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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이야기 만들기

시편 23: 1 ~ 6

김지철 목사

2016.01.03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물어보면, 시편 23편이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시편 23편은 그냥 읽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해지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둔 순간에 읽어도 마음속에 감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기쁜 잔치자리에서도 이 말씀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영적인 만족감과 행복, 감사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노래한 시인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다윗의 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사울 왕 다음의 이스라엘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일곱 형들은 집에 있었고, 막내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목자의 일이란 때로는 평지에서, 때로는 깊은 계곡을 지나 산지에 올라가서 양 무리를 먹이는 일입니다. 그는 사나운 자연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언제라도 맹수가 덮쳐올 수 있기에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양들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막대기를 들고 맹수와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아마 맹수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물맷돌을 돌리면서 짐승들을 쫓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거인 골리앗을 만났을 때 그가 사용했던 무기가 바로 이 물맷돌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목자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양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며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처럼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동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였고 자신은 양이었다고 고백하며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자신의 신앙이야기가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타인의 신앙에 숨어 있으면 신앙의 역동성은 사라집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등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아주 든든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목자와 양은 서로를 알고 있습니다. 대화하고 사랑하며 함께 가는 관계입니다. 상대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목자 없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참혹한 자리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짐승들 중에 가장 약하고 느리고 무능한 존재가 양이 아닐까 싶습니다. 광야에 홀로 내버려 두면, 굶주림에 죽어버립니다. 사나운 맹수의 공격과 도적들의 약탈의 현장에서 먹잇감에 불과한 존재가 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가 부패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목자 없는 양’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반대로 양 없는 목자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병사 없는 지휘관이고, 학생 없는 스승이며, 교인 없는 교역자입니다. 양 없는 목자는 더 이상 목자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했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내 신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남의 신앙에 편승해서 살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신앙, 아버지의 신앙,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신앙 속에 숨어 살아갑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초등학생 때, 중·고등학생 때도 교회를 빠진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는 영혼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어야 될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의 신앙이지 내 신앙은 아니라는 자책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역동성이 사라졌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을 믿긴 하는데 영혼에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혹시 내가 타인의 신앙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이야기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의 신앙에 묻혀서 삽니다. 교회의 구역 신앙에 묻혀 살아갑니다. 교회라는 거대한 공동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기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함께 찬송도 부릅니다. 함께 성경도 읽고 예배도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의 신앙에만 머물러 있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 신앙으로는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부모님이 계실 때는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떠나가시면 자신의 신앙도 거기서 멈춥니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다가 친구가 떠나게 되면 더 이상 교회 가기가 싫어집니다. 혼자 있을 때면 마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가진 신앙이 진짜 신앙이었을까’ 하고 화들짝 놀라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남의 신앙에 얹혀서 만족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신앙에, 때로는 배우자의 신앙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신앙의 씨름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나의 신앙으로 체득하지 않은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2∼3대에 걸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유산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사실 견고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습관성의 믿음으로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튼튼한 믿음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없는 믿음에 멈춰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감동을 받지 못하니까 남에게도 “예수 믿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이야기로 젖어든 신앙을 경험하지 못하고 3인칭의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인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편은 그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의 고백이 담긴 시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엄청난 친밀성을 과시하는 시입니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단순한 기대나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찬 선언입니다. 자신이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는 모두 현재형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23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입니다. 즉 체험적 확신에 찬 시인의 노래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나의 목자다’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칭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일 처음에는 3인칭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입니다. 2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2)

영어 성경으로 보면 ‘he’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절까지 하나님의 3인칭 표현은 계속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4절부터 하나님의 인칭이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뀝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 변화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2인칭 표현인 ‘당신’이라고 부르면 어른들은 화를 냅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보통 하대어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 ‘당신’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니 번역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최근 주기도문 번역에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본래 영어성경을 보면 2인칭 소유격 ‘Your’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이 되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없기에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4절에 나타난 ‘주께서’, ‘주의’란 표현이 바로 2인칭 ‘당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본뜻을 살리자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나이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내가 방황할 때에 당신의 지팡이가 내게 길을 알려주고 나를 인도하였습니다. 내가 두려워 떨 때에 당신의 막대기가 나를 지켜 주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2인칭의 하나님을 경험할 때, 온전한 나의 신앙이 됩니다.

‘나와 당신’이라는 말 속에서 사랑의 인격을 경험한 다윗의 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내 영혼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졌을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을 때도, 원수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핍박했을 때도 내 영혼이 일시적으로는 낙담한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결국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나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2인칭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2인칭으로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백한 후에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 이전에도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3인칭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의 신앙으로, 내 삶에 젖어든 신앙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3인칭의 믿음에서 2인칭의 믿음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3인칭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의 역동성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이야기로 젖어든 신앙이 될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벅찬 은혜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의 이름 뒤에 숨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의 품속에 숨거나 뒤에 멈춰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나 남편의 이름 뒤에 숨어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직접 서야 그 사랑의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에 간섭하셨습니다. 참여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행동이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하나님입니다. 명사로 표현된 하나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라는 존재에 대한 표현 하나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행동에 대한 표현입니다. 2절에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4절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신다’, 5절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다’까지 다윗은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하나님, 제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 겁니까? 하나님, 이런 때 제가 어떻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어떤 자세로 그 사람을 만나야 되겠습니까? 깊은 골짜기에 빠졌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신앙의 선배들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제게도 찾아오셔서 제 삶에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경험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 입으로 ‘여호와는 나의 선한 목자이십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행동하셨을 때 다윗은 반응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는 마치 선언처럼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5절에서는 ‘내 잔이 넘치고 있다’고 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드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결심한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을 추스르겠다. 내게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하면서 기뻐하면서 살겠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제 것입니다! 다 취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저를 맡기면 저를 광야로 몰아가실 것 아니에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비밀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1)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선한 목자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들, 즉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고 목숨을 바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 선한 목자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겁니다. “너도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내가 너를 신뢰한다. 그러니 너도 나를 믿고 너와 나의 사랑과 신앙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자”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나만의 신앙이야기를 만드는 한 해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습니다. 남의 신앙 뒤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떨쳐 버리십시오. 이제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신앙이 아니라, 아내나 남편의 신앙이 아니라 내 신앙을 갖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이제는 내가 직접 기도하고 직접 말씀을 읽고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과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하는 2016년도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새벽 기도에 여러분을 초청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직접 씨름해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펴서 읽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직접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의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영혼에 기쁨과 감격이 없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 신앙은 없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있다면 다 떨쳐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제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이제는 기도합니다. 이제는 말씀을 펴서 읽습니다. 제 속에 사랑의 이야기, 신앙의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시편 23편처럼 고백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선언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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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 1 ~ 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물어보면, 시편 23편이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시편 23편은 그냥 읽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해지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둔 순간에 읽어도 마음속에 감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기쁜 잔치자리에서도 이 말씀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영적인 만족감과 행복, 감사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노래한 시인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다윗의 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사울 왕 다음의 이스라엘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일곱 형들은 집에 있었고, 막내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목자의 일이란 때로는 평지에서, 때로는 깊은 계곡을 지나 산지에 올라가서 양 무리를 먹이는 일입니다. 그는 사나운 자연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언제라도 맹수가 덮쳐올 수 있기에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양들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막대기를 들고 맹수와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아마 맹수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물맷돌을 돌리면서 짐승들을 쫓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거인 골리앗을 만났을 때 그가 사용했던 무기가 바로 이 물맷돌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목자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양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며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처럼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동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였고 자신은 양이었다고 고백하며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자신의 신앙이야기가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타인의 신앙에 숨어 있으면 신앙의 역동성은 사라집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등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아주 든든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목자와 양은 서로를 알고 있습니다. 대화하고 사랑하며 함께 가는 관계입니다. 상대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목자 없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참혹한 자리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짐승들 중에 가장 약하고 느리고 무능한 존재가 양이 아닐까 싶습니다. 광야에 홀로 내버려 두면, 굶주림에 죽어버립니다. 사나운 맹수의 공격과 도적들의 약탈의 현장에서 먹잇감에 불과한 존재가 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가 부패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목자 없는 양’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반대로 양 없는 목자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병사 없는 지휘관이고, 학생 없는 스승이며, 교인 없는 교역자입니다. 양 없는 목자는 더 이상 목자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했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내 신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남의 신앙에 편승해서 살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신앙, 아버지의 신앙,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신앙 속에 숨어 살아갑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초등학생 때, 중·고등학생 때도 교회를 빠진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는 영혼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어야 될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의 신앙이지 내 신앙은 아니라는 자책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역동성이 사라졌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을 믿긴 하는데 영혼에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혹시 내가 타인의 신앙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이야기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의 신앙에 묻혀서 삽니다. 교회의 구역 신앙에 묻혀 살아갑니다. 교회라는 거대한 공동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기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함께 찬송도 부릅니다. 함께 성경도 읽고 예배도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의 신앙에만 머물러 있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 신앙으로는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부모님이 계실 때는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떠나가시면 자신의 신앙도 거기서 멈춥니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다가 친구가 떠나게 되면 더 이상 교회 가기가 싫어집니다. 혼자 있을 때면 마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가진 신앙이 진짜 신앙이었을까’ 하고 화들짝 놀라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남의 신앙에 얹혀서 만족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신앙에, 때로는 배우자의 신앙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신앙의 씨름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나의 신앙으로 체득하지 않은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2∼3대에 걸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유산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사실 견고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습관성의 믿음으로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튼튼한 믿음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없는 믿음에 멈춰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감동을 받지 못하니까 남에게도 “예수 믿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이야기로 젖어든 신앙을 경험하지 못하고 3인칭의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인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편은 그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의 고백이 담긴 시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엄청난 친밀성을 과시하는 시입니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단순한 기대나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찬 선언입니다. 자신이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는 모두 현재형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23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입니다. 즉 체험적 확신에 찬 시인의 노래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나의 목자다’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칭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일 처음에는 3인칭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입니다. 2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2)

영어 성경으로 보면 ‘he’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절까지 하나님의 3인칭 표현은 계속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4절부터 하나님의 인칭이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뀝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 변화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2인칭 표현인 ‘당신’이라고 부르면 어른들은 화를 냅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보통 하대어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 ‘당신’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니 번역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최근 주기도문 번역에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본래 영어성경을 보면 2인칭 소유격 ‘Your’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이 되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없기에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4절에 나타난 ‘주께서’, ‘주의’란 표현이 바로 2인칭 ‘당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본뜻을 살리자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나이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내가 방황할 때에 당신의 지팡이가 내게 길을 알려주고 나를 인도하였습니다. 내가 두려워 떨 때에 당신의 막대기가 나를 지켜 주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2인칭의 하나님을 경험할 때, 온전한 나의 신앙이 됩니다.

‘나와 당신’이라는 말 속에서 사랑의 인격을 경험한 다윗의 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내 영혼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졌을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을 때도, 원수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핍박했을 때도 내 영혼이 일시적으로는 낙담한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결국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나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2인칭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2인칭으로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백한 후에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 이전에도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3인칭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의 신앙으로, 내 삶에 젖어든 신앙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3인칭의 믿음에서 2인칭의 믿음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3인칭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의 역동성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이야기로 젖어든 신앙이 될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벅찬 은혜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의 이름 뒤에 숨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의 품속에 숨거나 뒤에 멈춰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나 남편의 이름 뒤에 숨어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직접 서야 그 사랑의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에 간섭하셨습니다. 참여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행동이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하나님입니다. 명사로 표현된 하나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라는 존재에 대한 표현 하나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행동에 대한 표현입니다. 2절에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4절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신다’, 5절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다’까지 다윗은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하나님, 제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 겁니까? 하나님, 이런 때 제가 어떻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어떤 자세로 그 사람을 만나야 되겠습니까? 깊은 골짜기에 빠졌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신앙의 선배들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제게도 찾아오셔서 제 삶에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경험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 입으로 ‘여호와는 나의 선한 목자이십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행동하셨을 때 다윗은 반응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는 마치 선언처럼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5절에서는 ‘내 잔이 넘치고 있다’고 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드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결심한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을 추스르겠다. 내게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하면서 기뻐하면서 살겠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제 것입니다! 다 취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저를 맡기면 저를 광야로 몰아가실 것 아니에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비밀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1)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선한 목자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들, 즉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고 목숨을 바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 선한 목자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겁니다. “너도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내가 너를 신뢰한다. 그러니 너도 나를 믿고 너와 나의 사랑과 신앙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자”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나만의 신앙이야기를 만드는 한 해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습니다. 남의 신앙 뒤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떨쳐 버리십시오. 이제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신앙이 아니라, 아내나 남편의 신앙이 아니라 내 신앙을 갖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이제는 내가 직접 기도하고 직접 말씀을 읽고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과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하는 2016년도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새벽 기도에 여러분을 초청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직접 씨름해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펴서 읽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직접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의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영혼에 기쁨과 감격이 없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 신앙은 없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있다면 다 떨쳐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제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이제는 기도합니다. 이제는 말씀을 펴서 읽습니다. 제 속에 사랑의 이야기, 신앙의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시편 23편처럼 고백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선언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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