동체에 남게 됩니다.
지도력이란 우리 삶의 인간관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만나면 충전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전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덕을 갖춘 사람입니까? 만나면 에너지를 주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까? 만날 때마다 자꾸 에너지를 빼앗는, 방전되는 느낌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공동체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용감하고 멋진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아버지 사울이 죽일 뻔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단이 힘을 얻기 위해 꿀송이 하나를 먹었는데, 그것이 자신이 명령한 것에서 어긋난다며 체면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백성이 오히려 요나단은 용사며, 결코 죽여선 안 된다고 만류했기에 요나단이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다윗의 진정한 친구였는데, 사울은 그 사실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가졌던 모든 신뢰를 잃은 것 같습니다. 한편 사울에게는 미갈이란 딸도 있었는데,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자 처음엔 다윗을 사위로 맞아들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다윗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촉발하자 미갈의 집에 군대를 파견해 다윗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미갈이 다윗의 피신을 돕습니다. 그때부터 미갈의 마음도 아버지 사울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아버지인데도 아들과 대화하지 않고 딸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부모로서의 리더십을 잃은 것입니다. 지도력이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모든 지도력이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대화가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면 밖에서도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사울의 신하들도 사울을 떠나게 됩니다. 최고의 신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들과 같은 부하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를 잃고 맙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다윗이 골리앗 장수를 무너뜨린 이후였습니다. 그때 다윗이 개선장군으로 성으로 들어왔는데, 그를 본 백성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이 노래는 사울 왕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물론 제가 사울 왕이었어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비교 당하는 건 누구에게나 불쾌한 감정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분노를 멈춰야 했습니다.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8~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8~9)

그는 피해망상적인 분노를 확대해 갑니다. 다윗이 자신의 나라를 삼켜 버리려 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 질투와 분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바로 이때부터 사울의 지도력은 급전직하(急轉直下)하기 시작합니다.
사울 왕은 자신 곁에 있던 진정한 협력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주위에는 진솔한 부하가 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울 스스로 초래한 결과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주위엔 아첨하는 자들, 기회주의자들, 무능력한 탐욕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역사는 3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똑같이 반복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합니까? 가장 큰 틀로 작용하는 게 지능지수입니다. 지금도 대학입시는 대개 IQ로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똑똑한 사람을 뽑기는 하지만 풍성한 감정을 지닌 사람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성지수인 EQ(Emotional Quotient)가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삶을 바르게 인도할 지표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SQ(Social Quotient)라고 하는 사회성지수입니다. 어떻게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사람이 지도력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 책임의식이 강하고 배려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떻게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반대 길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고독감에 빠집니다. 자신이 왕으로서의 명예심은 있는데, 진정한 자존감은 결여돼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는 어떻게 될까요? 오만한 동시에 열등감에 빠집니다. 결국 사울 왕은 아들을 잃고 딸도 잃으며, 다윗도 잃어버리고, 백성들에게서도 인정과 존경도 상실한 지도자로 전락합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사울 왕의 문제는 후회만 하고 회개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울과 같은 과오가 우리 삶에도 있습니다. 시작은 선하고 좋게 했으나 끝이 좋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울 왕처럼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며 무너지길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억누르고 무시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때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사울에게도 분명 여러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연민에만 빠지고 말았습니다. 즉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돌이켜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는 후회했지만, 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책과 열등감, 후회가 반복되었으나, 하나님 앞에 나가 참회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과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후회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들었을 때, 사울이 즉각 통회하며 자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불가능하지만, 만약 사울 왕이 그렇게 돌이켰다면 그의 인생도, 이스라엘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과 51편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자기 연민에 머무는 것이 후회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을 토해내는 것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대척점에 다윗 왕이 있습니다.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一喜一悲)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경청하며 우위에 두었습니다. 사울은 권력을 스스로 지키려 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기에 겸손했습니다. 사울은 자기 방어 메커니즘을 사용했습니다. 때문에 열등감 속에서 교만해졌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사울은 곁에 둔 사람을 의심하고 의혹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배려하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무엇보다 사울은 후회에서 멈추었으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로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또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중요한 건 그 이후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나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일까요?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이 좋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게 주신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선물이자 축복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좋은 리더입니다. 후회를 넘어 회개로 나아가는 사람이 좋은 리더입니다.
우리 삶에 누구에게나 연약한 모습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서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습니다. 내가 부끄럽습니다. 내 모습이 이렇게 초라합니다. 앞으로 더 나갈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받아 주세요. 십자가의 복음으로 저를 일으켜 세워 주세요.”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상처 난 마음을 만지시며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주위로 좋은 동역자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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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5: 16 ~ 19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금주 화요일에는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또 수요일에는 광역단체장과 광역의원, 교육감 등을 선출하는 지방선거도 있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공동체에 서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역사와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온유함의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모세의 리더십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나쁜 리더십’의 모델인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은 선한 왕으로 기록되었는데, 초대 왕 사울은 나쁜 왕으로 불립니다. 양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여러 내용 중 세 가지 정도로 사울의 잘못된 리더십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사울은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선으로 시작했으나 악으로 끝맺습니다. 처음에 그의 리더십은 존중 받는 좋은 리더십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좋은 리더십을 유지하고 발전해 나갔다면 큰 축복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졌습니다.
사울 왕은 본래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누가 봐도 지도자감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천하고 하나님께서 간택하셔서 왕이 된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에도 그의 초창기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무엘상 9:2)

외모도 출중하고 건장했으며, 내면적으로도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했을 때도 그는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 같은 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을 잃지 않던 초창기의 사울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지적합니다. “당신의 시작은 겸손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의 모습은 오만하고 불손하다. 당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이다.” 사무엘상 15장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상 15:17)

‘당신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별 볼 일 없다고 느낄 때, 즉 스스로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사울의 처음 모습을 회상시키면서 깨닫고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경고입니다. 사무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9절입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상 15:19)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냐고, 당신이 그래도 왕이냐고, 하늘에 더 크신 왕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냐는 경고합니다. 당신도 힘 있는 권력자이지만 하늘에는 더 크신 권력자, 최고 권력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도자에게 자존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울은 본래 왕이 되려는 생각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당나귀를 잃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면서 얼떨결에 왕으로 추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자존감이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아버지로서의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으셨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존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맡는 모든 역할에서 자존감을 지켜야 넉넉하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타인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아마 사울에게 이 자존감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위한 이익과 탐욕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는 용사였고 힘도 있었지만,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왕인지 칭찬 받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게 얼마나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가 보니,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간 사울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삶의 방향이 변질된 모습입니다. 즉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욕심을 채우는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더 관심이 있게 되면, 그때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는 때입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선물에 매몰돼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이제 그는 위기에 직면할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이 죽은 뒤에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두려워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습니다. 소위 점치는 무당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묻는 사울의 모습, 이는 왕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무너진 인생임을 증명합니다.
혹시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처음보다 좋아지고 있습니까? 역사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이런 전철을 밟았습니다. 처음에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지도자가 있는 것인데, 지도자를 위해 공동체가 도구로 전락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가장으로, 또 부모로서 어떤 모습으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까? 또 직장과 사회에서 내게 맡겨진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습니까? 우리도 사울처럼 실수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실패를 만회해야 합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으면,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처음 사랑은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도 드려도 모자란 마음입니다. 드리면 드릴수록 내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는 사랑입니다.

사울은 좋은 동역자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을 때 두 번째 문제가 생깁니다. 사울 왕도 그랬습니다. 그의 곁에 있던 좋은 협력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네트워킹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회적 인프라가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지도자 홀로 남게 됩니다. 소통이 끊어지고 대화도 단절됩니다. 그러면 명령과 복종이라는 단순 구조만 공동체에 남게 됩니다.
지도력이란 우리 삶의 인간관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만나면 충전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전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덕을 갖춘 사람입니까? 만나면 에너지를 주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까? 만날 때마다 자꾸 에너지를 빼앗는, 방전되는 느낌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공동체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용감하고 멋진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아버지 사울이 죽일 뻔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단이 힘을 얻기 위해 꿀송이 하나를 먹었는데, 그것이 자신이 명령한 것에서 어긋난다며 체면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백성이 오히려 요나단은 용사며, 결코 죽여선 안 된다고 만류했기에 요나단이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다윗의 진정한 친구였는데, 사울은 그 사실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가졌던 모든 신뢰를 잃은 것 같습니다. 한편 사울에게는 미갈이란 딸도 있었는데,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자 처음엔 다윗을 사위로 맞아들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다윗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촉발하자 미갈의 집에 군대를 파견해 다윗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미갈이 다윗의 피신을 돕습니다. 그때부터 미갈의 마음도 아버지 사울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아버지인데도 아들과 대화하지 않고 딸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부모로서의 리더십을 잃은 것입니다. 지도력이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모든 지도력이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대화가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면 밖에서도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사울의 신하들도 사울을 떠나게 됩니다. 최고의 신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들과 같은 부하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를 잃고 맙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다윗이 골리앗 장수를 무너뜨린 이후였습니다. 그때 다윗이 개선장군으로 성으로 들어왔는데, 그를 본 백성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이 노래는 사울 왕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물론 제가 사울 왕이었어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비교 당하는 건 누구에게나 불쾌한 감정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분노를 멈춰야 했습니다.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8~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8~9)

그는 피해망상적인 분노를 확대해 갑니다. 다윗이 자신의 나라를 삼켜 버리려 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 질투와 분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바로 이때부터 사울의 지도력은 급전직하(急轉直下)하기 시작합니다.
사울 왕은 자신 곁에 있던 진정한 협력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주위에는 진솔한 부하가 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울 스스로 초래한 결과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주위엔 아첨하는 자들, 기회주의자들, 무능력한 탐욕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역사는 3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똑같이 반복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합니까? 가장 큰 틀로 작용하는 게 지능지수입니다. 지금도 대학입시는 대개 IQ로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똑똑한 사람을 뽑기는 하지만 풍성한 감정을 지닌 사람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성지수인 EQ(Emotional Quotient)가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삶을 바르게 인도할 지표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SQ(Social Quotient)라고 하는 사회성지수입니다. 어떻게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사람이 지도력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 책임의식이 강하고 배려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떻게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반대 길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고독감에 빠집니다. 자신이 왕으로서의 명예심은 있는데, 진정한 자존감은 결여돼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는 어떻게 될까요? 오만한 동시에 열등감에 빠집니다. 결국 사울 왕은 아들을 잃고 딸도 잃으며, 다윗도 잃어버리고, 백성들에게서도 인정과 존경도 상실한 지도자로 전락합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사울 왕의 문제는 후회만 하고 회개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울과 같은 과오가 우리 삶에도 있습니다. 시작은 선하고 좋게 했으나 끝이 좋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울 왕처럼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며 무너지길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억누르고 무시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때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사울에게도 분명 여러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연민에만 빠지고 말았습니다. 즉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돌이켜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는 후회했지만, 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책과 열등감, 후회가 반복되었으나, 하나님 앞에 나가 참회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과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후회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들었을 때, 사울이 즉각 통회하며 자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불가능하지만, 만약 사울 왕이 그렇게 돌이켰다면 그의 인생도, 이스라엘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과 51편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자기 연민에 머무는 것이 후회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을 토해내는 것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대척점에 다윗 왕이 있습니다.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一喜一悲)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경청하며 우위에 두었습니다. 사울은 권력을 스스로 지키려 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기에 겸손했습니다. 사울은 자기 방어 메커니즘을 사용했습니다. 때문에 열등감 속에서 교만해졌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사울은 곁에 둔 사람을 의심하고 의혹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배려하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무엇보다 사울은 후회에서 멈추었으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로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또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중요한 건 그 이후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나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일까요?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이 좋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게 주신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선물이자 축복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좋은 리더입니다. 후회를 넘어 회개로 나아가는 사람이 좋은 리더입니다.
우리 삶에 누구에게나 연약한 모습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서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습니다. 내가 부끄럽습니다. 내 모습이 이렇게 초라합니다. 앞으로 더 나갈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받아 주세요. 십자가의 복음으로 저를 일으켜 세워 주세요.”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상처 난 마음을 만지시며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주위로 좋은 동역자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6월 1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나쁜 리더십사울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0, 51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삼상15:16~19절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1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지난 시간에는 온유함의 리더십을 소유하였던 모세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오늘은 나쁜 리더십의 모델인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사울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과 비교됩니다사울은 나쁜 왕으로다윗은 선한 왕으로 불립니다사울과 다윗의 차이점 3가지를 소개합니다.

설교의 요약

   1.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사울은 선함으로 시작했다가악으로 끝납니다사울의 처음 모습은 좋았는데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빠졌습니다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더 성숙해지고 있습니까그렇지 않으면 퇴보하고 있습니까그것은 모든 삶의 자리에서 다 해당되며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사무엘은 사울 왕의 시작은 겸손했지만마지막은 오만하고 불손했다고 지적합니다그것도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행하였다고 책망합니다(삼상15:19). 사울 왕은 하늘에 더 크신 왕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사울에게 권력을 주신 최고 권력자가 하늘에 계신 것을 망각하였습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자기를 위한 이익탐욕이 너무 앞서 갔습니다삶의 방향이 변질되었습니다사울 왕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자기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습니다(삼상13:9). 무엇보다 사울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자신을 도와줄 협력자가 사라졌습니다.

   사울은 자기 옆에 진정한 협력자 두기를 거절했습니다용감한 아들 요나단사랑스런 딸 미갈충성스런 신하 다윗까지 사울은 거절하였습니다왕이 되었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지만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세상은 지능지수(IQ)에서 벗어나 사회지능지수(SQ)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사울 왕은 절대적인 고독감에 빠졌습니다왕으로서 엄청난 자부심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정한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그래서 아들도딸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잃었습니다모든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3. 사울 왕은 자기 잘못에 대해 깊은 자책감으로 후회했지만진정으로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실수가 없거나실패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사울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에 멈추었습니다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사울이 즉각 회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상하고 통화며 자복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34:18, 51:17). 자기 자신을 향해 자기 탓을 하면서 자기 연민에 머무는 것이 후회입니다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을 고백하며 토해내는 것은 회개입니다잘못했습니까실수했습니까후회가 아닌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격한 경험이 있습니까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함께 나눠보세요.

   2.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차이점을 통하여 발견하는 좋은 리더십과 나쁜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나는 어떤 리더십을 소유하고 있습니까좋은 리더십을 갖도록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하나님 앞에 교만함으로 회개하지 않고 후회만 하다가 다시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기쁨을 누리며 다시 일어서도록 힘과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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