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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서를 읽어 보면, 요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예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요나는 자신 때문에 위기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큰 폭풍이 일어난 것은 “나 때문이다”라고 선언합니다.
…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 1:12)
‘나 때문’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뜻 보면 회개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을 무마하려고 하는 도덕적 편의주의로 사용될 위험이 있습니다. 진실이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모든 것을 침묵시키는 위험이 이 말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조금 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는 회개하는 통절한 마음으로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잘 읽어 보면,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명령 자체가 싫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니느웨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적국의 백성은 멸망해야 마땅한데,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가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이 요나를 추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흔드셨습니다. “요나야, 어디에 있니? 왜 그렇게 꼭꼭 숨었니? 내 앞에 나와 봐라. 나와 이야기를 하자.”
요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요나 때문에 요나와 한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이 죽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요나와 배에 탄 사람들 중 누가 신앙적입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요나에게는 신앙이 없고, 오히려 배에 탄 이방인들에게 더 큰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요나는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일부러 외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뱃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물어봅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요나 1:11)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요나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마치 무능력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요나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자신 때문에 폭풍을 만난 것이니 스스로 몸을 바다에 던지거나 둘째, 다시스로 도망가려는 것이 잘못이니 다시 육지로 가서 니느웨로 갈 것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 (요나 1:12)
요나는 스스로 바다에 빠지지 않고 남에게 자신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문제 해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괘씸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에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기 싫어한 요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것이다. 폭풍을 멈춰 주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여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바다가 스스로 잔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이 일의 주체이신 것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 안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어디 한번 나 죽여 보세요. 나는 당신 뜻에 순종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마음대로 해 보세요. 내가 그것을 마지막까지 볼 거예요.” 요나의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목이 곧아졌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요나와 한 배를 탄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을 듣고도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이 더 크게 화를 내실까봐 주저주저합니다. 배를 살리되 하나님의 화는 피하고 싶었던 그들은 결국 다시 육지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요나가 말한 것과는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요나 1:13)
요나는 뱃사람들의 이런 노력조차 무시하고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손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앙금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 모습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성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교회도 빠지지 않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헌금도 잘 바쳤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왜 이렇습니까? 내 자녀들을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사업은 왜 어렵게 하셨습니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마음이 늘 억눌려 있습니다. 내 뜻대로 행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은 사람들 중 얼굴이 어두운 사람들에게서 이런 마음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셨어요. 내가 이 길로 가자고 하는데도 하나님은 다른 길로 이끄셨어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어려움을 주셨지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겠어요. 나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있어요.”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의 영혼의 기쁨이 사라진 곳에는 요나에게 있던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계속 부딪히고 있습니다.
요나는 위기 앞에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위기 속에서 기도한 사람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기도는 아주 귀중한 기도였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 1:14)
참으로 깊이 있는 신앙의 기도가 아닙니까?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요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cried out’이라고 표현됩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믿던 신에게 기도하기로 이야기했던 사람들입니다. “너는 너의 신앙을 가지고 너의 신에게 기도하라.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각자 신에게 기도하라.” 그러나 이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가 여기까지 요나를 추적하여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놀랍지 않습니까?
예부터 ‘전쟁터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기도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는 위기 속에서도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뱃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지 않는 요나에게 경고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요나야, 너는 이 순간에도 기도하지 않느냐? 도대체 무슨 배짱이냐? 너는 도대체 왜 내게 네 모습을 그대로 말하지 않느냐?”
또 뱃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는 기도였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십시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왜 저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까지 멸망당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간구를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기도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속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는 요나의 말대로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 1:15)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 1:16)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은 읽지만,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두고 이 뱃사람들처럼 기도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제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토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나와 함께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10년, 20년, 30년 교회생활을 해도 실존을 건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은 그저 먼 곳에 계시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에 멈추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기쁨과 감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인생의 한계와 마지막을 아는 사람들이 감사할 줄 압니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아무것도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감사할 줄 압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생명조차도 결코 내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에게서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올리면서, 더욱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겠다고 서원합니다. 물론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인간은 왜 바닥까지 내려가야 돌아설까요? 그 전에는 정녕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인간은 망가지고 나서야 예수님을 바라볼까요? 인생의 바닥을 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인생의 폭풍을 만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전에 돌아오는 사람이 지혜자이고, 하나님이 초청하신 자리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는 입술로는 회개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고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일수록, 때로는 직분자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하나님께 예배드릴 줄도 알고 헌금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후회는 하지만, 정작 회개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0:13)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축복인 줄 잘 모릅니다. 후회와 회개는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릅니다. 후회는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며 스스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회는 과거 지향적이고, 과거에 집착하지만, 회개는 미래 지향적이며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새 세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회하는 사람의 마음은 우울하고 어둡지만,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온 용서로 기쁨을 누립니다.
실수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다시금 제사장에게 가서 받은 은화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 (마태복음 27:4)
회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후회였습니다. 넋두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토해 내고 “제가 나쁜 놈입니다. 제가 악한 짓을 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나와서 하늘의 용서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인생을 끝마쳤습니다.
마지막을 만나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갑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족적을 압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내가 어느 때에 넘어졌는지 압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마음속 폭풍은 무엇입니까? 파선할 것 같은 두려움과 아픔은 무엇입니까? 요나처럼 반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하나님과 싸우지 마십시오. 반대로 하나님 앞에 엎디십시오. “하나님, 제 모습을 제가 압니다. 제 부끄러운 모습을 주님 앞에 토해 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무너지기 전에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돌아오는 것, 바닥을 치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하심 속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때로 우리를 요나처럼 오르락내리락 하게 하신 것도 이제 그만 숨으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토해 내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을 확인하면서 주님과 함께 새로운 날을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 1: 11 ~ 16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서를 읽어 보면, 요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예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요나는 자신 때문에 위기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큰 폭풍이 일어난 것은 “나 때문이다”라고 선언합니다.
…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 1:12)
‘나 때문’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뜻 보면 회개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을 무마하려고 하는 도덕적 편의주의로 사용될 위험이 있습니다. 진실이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모든 것을 침묵시키는 위험이 이 말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조금 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는 회개하는 통절한 마음으로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잘 읽어 보면,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명령 자체가 싫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니느웨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적국의 백성은 멸망해야 마땅한데,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가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이 요나를 추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흔드셨습니다. “요나야, 어디에 있니? 왜 그렇게 꼭꼭 숨었니? 내 앞에 나와 봐라. 나와 이야기를 하자.”
요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요나 때문에 요나와 한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이 죽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요나와 배에 탄 사람들 중 누가 신앙적입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요나에게는 신앙이 없고, 오히려 배에 탄 이방인들에게 더 큰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요나는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일부러 외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뱃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물어봅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요나 1:11)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요나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마치 무능력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요나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자신 때문에 폭풍을 만난 것이니 스스로 몸을 바다에 던지거나 둘째, 다시스로 도망가려는 것이 잘못이니 다시 육지로 가서 니느웨로 갈 것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 (요나 1:12)
요나는 스스로 바다에 빠지지 않고 남에게 자신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문제 해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괘씸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에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기 싫어한 요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것이다. 폭풍을 멈춰 주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여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바다가 스스로 잔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이 일의 주체이신 것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 안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어디 한번 나 죽여 보세요. 나는 당신 뜻에 순종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마음대로 해 보세요. 내가 그것을 마지막까지 볼 거예요.” 요나의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목이 곧아졌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요나와 한 배를 탄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을 듣고도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이 더 크게 화를 내실까봐 주저주저합니다. 배를 살리되 하나님의 화는 피하고 싶었던 그들은 결국 다시 육지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요나가 말한 것과는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요나 1:13)
요나는 뱃사람들의 이런 노력조차 무시하고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손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앙금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 모습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성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교회도 빠지지 않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헌금도 잘 바쳤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왜 이렇습니까? 내 자녀들을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사업은 왜 어렵게 하셨습니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마음이 늘 억눌려 있습니다. 내 뜻대로 행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은 사람들 중 얼굴이 어두운 사람들에게서 이런 마음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셨어요. 내가 이 길로 가자고 하는데도 하나님은 다른 길로 이끄셨어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어려움을 주셨지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겠어요. 나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있어요.”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의 영혼의 기쁨이 사라진 곳에는 요나에게 있던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계속 부딪히고 있습니다.
요나는 위기 앞에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위기 속에서 기도한 사람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기도는 아주 귀중한 기도였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 1:14)
참으로 깊이 있는 신앙의 기도가 아닙니까?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요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cried out’이라고 표현됩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믿던 신에게 기도하기로 이야기했던 사람들입니다. “너는 너의 신앙을 가지고 너의 신에게 기도하라.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각자 신에게 기도하라.” 그러나 이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가 여기까지 요나를 추적하여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놀랍지 않습니까?
예부터 ‘전쟁터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기도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는 위기 속에서도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뱃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지 않는 요나에게 경고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요나야, 너는 이 순간에도 기도하지 않느냐? 도대체 무슨 배짱이냐? 너는 도대체 왜 내게 네 모습을 그대로 말하지 않느냐?”
또 뱃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는 기도였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십시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왜 저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까지 멸망당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간구를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기도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속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는 요나의 말대로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 1:15)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 1:16)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은 읽지만,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두고 이 뱃사람들처럼 기도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제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토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나와 함께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10년, 20년, 30년 교회생활을 해도 실존을 건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은 그저 먼 곳에 계시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에 멈추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기쁨과 감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인생의 한계와 마지막을 아는 사람들이 감사할 줄 압니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아무것도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감사할 줄 압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생명조차도 결코 내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에게서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올리면서, 더욱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겠다고 서원합니다. 물론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인간은 왜 바닥까지 내려가야 돌아설까요? 그 전에는 정녕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인간은 망가지고 나서야 예수님을 바라볼까요? 인생의 바닥을 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인생의 폭풍을 만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전에 돌아오는 사람이 지혜자이고, 하나님이 초청하신 자리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는 입술로는 회개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고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일수록, 때로는 직분자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하나님께 예배드릴 줄도 알고 헌금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후회는 하지만, 정작 회개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0:13)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축복인 줄 잘 모릅니다. 후회와 회개는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릅니다. 후회는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며 스스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회는 과거 지향적이고, 과거에 집착하지만, 회개는 미래 지향적이며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새 세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회하는 사람의 마음은 우울하고 어둡지만,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온 용서로 기쁨을 누립니다.
실수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다시금 제사장에게 가서 받은 은화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 (마태복음 27:4)
회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후회였습니다. 넋두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토해 내고 “제가 나쁜 놈입니다. 제가 악한 짓을 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나와서 하늘의 용서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인생을 끝마쳤습니다.
마지막을 만나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갑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족적을 압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내가 어느 때에 넘어졌는지 압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마음속 폭풍은 무엇입니까? 파선할 것 같은 두려움과 아픔은 무엇입니까? 요나처럼 반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하나님과 싸우지 마십시오. 반대로 하나님 앞에 엎디십시오. “하나님, 제 모습을 제가 압니다. 제 부끄러운 모습을 주님 앞에 토해 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무너지기 전에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돌아오는 것, 바닥을 치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하심 속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때로 우리를 요나처럼 오르락내리락 하게 하신 것도 이제 그만 숨으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토해 내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을 확인하면서 주님과 함께 새로운 날을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