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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 성경주제 14 : 하나님의 뒤집기 –

사무엘상 2: 4 ~ 8

김지철 목사

2013.12.08

불평등에 저항한 위인들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 인류 역사와 정신사에 위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들자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넬슨 만델라가 있을 것입니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면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의 흑인 운동가였고, 흑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역시 비폭력 저항운동을 했습니다.
며칠 전인 12월 5일, 넬슨 만델라는 9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을 차별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유색인 차별 정책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흑인들을 쫓아냈습니다. 만델라는 이것에 대해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40대 중반에 반란죄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무려 27년 동안의 옥고 생활 끝에 1990년 72세의 나이로 풀려납니다. 이어 노벨상을 받게 되고, 76세에 남아공의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 되면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고 마침내 흑백갈등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실현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온전하게 변화되면 한 공동체와 국가까지 변화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세계의 정신사를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만델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그의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만델라의 어록 중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나는 일생동안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일생을 바쳐 성취하고자 한 이상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러한 이상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피부색깔이나 가정, 환경, 종교 등의 이유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증오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증오보다 사람의 본성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선함이란 감춰져 있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불꽃입니다.”,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일생 전체를 감옥에서 보내면서까지 흑인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았던 인물입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불평등을 만듭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언급한 인물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간디마저도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이 나사렛에 행했던 삶의 내용들, 곧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하게 함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었던 삶의 모습을 똑같이 적용하고자 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고통 받고 억압받는 자기의 민족들, 자유와 인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투신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삶에 온전한 헌신이 일어나고 공동체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높고 교만한 자는 내려오고, 낮고 천한 자는 높아질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결할 것인가 생각하기 보다는, ‘에잇 이 못된 세상! 너무 불공평하다!’ 불평하며 탄식부터 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삶의 불공정성에 대해 질문합니다. ‘내 부모는 왜 이렇게 가난했을까? 나는 왜 공부할 여건이 안됐을까? 어떤 사람은 돈과 재물을 많이 쌓고 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 낮은 신분에서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땅에 왜 이런 고통과 고난이 있을까? 불공정성은 왜 지속되는 걸까?’ 그리고 결국은, 신정론적인 질문으로까지 확장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정의롭고 공정한 분이실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도, 목사로서 이 질문을 반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불공정성과 불공평, 부정의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합니까?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럽습니까? 끊임없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탐욕적입니다.
이런 인간이 만들어놓은 불공평과 부정의가 가득한 이 땅에 오히려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평과 정의를 세우려고 애쓰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이 땅에 있는 불공평과 불공정, 부정의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의 긍휼로 극복해 나가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 한나의 노래, 즉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자녀가 없어서 홀대를 받던 한나는 하나님께 은총을 받고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노래를 부릅니다.
구약과 신약에는 몇 가지 큰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약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의 찬양입니다. 급습해 들어오는 애굽 왕 바로의 군대 앞에서 하나님이 바다를 열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지시고 애굽의 군대는 침몰시키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을 깨달은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찬양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각이 교만한 자를 내리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권세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내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쭉 읽어보면, 하나님의 이 뒤집기 사건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있는 자를 그냥 끌어내리신다는 식의 뒤집기가 아닙니다. 약한 자는 무조건 높여주시겠다는 뒤집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조금 높아졌다고 뽐내면서 연약한 자를 무시하는 교만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고 접근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갖고 있는 특성이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힘 있는 자, 많이 가진 자, 높이 올라간 자들을 내리치려고 하실까요? 나의 잘됨과 나의 높아짐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을 생각하는 교만과 탐욕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탐욕은 방향성으로 생각했을 때, 일종의 구심력과도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은 마치 블랙홀같이 모든 것을 자신을 향해 끌어들입니다. 부자들이 만족하는 것 보셨습니까?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만족하는 것 보셨습니까? 하나의 권력을 가지면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하고, 무언가를 얻게 되면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좋다고 하는 것들은 다 자기 속에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쌓일수록 나타나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차별입니다. 권력의 차별성, 경제적인 차별성, 사회적인 차별성, 남녀 간의 차별성, 민족주의적인 배타성 등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히틀러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김일성이 지배한 이북의 집단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교만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욕심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은 블랙홀과도 같아서 부어도 부어도, 쏟아도 쏟아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인생의 길을 뒤집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랑입니다. 원심력으로써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외부와의 단절을 야기시키고,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원심력이 있어야 진정한 회전의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심력의 사랑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네 이웃 중에 고통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네 이웃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다른 사람들이 삶의 곤고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나님의 뒤집기는 삶의 태도에 대한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사실을 한나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사무엘상 2:4)

용사는 더 용감해지고 넘어진 자는 파멸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각본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정의와 불공평을 싫어하고, 빈익빈부익부를 싫어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가난해지면 앞으로 일어설 자리가 없다. 일단 부자가 되어야 더 큰 부자가 된다.’ 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침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나의 찬가를 들어보면, 용사의 그 든든한 활을 하나님께서 꺾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진 자, 별 볼일 없이 무력하게 된 자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사무엘상 2:5)

인생에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풍족함과 넉넉함이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남에게 빌어먹게 됩니다. 오히려 주린 자, 배고픈 자들은 더 이상 주리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 아닙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삶에 반전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서 한 번 꼴찌 했다고 매번 꼴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에서 한 번 일등 했다고 계속 일등이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있을 때, 잘나갈 때 오히려 더 겸손하고, 잘 안될 때, 실수하고 실패할 때,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사무엘상 2:6∼7)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실까요? ‘힘이 있다면 다 징계를 하겠다. 부자는 다 못 살게 하겠다.’하는 단순논법이 아닙니다. ‘힘없는 자는 내가 무조건 축복하겠다. 가난한 자는 내가 무조건 좋아하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내가 힘을 주어 네가 힘을 받았느냐? 그 힘이 무엇을 위해서 쓰여졌느냐? 네가 재물을 많이 가졌느냐? 그 재물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되겠느냐?”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재물, ‘나’만을 위한 권력은 교만이니 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전해야 할 희망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판하여 질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누가복음 3:5∼6)

누구나 다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높은 산은 하나님께서 깎아 내리시고, 깊은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골을 메워서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나 성별, 가진 것으로 차별받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는 새로운 나라를 이 땅에 허락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곧, 높은 자는 낮고 천한 자를 살펴보고, 낮고 비천한 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희망하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이름 중 우리에게 친근한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입니다. 고아와 과부도 인격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 그들도 존중받으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펼치시기 위해 구약에는 사사와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마지막 시대에는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passion은 passion인데 compassion, 즉 같이 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가난한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 고통 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를 뒤따랐던 사도 바울은 인생의 수많은 고난을 경험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4)

고난을 이겨내셨습니까? 가난을 극복하셨습니까? 외로움을 이기셨습니까? 그렇다면, 고통 받는 다른 자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런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꿈과 희망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이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일까요? 성령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파토스(열정)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 주신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이유입니다.
한나는 찬양을 부르며 개인의 축복의 역사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정의 축복이었습니다. 또한 민족사를 움직이는 축복의 노래였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세계사를 변화시키고 인류 역사에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잊혀진 노래가 있습니까? 다시 찾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지 않게 된 노래들이 있습니까? 찬양이 있습니까? 다시 내 영혼의 찬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우리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고난과 슬픔, 절망을 이겨내어,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초청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도 새로운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의 어디에 고통과 아픔과 부자유와 핍박과 억압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오늘도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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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 4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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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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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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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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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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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불평등에 저항한 위인들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 인류 역사와 정신사에 위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들자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넬슨 만델라가 있을 것입니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면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의 흑인 운동가였고, 흑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역시 비폭력 저항운동을 했습니다.
며칠 전인 12월 5일, 넬슨 만델라는 9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을 차별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유색인 차별 정책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흑인들을 쫓아냈습니다. 만델라는 이것에 대해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40대 중반에 반란죄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무려 27년 동안의 옥고 생활 끝에 1990년 72세의 나이로 풀려납니다. 이어 노벨상을 받게 되고, 76세에 남아공의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 되면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고 마침내 흑백갈등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실현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온전하게 변화되면 한 공동체와 국가까지 변화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세계의 정신사를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만델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그의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만델라의 어록 중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나는 일생동안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일생을 바쳐 성취하고자 한 이상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러한 이상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피부색깔이나 가정, 환경, 종교 등의 이유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증오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증오보다 사람의 본성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선함이란 감춰져 있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불꽃입니다.”,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일생 전체를 감옥에서 보내면서까지 흑인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았던 인물입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불평등을 만듭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언급한 인물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간디마저도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이 나사렛에 행했던 삶의 내용들, 곧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하게 함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었던 삶의 모습을 똑같이 적용하고자 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고통 받고 억압받는 자기의 민족들, 자유와 인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투신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삶에 온전한 헌신이 일어나고 공동체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높고 교만한 자는 내려오고, 낮고 천한 자는 높아질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결할 것인가 생각하기 보다는, ‘에잇 이 못된 세상! 너무 불공평하다!’ 불평하며 탄식부터 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삶의 불공정성에 대해 질문합니다. ‘내 부모는 왜 이렇게 가난했을까? 나는 왜 공부할 여건이 안됐을까? 어떤 사람은 돈과 재물을 많이 쌓고 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 낮은 신분에서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땅에 왜 이런 고통과 고난이 있을까? 불공정성은 왜 지속되는 걸까?’ 그리고 결국은, 신정론적인 질문으로까지 확장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정의롭고 공정한 분이실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도, 목사로서 이 질문을 반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불공정성과 불공평, 부정의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합니까?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럽습니까? 끊임없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탐욕적입니다.
이런 인간이 만들어놓은 불공평과 부정의가 가득한 이 땅에 오히려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평과 정의를 세우려고 애쓰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이 땅에 있는 불공평과 불공정, 부정의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의 긍휼로 극복해 나가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 한나의 노래, 즉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자녀가 없어서 홀대를 받던 한나는 하나님께 은총을 받고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노래를 부릅니다.
구약과 신약에는 몇 가지 큰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약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의 찬양입니다. 급습해 들어오는 애굽 왕 바로의 군대 앞에서 하나님이 바다를 열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지시고 애굽의 군대는 침몰시키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을 깨달은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찬양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각이 교만한 자를 내리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권세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내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쭉 읽어보면, 하나님의 이 뒤집기 사건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있는 자를 그냥 끌어내리신다는 식의 뒤집기가 아닙니다. 약한 자는 무조건 높여주시겠다는 뒤집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조금 높아졌다고 뽐내면서 연약한 자를 무시하는 교만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고 접근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갖고 있는 특성이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힘 있는 자, 많이 가진 자, 높이 올라간 자들을 내리치려고 하실까요? 나의 잘됨과 나의 높아짐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을 생각하는 교만과 탐욕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탐욕은 방향성으로 생각했을 때, 일종의 구심력과도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은 마치 블랙홀같이 모든 것을 자신을 향해 끌어들입니다. 부자들이 만족하는 것 보셨습니까?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만족하는 것 보셨습니까? 하나의 권력을 가지면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하고, 무언가를 얻게 되면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좋다고 하는 것들은 다 자기 속에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쌓일수록 나타나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차별입니다. 권력의 차별성, 경제적인 차별성, 사회적인 차별성, 남녀 간의 차별성, 민족주의적인 배타성 등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히틀러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김일성이 지배한 이북의 집단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교만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욕심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은 블랙홀과도 같아서 부어도 부어도, 쏟아도 쏟아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인생의 길을 뒤집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랑입니다. 원심력으로써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외부와의 단절을 야기시키고,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원심력이 있어야 진정한 회전의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심력의 사랑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네 이웃 중에 고통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네 이웃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다른 사람들이 삶의 곤고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나님의 뒤집기는 삶의 태도에 대한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사실을 한나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사무엘상 2:4)

용사는 더 용감해지고 넘어진 자는 파멸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각본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정의와 불공평을 싫어하고, 빈익빈부익부를 싫어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가난해지면 앞으로 일어설 자리가 없다. 일단 부자가 되어야 더 큰 부자가 된다.’ 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침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나의 찬가를 들어보면, 용사의 그 든든한 활을 하나님께서 꺾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진 자, 별 볼일 없이 무력하게 된 자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사무엘상 2:5)

인생에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풍족함과 넉넉함이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남에게 빌어먹게 됩니다. 오히려 주린 자, 배고픈 자들은 더 이상 주리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 아닙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삶에 반전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서 한 번 꼴찌 했다고 매번 꼴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에서 한 번 일등 했다고 계속 일등이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있을 때, 잘나갈 때 오히려 더 겸손하고, 잘 안될 때, 실수하고 실패할 때,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사무엘상 2:6∼7)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실까요? ‘힘이 있다면 다 징계를 하겠다. 부자는 다 못 살게 하겠다.’하는 단순논법이 아닙니다. ‘힘없는 자는 내가 무조건 축복하겠다. 가난한 자는 내가 무조건 좋아하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내가 힘을 주어 네가 힘을 받았느냐? 그 힘이 무엇을 위해서 쓰여졌느냐? 네가 재물을 많이 가졌느냐? 그 재물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되겠느냐?”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재물, ‘나’만을 위한 권력은 교만이니 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는 전해야 할 희망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판하여 질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누가복음 3:5∼6)

누구나 다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높은 산은 하나님께서 깎아 내리시고, 깊은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골을 메워서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나 성별, 가진 것으로 차별받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는 새로운 나라를 이 땅에 허락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곧, 높은 자는 낮고 천한 자를 살펴보고, 낮고 비천한 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희망하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이름 중 우리에게 친근한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입니다. 고아와 과부도 인격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 그들도 존중받으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펼치시기 위해 구약에는 사사와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마지막 시대에는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passion은 passion인데 compassion, 즉 같이 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가난한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 고통 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를 뒤따랐던 사도 바울은 인생의 수많은 고난을 경험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4)

고난을 이겨내셨습니까? 가난을 극복하셨습니까? 외로움을 이기셨습니까? 그렇다면, 고통 받는 다른 자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런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꿈과 희망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이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일까요? 성령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파토스(열정)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 주신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이유입니다.
한나는 찬양을 부르며 개인의 축복의 역사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정의 축복이었습니다. 또한 민족사를 움직이는 축복의 노래였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세계사를 변화시키고 인류 역사에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잊혀진 노래가 있습니까? 다시 찾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지 않게 된 노래들이 있습니까? 찬양이 있습니까? 다시 내 영혼의 찬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우리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고난과 슬픔, 절망을 이겨내어,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초청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도 새로운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의 어디에 고통과 아픔과 부자유와 핍박과 억압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오늘도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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