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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고린도전서 15: 3 ~ 11

김지철 목사

2014.04.27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일어난 지 12일째로 접어들었습니다. 국민 모두가 함께 애통해하고 슬퍼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부모의 저 비통함을 누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의 애처로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사라지면 마음이 얼마나 허해집니까? 재충전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죽음에는 되돌이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에는 ‘리셋불가’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안타까웠던 것은 희생자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포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이 남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함께 절감한 것입니다. 멀쩡히 걸어가다가도 교통사고를 당하면 삶이 끝나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담했던 사건들을 기억합니다. 성수대교 붕괴, 지하철 화재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등 우리는 그 아픈 경험을 함께 목도했습니다. 결코 희생당한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탐욕,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비겁함, 우리의 올바로 서지 못함에 대한 결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죽음은 우리 곁에 알게 모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보면 사람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죽음의 현상을 뼈아프게 통감하곤 합니다.

죽음은 살아감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도 이 죽음 앞에서 비통하게 우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생애 세 번의 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거꾸로 추적해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라는 뜻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로 멸망하고 있는 이 평화 없는 도시와 그곳의 백성들을 보시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소리치시면서 슬피 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마다 지나치셨던 마을 베다니의 어느 집에서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대화하시기를 좋아하셨던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라는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시기도 전에 죽어버린 오빠 때문에 슬피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며 예수님은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3∼35)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더 슬프고 화나게 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아, 네가 어찌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느냐”하고 외치셨습니다. 사람에게 눈물을 쏟게 하는 죽음, 생명을 거역하는 죽음을 향해서 화를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래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얼마나 끔찍한 도둑입니까? 생명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며 상처받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지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삶의 온전한 기쁨을 모독합니다. 짓밟아 버립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죽음을 통절하게 느꼈던 것은 저를 사랑하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그때, ‘도대체 죽음이란 뭘까? 산다는 것이 뭘까?’ 하는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 두 살 되던 해에 6.25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는 아버지가 없을까. 다른 사람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왜 내게는 없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무덤을 주먹으로 치며 울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삶을 빨리 마치셨나요. 당신은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당신은 왜 이렇게 죽어야 했나요.”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를 키우고 손자 손녀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 두 살이 되면 ‘아빠’, ‘엄마’ 소리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내 아버지를 보며 아빠아빠하고 불렀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아버지도 나를 가슴에 안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나를 얼렀겠구나 하는 것들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을 일찍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상과부라는 말이 바로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을 일찍 여읜 탓에 남편의 사랑도 못 받고, 그냥 아들 하나 키우느라고 애쓴 인생 아닙니까.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는 네 누이동생도 있었단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죽고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울다가 경기가 들려서 네 동생을 낳았단다. 꼭 3일 살다가 죽었단다.”
전쟁 중에 사흘 살다가 죽은 동생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저는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누구 잘못 때문일까. 죽음이란 도대체 무얼까. 전쟁이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내 인생에 상처를 주는 이 죽음은 내 인생의 적대자가 아닌가.’ 우리 인생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죽음에 대한 질문을 오랫동안 했던 적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승리를 선언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아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더 통탄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며 증인 목록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백 명의 형제들, 특히 이들 중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까지 살아있는 자도 있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에게도 나타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바울은 이것이 은혜라고,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베푸신 은혜라고 증언합니다. 도대체 바울이 무엇을 봤기에 이것을 ‘선물’이라고 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고 ‘은혜’라고 했을까요?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동시에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반복합니다. 세상에 자기 교주의 죽음을 이렇게 널리 알리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깨달은 은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닥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죽음을 저항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음이란 회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빼앗는 못된 강도와도 같기 때문에 죽음을 향해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치 악한 사람에게 하듯 죽음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고린도전서15:55)

“네가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에게 승리한다고 생각하느냐? 이제 네 승리는 끝났다!”고 바울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15:55)

“네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느냐? 사람을 아프게 하고 쓰리게 하고 절망케 했느냐? 네 모든 것이 이제는 끝났다!”고 사도 바울이 죽음을 향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예수님이 저항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죽음을 이기셨다는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과 맞닥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죽음을 맞닥뜨리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겁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장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 죽음은 달려옵니다. 그때 죽음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과 맞닥뜨려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붙들고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벌벌 떨며 도망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죽음 속에 들어가시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역사를, 새 생명의 역사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바울에게 은혜였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두 번째 은혜는 지도자 중에 지도자, 왕 중에 왕이신 예수님이 먼저 고난의 길에 들어서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도자의 보신주의가 공동체를 망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고난이 공동체를 살린다는 신비한 하나님의 역설을 그는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픔이 새 생명의 자리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고난 받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모든 아픔과 죄악을 대신 지시는 그 자리에, 생명의 역사,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보신주의가 얼마나 비판받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왕 중에 왕입니다. 지도자 중에 지도자이십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방식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원하신 이 고난의 길에는 하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생명의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냥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 가장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정의 아픔과 슬픔, 가정의 문제로 신음하는 사람이 가장입니다. 회사의 대표는 누구일까요? 회사의 문제를 가장 깊이 알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나갈지 고민하는 사람이 회사의 대표입니다. 국가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백성의 슬픔과 아픔을 등에 지고 애통해 하는 자가 국가 지도자입니다.
교회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모범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도자 중에 지도자로 먼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고난 받으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거짓 교주들, 거짓 지도자들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혼자 살기 위해 공동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혼자 배 부르려고 공동체를 강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백히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죽어도 교회는 살아 있어야 그것이 참되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회사 대표는 죽어도 회사는 살아 움직여야 그 회사가 멋진 회사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죽어도 국가는 살아나야 하는 것이 그 국가의 건강성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온 인류에 새로운 희망의 빛, 생명의 빛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의 문제는 이것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먼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120세를 사는 것이 복 받은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청년들과 젊은이들의 가슴에 생명이 불타야 그 나라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고통당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억압받는 사회는 망하는 사회입니다. 망하는 집단이고 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은혜란, 소명이고 사명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뒤집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로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감당해야 될까요? 먼저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 하나님이 주신 역사에 동참하는 우리가 이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일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여기며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은혜란,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과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자신이 수고하고, 땀 흘리고, 고난 받고, 때로는 구렁텅이에 빠지면서도 충성한 것은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축복, 하나님을 사랑하는 축복. 우리에게 주신 삶의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이 백성과 이 공동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바울은 한때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 지도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직분을 받고 뽐내며 살면 그것이 자랑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바울이 갖고 있었던 헛된 자랑, 헛된 지도자의 모습을 모두 부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들, 사회를 썩어가게 하는 것들에 대해 거절하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 맘모니즘, 물신숭배를 깨뜨려야 합니다. 한탕주의, 쾌락주의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기적인 탐욕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보신주의를 벗어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우리를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 삶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시 붙잡는 것입니다.
내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가, 내가 말씀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내가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인생을 준비하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먼저 깨달은 우리가, 먼저 확인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축복받은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또다시 암울한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은혜의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의 뜻에 순종하며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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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 3 ~ 11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일어난 지 12일째로 접어들었습니다. 국민 모두가 함께 애통해하고 슬퍼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부모의 저 비통함을 누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의 애처로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사라지면 마음이 얼마나 허해집니까? 재충전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죽음에는 되돌이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에는 ‘리셋불가’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안타까웠던 것은 희생자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포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이 남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함께 절감한 것입니다. 멀쩡히 걸어가다가도 교통사고를 당하면 삶이 끝나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담했던 사건들을 기억합니다. 성수대교 붕괴, 지하철 화재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등 우리는 그 아픈 경험을 함께 목도했습니다. 결코 희생당한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탐욕,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비겁함, 우리의 올바로 서지 못함에 대한 결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죽음은 우리 곁에 알게 모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보면 사람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죽음의 현상을 뼈아프게 통감하곤 합니다.

죽음은 살아감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도 이 죽음 앞에서 비통하게 우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생애 세 번의 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거꾸로 추적해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라는 뜻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로 멸망하고 있는 이 평화 없는 도시와 그곳의 백성들을 보시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소리치시면서 슬피 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마다 지나치셨던 마을 베다니의 어느 집에서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대화하시기를 좋아하셨던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라는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시기도 전에 죽어버린 오빠 때문에 슬피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며 예수님은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3∼35)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더 슬프고 화나게 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아, 네가 어찌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느냐”하고 외치셨습니다. 사람에게 눈물을 쏟게 하는 죽음, 생명을 거역하는 죽음을 향해서 화를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래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얼마나 끔찍한 도둑입니까? 생명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며 상처받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지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삶의 온전한 기쁨을 모독합니다. 짓밟아 버립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죽음을 통절하게 느꼈던 것은 저를 사랑하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그때, ‘도대체 죽음이란 뭘까? 산다는 것이 뭘까?’ 하는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 두 살 되던 해에 6.25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는 아버지가 없을까. 다른 사람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왜 내게는 없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무덤을 주먹으로 치며 울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삶을 빨리 마치셨나요. 당신은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당신은 왜 이렇게 죽어야 했나요.”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를 키우고 손자 손녀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 두 살이 되면 ‘아빠’, ‘엄마’ 소리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내 아버지를 보며 아빠아빠하고 불렀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아버지도 나를 가슴에 안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나를 얼렀겠구나 하는 것들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을 일찍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상과부라는 말이 바로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을 일찍 여읜 탓에 남편의 사랑도 못 받고, 그냥 아들 하나 키우느라고 애쓴 인생 아닙니까.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는 네 누이동생도 있었단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죽고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울다가 경기가 들려서 네 동생을 낳았단다. 꼭 3일 살다가 죽었단다.”
전쟁 중에 사흘 살다가 죽은 동생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저는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누구 잘못 때문일까. 죽음이란 도대체 무얼까. 전쟁이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내 인생에 상처를 주는 이 죽음은 내 인생의 적대자가 아닌가.’ 우리 인생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죽음에 대한 질문을 오랫동안 했던 적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승리를 선언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아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더 통탄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며 증인 목록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백 명의 형제들, 특히 이들 중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까지 살아있는 자도 있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에게도 나타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바울은 이것이 은혜라고,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베푸신 은혜라고 증언합니다. 도대체 바울이 무엇을 봤기에 이것을 ‘선물’이라고 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고 ‘은혜’라고 했을까요?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동시에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반복합니다. 세상에 자기 교주의 죽음을 이렇게 널리 알리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깨달은 은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닥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죽음을 저항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음이란 회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빼앗는 못된 강도와도 같기 때문에 죽음을 향해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치 악한 사람에게 하듯 죽음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고린도전서15:55)

“네가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에게 승리한다고 생각하느냐? 이제 네 승리는 끝났다!”고 바울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15:55)

“네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느냐? 사람을 아프게 하고 쓰리게 하고 절망케 했느냐? 네 모든 것이 이제는 끝났다!”고 사도 바울이 죽음을 향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예수님이 저항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죽음을 이기셨다는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과 맞닥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죽음을 맞닥뜨리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겁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장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 죽음은 달려옵니다. 그때 죽음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과 맞닥뜨려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붙들고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벌벌 떨며 도망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죽음 속에 들어가시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역사를, 새 생명의 역사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바울에게 은혜였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두 번째 은혜는 지도자 중에 지도자, 왕 중에 왕이신 예수님이 먼저 고난의 길에 들어서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도자의 보신주의가 공동체를 망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고난이 공동체를 살린다는 신비한 하나님의 역설을 그는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픔이 새 생명의 자리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고난 받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모든 아픔과 죄악을 대신 지시는 그 자리에, 생명의 역사,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보신주의가 얼마나 비판받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왕 중에 왕입니다. 지도자 중에 지도자이십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방식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원하신 이 고난의 길에는 하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생명의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냥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 가장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정의 아픔과 슬픔, 가정의 문제로 신음하는 사람이 가장입니다. 회사의 대표는 누구일까요? 회사의 문제를 가장 깊이 알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나갈지 고민하는 사람이 회사의 대표입니다. 국가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백성의 슬픔과 아픔을 등에 지고 애통해 하는 자가 국가 지도자입니다.
교회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모범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도자 중에 지도자로 먼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고난 받으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거짓 교주들, 거짓 지도자들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혼자 살기 위해 공동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혼자 배 부르려고 공동체를 강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백히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죽어도 교회는 살아 있어야 그것이 참되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회사 대표는 죽어도 회사는 살아 움직여야 그 회사가 멋진 회사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죽어도 국가는 살아나야 하는 것이 그 국가의 건강성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온 인류에 새로운 희망의 빛, 생명의 빛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의 문제는 이것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먼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120세를 사는 것이 복 받은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청년들과 젊은이들의 가슴에 생명이 불타야 그 나라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고통당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억압받는 사회는 망하는 사회입니다. 망하는 집단이고 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은혜란, 소명이고 사명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뒤집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로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감당해야 될까요? 먼저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 하나님이 주신 역사에 동참하는 우리가 이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일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여기며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은혜란,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과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자신이 수고하고, 땀 흘리고, 고난 받고, 때로는 구렁텅이에 빠지면서도 충성한 것은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축복, 하나님을 사랑하는 축복. 우리에게 주신 삶의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이 백성과 이 공동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바울은 한때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 지도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직분을 받고 뽐내며 살면 그것이 자랑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바울이 갖고 있었던 헛된 자랑, 헛된 지도자의 모습을 모두 부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들, 사회를 썩어가게 하는 것들에 대해 거절하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 맘모니즘, 물신숭배를 깨뜨려야 합니다. 한탕주의, 쾌락주의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기적인 탐욕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보신주의를 벗어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우리를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 삶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시 붙잡는 것입니다.
내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가, 내가 말씀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내가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인생을 준비하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먼저 깨달은 우리가, 먼저 확인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축복받은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또다시 암울한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은혜의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의 뜻에 순종하며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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