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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축복하라! – 축복하는 삶 3 –

마태복음 22: 34 ~ 40

김지철 목사

2014.07.13

수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가늠해 본 적 있으십니까? 특별히 대학 청년들의 고민은 무엇일까요? 대학교에서 약 10년 동안 5천 명의 학생들을 상담한 분의 이야기로는 그들이 힘들어하는 삶의 주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보면 학업, 진로, 취업, 인간관계, 연애, 섹스, 성공 등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때로는 잘 모르겠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될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다는 고백이 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자아 존중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존감이 부족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겁을 먹고 위축됩니다. 도전하려는 용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여러 방면에서 다가오는 것을 거꾸로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는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이것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절망이 다가오고 우울증에 빠집니다. 때로는 죽음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종종 죽음을 생각할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걸까요? 그토록 소중한 생명을 내버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었으면 자신을 포기했을까 싶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7월 2일에 공개한 OECD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12년 기준으로 10만 명당 29.1명이었습니다. 이것은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OECD 평균인 12.1명의 2.4배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우리는 자살률 1위의 자리를 10년 동안 유지하고 있습니다.
33분마다 한명 꼴로 자살을 한다고 하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한 시간에 2명이 자살한 셈입니다. 이 땅에서 한 해에 만 오천 명 이상이 자살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매우 끔찍한 일입니다. 특히 청소년의 자살 이유는 자존감에 대한 상처 때문이라고 합니다. 학업, 외모, 친구관계, 부모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존감의 결여가 스스로를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축복에 대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처 정도에 따라 넘어지기도 하고 극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체에 면역시스템을 주셨습니다. 피부를 주셔서 병균을 일차적으로 막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병균이 안에 침투하게 되면 혈액 속 백혈구를 통해 면역시스템이 작동하게 하셨습니다. 이 면역시스템이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육체의 병은 아마 면역 결핍증일 것입니다. 면역체계가 무너지면 모든 질병의 바이러스를 견뎌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또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의 면역시스템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축복받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향해서 축복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은 자라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나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자라고 선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향해서 축복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내 몸을 만지면서 “몸아, 건강해라.”, 내 마음을 향해서 “영혼아, 용기를 가져라.” 이렇게 축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선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축복하라고 하면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축복하는 게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이렇게 묻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애나 자기를 향한 집착이 스스로를 축복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닙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애는 자존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 잘난 것 같으면 우월감을 갖고, 반대로 못난 것 같으면 열등감에 빠져드는 것이 자기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강하거나 고집이 센 사람들을 만나보면 실제로는 굉장히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존심은 강한데 자존감이 약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남자들이 평상시에는 자존심을 발휘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보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왜 밤이 되면 술을 마십니까? 그 자존심을 좀 버려 보려고, 자기를 좀 흩뜨리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다음날이 되어서는 지난밤의 행동을 모두 술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스를 기억하십니까? 연못에 비치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그 모습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결국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자기도취증에 빠진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존심은 자기를 축복하는 자존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 개발을 위한 책에 등장하는 인본주의적인 자기 최면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자꾸만 되뇌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것처럼 세뇌가 되는데 그것이 자기 축복과 관계있는 것이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다릅니다. 자기를 축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의 근원이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신념은 자기 확신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씀 위에 기초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은 말씀 때문에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세뇌나 자기 개발을 위한 신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자꾸 축복하면 교만해질 위험은 없는가?” 이것 또한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축복하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명백하게 알게 됩니다. 참된 자아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의 자존감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겸손해지며, 내 이웃도 소중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놀랍게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주체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주체입니다. 사랑하는 그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자신같이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네가 너 자신을 미워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네가 너를 조롱하면 네가 다른 사람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된다.”
사랑하되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나의 나됨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남도 귀한 존재인 줄 알고 그의 인격도 존중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이 과학의 시대에 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왜 우상숭배나 미신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노예처럼 강압하시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처럼 멋지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또 인간 전체를 부르셨구나. 인간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한 존재로 만드시는구나. 얼굴의 색깔에 상관없이, 돈의 유무에 상관없이, 권력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한 인간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구나.’
기독교 운동은 인간이 만든 모든 차별성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인간을 존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존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너를 만드신 창조주가 있단다. 너는 피조물이란다. 너보다 크신 분이 계신단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드릴 때마다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무리 잘나가도 하나님 앞에 서면 부끄럽고 연약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겸손히 살아야 되겠다고, 교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너는 이 땅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하늘과 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된 존재, 소중한 존재가 바로 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시면서 “나도 너에게 복을 주었으니 너도 너 자신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입니다.

기독교만큼 인간중심의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를 신중심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을 인간을 억압하고 조정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만큼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내 친구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내 생명을 버렸다”고 말하는 종교나 철학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이데올로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당당히 살아가도록 불러 주신 이가 또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근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지녔던 무거운 짐을 대신 진 것 아닙니까? 우리의 걱정과 근심, 절망, 탄식, 죄와 허물, 질병, 죽음의 공포 이 모든 것을 대신 지시고 고통 받는 인간들과 연대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그분의 고난 속에 우리의 열등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들어 있고, 우리 삶의 모든 탄식들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입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을 진리로 이끌어가는 종교입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신음하는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을 향한 새 생명의 표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인간의 자리에, 이 낮은 자리에 찾아오셔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을 어디서 만나보셨습니까? 예수님처럼 고난당하고 죄인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그렇게 열망한 분을 우리가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이자 가장 큰 관심은 바로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자가 예배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자꾸만 되뇌게 합니다. 이것은 잠깐의 효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상대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금방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하기에 스스로에게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인 표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런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내 시간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삶의 공간과 물질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나를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을 만지면서 건강을 달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셔야 합니다. 마음 속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손을 가슴에 대고 나를 향해서 축복하셔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냐.’ 말씀하셔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면서, 나의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모두 맡기면서 스스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 또한 하나님께 맡기면서 스스로를 축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때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먼저 나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를 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잣대를 대기 전에 내가 먼저 대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날카롭고 엄정하게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나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가진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자주 실수를 하는지, 내가 얼마나 죄와 정욕에 붙들려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면서 자기 실존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로마서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스스로를 건져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죄악이 있고, 부정함과 결함이 있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것을 정확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긍휼, 사랑의 잣대를 대야 합니다. ‘이런 나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 같은 자를 용서해 주셨구나. 내 죄의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지셨구나.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구나.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만드셨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면서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위로하신 나인데 왜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셨으니 나도 나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실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죽음과 생명, 천사들, 오늘 일이나 내일 일, 그 어떤 피조물도 나를 겁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나를 끊을 수 없다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이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축복하는 것은 선포이며 기도이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도 자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이 두려움을 이겨나갈 용기를 주옵소서.”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축복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날마다 선언하십시오.

목사인 저는 저 자신을 어떻게 축복할까요? 말씀 드렸습니다만,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마가복음 1장 11절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예수님께만 말씀하지 마시고 내게도 그렇게 말씀하옵소서.’
신념의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면,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기를 위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나 자신을 위해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내 영혼에 기쁨을 주옵소서, 내 영혼의 걱정과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고 하나님의 평안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몸의 연약한 곳을 만지면서 “하나님, 내 몸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놓으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귀한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하나님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내 이웃도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며 사랑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할 줄 아는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오늘도 선포하며 누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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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 34 ~ 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가늠해 본 적 있으십니까? 특별히 대학 청년들의 고민은 무엇일까요? 대학교에서 약 10년 동안 5천 명의 학생들을 상담한 분의 이야기로는 그들이 힘들어하는 삶의 주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보면 학업, 진로, 취업, 인간관계, 연애, 섹스, 성공 등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때로는 잘 모르겠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될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다는 고백이 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자아 존중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존감이 부족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겁을 먹고 위축됩니다. 도전하려는 용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여러 방면에서 다가오는 것을 거꾸로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는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이것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절망이 다가오고 우울증에 빠집니다. 때로는 죽음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종종 죽음을 생각할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걸까요? 그토록 소중한 생명을 내버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었으면 자신을 포기했을까 싶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7월 2일에 공개한 OECD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12년 기준으로 10만 명당 29.1명이었습니다. 이것은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OECD 평균인 12.1명의 2.4배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우리는 자살률 1위의 자리를 10년 동안 유지하고 있습니다.
33분마다 한명 꼴로 자살을 한다고 하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한 시간에 2명이 자살한 셈입니다. 이 땅에서 한 해에 만 오천 명 이상이 자살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매우 끔찍한 일입니다. 특히 청소년의 자살 이유는 자존감에 대한 상처 때문이라고 합니다. 학업, 외모, 친구관계, 부모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존감의 결여가 스스로를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축복에 대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처 정도에 따라 넘어지기도 하고 극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체에 면역시스템을 주셨습니다. 피부를 주셔서 병균을 일차적으로 막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병균이 안에 침투하게 되면 혈액 속 백혈구를 통해 면역시스템이 작동하게 하셨습니다. 이 면역시스템이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육체의 병은 아마 면역 결핍증일 것입니다. 면역체계가 무너지면 모든 질병의 바이러스를 견뎌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또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의 면역시스템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축복받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향해서 축복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은 자라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나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자라고 선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향해서 축복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내 몸을 만지면서 “몸아, 건강해라.”, 내 마음을 향해서 “영혼아, 용기를 가져라.” 이렇게 축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선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축복하라고 하면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축복하는 게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이렇게 묻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애나 자기를 향한 집착이 스스로를 축복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닙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애는 자존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 잘난 것 같으면 우월감을 갖고, 반대로 못난 것 같으면 열등감에 빠져드는 것이 자기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강하거나 고집이 센 사람들을 만나보면 실제로는 굉장히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존심은 강한데 자존감이 약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남자들이 평상시에는 자존심을 발휘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보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왜 밤이 되면 술을 마십니까? 그 자존심을 좀 버려 보려고, 자기를 좀 흩뜨리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다음날이 되어서는 지난밤의 행동을 모두 술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스를 기억하십니까? 연못에 비치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그 모습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결국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자기도취증에 빠진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존심은 자기를 축복하는 자존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 개발을 위한 책에 등장하는 인본주의적인 자기 최면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자꾸만 되뇌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것처럼 세뇌가 되는데 그것이 자기 축복과 관계있는 것이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다릅니다. 자기를 축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의 근원이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신념은 자기 확신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씀 위에 기초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은 말씀 때문에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세뇌나 자기 개발을 위한 신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자꾸 축복하면 교만해질 위험은 없는가?” 이것 또한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축복하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명백하게 알게 됩니다. 참된 자아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의 자존감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겸손해지며, 내 이웃도 소중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놀랍게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주체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주체입니다. 사랑하는 그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자신같이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네가 너 자신을 미워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네가 너를 조롱하면 네가 다른 사람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된다.”
사랑하되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나의 나됨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남도 귀한 존재인 줄 알고 그의 인격도 존중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이 과학의 시대에 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왜 우상숭배나 미신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노예처럼 강압하시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처럼 멋지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또 인간 전체를 부르셨구나. 인간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한 존재로 만드시는구나. 얼굴의 색깔에 상관없이, 돈의 유무에 상관없이, 권력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한 인간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구나.’
기독교 운동은 인간이 만든 모든 차별성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인간을 존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존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너를 만드신 창조주가 있단다. 너는 피조물이란다. 너보다 크신 분이 계신단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드릴 때마다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무리 잘나가도 하나님 앞에 서면 부끄럽고 연약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겸손히 살아야 되겠다고, 교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너는 이 땅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하늘과 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된 존재, 소중한 존재가 바로 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시면서 “나도 너에게 복을 주었으니 너도 너 자신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입니다.

기독교만큼 인간중심의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를 신중심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을 인간을 억압하고 조정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만큼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내 친구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내 생명을 버렸다”고 말하는 종교나 철학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이데올로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당당히 살아가도록 불러 주신 이가 또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근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지녔던 무거운 짐을 대신 진 것 아닙니까? 우리의 걱정과 근심, 절망, 탄식, 죄와 허물, 질병, 죽음의 공포 이 모든 것을 대신 지시고 고통 받는 인간들과 연대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그분의 고난 속에 우리의 열등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들어 있고, 우리 삶의 모든 탄식들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입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을 진리로 이끌어가는 종교입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신음하는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을 향한 새 생명의 표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인간의 자리에, 이 낮은 자리에 찾아오셔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을 어디서 만나보셨습니까? 예수님처럼 고난당하고 죄인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그렇게 열망한 분을 우리가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이자 가장 큰 관심은 바로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자가 예배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자꾸만 되뇌게 합니다. 이것은 잠깐의 효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상대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금방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하기에 스스로에게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인 표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런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내 시간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삶의 공간과 물질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나를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을 만지면서 건강을 달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셔야 합니다. 마음 속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손을 가슴에 대고 나를 향해서 축복하셔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냐.’ 말씀하셔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면서, 나의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모두 맡기면서 스스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 또한 하나님께 맡기면서 스스로를 축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때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먼저 나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를 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잣대를 대기 전에 내가 먼저 대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날카롭고 엄정하게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나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가진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자주 실수를 하는지, 내가 얼마나 죄와 정욕에 붙들려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면서 자기 실존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로마서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스스로를 건져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죄악이 있고, 부정함과 결함이 있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것을 정확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긍휼, 사랑의 잣대를 대야 합니다. ‘이런 나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 같은 자를 용서해 주셨구나. 내 죄의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지셨구나.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구나.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만드셨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면서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위로하신 나인데 왜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셨으니 나도 나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실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죽음과 생명, 천사들, 오늘 일이나 내일 일, 그 어떤 피조물도 나를 겁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나를 끊을 수 없다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이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축복하는 것은 선포이며 기도이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도 자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이 두려움을 이겨나갈 용기를 주옵소서.”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축복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날마다 선언하십시오.

목사인 저는 저 자신을 어떻게 축복할까요? 말씀 드렸습니다만,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마가복음 1장 11절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예수님께만 말씀하지 마시고 내게도 그렇게 말씀하옵소서.’
신념의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면,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기를 위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나 자신을 위해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내 영혼에 기쁨을 주옵소서, 내 영혼의 걱정과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고 하나님의 평안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몸의 연약한 곳을 만지면서 “하나님, 내 몸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놓으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귀한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하나님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내 이웃도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며 사랑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할 줄 아는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오늘도 선포하며 누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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