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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웃을 축복하라! – 축복하는 삶 4 –

레위기 19: 1 ~ 37

김지철 목사

2014.07.20

인간의 본성은 축복에 인색합니다.

‘나의 이웃을 축복하라’는 말씀을 준비하다가 옛날 독일 유학시절이 생각났습니다. 10여년 된 중고 자동차를 한 대 사서는 몰고 다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차가 앞으로 끼어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훨씬 좋은 차가 끼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인 제 입에서 쌍욕이 나왔습니다. ‘내 입에서 이런 욕설이 나오다니…!’ 저 자신도 놀랐지만, 정작 더 놀란 것은 옆에 앉아있었던 아내였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욕설을 할 수 있나 하는 눈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결코 작지 않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나 중심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자동차를 몰 때도 얼마나 나 중심적으로 몰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진심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차에 놀라고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해서 아마 그런 욕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다음부터 저는 이렇게 생각하며 축복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바쁘면 저렇게 끼어들까?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앞에 가는 차, 뒤에서 따라오는 차, 옆에 가는 차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축복하는 게 아니라 운전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그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부터 마음에 평안과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눈에 거슬리는 것 때문에 불쾌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내 기분이 상한다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욕을 퍼붓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속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축복하고, 이웃을 배려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내 가치관과 부합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명제가 있습니다. ‘나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사랑한다.’ 이 명제가 우리의 마음을 늘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욕하고 비난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로이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 자질에 상당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본능을 만족시키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존재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그는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남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옛날부터 사용해온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이 가족과 같다는 뜻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다정다감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요사이 우리는 가까운 이웃이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원수로 돌변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최근에 이웃 간의 갈등문제가 언론에 자주 보도됩니다. 층간 소음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서로 큰소리를 내고, 때로는 고발이나 칼부림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암울하고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누구에게라도 큰소리를 치고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으면 내 존재 이유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회입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경계대상 1호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만날 때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잘될 때는 내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생색을 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무언가 틀어지고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남을 탓하고 다른 것에 핑계를 댑니다.
남을 탓하는 것, 이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온 인간의 본성입니다. 첫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고 왜 그랬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하와 탓을 합니다. 아주 교묘하게 핑계를 댑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나온 아담의 대답을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기본적으로 자기반성이 없습니다. 자기 책임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마음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아내에게 자기의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이 첫 인간 아담의 모습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하와는 뱀 탓을 했습니다. 결국 그토록 아름답게 지어진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들 자신을 일그러뜨립니다. 두려움에 가득 차게 됩니다.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용서받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어땠을까요?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형으로서의 자존심을 동생 아벨이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왜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성찰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저 모든 책임을 동생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남의 탓을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은 모든 책임이 미 제국주의 자들과 남조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다른 곳을 향해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남을 탓하는 것, 특별히 부모님을 탓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내가 지금 이 모양인 것은 다 아버지 탓이고 어머니 탓이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로젠블라트(Rosenblatt)가 쓴 작은 지혜책자가 있습니다.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58가지’라는 이 책의 7번째 명제는 “30이 넘었으면 자기 인생을 부모 탓으로 돌리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이 나이를 25으로 낮추라.’고 쓰여 있습니다. 저는 이 명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나이를 20살까지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미성년 때는 “아버지, 엄마! 나를 왜 이렇게 키웠어!”하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계속 부모님을 탓한다면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겠습니까?

끼리끼리 어울리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을 탓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남을 축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텃세 때문입니다. 지연의 텃세, 학연의 텃세 등 우리에게는 끼리끼리 모여 집단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갖는 텃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배타적인 입장을 갖습니다. “내 영역 안에는 허락 없이 누구도 못 들어와!” 큰소리치며 방어벽을 쌓습니다.
이러한 텃세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내 것을 누군가 빼앗아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기득권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타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 형태입니다. 텃세를 가지고서는 남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아무나 내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그러려는 사람을 축출하고 넘어뜨립니다.
텃세가 왜 남을 축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될까요? 축복한다는 것은 나를 개방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안에 들어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더불어 한 공동체에 속하겠다는 마음이 이웃을 축복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 안에서조차 텃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병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곪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성도님들은 ‘여기는 내 자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찍 오면 앞에 앉고, 가운데 자리에 앉는 것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삶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꺼이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바라십니다.
텃세를 강조하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텃세를 깨뜨리려는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보수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좋은 것을 보수한다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가겠다는 진보만큼 좋은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보수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가 되면 양상이 달라집니다. 보수주의자들의 특징은 개방성이 결여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기득권에 안주하여 끊임없이 방어막을 칩니다.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책임성이 결여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남의 문제점만 보며 비난하고,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보수적이면서 개방성을 지닌 인물이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런 사람은 보수적이면서 남을 축복할 줄 압니다. 진보적이면서 자기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인물이라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 사람은 이웃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보수와 진보는 서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에는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

사랑하는 이들끼리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을 배타하고 텃세를 부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아니 동물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본질을 꽉 붙잡고 계신 분이 또 있을까요?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당신 자신을 온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분이 또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매력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 삶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신 이유가 아닙니까?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배려가 곧 ‘거룩’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간다는 것은, 이웃을 배려하고 축복하고 공평하게 대하며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 2절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37절까지의 많은 구절들의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귀히 여겨라. 거짓말로 사기 치지 말라. 나그네들에게도 배려할 줄 알라’입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18)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34)

‘거룩’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삶의 방식이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도피하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승처럼 삶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거룩을 향하는 길이 아닙니다. 가족관계를 포기해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정에서부터, 가까운 이웃과의 사이에서부터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대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삶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먼저는 거리상으로 가까운 이들입니다. 가정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이고, 내 부모와 자녀입니다. 내 형제와 자매 그리고 이웃집들입니다.
구약에서의 이웃은 첫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주위 백성들로 개념이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당시에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더욱 보편성과 우주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혐오스러운 백성으로 간주되었던 사마리아 사람들, 개나 돼지처럼 여겼던 그들을 예수님은 친구처럼 만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보이듯이 당대의 영적지도자와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레위인보다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실천했다고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즉 예수님에게 이웃이란 거리상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됨이란 그런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돕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자도 있을 수 있고, 부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색의 차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에도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궁핍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늘 우선이었습니다.
나는 베푸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받으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주위에 나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나에게 베푸는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베푸는 사람만 주위에 많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거지근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베풀었으니 너도 네 이웃에게 베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라는 껍질이 너무 단단하고, 나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깨트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형태를 깨트리기 위한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시간을 축복하고 공간을 축복하고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고 내가 축복받은 존재로서 내 이웃을 축복할 줄 알아야 ‘나’라는 딱딱한 껍질을 깨버릴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인간의 값어치를 높여 주십니다. 내 자존감을 높여 주십니다. 내게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십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비밀의 세계,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본래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I am a nothing and a nobody.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I am a somebody in Christ.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너는 somebody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야. 내가 너를 축복한다. 너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 복을 받은 자로서 세상을 향해 복 주기를 원한다.”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을 축복하기 어렵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세요.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축복하세요. 부모는 자녀를 축복하고 자녀는 부모를 축복하세요. 형제들을 축복하세요. 마음으로부터 축복하세요. 그리고 축복의 범위를 넓혀가세요.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복을 받아야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본래 종이었다. 너희가 본래 나그네였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붙들어서 너희를 이끌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남을 축복해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받은 복을 확인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 내 안에 진리가 있고 예수의 생명이 있다는 이 사실을 확인해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복, 용서의 복, 은혜의 복, 진리의 복, 평안의 복, 기쁨의 복을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빌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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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9: 1 ~ 37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5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7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인간의 본성은 축복에 인색합니다.

‘나의 이웃을 축복하라’는 말씀을 준비하다가 옛날 독일 유학시절이 생각났습니다. 10여년 된 중고 자동차를 한 대 사서는 몰고 다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차가 앞으로 끼어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훨씬 좋은 차가 끼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인 제 입에서 쌍욕이 나왔습니다. ‘내 입에서 이런 욕설이 나오다니…!’ 저 자신도 놀랐지만, 정작 더 놀란 것은 옆에 앉아있었던 아내였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욕설을 할 수 있나 하는 눈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결코 작지 않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나 중심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자동차를 몰 때도 얼마나 나 중심적으로 몰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진심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차에 놀라고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해서 아마 그런 욕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다음부터 저는 이렇게 생각하며 축복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바쁘면 저렇게 끼어들까?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앞에 가는 차, 뒤에서 따라오는 차, 옆에 가는 차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축복하는 게 아니라 운전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그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부터 마음에 평안과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눈에 거슬리는 것 때문에 불쾌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내 기분이 상한다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욕을 퍼붓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속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축복하고, 이웃을 배려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내 가치관과 부합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명제가 있습니다. ‘나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사랑한다.’ 이 명제가 우리의 마음을 늘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욕하고 비난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로이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 자질에 상당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본능을 만족시키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존재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그는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남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옛날부터 사용해온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이 가족과 같다는 뜻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다정다감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요사이 우리는 가까운 이웃이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원수로 돌변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최근에 이웃 간의 갈등문제가 언론에 자주 보도됩니다. 층간 소음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서로 큰소리를 내고, 때로는 고발이나 칼부림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암울하고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누구에게라도 큰소리를 치고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으면 내 존재 이유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회입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경계대상 1호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만날 때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잘될 때는 내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생색을 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무언가 틀어지고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남을 탓하고 다른 것에 핑계를 댑니다.
남을 탓하는 것, 이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온 인간의 본성입니다. 첫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고 왜 그랬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하와 탓을 합니다. 아주 교묘하게 핑계를 댑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나온 아담의 대답을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기본적으로 자기반성이 없습니다. 자기 책임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마음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아내에게 자기의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이 첫 인간 아담의 모습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하와는 뱀 탓을 했습니다. 결국 그토록 아름답게 지어진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들 자신을 일그러뜨립니다. 두려움에 가득 차게 됩니다.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용서받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어땠을까요?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형으로서의 자존심을 동생 아벨이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왜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성찰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저 모든 책임을 동생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남의 탓을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은 모든 책임이 미 제국주의 자들과 남조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다른 곳을 향해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남을 탓하는 것, 특별히 부모님을 탓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내가 지금 이 모양인 것은 다 아버지 탓이고 어머니 탓이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로젠블라트(Rosenblatt)가 쓴 작은 지혜책자가 있습니다.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58가지’라는 이 책의 7번째 명제는 “30이 넘었으면 자기 인생을 부모 탓으로 돌리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이 나이를 25으로 낮추라.’고 쓰여 있습니다. 저는 이 명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나이를 20살까지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미성년 때는 “아버지, 엄마! 나를 왜 이렇게 키웠어!”하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계속 부모님을 탓한다면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겠습니까?

끼리끼리 어울리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을 탓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남을 축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텃세 때문입니다. 지연의 텃세, 학연의 텃세 등 우리에게는 끼리끼리 모여 집단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갖는 텃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배타적인 입장을 갖습니다. “내 영역 안에는 허락 없이 누구도 못 들어와!” 큰소리치며 방어벽을 쌓습니다.
이러한 텃세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내 것을 누군가 빼앗아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기득권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타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 형태입니다. 텃세를 가지고서는 남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아무나 내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그러려는 사람을 축출하고 넘어뜨립니다.
텃세가 왜 남을 축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될까요? 축복한다는 것은 나를 개방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안에 들어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더불어 한 공동체에 속하겠다는 마음이 이웃을 축복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 안에서조차 텃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병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곪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성도님들은 ‘여기는 내 자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찍 오면 앞에 앉고, 가운데 자리에 앉는 것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삶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꺼이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바라십니다.
텃세를 강조하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텃세를 깨뜨리려는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보수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좋은 것을 보수한다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가겠다는 진보만큼 좋은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보수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가 되면 양상이 달라집니다. 보수주의자들의 특징은 개방성이 결여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기득권에 안주하여 끊임없이 방어막을 칩니다.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책임성이 결여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남의 문제점만 보며 비난하고,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보수적이면서 개방성을 지닌 인물이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런 사람은 보수적이면서 남을 축복할 줄 압니다. 진보적이면서 자기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인물이라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 사람은 이웃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보수와 진보는 서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에는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

사랑하는 이들끼리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을 배타하고 텃세를 부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아니 동물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본질을 꽉 붙잡고 계신 분이 또 있을까요?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당신 자신을 온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분이 또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매력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 삶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신 이유가 아닙니까?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배려가 곧 ‘거룩’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간다는 것은, 이웃을 배려하고 축복하고 공평하게 대하며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 2절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37절까지의 많은 구절들의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귀히 여겨라. 거짓말로 사기 치지 말라. 나그네들에게도 배려할 줄 알라’입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18)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34)

‘거룩’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삶의 방식이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도피하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승처럼 삶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거룩을 향하는 길이 아닙니다. 가족관계를 포기해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정에서부터, 가까운 이웃과의 사이에서부터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대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삶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먼저는 거리상으로 가까운 이들입니다. 가정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이고, 내 부모와 자녀입니다. 내 형제와 자매 그리고 이웃집들입니다.
구약에서의 이웃은 첫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주위 백성들로 개념이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당시에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더욱 보편성과 우주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혐오스러운 백성으로 간주되었던 사마리아 사람들, 개나 돼지처럼 여겼던 그들을 예수님은 친구처럼 만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보이듯이 당대의 영적지도자와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레위인보다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실천했다고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즉 예수님에게 이웃이란 거리상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됨이란 그런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돕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자도 있을 수 있고, 부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색의 차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에도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궁핍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늘 우선이었습니다.
나는 베푸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받으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주위에 나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나에게 베푸는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베푸는 사람만 주위에 많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거지근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베풀었으니 너도 네 이웃에게 베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라는 껍질이 너무 단단하고, 나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깨트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형태를 깨트리기 위한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시간을 축복하고 공간을 축복하고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고 내가 축복받은 존재로서 내 이웃을 축복할 줄 알아야 ‘나’라는 딱딱한 껍질을 깨버릴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인간의 값어치를 높여 주십니다. 내 자존감을 높여 주십니다. 내게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십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비밀의 세계,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본래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I am a nothing and a nobody.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I am a somebody in Christ.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너는 somebody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야. 내가 너를 축복한다. 너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 복을 받은 자로서 세상을 향해 복 주기를 원한다.”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을 축복하기 어렵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세요.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축복하세요. 부모는 자녀를 축복하고 자녀는 부모를 축복하세요. 형제들을 축복하세요. 마음으로부터 축복하세요. 그리고 축복의 범위를 넓혀가세요.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복을 받아야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본래 종이었다. 너희가 본래 나그네였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붙들어서 너희를 이끌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남을 축복해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받은 복을 확인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 내 안에 진리가 있고 예수의 생명이 있다는 이 사실을 확인해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복, 용서의 복, 은혜의 복, 진리의 복, 평안의 복, 기쁨의 복을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빌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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