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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와 근면의 경계선에서 – 7대 죄악 4 ‘나태’ –

마태복음 25: 24 ~ 30

김지철 목사

2014.03.16

우리는 자주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한 포탈회사가 최근 대학생 366명을 대상으로 시간 관리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시간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시간을 잘 관리하는가?’ 하는 물음에는 5명 중 2명만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 관리의 비결에 대해서는 52.3%가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비결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간을 허비하거나 낭비해 본 적이 있다는 대답은 94%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물어보니, 첫째, 귀찮고 게을러서(24.4%), 둘째, 습관적으로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을 보느라(21.2%), 셋째,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시작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17.7%) 라는 대답들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좀 다른가요? 아마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른들도 부지런해야 하는 것과 게을러지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다시 대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느리더라도 여유롭게 살아가는 삶이 좋은가 아니면 바쁘게 살아가며 일을 성취하는 삶이 더 좋은가?’ 대답은, 느리더라도 여유로운 삶이 55%, 일을 성취하고 이뤄내는 삶이 44%로 오히려 여유있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했습니다.
도대체 부지런한 것은 무엇이고, 게으른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부지런하면 여유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게으르면 바쁜 것을 피하며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50대 중반쯤 되는 두 여인이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시집간 딸은 잘 살아요?”, “그럼, 우리 딸은 정말 시집을 잘 갔어요. 걘 일을 안 해요. 한낮까지 늦잠을 잔답니다. 가정부가 청소며 부엌일을 다 하니까 쇼핑이나 슬슬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아요. 팔자가 좋은 거죠.” 그랬더니 상대가 이번에는 아들에 대해 묻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지내요?”, “아들 생각하면 화가 나서 죽겠어요. 아내 복이 없는가 봐요. 남자에게 빌붙어서 사는 여잘 만났어요. 며느린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해요. 가정부가 집안일 다 하고, 며느리는 늦잠이나 자지요. 부엌에는 얼씬도 안 해요. 내 아들이 번 돈으로 쇼핑이나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니까요. 그것도 비싼 물건만 좋아해요. 아주 속상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딸은 팔자가 좋고, 아들 녀석은 팔자 좋은 누군가의 딸 때문에 혼자 뼈 빠지게 일하며 고생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더 좋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은 칭찬을 받고, 한 사람은 꾸중을 받습니다.

요즘 7대 죄악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나태와 근면,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경계선에서’라는 제목으로 어떤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모습인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외국으로 나가는 집 주인이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능력에 따라 돈을 맡겼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라는 엄청난 재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인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마태복음 25:19)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가 무슨 뜻입니까? 맡긴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했는가 주인이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상업적으로 보자면, input과 output을 점검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갖고 와서는, 이만큼 더 남겼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칭찬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복음 25:21)

한 달란트는, 당시 20년 동안의 봉급에 해당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봉급 20년 치를 한 번에 맡긴다면 굉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섯 달란트라니, 백 년 치 봉급을 맡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말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남기고, 주인에게 동일한 칭찬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이 벌고 적게 버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초점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주인이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란, 우리의 시간, 재물, 환경, 가족,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은사들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하나의 인물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 엄정한 꾸중을 듣게 됩니다. “악한 종아, 게으른 종아!” 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장벽을 쌓게 되면 삶을 비관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폐쇄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의 족쇄를 찬 것입니다. “나는 못 해 먹겠다. 못 살겠어!”
하지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세상을 향해 열었습니다. 어떻게 열었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태복음 25:16)

여기 보면 ‘갔다, 장사했다, 남겼다.’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게다가 ‘바로’라는 부사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그는 달란트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삶을 적극적으로 대하고 도전했습니다. 창의적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 돈과 재물이 어떻게 쓰여져야 할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의 용도를 바르게 알아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태복음 25:18)

여기에도 동사 세 개가 나옵니다. 그것은 ‘갔다, (땅을) 팠다, 감추었다’입니다. 만약 씨앗을 받았다면, 땅을 파서 심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준 것은 달란트, 곧 재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땅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두겠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인생이 폐쇄적이 되었을까요? 왜 자기가 가진 것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게 주신 돈 버는 재주, 내게 주신 손재주, 내게 주신 목을 쓰는 재주, 내게 주신 인간관계, 내게 주신 환경, 이 모든 것들을 땅 속에 그냥 집어넣은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왜 내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을까? 저 사람은 두 달란트,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인데…’ 여러분은 이러한 시기심 때문에 인생의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낭비해 본 적 없습니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돈이 많지요? 저 사람은 왜 아버지를 잘 만났지요? 저 사람은 왜 환경이 좋지요? 도대체 내 꼬라지는 이게 뭡니까!’ 자기 연민과 자기 탄식 속에서 내게 있는 소중한 것들은 들여다보지 않고, 남과 비교하며 인생을 낭비해버린 삶의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는 아마 주인에게 속으로 이렇게 항의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하대하십니까?’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은 것을 그저 땅에 파묻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멈추겠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떨쳐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자기를 폐쇄하는 것, 장벽을 쌓는 것입니다. 만남에도 장벽을 쌓고, 대화에도 장벽을 쌓아 그저 그 속에서 움츠려드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관주의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삭바삭 소리라도 나면 누군가 나를 침범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거리에서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비관적인 인생이 되었을까요?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태복음 25:25)

두려운 마음에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고 본전치기나 했으면 좋겠다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고 스스로 가두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인간을 만드신 후 좋구나 하시며 “내가 일한 것처럼 너도 일해라. 내가 아름답게 만든 것처럼 너도 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라.”고 하신 그 뜻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심술궂은 장난꾼이 아닌가. 나를 조롱하는 악한 존재가 아닌가. 내 삶을 괴롭히고 내 것을 빼앗아가는 그런 분이 아닌가. 나는 살기 싫다. 이것이 당신 것이면 당신이 도로 가지고 가라!’하며 자신과 하나님을 분리시켜 버렸습니다. “이건 당신 것이요!”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젊음을 주시고, 가족, 직장 등 삶의 모든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의 것이다. 네가 네 시간을 관리해라. 네가 가진 재물을 관리하고, 네 가족을 네가 책임져라. 너의 삶의 터전을 내 마음을 품고 네가 다스려봐라. 이끌어봐라.”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마태복음 25:24∼25)

왜 두려워했습니까? 주인을, 아니 하나님을 완고하고 거친 분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전노 같은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인을 그런 악한 인격자로 몰아간 것입니다.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는 사람, 타작도 하지 않고 알곡을 거두려는 인색한 주인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노동력과 재산을 착취하는 파렴치한 인격으로 매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불성실을 변명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남기면 주인이 다 뺏어갈 것이고, 모자라면 나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배상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 하면 겁이 나고, 그렇다고 잠자리에서 빙글빙글 빈둥빈둥 놀기만 하면 또 후회가 되고. 우리는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이렇게 내려놓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에는 결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그막에 가서야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구나. 내가 정말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구나. 그런데 인생이 다 가버렸구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은사들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귀해지고 커집니다. 건강, 지혜, 물질, 재능 등의 은사들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방향이 명백해야 합니다. 방향이 없으면 아무리 바쁘게 뛰어다녀도 그것은 진정한 부지런함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학교에 가는지 모르고, 왜 직장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고,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지 이유를 모르면, 열심도 있고 헌신도 있지만 그저 바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일중독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가장 먼저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가족과 가정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공동체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의 방향과 목표가 있어야 내가 하는 일이 기쁘고 내가 하는 일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셔야 됩니다. 내게 주신 공간, 내게 주신 시간, 내게 주신 이웃, 이것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알게 될 때에 게으름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어라. (Save apart time to read)’ 배움으로 성숙해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읽어야 할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읽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지혜의 샘이기 때문이다. (It`s the spring of wisdom)’ 지혜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어라. (Save apart time to laugh)’ 기쁘게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찡그리고 불평하면서 살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It`s the music of your soul)’ 우리 영혼의 음악이, 우리의 노래가 얼굴에 웃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어라. (Save apart time to love)’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for your life is too short)’ 인생은 일장춘몽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불평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시간들을 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알아야 우리의 인생이 풍요로움 속에 넘치게 됩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인생을 살다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경탄할 때도 있고 탄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인정하며 내게 주신 삶을 감사함으로 누려야 합니다.
게으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사랑함’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쉬어야 될 때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쉬시기 바랍니다. 일을 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속에 뛰어들어 보십시오. 삶에는 쉴 때도 있고 일할 때도 있고, 일어설 때도 있고 누워서 잘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이 내 삶에 복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시간을 주시고, 공간도 주시고, 달란트도 주시고, 이웃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이러한 것들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내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입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게 가정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내게 직장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에 살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소중한 것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잘 하였도다. 착하구나.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자리에 기쁨으로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일들은 다 잊어버리시고, 오늘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말씀으로, 사랑으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축복들을 함께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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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 24 ~ 30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우리는 자주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한 포탈회사가 최근 대학생 366명을 대상으로 시간 관리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시간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시간을 잘 관리하는가?’ 하는 물음에는 5명 중 2명만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 관리의 비결에 대해서는 52.3%가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비결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간을 허비하거나 낭비해 본 적이 있다는 대답은 94%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물어보니, 첫째, 귀찮고 게을러서(24.4%), 둘째, 습관적으로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을 보느라(21.2%), 셋째,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시작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17.7%) 라는 대답들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좀 다른가요? 아마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른들도 부지런해야 하는 것과 게을러지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다시 대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느리더라도 여유롭게 살아가는 삶이 좋은가 아니면 바쁘게 살아가며 일을 성취하는 삶이 더 좋은가?’ 대답은, 느리더라도 여유로운 삶이 55%, 일을 성취하고 이뤄내는 삶이 44%로 오히려 여유있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했습니다.
도대체 부지런한 것은 무엇이고, 게으른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부지런하면 여유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게으르면 바쁜 것을 피하며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50대 중반쯤 되는 두 여인이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시집간 딸은 잘 살아요?”, “그럼, 우리 딸은 정말 시집을 잘 갔어요. 걘 일을 안 해요. 한낮까지 늦잠을 잔답니다. 가정부가 청소며 부엌일을 다 하니까 쇼핑이나 슬슬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아요. 팔자가 좋은 거죠.” 그랬더니 상대가 이번에는 아들에 대해 묻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지내요?”, “아들 생각하면 화가 나서 죽겠어요. 아내 복이 없는가 봐요. 남자에게 빌붙어서 사는 여잘 만났어요. 며느린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해요. 가정부가 집안일 다 하고, 며느리는 늦잠이나 자지요. 부엌에는 얼씬도 안 해요. 내 아들이 번 돈으로 쇼핑이나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니까요. 그것도 비싼 물건만 좋아해요. 아주 속상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딸은 팔자가 좋고, 아들 녀석은 팔자 좋은 누군가의 딸 때문에 혼자 뼈 빠지게 일하며 고생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더 좋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은 칭찬을 받고, 한 사람은 꾸중을 받습니다.

요즘 7대 죄악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나태와 근면,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경계선에서’라는 제목으로 어떤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모습인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외국으로 나가는 집 주인이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능력에 따라 돈을 맡겼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라는 엄청난 재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인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마태복음 25:19)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가 무슨 뜻입니까? 맡긴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했는가 주인이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상업적으로 보자면, input과 output을 점검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갖고 와서는, 이만큼 더 남겼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칭찬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복음 25:21)

한 달란트는, 당시 20년 동안의 봉급에 해당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봉급 20년 치를 한 번에 맡긴다면 굉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섯 달란트라니, 백 년 치 봉급을 맡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말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남기고, 주인에게 동일한 칭찬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이 벌고 적게 버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초점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주인이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란, 우리의 시간, 재물, 환경, 가족,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은사들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하나의 인물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 엄정한 꾸중을 듣게 됩니다. “악한 종아, 게으른 종아!” 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장벽을 쌓게 되면 삶을 비관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폐쇄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의 족쇄를 찬 것입니다. “나는 못 해 먹겠다. 못 살겠어!”
하지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세상을 향해 열었습니다. 어떻게 열었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태복음 25:16)

여기 보면 ‘갔다, 장사했다, 남겼다.’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게다가 ‘바로’라는 부사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그는 달란트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삶을 적극적으로 대하고 도전했습니다. 창의적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 돈과 재물이 어떻게 쓰여져야 할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의 용도를 바르게 알아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태복음 25:18)

여기에도 동사 세 개가 나옵니다. 그것은 ‘갔다, (땅을) 팠다, 감추었다’입니다. 만약 씨앗을 받았다면, 땅을 파서 심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준 것은 달란트, 곧 재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땅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두겠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인생이 폐쇄적이 되었을까요? 왜 자기가 가진 것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게 주신 돈 버는 재주, 내게 주신 손재주, 내게 주신 목을 쓰는 재주, 내게 주신 인간관계, 내게 주신 환경, 이 모든 것들을 땅 속에 그냥 집어넣은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왜 내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을까? 저 사람은 두 달란트,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인데…’ 여러분은 이러한 시기심 때문에 인생의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낭비해 본 적 없습니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돈이 많지요? 저 사람은 왜 아버지를 잘 만났지요? 저 사람은 왜 환경이 좋지요? 도대체 내 꼬라지는 이게 뭡니까!’ 자기 연민과 자기 탄식 속에서 내게 있는 소중한 것들은 들여다보지 않고, 남과 비교하며 인생을 낭비해버린 삶의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는 아마 주인에게 속으로 이렇게 항의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하대하십니까?’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은 것을 그저 땅에 파묻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멈추겠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떨쳐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자기를 폐쇄하는 것, 장벽을 쌓는 것입니다. 만남에도 장벽을 쌓고, 대화에도 장벽을 쌓아 그저 그 속에서 움츠려드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관주의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삭바삭 소리라도 나면 누군가 나를 침범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거리에서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비관적인 인생이 되었을까요?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태복음 25:25)

두려운 마음에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고 본전치기나 했으면 좋겠다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고 스스로 가두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인간을 만드신 후 좋구나 하시며 “내가 일한 것처럼 너도 일해라. 내가 아름답게 만든 것처럼 너도 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라.”고 하신 그 뜻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심술궂은 장난꾼이 아닌가. 나를 조롱하는 악한 존재가 아닌가. 내 삶을 괴롭히고 내 것을 빼앗아가는 그런 분이 아닌가. 나는 살기 싫다. 이것이 당신 것이면 당신이 도로 가지고 가라!’하며 자신과 하나님을 분리시켜 버렸습니다. “이건 당신 것이요!”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젊음을 주시고, 가족, 직장 등 삶의 모든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의 것이다. 네가 네 시간을 관리해라. 네가 가진 재물을 관리하고, 네 가족을 네가 책임져라. 너의 삶의 터전을 내 마음을 품고 네가 다스려봐라. 이끌어봐라.”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마태복음 25:24∼25)

왜 두려워했습니까? 주인을, 아니 하나님을 완고하고 거친 분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전노 같은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인을 그런 악한 인격자로 몰아간 것입니다.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는 사람, 타작도 하지 않고 알곡을 거두려는 인색한 주인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노동력과 재산을 착취하는 파렴치한 인격으로 매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불성실을 변명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남기면 주인이 다 뺏어갈 것이고, 모자라면 나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배상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 하면 겁이 나고, 그렇다고 잠자리에서 빙글빙글 빈둥빈둥 놀기만 하면 또 후회가 되고. 우리는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이렇게 내려놓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에는 결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그막에 가서야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구나. 내가 정말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구나. 그런데 인생이 다 가버렸구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은사들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귀해지고 커집니다. 건강, 지혜, 물질, 재능 등의 은사들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방향이 명백해야 합니다. 방향이 없으면 아무리 바쁘게 뛰어다녀도 그것은 진정한 부지런함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학교에 가는지 모르고, 왜 직장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고,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지 이유를 모르면, 열심도 있고 헌신도 있지만 그저 바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일중독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가장 먼저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가족과 가정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공동체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의 방향과 목표가 있어야 내가 하는 일이 기쁘고 내가 하는 일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셔야 됩니다. 내게 주신 공간, 내게 주신 시간, 내게 주신 이웃, 이것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알게 될 때에 게으름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어라. (Save apart time to read)’ 배움으로 성숙해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읽어야 할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읽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지혜의 샘이기 때문이다. (It`s the spring of wisdom)’ 지혜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어라. (Save apart time to laugh)’ 기쁘게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찡그리고 불평하면서 살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It`s the music of your soul)’ 우리 영혼의 음악이, 우리의 노래가 얼굴에 웃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어라. (Save apart time to love)’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for your life is too short)’ 인생은 일장춘몽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불평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시간들을 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알아야 우리의 인생이 풍요로움 속에 넘치게 됩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인생을 살다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경탄할 때도 있고 탄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인정하며 내게 주신 삶을 감사함으로 누려야 합니다.
게으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사랑함’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쉬어야 될 때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쉬시기 바랍니다. 일을 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속에 뛰어들어 보십시오. 삶에는 쉴 때도 있고 일할 때도 있고, 일어설 때도 있고 누워서 잘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이 내 삶에 복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시간을 주시고, 공간도 주시고, 달란트도 주시고, 이웃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이러한 것들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내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입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게 가정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내게 직장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에 살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소중한 것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잘 하였도다. 착하구나.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자리에 기쁨으로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일들은 다 잊어버리시고, 오늘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말씀으로, 사랑으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축복들을 함께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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