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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이기에?” – 모세 이야기 6 –

출애굽기 3: 9 ~ 14

김지철 목사

2016.12.04

스트레스는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지난 2015년 인터넷 취업포탈 사이트 커리어에서 구직자 9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질문 중 하나가 ‘연말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구직자 중 무려 97.5%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더니, ‘내년에도 취업이 불투명하고 확신이 없어 취업에 대한 압박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라고 대부분의 구직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또, 올 연말에는 직장인 350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만약 현재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3위는 부모님과 가족들로 10.5%였습니다. 2위는 직장 상사나 동료들로 15.8%였습니다. 그렇다면, 1위는 누구였을까요? 무려 63.2%나 차지했는데,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10명 중 6명 이상이 자기 자신이 스트레스 유발자 곧 주범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인간관계를 맺으면서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스트레스의 주범이란 사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일까? 내가 왜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정체성입니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 질문을 반복할 뿐 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주 간결하게 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 자신 혹은 환경에 의해 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자신을 규정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 자신만을 들여다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압니까? 내가 아는 내가 참 나일까요?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의 이름이 나입니까?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를 규정합니까? 다른 나라에 들어가 입국수속을 밟을 때, 이름과 성별, 나이, 주소 등을 기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나를 다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나를 수식하는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데는 부족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위 환경적인 요소들을 끌어다가 내가 누구인지를 표현하곤 합니다. 지연, 학연, 혈연 등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대답해 보려고도 합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이념 및 정치적 성향 등으로 나 자신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나일까요?
이처럼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이 땅에서 살아갈까?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보통 일상적인 삶을 살 때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궁극적인 질문들이 터져 나옵니다. 또, 소명과 사명을 깨닫기 위해 몸부림칠 때,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들이 솟구쳐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 앞에 이런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나의 아픔을 알고 있느냐? 내 백성 이스라엘이 억압당하고 핍박당하는 현실을 내가 목격하고 있는데, 너도 그 현실을 보고 있느냐? 내가 저들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을 들었는데, 모세 너도 듣고 있느냐? 내가 내 백성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데, 너도 내 백성을 보고 가슴 아파하느냐?”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가라.”라고 모세를 명하셨습니다. 그런 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고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겠다.”고 그를 재촉하셨습니다.
모세는 두려웠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엄습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나입니까? 왜 내가 가야 합니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가 40년 전에 지도자로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때 저들이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도자 되기를 포기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숨어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나입니까?” 원망 섞인 울분을 하나님께 토해내는 모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두 번째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영어로 “Who am I?”입니다. 내가 그런 자격을 갖춘 자냐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내빼면서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즉 “Who are you?”라는 질문입니다. 나를 파송하시겠다고 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나를 파송하느냐고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이 두 질문에 모세가 대답을 받아야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나더러 가라고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갑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내가 누구길래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모세가 되묻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자기 확신과 자기 불신이라는 두 마음을 융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려는 욕망이 있음에도, 지도자가 얼마나 긴장감과 위기감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지, 얼마나 무거운 짐이 그에게 부여되는지를 헤아리려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두 마음 때문에 갈등하고 충돌합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 확신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이 마음속에서 요동합니다. 이 두 마음이 서로 마주치면서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이 두 마음에는 각각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는 진정한 용기 혹은 만용이나 허세를 부리게 하는 가능성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에는 겸손한 지도자 혹은 무능력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될 때는, 이 두 마음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그 가운데 좋은 가능성을 끌어내야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만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언뜻 굉장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에만 붙잡혀 있으면 자기 사랑에 멈춰 서게 됩니다.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만한 지도자가 됩니다. 이런 지도자는 대화도, 소통도 하지 않는 지도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반대로,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 혹은 자격지심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어떨까요? 천박한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진정한 용기도 결여됩니다. 모든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때론 귀찮아하고 도망치려 합니다.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이 두 마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도 모세에게 두 개의 신뢰(Trust) 관문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두 신뢰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이제 가라.” 모세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아직 못 가겠습니다. 시간을 더 주세요. 내가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란다. 네가 하고 싶다고 지도자가 되는 게 아니란다. 네가 그렇게 지도자가 되려 했을 때도 치명타를 맞은 경험이 있지 않느냐? 물론 네가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인지 질문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너 자신을 보고 지도자 됨을 결정하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내가 누구길래’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애굽기 3:12 중)

모세는 분명 ‘내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모습을 보이는 게 인간입니다. 얼마나 상대적입니까? 자꾸만 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너의 정체성을 네 안에서 찾지 마라.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정체성을 환경을 통해서도 찾지 말거라. 환경 자체가 자꾸 바뀌고 있지 않느냐?”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모세가 누구인가, 또 그가 어떤 존재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와 함께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란다. 너와 함께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중요하단다. 그걸 깨달아야 네가 진정 누구인지 알게 된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넌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는 이 메시지가 우리 모든 신앙인의 자부심이며, 지도자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 자신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함으로 네가 너답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라. 너는 결코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환경을 이끌고 환경을 바꾸는 존재가 너란다. 그러니 나와 더불어 인생을 열어 가거라.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니, 너는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가거라.”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나 자신 혹은 내 주위 환경으로 내가 규정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고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실존이 드러납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십니다.

이제 두 번째 신뢰의 관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그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나를 보내신다고 하는데,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해야 하는데, 그들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당신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중)

이런 이름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라고 하시는데, 세상에 이런 이름을 가진 존재는 없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나다.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자다. 내가 누구인지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속성, 성품,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다짐을 그 안에 담으셨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I am who(that) I am.” 즉, “나는 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은 존재, 곧 나는 나다. I am myself. 나는 나 자신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존재, 시간과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 너희를 이끌어 가는 존재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알려 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내가 너희와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보아라. 너희가 나와 더불어 있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지도자는 공동체를 위하는 지도자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위대하게 태어난다. 어떤 이는 자기 노력으로 위대해진다. 또 어떤 이는 강제로 떠밀려 위대해진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위대해지는 사람은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자기 스스로 위대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결국 몰락하고 맙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강력한 부름을 받아 위대해진 인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면서 모세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0절 하반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10 중)

내가 너를 세운 이유, 지도자로 만든 이유가 있다고, 그것은 내 백성을 위해 네가 쓰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바로 지도자입니다. 그래야 쓰임 받을 때 귀하게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끝났을 때도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모세라는 인물의 삶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봅니다. 모세의 삶은 광야 같은 여정이었습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하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그의 인생이,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인도하며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에 그의 최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었습니다. 눈앞에 그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에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바라만 보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그는 느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지도자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지도자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내 욕심에 의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후자라면 멈춰서야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려고 지도자가 된 것이라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믿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맡겨주신 사람들을 선하게 이끌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침에도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내게 맡겨 주신 일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바로 이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춰서는 순종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지도자인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이 바로 이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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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 9 ~ 14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스트레스는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지난 2015년 인터넷 취업포탈 사이트 커리어에서 구직자 9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질문 중 하나가 ‘연말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구직자 중 무려 97.5%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더니, ‘내년에도 취업이 불투명하고 확신이 없어 취업에 대한 압박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라고 대부분의 구직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또, 올 연말에는 직장인 350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만약 현재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3위는 부모님과 가족들로 10.5%였습니다. 2위는 직장 상사나 동료들로 15.8%였습니다. 그렇다면, 1위는 누구였을까요? 무려 63.2%나 차지했는데,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10명 중 6명 이상이 자기 자신이 스트레스 유발자 곧 주범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인간관계를 맺으면서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스트레스의 주범이란 사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일까? 내가 왜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정체성입니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 질문을 반복할 뿐 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주 간결하게 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 자신 혹은 환경에 의해 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자신을 규정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 자신만을 들여다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압니까? 내가 아는 내가 참 나일까요?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의 이름이 나입니까?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를 규정합니까? 다른 나라에 들어가 입국수속을 밟을 때, 이름과 성별, 나이, 주소 등을 기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나를 다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나를 수식하는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데는 부족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위 환경적인 요소들을 끌어다가 내가 누구인지를 표현하곤 합니다. 지연, 학연, 혈연 등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대답해 보려고도 합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이념 및 정치적 성향 등으로 나 자신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나일까요?
이처럼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이 땅에서 살아갈까?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보통 일상적인 삶을 살 때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궁극적인 질문들이 터져 나옵니다. 또, 소명과 사명을 깨닫기 위해 몸부림칠 때,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들이 솟구쳐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 앞에 이런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나의 아픔을 알고 있느냐? 내 백성 이스라엘이 억압당하고 핍박당하는 현실을 내가 목격하고 있는데, 너도 그 현실을 보고 있느냐? 내가 저들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을 들었는데, 모세 너도 듣고 있느냐? 내가 내 백성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데, 너도 내 백성을 보고 가슴 아파하느냐?”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가라.”라고 모세를 명하셨습니다. 그런 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고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겠다.”고 그를 재촉하셨습니다.
모세는 두려웠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엄습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나입니까? 왜 내가 가야 합니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가 40년 전에 지도자로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때 저들이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도자 되기를 포기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숨어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나입니까?” 원망 섞인 울분을 하나님께 토해내는 모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두 번째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영어로 “Who am I?”입니다. 내가 그런 자격을 갖춘 자냐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내빼면서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즉 “Who are you?”라는 질문입니다. 나를 파송하시겠다고 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나를 파송하느냐고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이 두 질문에 모세가 대답을 받아야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나더러 가라고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갑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내가 누구길래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모세가 되묻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자기 확신과 자기 불신이라는 두 마음을 융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려는 욕망이 있음에도, 지도자가 얼마나 긴장감과 위기감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지, 얼마나 무거운 짐이 그에게 부여되는지를 헤아리려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두 마음 때문에 갈등하고 충돌합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 확신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이 마음속에서 요동합니다. 이 두 마음이 서로 마주치면서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이 두 마음에는 각각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는 진정한 용기 혹은 만용이나 허세를 부리게 하는 가능성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에는 겸손한 지도자 혹은 무능력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될 때는, 이 두 마음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그 가운데 좋은 가능성을 끌어내야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만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언뜻 굉장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에만 붙잡혀 있으면 자기 사랑에 멈춰 서게 됩니다.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만한 지도자가 됩니다. 이런 지도자는 대화도, 소통도 하지 않는 지도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반대로,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 혹은 자격지심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어떨까요? 천박한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진정한 용기도 결여됩니다. 모든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때론 귀찮아하고 도망치려 합니다.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이 두 마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도 모세에게 두 개의 신뢰(Trust) 관문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두 신뢰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이제 가라.” 모세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아직 못 가겠습니다. 시간을 더 주세요. 내가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란다. 네가 하고 싶다고 지도자가 되는 게 아니란다. 네가 그렇게 지도자가 되려 했을 때도 치명타를 맞은 경험이 있지 않느냐? 물론 네가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인지 질문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너 자신을 보고 지도자 됨을 결정하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내가 누구길래’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애굽기 3:12 중)

모세는 분명 ‘내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모습을 보이는 게 인간입니다. 얼마나 상대적입니까? 자꾸만 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너의 정체성을 네 안에서 찾지 마라.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정체성을 환경을 통해서도 찾지 말거라. 환경 자체가 자꾸 바뀌고 있지 않느냐?”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모세가 누구인가, 또 그가 어떤 존재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와 함께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란다. 너와 함께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중요하단다. 그걸 깨달아야 네가 진정 누구인지 알게 된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넌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는 이 메시지가 우리 모든 신앙인의 자부심이며, 지도자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 자신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함으로 네가 너답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라. 너는 결코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환경을 이끌고 환경을 바꾸는 존재가 너란다. 그러니 나와 더불어 인생을 열어 가거라.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니, 너는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가거라.”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나 자신 혹은 내 주위 환경으로 내가 규정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고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실존이 드러납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십니다.

이제 두 번째 신뢰의 관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그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나를 보내신다고 하는데,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해야 하는데, 그들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당신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중)

이런 이름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라고 하시는데, 세상에 이런 이름을 가진 존재는 없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나다.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자다. 내가 누구인지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속성, 성품,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다짐을 그 안에 담으셨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I am who(that) I am.” 즉, “나는 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은 존재, 곧 나는 나다. I am myself. 나는 나 자신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존재, 시간과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 너희를 이끌어 가는 존재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알려 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내가 너희와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보아라. 너희가 나와 더불어 있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지도자는 공동체를 위하는 지도자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위대하게 태어난다. 어떤 이는 자기 노력으로 위대해진다. 또 어떤 이는 강제로 떠밀려 위대해진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위대해지는 사람은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자기 스스로 위대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결국 몰락하고 맙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강력한 부름을 받아 위대해진 인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면서 모세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0절 하반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10 중)

내가 너를 세운 이유, 지도자로 만든 이유가 있다고, 그것은 내 백성을 위해 네가 쓰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바로 지도자입니다. 그래야 쓰임 받을 때 귀하게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끝났을 때도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모세라는 인물의 삶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봅니다. 모세의 삶은 광야 같은 여정이었습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하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그의 인생이,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인도하며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에 그의 최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었습니다. 눈앞에 그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에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바라만 보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그는 느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지도자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지도자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내 욕심에 의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후자라면 멈춰서야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려고 지도자가 된 것이라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믿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맡겨주신 사람들을 선하게 이끌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침에도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내게 맡겨 주신 일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바로 이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춰서는 순종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지도자인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이 바로 이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6년 12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내가 누구이기에? – 모세이야기 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8, 32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 3:5-10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취업포탈 코리아에서 2016년도 연말을 맞이하면서 직장인 350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에 63.2%의 응답자가 ‘나 자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하는지 등으로 인해 내가 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트레스는 엄청난 부담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를 바로 이해하고 해결하는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신앙인의 대답은 아주 간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신의 환경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나를 규정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환경으로, 때로는 이념적 성향으로 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9절) 갑자기 모세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도대체 자신이 왜 가야하는지, 왜 자신인지에 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두 가지의 물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이고(내가 누구이기에),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당신은 누구십니까?). (11절)
지도자의 긴장과 위기는 할 수 있다는 지도자의 자기 확신과 할 수 없다는 지도자의 자기 불신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와 ‘나는 할 수 없다’의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자기애에 빠지고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독선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나는 못하겠다’는 자격지심입니다. 천박한 자기 연민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두 개의 신뢰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는 나에 대한 징정한 신뢰이고, 또 하나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내가 누구냐고 질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모세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함께 계시는 분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누구인지는 너 자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너는 네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이끄는 존재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묻습니다.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름은 나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끌어주실 것임을,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누기
1.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 속에 있었던 경험, 그리고 그 답을 어떻게 찾았는지를 나눠봅시다.
2. 내게 말씀해주신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서로 고백해봅시다.
3.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가 지금 순종함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생각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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