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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다 똑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의 얼굴만큼 다 다른 것일까요? 아마 조금씩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다른 신앙의 모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먼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영혼이 밝고 따뜻해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저 사람처럼 믿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에 늘 감사의 고백이 울려나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저렇게 쉽게 짜증을 낼까? 왜 늘 불평을 하며 무슨 사건만 나면 남의 탓만을 할까?’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신앙에도 몇 가지 단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야 한다고 여기는 단계입니다. 즉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할 때의 마음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 건강 좀 주세요! 하나님, 돈과 재물을 얻게 해 주세요! 하나님, 잘나가는 직책도 얻고, 지휘도 갖고, 명예도 얻도록 나를 밀어주세요!’
세상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샤머니즘적인 신앙, 복 받는 것만을 추구하는 굿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이 단계를 지납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고,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 하나님은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믿는 단계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믿게 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사람들을 찾으셨을까?’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됨이 마음 속에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읽힙니다. 하나님이 어떤 긍휼한 마음으로 인간을 찾아오시고 이렇게 나 같은 사람까지 찾아오셔서 부르시는 것인가 궁금해지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음 속으로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과 사귀면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나의 산성이십니다. 나의 생명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희망이시고 은총이십니다.” 그때 신앙은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사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알아가는 배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자리는 곧 성숙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가는 세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드리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에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일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게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을 내 것으로 삼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일까?’
연애하던 때가 기억나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까? 무엇을 하면 이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할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듯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 있으면 사랑이 더욱 더 꽃피게 됩니다.
우리가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드릴까 생각하는 것, 태양이 지구를 향해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향해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는 것. 이렇게 우리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제 인생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의 사람은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신앙의 단계에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함께 고난을 당하자!”고 하면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믿으려고 왔는데, 예수 믿고 고난을 당하자니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아마 이런 질문을 갖기도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 예수님을 모시며 살았지만 그가 머리로부터 가슴으로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되기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이제 시작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은 ‘네가 이제 시작점까지 왔구나! 지금껏 나를 향한 판단이 마이너스이더니 이제는 제로 포인트까지 왔구나. 이제는 나와 함께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동시에 고난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거다.”
하지만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맞섭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펄쩍 뛰었습니다. “아니 여태까지 주님을 따라왔는데 이제 죽으려고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주님을 따른 무리들은 어떻게 됩니까? 출세해 보겠다고, 부자 한 번 되어 보겠다고, 세상에서 큰소리 좀 쳐 보겠다고 주님을 따라왔는데 고난을 당하시다니요?” 베드로는 당혹해하며 예수님을 말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했던 베드로는 사도행전과 그의 삶의 후기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자! 거룩한 고난에 동참하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 2:20)
선한 일을 하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 비난받고, 조롱받고, 핍박받고, 고난을 받으면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21절에서 계속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21)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처럼 너희는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사명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좋아하고, 명예와 직분, 직책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난 받을 준비를 해야 네가 속한 공동체가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은 고난’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고난이란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반갑지 않은 손님이 고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난은 수동적입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들었지’하며 탄식하는 것이 고난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고난의 자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것도 기뻐하면서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런 실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난 받기를 원한다. 고난을 기뻐하겠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충격적인 말입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내가 부딪치는 괴로움을 이기고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괴로움을 기뻐하다니 이것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저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존경하게 됐습니다. 자기가 고난 받는 것을 자원하는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는 낮아지고 당신들은 높아지기를 원한다. 나는 세상에서 조롱받고, 당신들은 칭찬받기를 원한다. 나는 죽음의 쓰레기처럼 내려가도 당신들은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지도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새디스트의 모습입니까? 고통을 받으면서 쾌락을 느끼는 마조키스트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고대 스토아 철학자처럼 육체의 고통에 초연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남은 고난일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에서 처참히 돌아가신 예수님 말고 무슨 고난이 또 남아 있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능과 능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일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는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피조물을 다 화해시켰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이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구원의 사건이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화해 사건은 이미 그것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부족한 것 없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고난이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른다. 이 놀라운 말씀과 이 놀라운 사건을 세상은 모른다. 그러니 네가 증거해라.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너를 비난할 수 있다. 너를 조롱할 수도 있다. 박해와 조롱을 받고, 위험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네가 감내해야 이 세상이 축복을 받는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이미 모든 치유와 은혜를 내려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태복음 5:11∼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핍박과 조롱과 박해를 받고, 사람들이 너희를 욕할 때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겁먹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받고, 채찍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5:41)
놀랍지 않습니까? 고난 받는 것 때문에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채찍에 맞고 박해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박해까지 받게 되었다며 고난을 기뻐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음의 고난을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 혼자 뭐하고 있니? 어디 하나님이 계신 것이 보이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생명을 걸고 지키면서 그 어떤 협박에도 ‘죽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고난 받는 것을 준비한 사람들, 고난 받을 것을 기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나옵니다. 지상 세계에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닮은 존재가 누구일까요?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고통 중에 아파하면 자신의 고통과 아픔으로 슬퍼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엄마들이 왜 다 그렇게 웁니까? 2년 동안 못 본다는 것 때문일까요? 아니지 않습니까? ‘내 아들, 이렇게 고이 키운 녀석이 그 고된 훈련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 어려운 것들을 다 감내할 수 있을까?’ 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린 자녀가 감기몸살로 열이 펄펄 올라 잠을 못 자고 울고 있으면,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마음에 ‘하나님, 저 고통을 내게 주시고 쟤를 좀 살려주세요!’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 아닙니까.
바울을 보면 어머니의 심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라는 말이 24절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슴 깊숙이 놓여 있는 ‘내가 괴로움과 고난 받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내 목숨을 너희를 위해서 대속물로 주겠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섬기러 왔다. 그래서 내가 이 고난의 길을 가고 십자가의 길을 간다.” 바울은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나는 공동체가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 받음으로 이 공동체가 살아나면, 내가 낮은 자리에 내려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조롱을 받아도 이 공동체가 칭찬을 받으면, 내가 그 조롱의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의 어머니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 마음 속에 보화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보화, 예수님 계시의 비밀이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보면 바울이 가슴에 품은 그 계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그 계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6∼27)
감추어졌던 비밀이 나에게 나타났고, 공동체에 나타났고, 이 시대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곧 우리의 희망, 영광의 소망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을 받아도 두렵지 않은 바울의 이유였습니다.
구원의 비밀로 ‘남은 고난’을 감당하십시오.
조선시대에 암행어사 제도라는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역 행정관의 잘잘못을 조사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암행어사는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습니다. 하지만 아주 담대하고 늠름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가슴에 임금님이 수여한 마패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인 치신 이 계시의 비밀, 은혜의 비밀, 구원의 비밀, 그 보석과도 같은 비밀이 내 안에 있을 때에, 우리 안에는 상황을 뛰어 넘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울려 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로새서 1:28)
영어 성경을 보면, ‘everyone perfect in Christ’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자비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엄격했기 때문에 그 엄격한 기준에 의해 다른 사람도 가차 없이 내려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넉넉한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슴에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에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오후 예배 때, 아홉 분의 집사님을 장로로 임직하는 임직식이 있습니다. 장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일까요?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직접 투표해서 세운 주님의 종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명예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서 임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에 동참하라고, 교회를 섬기라고, 내가 낮아짐으로 성도님들을 높이고, 내가 비난을 받음으로 성도님들이 칭찬을 받게 하고, 내가 고난에 들어감으로 성도님들이 치유 받고 회복되고 은총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은 사람, 하늘의 보화를 가슴에 품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고난을 내 속에 채워나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우리 가족이 치유를 받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로 새롭게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골로새서 1: 24 ~ 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신앙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다 똑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의 얼굴만큼 다 다른 것일까요? 아마 조금씩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다른 신앙의 모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먼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영혼이 밝고 따뜻해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저 사람처럼 믿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에 늘 감사의 고백이 울려나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저렇게 쉽게 짜증을 낼까? 왜 늘 불평을 하며 무슨 사건만 나면 남의 탓만을 할까?’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신앙에도 몇 가지 단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야 한다고 여기는 단계입니다. 즉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할 때의 마음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 건강 좀 주세요! 하나님, 돈과 재물을 얻게 해 주세요! 하나님, 잘나가는 직책도 얻고, 지휘도 갖고, 명예도 얻도록 나를 밀어주세요!’
세상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샤머니즘적인 신앙, 복 받는 것만을 추구하는 굿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이 단계를 지납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고,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 하나님은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믿는 단계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믿게 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사람들을 찾으셨을까?’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됨이 마음 속에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읽힙니다. 하나님이 어떤 긍휼한 마음으로 인간을 찾아오시고 이렇게 나 같은 사람까지 찾아오셔서 부르시는 것인가 궁금해지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음 속으로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과 사귀면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나의 산성이십니다. 나의 생명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희망이시고 은총이십니다.” 그때 신앙은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사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알아가는 배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자리는 곧 성숙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가는 세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드리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에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일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게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을 내 것으로 삼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일까?’
연애하던 때가 기억나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까? 무엇을 하면 이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할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듯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 있으면 사랑이 더욱 더 꽃피게 됩니다.
우리가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드릴까 생각하는 것, 태양이 지구를 향해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향해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는 것. 이렇게 우리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제 인생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의 사람은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신앙의 단계에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함께 고난을 당하자!”고 하면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믿으려고 왔는데, 예수 믿고 고난을 당하자니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아마 이런 질문을 갖기도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 예수님을 모시며 살았지만 그가 머리로부터 가슴으로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되기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이제 시작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은 ‘네가 이제 시작점까지 왔구나! 지금껏 나를 향한 판단이 마이너스이더니 이제는 제로 포인트까지 왔구나. 이제는 나와 함께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동시에 고난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거다.”
하지만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맞섭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펄쩍 뛰었습니다. “아니 여태까지 주님을 따라왔는데 이제 죽으려고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주님을 따른 무리들은 어떻게 됩니까? 출세해 보겠다고, 부자 한 번 되어 보겠다고, 세상에서 큰소리 좀 쳐 보겠다고 주님을 따라왔는데 고난을 당하시다니요?” 베드로는 당혹해하며 예수님을 말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했던 베드로는 사도행전과 그의 삶의 후기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자! 거룩한 고난에 동참하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 2:20)
선한 일을 하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 비난받고, 조롱받고, 핍박받고, 고난을 받으면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21절에서 계속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21)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처럼 너희는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사명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좋아하고, 명예와 직분, 직책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난 받을 준비를 해야 네가 속한 공동체가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은 고난’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고난이란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반갑지 않은 손님이 고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난은 수동적입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들었지’하며 탄식하는 것이 고난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고난의 자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것도 기뻐하면서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런 실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난 받기를 원한다. 고난을 기뻐하겠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충격적인 말입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내가 부딪치는 괴로움을 이기고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괴로움을 기뻐하다니 이것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저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존경하게 됐습니다. 자기가 고난 받는 것을 자원하는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는 낮아지고 당신들은 높아지기를 원한다. 나는 세상에서 조롱받고, 당신들은 칭찬받기를 원한다. 나는 죽음의 쓰레기처럼 내려가도 당신들은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지도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새디스트의 모습입니까? 고통을 받으면서 쾌락을 느끼는 마조키스트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고대 스토아 철학자처럼 육체의 고통에 초연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남은 고난일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에서 처참히 돌아가신 예수님 말고 무슨 고난이 또 남아 있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능과 능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일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는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피조물을 다 화해시켰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이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구원의 사건이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화해 사건은 이미 그것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부족한 것 없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고난이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른다. 이 놀라운 말씀과 이 놀라운 사건을 세상은 모른다. 그러니 네가 증거해라.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너를 비난할 수 있다. 너를 조롱할 수도 있다. 박해와 조롱을 받고, 위험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네가 감내해야 이 세상이 축복을 받는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이미 모든 치유와 은혜를 내려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태복음 5:11∼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핍박과 조롱과 박해를 받고, 사람들이 너희를 욕할 때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겁먹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받고, 채찍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5:41)
놀랍지 않습니까? 고난 받는 것 때문에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채찍에 맞고 박해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박해까지 받게 되었다며 고난을 기뻐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음의 고난을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 혼자 뭐하고 있니? 어디 하나님이 계신 것이 보이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생명을 걸고 지키면서 그 어떤 협박에도 ‘죽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고난 받는 것을 준비한 사람들, 고난 받을 것을 기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나옵니다. 지상 세계에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닮은 존재가 누구일까요?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고통 중에 아파하면 자신의 고통과 아픔으로 슬퍼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엄마들이 왜 다 그렇게 웁니까? 2년 동안 못 본다는 것 때문일까요? 아니지 않습니까? ‘내 아들, 이렇게 고이 키운 녀석이 그 고된 훈련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 어려운 것들을 다 감내할 수 있을까?’ 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린 자녀가 감기몸살로 열이 펄펄 올라 잠을 못 자고 울고 있으면,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마음에 ‘하나님, 저 고통을 내게 주시고 쟤를 좀 살려주세요!’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 아닙니까.
바울을 보면 어머니의 심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라는 말이 24절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슴 깊숙이 놓여 있는 ‘내가 괴로움과 고난 받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내 목숨을 너희를 위해서 대속물로 주겠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섬기러 왔다. 그래서 내가 이 고난의 길을 가고 십자가의 길을 간다.” 바울은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나는 공동체가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 받음으로 이 공동체가 살아나면, 내가 낮은 자리에 내려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조롱을 받아도 이 공동체가 칭찬을 받으면, 내가 그 조롱의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의 어머니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 마음 속에 보화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보화, 예수님 계시의 비밀이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보면 바울이 가슴에 품은 그 계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그 계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6∼27)
감추어졌던 비밀이 나에게 나타났고, 공동체에 나타났고, 이 시대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곧 우리의 희망, 영광의 소망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을 받아도 두렵지 않은 바울의 이유였습니다.
구원의 비밀로 ‘남은 고난’을 감당하십시오.
조선시대에 암행어사 제도라는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역 행정관의 잘잘못을 조사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암행어사는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습니다. 하지만 아주 담대하고 늠름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가슴에 임금님이 수여한 마패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인 치신 이 계시의 비밀, 은혜의 비밀, 구원의 비밀, 그 보석과도 같은 비밀이 내 안에 있을 때에, 우리 안에는 상황을 뛰어 넘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울려 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로새서 1:28)
영어 성경을 보면, ‘everyone perfect in Christ’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자비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엄격했기 때문에 그 엄격한 기준에 의해 다른 사람도 가차 없이 내려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넉넉한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슴에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에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오후 예배 때, 아홉 분의 집사님을 장로로 임직하는 임직식이 있습니다. 장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일까요?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직접 투표해서 세운 주님의 종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명예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서 임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에 동참하라고, 교회를 섬기라고, 내가 낮아짐으로 성도님들을 높이고, 내가 비난을 받음으로 성도님들이 칭찬을 받게 하고, 내가 고난에 들어감으로 성도님들이 치유 받고 회복되고 은총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은 사람, 하늘의 보화를 가슴에 품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고난을 내 속에 채워나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우리 가족이 치유를 받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로 새롭게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