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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의 영, 새로움의 영? – 성령과 악령 17 –

고린도후서 4: 16

김지철 목사

2017.10.15

인간의 새로움은 겉모습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3년 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방지일 목사님이 기억납니다. 방 목사님은 103세까지 사셨습니다. 노년에도 세계 곳곳에 나가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5년 전에는 우리 교회에 오셔서 제직수련회를 인도해 주셨는데, 그때 연세가 100세가 넘으셨습니다. 무리한 부탁 같았지만 방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말씀을 증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강단에 오르신 방 목사님은 7시 45분부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한참 동안 말씀을 전하시다가 8시 45분이 되니 “이제 끝날 때가 됐습니다.”라고 말씀하신 후 기도로 마무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놀랐습니다. 또한 방 목사님이 생전에 자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녹스는 것이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방 목사님은 100세가 넘을 때까지 육체와 영적인 에너지를 다 쏟으며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친지들과 대화하셨고, 다음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당신이 말씀한 대로 닳아 없어지는 삶을 살다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방 목사님이 떠오를 때마다 저의 삶을 반성해 보곤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낡다’라는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로, ‘오래되어 헐고 너절하다’, ‘시대에 뒤떨어져 새롭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낡아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흐르면 다 낡게 마련입니다. 보통 ‘낡는다’는 표현은 사물이나 물건에 사용됩니다. 새로운 브랜드, 즉 신상품 소식이 신문과 인터넷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1년만 지나도, 아니 어떤 물건은 한 달만 지나도 중고 상품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낡은 상품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또 자주 사용하면 낡아집니다. 우리가 매일 세수하며 사용하는 비누도, 양치질에 사용하는 치약도 줄어들고 없어지게 됩니다. 매일 우리 손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도 1, 2년만 지나면 다른 제품으로 바뀝니다. 자주 사용하면 낡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것으로 보충하고 충전하기도 합니다. 면도기도 그렇고, 청소기도, 자동차도 점차 충전해서 사용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럼 인간도 충전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으로 인해 더욱 빨리 소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려고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어 불멸의 꿈을 이루고자 애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낱 로봇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회복탄력성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 낡아지는 세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새로움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일까요? 최근 정신의학계에서 ‘회복탄력성’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는 ‘얼마나 탄력성을 갖고 현실 문제를 대처하고 이겨나가는가’를 묻는 개념입니다. 왜 이런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누구나 크고 작은 다양한 시련을 겪으며 실패를 경험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역경에 빠져 바닥을 치는 삶을 살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아니면 거기에 주저앉아버리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 신체에 근육이 생기듯이 우리 마음에도 근력이 필요합니다. 물체마다 탄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영적 탄력성이 있어야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탄력성’ 내지 ‘회복탄력지수’라고 부릅니다.
회복탄력성은 크게 세 요소로 구성됩니다. 자기조절능력, 대인관계능력, 삶에 대한 긍정성이 그것입니다. 먼저 자기조절능력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감정을 잘 조절하고 조정할 줄 아는가? 충동적인 마음과 욕구가 생겼을 때 어떻게 통제하는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내면적 세계에 얼마나 주도권을 갖고 살아가는가?’ 등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다면, 자기조절능력이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대인관계능력인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다른 사람의 느낌과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가? 어려움이 찾아올 때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삶의 영역을 다른 세상을 향해 넓혀갈 수 있는가? 이웃에게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이 내면세계에 대한 물음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외면세계로 나가는 능력에 대한 물음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삶에 대한 긍정성, 즉 자아 낙관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불평하며 살고 있는가?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내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 왔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은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길 요청합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종교입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마지막 미래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삶에 낙관주의적 사고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 최고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생 최고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녹슬지 않는 인생을 사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인생 탄력성을 갖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7~38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5:37~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포도주를 새로 담그면 발효 과정에서 가스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전에 쓰던 가죽부대는 탄력성이 부족하므로, 여기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발효 과정에서 발생되는 가스를 감당할 수 없어 부대가 터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부대도 망가지고 포도주도 망치기 때문에, 새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부대 곧 탄력성이 있는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죽부대와 포도주를 둘 다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세계가 왔으니 이전의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태도를 변화시키라는 말입니다. 옛것을 생각하지만 거기에 묶여 살지는 말라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들을 새롭게 만들어 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행동은 어디에 기초합니까? 그분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인간을 향합니다. “인간이 고통 속에 놓여 있으니 그들을 치유해라. 인간을 회복해라. 그들이 억눌려 있으니 그들을 해방해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죽음, 질병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역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또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안식일 법까지 어기면서 사람을 살리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냐!” 이렇게 선언하시며 인간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기독교 신앙만큼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 신앙입니다. 음식 문제에 대해 시비가 붙었을 때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다.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느냐? 시기와 질투, 거짓과 사기, 탐욕과 정욕, 이런 것들이 네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처럼 새롭고도 혁명적인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도 바울도 녹슨 인생이 아닌 닳아 없어진 삶을 산 인물입니다. 바울은 자기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여기서 사도 바울은 겉사람과 속사람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겉은 결국 낡아집니다. 외적으로 늙는다는 것입니다. 육체도 연약해집니다. 백발이 성성해지고 이마와 눈가에 주름도 생깁니다. 한 해 한 해가 지나면서 자꾸 쇠약해집니다. 기력도 떨어집니다. 만약 우리 인생이 이것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처량할까요? 나이 들수록 답답해지고 허무해질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엄중한 심판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심판이 바로 시간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습니다. 권력자나 평민이나 똑같습니다. 지식인이든 그렇지 못한 자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임하는 것이 시간입니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시퍼런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 중국 최고의 폭군이었던 그는 영생하고 싶어 불로초를 구하려 했습니다. 그런 그가 몇 살에 죽었는지 아십니까? 50세에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살입니까? 50세가 넘으신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생의 시간과 나이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속임 없이 다가오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사람이 낡아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이 아니라고, 우리에겐 ‘속사람’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속사람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며,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내 육체는 낡아지고 있지만 결코 녹슬지 않는, 날로 새로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속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속사람을 관리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후서 4:16 중)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 별 것 없다. 이제 끝이다.’라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주 일상의 삶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일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밥 먹고, 직장에 나가 수고하고,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만나 저녁 식사를 나누고, 밤에 집에 들어와 잠을 자는, 이 일상적인 삶이 우리 마음에 알게 모르게 쉼과 평안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성 속에 파묻히면 문제가 됩니다. 일상성 속에 매몰돼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기대와 설렘이 사라집니다. 틀에 박힌 삶이 되면 흥미도 잃어버립니다. 매일매일이 똑같습니다. 어제의 일이 오늘 또 반복됩니다. 익숙한 것에 붙잡혀 있으니 호기심도 사라집니다. 삶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그만, 저렇게 살아도 그만이라는 허무의식이 우리 속에 자라납니다.

일상을 침투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일상성 속에 침투해 오는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비일상성을 경험해야 우리 영혼이 기쁨과 감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며 인생을 열어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이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것은, 일상성 속에 그저 매몰돼 살지 말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새벽 기도를 드립니까? 그렇게 바쁘면서도, 좀 더 잘 수 있는데도 왜 주님 앞에 나옵니까? 일상성 속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즉 하늘의 음성,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왜 주일 예배를 드립니까? 가야할 곳도 많고, 금 같은 시간인데, 왜 그 시간을 주님 만나는 데 사용합니까? 일주일간의 반복된 삶에서 오늘 하루 탈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사는구나.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이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나는 순간 속에 꺼져갈 존재구나.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구나.’라는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접촉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계시를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길이 있군요. 하나님,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용서의 길이 있군요. 하나님, 저에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데, 하나님 앞에 서니 평안과 쉼이 찾아오는군요. 하나님, 인생의 무의미함 속에 인생을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돌아보니 제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군요.” 이렇게 하늘의 계시를 접하면서 우리 안에 다시 용기와 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기쁨, 예배자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험난한 인생 여정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약속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이 담긴 고린도후서 5장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1)

겉사람이 낡아진다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낡아진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또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집에 우리를 초청하시니, 겉사람의 낡아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먼저 우리가 낡아지는 상품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닌 작품, 곧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표는 명품이 되는 게 아닙니다. 명품 역시 낡아지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진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게 진품으로 사는 삶입니까? 주님 안에서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삶을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랑하며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천하 누구보다 귀하고 복된 존재가 우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성령은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부활하게 한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영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위로의 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회복탄력성, 생명의 회복탄력성, 위로의 회복탄력성을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신 신앙의 선배를 기억하며,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선포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되새기며,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가? 내 마음에 성령이 계시는가? 주님을 모시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답게 살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담대하게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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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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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새로움은 겉모습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3년 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방지일 목사님이 기억납니다. 방 목사님은 103세까지 사셨습니다. 노년에도 세계 곳곳에 나가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5년 전에는 우리 교회에 오셔서 제직수련회를 인도해 주셨는데, 그때 연세가 100세가 넘으셨습니다. 무리한 부탁 같았지만 방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말씀을 증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강단에 오르신 방 목사님은 7시 45분부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한참 동안 말씀을 전하시다가 8시 45분이 되니 “이제 끝날 때가 됐습니다.”라고 말씀하신 후 기도로 마무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놀랐습니다. 또한 방 목사님이 생전에 자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녹스는 것이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방 목사님은 100세가 넘을 때까지 육체와 영적인 에너지를 다 쏟으며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친지들과 대화하셨고, 다음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당신이 말씀한 대로 닳아 없어지는 삶을 살다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방 목사님이 떠오를 때마다 저의 삶을 반성해 보곤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낡다’라는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로, ‘오래되어 헐고 너절하다’, ‘시대에 뒤떨어져 새롭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낡아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흐르면 다 낡게 마련입니다. 보통 ‘낡는다’는 표현은 사물이나 물건에 사용됩니다. 새로운 브랜드, 즉 신상품 소식이 신문과 인터넷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1년만 지나도, 아니 어떤 물건은 한 달만 지나도 중고 상품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낡은 상품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또 자주 사용하면 낡아집니다. 우리가 매일 세수하며 사용하는 비누도, 양치질에 사용하는 치약도 줄어들고 없어지게 됩니다. 매일 우리 손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도 1, 2년만 지나면 다른 제품으로 바뀝니다. 자주 사용하면 낡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것으로 보충하고 충전하기도 합니다. 면도기도 그렇고, 청소기도, 자동차도 점차 충전해서 사용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럼 인간도 충전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으로 인해 더욱 빨리 소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려고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어 불멸의 꿈을 이루고자 애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낱 로봇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회복탄력성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 낡아지는 세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새로움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일까요? 최근 정신의학계에서 ‘회복탄력성’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는 ‘얼마나 탄력성을 갖고 현실 문제를 대처하고 이겨나가는가’를 묻는 개념입니다. 왜 이런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누구나 크고 작은 다양한 시련을 겪으며 실패를 경험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역경에 빠져 바닥을 치는 삶을 살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아니면 거기에 주저앉아버리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 신체에 근육이 생기듯이 우리 마음에도 근력이 필요합니다. 물체마다 탄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영적 탄력성이 있어야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탄력성’ 내지 ‘회복탄력지수’라고 부릅니다.
회복탄력성은 크게 세 요소로 구성됩니다. 자기조절능력, 대인관계능력, 삶에 대한 긍정성이 그것입니다. 먼저 자기조절능력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감정을 잘 조절하고 조정할 줄 아는가? 충동적인 마음과 욕구가 생겼을 때 어떻게 통제하는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내면적 세계에 얼마나 주도권을 갖고 살아가는가?’ 등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다면, 자기조절능력이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대인관계능력인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다른 사람의 느낌과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가? 어려움이 찾아올 때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삶의 영역을 다른 세상을 향해 넓혀갈 수 있는가? 이웃에게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이 내면세계에 대한 물음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외면세계로 나가는 능력에 대한 물음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삶에 대한 긍정성, 즉 자아 낙관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불평하며 살고 있는가?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내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 왔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은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길 요청합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종교입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마지막 미래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삶에 낙관주의적 사고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 최고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생 최고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녹슬지 않는 인생을 사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인생 탄력성을 갖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7~38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5:37~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포도주를 새로 담그면 발효 과정에서 가스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전에 쓰던 가죽부대는 탄력성이 부족하므로, 여기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발효 과정에서 발생되는 가스를 감당할 수 없어 부대가 터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부대도 망가지고 포도주도 망치기 때문에, 새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부대 곧 탄력성이 있는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죽부대와 포도주를 둘 다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세계가 왔으니 이전의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태도를 변화시키라는 말입니다. 옛것을 생각하지만 거기에 묶여 살지는 말라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들을 새롭게 만들어 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행동은 어디에 기초합니까? 그분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인간을 향합니다. “인간이 고통 속에 놓여 있으니 그들을 치유해라. 인간을 회복해라. 그들이 억눌려 있으니 그들을 해방해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죽음, 질병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역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또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안식일 법까지 어기면서 사람을 살리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냐!” 이렇게 선언하시며 인간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기독교 신앙만큼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 신앙입니다. 음식 문제에 대해 시비가 붙었을 때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다.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느냐? 시기와 질투, 거짓과 사기, 탐욕과 정욕, 이런 것들이 네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처럼 새롭고도 혁명적인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도 바울도 녹슨 인생이 아닌 닳아 없어진 삶을 산 인물입니다. 바울은 자기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여기서 사도 바울은 겉사람과 속사람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겉은 결국 낡아집니다. 외적으로 늙는다는 것입니다. 육체도 연약해집니다. 백발이 성성해지고 이마와 눈가에 주름도 생깁니다. 한 해 한 해가 지나면서 자꾸 쇠약해집니다. 기력도 떨어집니다. 만약 우리 인생이 이것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처량할까요? 나이 들수록 답답해지고 허무해질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엄중한 심판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심판이 바로 시간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습니다. 권력자나 평민이나 똑같습니다. 지식인이든 그렇지 못한 자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임하는 것이 시간입니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시퍼런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 중국 최고의 폭군이었던 그는 영생하고 싶어 불로초를 구하려 했습니다. 그런 그가 몇 살에 죽었는지 아십니까? 50세에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살입니까? 50세가 넘으신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생의 시간과 나이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속임 없이 다가오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사람이 낡아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이 아니라고, 우리에겐 ‘속사람’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속사람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며,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내 육체는 낡아지고 있지만 결코 녹슬지 않는, 날로 새로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속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속사람을 관리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후서 4:16 중)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 별 것 없다. 이제 끝이다.’라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주 일상의 삶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일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밥 먹고, 직장에 나가 수고하고,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만나 저녁 식사를 나누고, 밤에 집에 들어와 잠을 자는, 이 일상적인 삶이 우리 마음에 알게 모르게 쉼과 평안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성 속에 파묻히면 문제가 됩니다. 일상성 속에 매몰돼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기대와 설렘이 사라집니다. 틀에 박힌 삶이 되면 흥미도 잃어버립니다. 매일매일이 똑같습니다. 어제의 일이 오늘 또 반복됩니다. 익숙한 것에 붙잡혀 있으니 호기심도 사라집니다. 삶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그만, 저렇게 살아도 그만이라는 허무의식이 우리 속에 자라납니다.

일상을 침투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일상성 속에 침투해 오는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비일상성을 경험해야 우리 영혼이 기쁨과 감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며 인생을 열어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이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것은, 일상성 속에 그저 매몰돼 살지 말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새벽 기도를 드립니까? 그렇게 바쁘면서도, 좀 더 잘 수 있는데도 왜 주님 앞에 나옵니까? 일상성 속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즉 하늘의 음성,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왜 주일 예배를 드립니까? 가야할 곳도 많고, 금 같은 시간인데, 왜 그 시간을 주님 만나는 데 사용합니까? 일주일간의 반복된 삶에서 오늘 하루 탈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사는구나.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이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나는 순간 속에 꺼져갈 존재구나.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구나.’라는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접촉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계시를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길이 있군요. 하나님,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용서의 길이 있군요. 하나님, 저에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데, 하나님 앞에 서니 평안과 쉼이 찾아오는군요. 하나님, 인생의 무의미함 속에 인생을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돌아보니 제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군요.” 이렇게 하늘의 계시를 접하면서 우리 안에 다시 용기와 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기쁨, 예배자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험난한 인생 여정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약속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이 담긴 고린도후서 5장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1)

겉사람이 낡아진다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낡아진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또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집에 우리를 초청하시니, 겉사람의 낡아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먼저 우리가 낡아지는 상품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닌 작품, 곧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표는 명품이 되는 게 아닙니다. 명품 역시 낡아지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진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게 진품으로 사는 삶입니까? 주님 안에서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삶을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랑하며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천하 누구보다 귀하고 복된 존재가 우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성령은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부활하게 한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영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위로의 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회복탄력성, 생명의 회복탄력성, 위로의 회복탄력성을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신 신앙의 선배를 기억하며,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선포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되새기며,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가? 내 마음에 성령이 계시는가? 주님을 모시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답게 살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담대하게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10월 1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낡음의 영, 새로움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1, 28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고후 4:16-5:1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103세에 별세하신 방지일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는 않겠다. 녹스는 것이 두려울 뿐, 닳아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리고 그분은 그 말씀대로 살다 하나님 앞에 가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며 자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낡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새것으로 다시 보충하며 낡음을 면하려 합니다. 그러면 인간도 충전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이기적 탐욕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소모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습니다.

  

설교의 요약

최근 인간의 정신치료에 대해서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은 크고 작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 앞에서 바닥을 친 삶이, 그 바닥을 도리어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회복 탄력성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자기조절능력입니다.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지,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둘째, 대인관계능력입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셋째는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불평하고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최고의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잘 보여 줍니다(눅5:37-38). 포도주가 발효과정에서 부풀어 오르는데 오래된 가죽부대는 탄력성이 사라져 포도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찢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옛 것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만 그것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안식일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함임을, 정결법의 본질이 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정결을 위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녹슨 인생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겉사람은 세월과 함께 낡아집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심판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자나 평민이나 말입니다. 그러나 속사람, 즉 인간의 마음은, 삶의 태도는 결코 녹슬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후4:16).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일상성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것입니다. 일상의 평안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일상성은 익숙함을 낳고 타성에 젖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성을 침투해 들어오는 하늘의 간섭을 맞이해야 합니다. 왜 새벽기도를 하십니까? 왜 주일예배를 드리십니까? 일주일 동안의 반복된 삶에서 하루를 탈출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나의 간극을 깨닫습니다. 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나는 땅에 사는 인간,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 나는 순간 속에 꺼져갈 존재,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개방되게 됩니다.

우리는 여러 다양한 상품 중의 단지 하나에 불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목표는 상품의 하나인 ‘명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진품’이 되는데 있습니다.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제일가는 ‘첫 번째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이고 예수님만이 참된 기쁨인 이유입니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존재로, 육체는 낡아지지만 영혼은 기뻐 뛰는, 예수님만이 참된 소망임을 드러내는 주님의 자녀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의 일생은 닳아 없어지는 인생이었나요? 아니면 녹스는 인생이었나요? 인생을 돌아보며 회개와 은혜를 고백합시다.

2. 지금 나의 회복 탄력성은 몇 점입니까? 그 점수를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일상성에 ‘매몰되는 삶’이 아니라, ‘새로움의 삶’을 살기 위한 나의 결단을 나눠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성 속에 빠져 매몰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섬세한 음성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옵소서. 세상에 흔한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위로받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갖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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