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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간을 축복하라 – 축복하는 삶 2 –

신명기 33: 13 ~ 17

김지철 목사

2014.07.06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스(Midas), 혹은 마이다스라는 왕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os)에게 자신이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전부 금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그것을 허락합니다.
미다스가 가구를 만지자 가구가 금이 됩니다. 정원수를 만지고, 조각을 만지자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매우 신났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기 위해서 음식을 만지니 음식이 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기겁할 일은, 아버지를 보고 달려오는 딸을 안았더니 딸이 금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미다스 왕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게 됩니다.
지금도 돈 잘 버는 사람, 투자를 잘 하는 사람의 손을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마이다스의 손을 통해 말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지와 탐욕이 커질수록 걷잡을 수 없는 위기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만지는 것이 다 금덩어리로 바꿔줬으면…’ 하지만 그것은 물건일 때만 그럴 듯해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만지는 것이 인격체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화와 저주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밟는 땅을 복 받게 하고, 우리가 만지는 것을 축복한다는 것이, 혹 마이다스의 손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결코 그래서는 안 되고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이다스의 손에는 자기 탐욕을 위한 축복이 그 핵심입니다. 또 신앙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그 자체가 꼭 나쁜 것일까요?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밟는 땅과 만지는 것에 복을 주고 것과 마이다스가 비는 복, 혹은 기복주의적 신앙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내가 받을 복 가운데 가둬 두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한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내게 복이 없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가치를 잃습니다. 즉 보는 것, 만지는 것 속에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물질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물질화(物質化)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복주의의 잘못된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복을 비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자연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 세상을 아름답게 풍요롭게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비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보이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를 원하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내 삶의 자리에 요청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복을 비는 모습입니다.

창조의 모든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범신론은 모든 삶의 자리에 신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여깁니다. 그러나 범신론은, 그 물질이 곧 하나님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와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모든 신성 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공간을 축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 공간, 내가 밟고 있는 이 땅, 내가 만지는 이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보기에 좋구나!”하신 곳이라는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함께 계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하나님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보면서 고백했습니다. 창조의 곳곳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찬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편 104편, 8편, 19편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에는, 창조의 영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편 104편 10절 이하의 말씀 몇 구절만 나눠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편 104:10∼12)

하나님께서 산을 만드시고 물줄기를 내시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게 하시고, 거기에 공중의 새들도 깃들이며 지저귀고 있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시편 104:19∼20)

해는 뜨고 지는 때를 알고, 어둠이 다가오면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와서 또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만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시인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편 104:24)

시인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30절에는 이 가운데 주님의 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30)

하나님의 영이 이 땅에 임하시면서 봄이 되면 봄의 세계를, 여름이 되면 여름의 세계를, 가을이 되면 가을의 세계를, 겨울이 되면 겨울의 세계를 지면에 새롭게 만드신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피조된 세계 속에 동행하심으로 이 세계를 다스리고 이끌고 계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곧 영성입니다.

성령에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창조의 영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의 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공간을 축복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 영이 창조의 영이며 지금도 이 땅에 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신앙의 선배들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창조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 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인간의 영광 중에 솔로몬의 영광처럼 큰 영광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러나 이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운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크다.”
그리고 이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저 공중에 나는 새보다 낫지 않느냐? 저 들에 핀 백합화보다 더 고귀한 존재가 아니냐? 그런데 저들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의 삶을 사는데 어떻게 인간인 너희들은 믿음이 없어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면서 살고 있느냐?”
마태복음 6장에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삶의 축복들을 그대로 믿고 누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30)

“공중에 나는 새도 입히고 먹이고, 또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고 먹이는 나를 생각하며 근심하지 말고 이 모든 만물을 누리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이 창조의 자리에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삶을 신비한 세계 속에서만 찾지 말고, 우리가 밟고 있는 그 땅 위에서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신비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멈춰서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성은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체계도 아니며, 영성은 적성이나 기질과도 무관하다. 영성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며 살면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경탄과 동시에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이 공간을 축복하는 삶일까요? 첫 번째, 경탄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들을 축복하며 찬양할 때, 그것이 축복의 삶입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서있는 삶의 공간과 시간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심을 깨닫게 되면, 살아있는 시간이 됩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그냥 멈춰선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는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경탄합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내 삶과 내 삶의 공간을 경탄하지 않으며 살게 되면 우리는 결코 공간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시인들은 자기의 삶을 보면서 경탄했습니다. 대표적인 경탄시를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8:1)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으면서 찬탄하는 것입니다.
경탄함과 동시에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픔과 슬픔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세계가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세상이 생태학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아파하고 통탄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 인간의 죄악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들끼리 갈등하고 서로를 향해 분노함으로 자연만물이 함께 아파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테러와 전쟁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삶의 공간이 황폐해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 아픔과 슬픔이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축복하는 길입니다.
축복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빛의 역사가 다시 비추고,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다 하셨던 풍요의 역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자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무질서와 카오스 속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로 아름답게 빛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축복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축복, 특히 요셉지파를 향한 축복 속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모든 피조물들이 적재적소에 놓여야 합니다. 태양은 태양대로 달은 달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비는 비대로 그리고 강물과 땅의 지하수들은 그 모습대로 있어야 이 땅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신명기 33:13∼14)

태양과 달은 하늘에서 떠서 빛을 비추고, 구름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땅은 강과 바다 그리고 지하수를 통해 물기를 보태면 땅의 식물들이 열매를 맺고 동물들이 주어진 삶을 축복 속에서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과 식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공간을 축복하려면, 내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아버지입니까? 아버지 역할을 잘 감당해야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어머니입니까? 어머니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해야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내가 자녀입니까? 자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주어진 자리와 위치를 잘 감당해야 축복 받은 직장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역할을, 교회 직임자는 직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교회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왜 사회가 흔들립니까? 왜 교회가 흔들립니까? 왜 가정이 흔들립니까?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내 역할을 잘 감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직임을 포기하려 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 곤궁함이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피조물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때, 이 땅에 축복의 역사가 생깁니다. 결국 우리가 공간을 축복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내게 맡겨진 것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16절에서 모세는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입니까? 모세를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불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이십니다. “네가 내 마음을 아느냐?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었는데 너도 듣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너도 저 고통소리를 듣고 있느냐? 내가 이 백성을 사랑하는데, 이들이 온전하게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을 보는 내 마음을 아느냐?”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래 어떤 백성이었습니까? 종 되었던 백성, 자기 권리가 없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지도자를 세우시고 사회적 어려움을 이겨나가게 하셨습니다. 자유와 해방이 있는 곳,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가나안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옛 기억을 되살림으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이 땅을 축복하고 이 백성을 축복하는 비결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비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는 창조의 목표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목표는 구원입니다.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되고, 억압된 것에서 해방되고, 고통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가난의 문제, 사회적 차별의 문제,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빌어야 됩니다. 어떤 복입니까? 자유하게 하는 복,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복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복을 선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복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밟는 땅이 거룩한 자리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밟으면 그 땅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자유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밟는 땅이 자유의 자리가 되고, 용서의 자리가 되고, 생명의 자리가 되고, 빛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썩었다고 하고, 기독교가 있던 자리에 썩은 냄새가 났다고 하면, 복음이 썩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복음의 역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슬픔을 물리칩니다. 생명의 자유와 하나님이 주신 인권의 자유가 있는 곳, 공의와 정의가 일어나는 그 자리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선포해야 할 복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우리를 당신의 창조 파트너로, 구원의 파트너로 부르십니다. 다시 빛을 만들고, 질서를 만들고, 조화를 만들고, 자유와 해방을 만들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삶이 괴롭고 힘듭니까? 엉클어져 있습니까? 뒤죽박죽입니까? 주위에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이웃이 있습니까?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 함께하면서 기도로 우리의 손을 뻗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공간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첫 창조 때 수면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과 동행하셨던 바로 그 영이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받았던 그 성령이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늘도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생명의 영, 빛의 영, 자유의 영, 해방의 영,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영은 우리를 세상을 향해 파송시키십니다. “이제는 네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니 네가 밟는 땅을 거룩하게 하라. 네가 만지는 것을 거룩하게 하라. 네가 만나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라.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의 주인 되심을 알게 하고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리면서 살게 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이 위대한 역사 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내 시간을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공간을 축복하십시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세상에 선포하며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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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3: 13 ~ 17

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스(Midas), 혹은 마이다스라는 왕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os)에게 자신이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전부 금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그것을 허락합니다.
미다스가 가구를 만지자 가구가 금이 됩니다. 정원수를 만지고, 조각을 만지자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매우 신났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기 위해서 음식을 만지니 음식이 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기겁할 일은, 아버지를 보고 달려오는 딸을 안았더니 딸이 금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미다스 왕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게 됩니다.
지금도 돈 잘 버는 사람, 투자를 잘 하는 사람의 손을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마이다스의 손을 통해 말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지와 탐욕이 커질수록 걷잡을 수 없는 위기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만지는 것이 다 금덩어리로 바꿔줬으면…’ 하지만 그것은 물건일 때만 그럴 듯해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만지는 것이 인격체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화와 저주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밟는 땅을 복 받게 하고, 우리가 만지는 것을 축복한다는 것이, 혹 마이다스의 손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결코 그래서는 안 되고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이다스의 손에는 자기 탐욕을 위한 축복이 그 핵심입니다. 또 신앙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그 자체가 꼭 나쁜 것일까요?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밟는 땅과 만지는 것에 복을 주고 것과 마이다스가 비는 복, 혹은 기복주의적 신앙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내가 받을 복 가운데 가둬 두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한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내게 복이 없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가치를 잃습니다. 즉 보는 것, 만지는 것 속에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물질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물질화(物質化)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복주의의 잘못된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복을 비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자연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 세상을 아름답게 풍요롭게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비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보이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를 원하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내 삶의 자리에 요청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복을 비는 모습입니다.

창조의 모든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범신론은 모든 삶의 자리에 신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여깁니다. 그러나 범신론은, 그 물질이 곧 하나님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와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모든 신성 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공간을 축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 공간, 내가 밟고 있는 이 땅, 내가 만지는 이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보기에 좋구나!”하신 곳이라는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함께 계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하나님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보면서 고백했습니다. 창조의 곳곳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찬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편 104편, 8편, 19편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에는, 창조의 영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편 104편 10절 이하의 말씀 몇 구절만 나눠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편 104:10∼12)

하나님께서 산을 만드시고 물줄기를 내시고 그것을 들짐승이 먹게 하시고, 거기에 공중의 새들도 깃들이며 지저귀고 있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시편 104:19∼20)

해는 뜨고 지는 때를 알고, 어둠이 다가오면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와서 또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만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시인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편 104:24)

시인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30절에는 이 가운데 주님의 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30)

하나님의 영이 이 땅에 임하시면서 봄이 되면 봄의 세계를, 여름이 되면 여름의 세계를, 가을이 되면 가을의 세계를, 겨울이 되면 겨울의 세계를 지면에 새롭게 만드신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피조된 세계 속에 동행하심으로 이 세계를 다스리고 이끌고 계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곧 영성입니다.

성령에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창조의 영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의 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공간을 축복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 영이 창조의 영이며 지금도 이 땅에 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신앙의 선배들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창조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 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인간의 영광 중에 솔로몬의 영광처럼 큰 영광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러나 이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운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크다.”
그리고 이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저 공중에 나는 새보다 낫지 않느냐? 저 들에 핀 백합화보다 더 고귀한 존재가 아니냐? 그런데 저들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의 삶을 사는데 어떻게 인간인 너희들은 믿음이 없어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면서 살고 있느냐?”
마태복음 6장에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삶의 축복들을 그대로 믿고 누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30)

“공중에 나는 새도 입히고 먹이고, 또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고 먹이는 나를 생각하며 근심하지 말고 이 모든 만물을 누리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이 창조의 자리에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삶을 신비한 세계 속에서만 찾지 말고, 우리가 밟고 있는 그 땅 위에서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신비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멈춰서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성은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체계도 아니며, 영성은 적성이나 기질과도 무관하다. 영성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며 살면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경탄과 동시에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이 공간을 축복하는 삶일까요? 첫 번째, 경탄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들을 축복하며 찬양할 때, 그것이 축복의 삶입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서있는 삶의 공간과 시간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심을 깨닫게 되면, 살아있는 시간이 됩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그냥 멈춰선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는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경탄합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내 삶과 내 삶의 공간을 경탄하지 않으며 살게 되면 우리는 결코 공간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시인들은 자기의 삶을 보면서 경탄했습니다. 대표적인 경탄시를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8:1)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으면서 찬탄하는 것입니다.
경탄함과 동시에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픔과 슬픔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세계가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세상이 생태학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아파하고 통탄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 인간의 죄악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들끼리 갈등하고 서로를 향해 분노함으로 자연만물이 함께 아파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테러와 전쟁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삶의 공간이 황폐해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 아픔과 슬픔이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축복하는 길입니다.
축복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빛의 역사가 다시 비추고,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다 하셨던 풍요의 역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자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무질서와 카오스 속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로 아름답게 빛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축복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축복, 특히 요셉지파를 향한 축복 속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모든 피조물들이 적재적소에 놓여야 합니다. 태양은 태양대로 달은 달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비는 비대로 그리고 강물과 땅의 지하수들은 그 모습대로 있어야 이 땅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신명기 33:13∼14)

태양과 달은 하늘에서 떠서 빛을 비추고, 구름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땅은 강과 바다 그리고 지하수를 통해 물기를 보태면 땅의 식물들이 열매를 맺고 동물들이 주어진 삶을 축복 속에서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과 식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공간을 축복하려면, 내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아버지입니까? 아버지 역할을 잘 감당해야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어머니입니까? 어머니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해야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내가 자녀입니까? 자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주어진 자리와 위치를 잘 감당해야 축복 받은 직장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역할을, 교회 직임자는 직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교회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왜 사회가 흔들립니까? 왜 교회가 흔들립니까? 왜 가정이 흔들립니까?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내 역할을 잘 감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직임을 포기하려 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 곤궁함이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피조물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때, 이 땅에 축복의 역사가 생깁니다. 결국 우리가 공간을 축복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내게 맡겨진 것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16절에서 모세는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입니까? 모세를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불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이십니다. “네가 내 마음을 아느냐?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었는데 너도 듣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너도 저 고통소리를 듣고 있느냐? 내가 이 백성을 사랑하는데, 이들이 온전하게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을 보는 내 마음을 아느냐?”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래 어떤 백성이었습니까? 종 되었던 백성, 자기 권리가 없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지도자를 세우시고 사회적 어려움을 이겨나가게 하셨습니다. 자유와 해방이 있는 곳,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가나안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옛 기억을 되살림으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이 땅을 축복하고 이 백성을 축복하는 비결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비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는 창조의 목표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목표는 구원입니다.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되고, 억압된 것에서 해방되고, 고통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가난의 문제, 사회적 차별의 문제,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빌어야 됩니다. 어떤 복입니까? 자유하게 하는 복,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복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복을 선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복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밟는 땅이 거룩한 자리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밟으면 그 땅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자유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밟는 땅이 자유의 자리가 되고, 용서의 자리가 되고, 생명의 자리가 되고, 빛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썩었다고 하고, 기독교가 있던 자리에 썩은 냄새가 났다고 하면, 복음이 썩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복음의 역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슬픔을 물리칩니다. 생명의 자유와 하나님이 주신 인권의 자유가 있는 곳, 공의와 정의가 일어나는 그 자리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선포해야 할 복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우리를 당신의 창조 파트너로, 구원의 파트너로 부르십니다. 다시 빛을 만들고, 질서를 만들고, 조화를 만들고, 자유와 해방을 만들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삶이 괴롭고 힘듭니까? 엉클어져 있습니까? 뒤죽박죽입니까? 주위에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이웃이 있습니까?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 함께하면서 기도로 우리의 손을 뻗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공간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첫 창조 때 수면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과 동행하셨던 바로 그 영이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받았던 그 성령이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늘도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생명의 영, 빛의 영, 자유의 영, 해방의 영,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영은 우리를 세상을 향해 파송시키십니다. “이제는 네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니 네가 밟는 땅을 거룩하게 하라. 네가 만지는 것을 거룩하게 하라. 네가 만나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라.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의 주인 되심을 알게 하고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리면서 살게 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이 위대한 역사 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내 시간을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공간을 축복하십시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세상에 선포하며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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