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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창세기 22: 8 ~ 14

김지철 목사

2018.05.27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올해 들어 ‘사랑’을 주제로 창세기 1장부터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창세기에 관한 마지막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안에 믿음의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두 번 하셨는데, 그중 첫 번째는 고향 하란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어 오늘 본문인 창세기 22장 2절에서는 ‘모리아 땅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은 ‘과거에서 벗어나라’는, ‘과거와 네 삶을 단절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네 삶의 터전을 떠나라. 옛 우상의 세계, 육체적 욕심의 세계를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두 번째 명령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와 단절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축복에 관한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 나이 100세 때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명령을 통해 하나님이 마치 이 언약을 폐기처분하는 것만 같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라는 건 이해되지만, 미래의 약속까지도 단절시키는 것 같습니다.
미래의 약속에서 단절되면 남는 건 무엇입니까? 현재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네 삶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냐? 대답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물으셨습니다. 약속된 미래조차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참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명령을 아브라함이 듣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아브라함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환경이나 조건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그것도 ‘자식’에 관한 시험입니다. 더군다나 100세에 낳은 귀하디귀한 아들에 관한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을 참 괴롭게 하는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제물로 드리면 안 됩니까?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입니까? 이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스스로 폐기처분 하십니까? 왜 이렇게 변덕스러우십니까?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입니까? 저를 광신자로 내몰고 살인자 누명까지 씌우려고 하십니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렇게 수많은 물음을 토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우리도 똑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가리킬 때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왜일까요? 아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매우 집착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얻은 아들입니다. 수십 년을 기다려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그러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아들과 딸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아들과 딸이 하나님보다 우선시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십자가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문득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10:37)

그렇다면, 신앙이란 이처럼 가혹한 것일까요? 신앙이란 부모와의 연도, 자녀와의 연도 다 끊어버리는 것일까요?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다가 이런 난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 위기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백하게 묻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물음입니다. “100세에 낳은 네 소중한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게 확실하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른 후 특별히 베드로를 향해 던지신 질문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을 온전케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길 원하시며, 인간에게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이 성경 여러 곳에서도 표현되어 있는데, ‘청년이 신부를 얻어 장가가는 기쁨’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 남성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기쁨이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신방에서 그 신부를 맞이하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62장 5절에도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그토록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 사랑과 기쁨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질투는 우리를 독차지하려는 질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은 우리를 얽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풍성하게 하며, 너그럽게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며 승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랑, 풍성한 사랑을 하도록 초청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단에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삭은 내가 네게 준 선물이지 네 소유물이 아니다. 네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소유물이 아니라 나에게 속한 존재다. 이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새로운 백성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녀들 역시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잠시 맡겨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자녀들을 사랑함으로 바로 세우길 원하시지, 집착하길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보다, 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올바르고 넉넉하며 풍성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신 것도 바로 이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에 기인한 ‘믿음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엄청난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침묵하는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반응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수백 번, 수천 번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어떤 질문도, 물음도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의 행동만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먼저 드러난 모습은 ‘아침이 일찍이 일어나’라는 구절입니다. 아마 그는 전날 밤을 꼬박 샜을 것입니다.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고 증언할 뿐입니다. 창세기 22장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세기 22:3)

여기 보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사가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는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새벽에 자신도 함께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오를 때도 ‘아침이 일찍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34장).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아침에 하나님이 일하실 때 나도 시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수많이 질문이 있음에도 침묵하며 순종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창세기 22장 4절입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세기 22:4)

삼일 길을 갔습니다. 바로 이쯤, 아브라함의 마음이 조금 들여다보이는 구절이 나옵니다. 삼일 길쯤 간 후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찌할까? 내 아들을 어떻게 바친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로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만 보고 삼일 길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처절한 마음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존은 이미 죽음의 상태 속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사흘 만에 고개를 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동입니다. 10절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세기 22:10)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런 태도가 과연 믿음일까요? 광신적인 혹은 맹목적인 신념은 아닐까요?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믿음이 정말 살아 있는 믿음인지,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믿음인지, 오늘날 아버지가 아브라함처럼 행동한다면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광신자요, 살인자요, 정신병자라는 욕을 받기에 충분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를 통해 하나님이 확인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하나님이 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도약이 생성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그동안 내가 네게 많은 축복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그 축복에 매어 있지 않았니? 내가 네게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너는 그 선물만 붙들고 있는 게 아니냐? 선물을 준 나는 잊어버리고, 선물에만 집착하고 있구나!’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주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구나. 정작 선물을 주는 나를 사랑하고 예배하는 데는 소홀한 것 같구나!”

믿음과 광신의 차이는 ‘변화’의 유무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믿음과 왜곡된 광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자기 갱신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므로 우리의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어떻게 다가왔습니까? 번제단에 아들을 내 놓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더 이상 역동적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제 그 칼을 거두어라.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릴 필요가 없다. 내가 네 마음을 읽었다.”라는 말씀으로 변화됩니다. 이 또한 굉장히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은 이와 같습니다. 살아 움직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 생각이 변화되고 성숙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반면 광신을 촉발하는 이념은 변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관용이나 너그러움도 없습니다. 나의 관점이나 방향이 잘못된 것인지 문제제기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비판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신, 곧 사이비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는 비단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도, 정치권력 세계에도 똑같이 작용합니다. 내가 아닌 모든 것은 악이라고 치부합니다.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공격합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거짓된 신념이 광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광신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해 내 생각과 이념을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생각과 이념조차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거기서 살아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끊임없는 변화와 성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순종은 사랑을 낳고,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그러나 광신은 죽음을 낳으며, 미움을 쌓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앞에 나오길 원하시며, 그를 초청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선물을 선물로 알고, 선물을 주신 나 여호와의 위대함과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구나. 내가 드디어 너에게 진정한 믿음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이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을 작품화한 많은 화가들이 있습니다. 그중 색채감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샤갈(Marc Chagall)이 1966년에 ‘이삭의 희생’이란 유화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작품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빨갛게 뒤덮여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의 고뇌와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색은 노란색입니다. 이 색은 이삭이 누워 있는 자리에 나타난 색입니다. 하늘의 색은 파랗습니다. 여기서 천사가 손을 내밀며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 든 칼을 멈추라!” 한편 이삭은 순종하고 있습니다. 한 눈은 뜨고 한 눈은 감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체념을 하고, 한편으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그 뒤에 한 여인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라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나무 옆에 어린 양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이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유대인이었던 샤갈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도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윗부분에 보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이 있고, 그 앞에 통곡하는 여인들도 보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과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또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한 이삭에게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과 순종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봐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사람을 봐라. 인생에서 첫 번째가 하나님인 이 사람을 봐라.” 하시며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어려움과 커다란 장벽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최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내 자녀와 부모님도 하나님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설 때, 우리 삶의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우선으로, 가장 소중한 분으로 고백할 때, 우리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해도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향해, 세상을 향해 담대히 걸어 나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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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 8 ~ 14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올해 들어 ‘사랑’을 주제로 창세기 1장부터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창세기에 관한 마지막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안에 믿음의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두 번 하셨는데, 그중 첫 번째는 고향 하란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어 오늘 본문인 창세기 22장 2절에서는 ‘모리아 땅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은 ‘과거에서 벗어나라’는, ‘과거와 네 삶을 단절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네 삶의 터전을 떠나라. 옛 우상의 세계, 육체적 욕심의 세계를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두 번째 명령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와 단절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축복에 관한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 나이 100세 때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명령을 통해 하나님이 마치 이 언약을 폐기처분하는 것만 같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라는 건 이해되지만, 미래의 약속까지도 단절시키는 것 같습니다.
미래의 약속에서 단절되면 남는 건 무엇입니까? 현재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네 삶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냐? 대답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물으셨습니다. 약속된 미래조차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참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명령을 아브라함이 듣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아브라함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환경이나 조건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그것도 ‘자식’에 관한 시험입니다. 더군다나 100세에 낳은 귀하디귀한 아들에 관한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을 참 괴롭게 하는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제물로 드리면 안 됩니까?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입니까? 이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스스로 폐기처분 하십니까? 왜 이렇게 변덕스러우십니까?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입니까? 저를 광신자로 내몰고 살인자 누명까지 씌우려고 하십니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렇게 수많은 물음을 토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우리도 똑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가리킬 때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왜일까요? 아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매우 집착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얻은 아들입니다. 수십 년을 기다려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그러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아들과 딸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아들과 딸이 하나님보다 우선시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십자가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문득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10:37)

그렇다면, 신앙이란 이처럼 가혹한 것일까요? 신앙이란 부모와의 연도, 자녀와의 연도 다 끊어버리는 것일까요?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다가 이런 난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 위기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백하게 묻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물음입니다. “100세에 낳은 네 소중한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게 확실하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른 후 특별히 베드로를 향해 던지신 질문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을 온전케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길 원하시며, 인간에게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이 성경 여러 곳에서도 표현되어 있는데, ‘청년이 신부를 얻어 장가가는 기쁨’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 남성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기쁨이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신방에서 그 신부를 맞이하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62장 5절에도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그토록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 사랑과 기쁨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질투는 우리를 독차지하려는 질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은 우리를 얽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풍성하게 하며, 너그럽게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며 승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랑, 풍성한 사랑을 하도록 초청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단에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삭은 내가 네게 준 선물이지 네 소유물이 아니다. 네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소유물이 아니라 나에게 속한 존재다. 이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새로운 백성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녀들 역시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잠시 맡겨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자녀들을 사랑함으로 바로 세우길 원하시지, 집착하길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보다, 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올바르고 넉넉하며 풍성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신 것도 바로 이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에 기인한 ‘믿음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엄청난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침묵하는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반응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수백 번, 수천 번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어떤 질문도, 물음도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의 행동만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먼저 드러난 모습은 ‘아침이 일찍이 일어나’라는 구절입니다. 아마 그는 전날 밤을 꼬박 샜을 것입니다.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고 증언할 뿐입니다. 창세기 22장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세기 22:3)

여기 보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사가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는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새벽에 자신도 함께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오를 때도 ‘아침이 일찍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34장).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아침에 하나님이 일하실 때 나도 시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수많이 질문이 있음에도 침묵하며 순종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창세기 22장 4절입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세기 22:4)

삼일 길을 갔습니다. 바로 이쯤, 아브라함의 마음이 조금 들여다보이는 구절이 나옵니다. 삼일 길쯤 간 후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찌할까? 내 아들을 어떻게 바친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로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만 보고 삼일 길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처절한 마음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존은 이미 죽음의 상태 속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사흘 만에 고개를 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동입니다. 10절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세기 22:10)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런 태도가 과연 믿음일까요? 광신적인 혹은 맹목적인 신념은 아닐까요?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믿음이 정말 살아 있는 믿음인지,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믿음인지, 오늘날 아버지가 아브라함처럼 행동한다면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광신자요, 살인자요, 정신병자라는 욕을 받기에 충분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를 통해 하나님이 확인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하나님이 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도약이 생성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그동안 내가 네게 많은 축복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그 축복에 매어 있지 않았니? 내가 네게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너는 그 선물만 붙들고 있는 게 아니냐? 선물을 준 나는 잊어버리고, 선물에만 집착하고 있구나!’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주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구나. 정작 선물을 주는 나를 사랑하고 예배하는 데는 소홀한 것 같구나!”

믿음과 광신의 차이는 ‘변화’의 유무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믿음과 왜곡된 광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자기 갱신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므로 우리의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어떻게 다가왔습니까? 번제단에 아들을 내 놓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더 이상 역동적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제 그 칼을 거두어라.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릴 필요가 없다. 내가 네 마음을 읽었다.”라는 말씀으로 변화됩니다. 이 또한 굉장히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은 이와 같습니다. 살아 움직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 생각이 변화되고 성숙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반면 광신을 촉발하는 이념은 변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관용이나 너그러움도 없습니다. 나의 관점이나 방향이 잘못된 것인지 문제제기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비판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신, 곧 사이비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는 비단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도, 정치권력 세계에도 똑같이 작용합니다. 내가 아닌 모든 것은 악이라고 치부합니다.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공격합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거짓된 신념이 광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광신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해 내 생각과 이념을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생각과 이념조차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거기서 살아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끊임없는 변화와 성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순종은 사랑을 낳고,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그러나 광신은 죽음을 낳으며, 미움을 쌓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앞에 나오길 원하시며, 그를 초청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선물을 선물로 알고, 선물을 주신 나 여호와의 위대함과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구나. 내가 드디어 너에게 진정한 믿음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이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을 작품화한 많은 화가들이 있습니다. 그중 색채감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샤갈(Marc Chagall)이 1966년에 ‘이삭의 희생’이란 유화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작품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빨갛게 뒤덮여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의 고뇌와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색은 노란색입니다. 이 색은 이삭이 누워 있는 자리에 나타난 색입니다. 하늘의 색은 파랗습니다. 여기서 천사가 손을 내밀며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에 든 칼을 멈추라!” 한편 이삭은 순종하고 있습니다. 한 눈은 뜨고 한 눈은 감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체념을 하고, 한편으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그 뒤에 한 여인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라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나무 옆에 어린 양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이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유대인이었던 샤갈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도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윗부분에 보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이 있고, 그 앞에 통곡하는 여인들도 보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과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또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한 이삭에게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과 순종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봐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사람을 봐라. 인생에서 첫 번째가 하나님인 이 사람을 봐라.” 하시며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어려움과 커다란 장벽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최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내 자녀와 부모님도 하나님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설 때, 우리 삶의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우선으로, 가장 소중한 분으로 고백할 때, 우리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해도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향해, 세상을 향해 담대히 걸어 나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8년 5월 2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1, 31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22:8~14절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2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특별히 아들을 바치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라떠나라라고 하는 명령을 두 번 받게 됩니다(12:1, 22:1). 첫 번째 명령은 과거와 네 삶을 단절시키라(12;1)”라고 하는 명령입니다두 번째 미래와 단절을 시키라(22:2)”는 명령입니다과거와 미래를 단절하면 남는 것은 현재 뿐입니다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설교의 요약

   환경과 삶의 여건에 대한 시험이라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습니다그런데 사람에 관련된 시험은 쉽지 않습니다그래서 살을 파고 뼈를 깎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듯 아픈 것입니다아들 ? 아브라함은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사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집착을 하고 있었습니다아브라함의 십자가는 아들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입니다(10:37). 시험의 본질은 100세에 난 너의 소중한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물음입니다(21:15).

   1) 우선적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   2) 사랑에 목말라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하나님의 사랑을 우선해야 다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남을 살리고 세우는 사랑입니다소중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배우면그 소중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시선을 바꾸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침묵하였습니다오히려 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준비하였습니다(22: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오를 때에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3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22:1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네게 많은 축복을 주었는데너는 축복에 메어 있지 않느냐너는 너에게 많은 선물을 너에게 줬는데그 선물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자꾸 잊어버리고선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믿음은 자기 갱신을 하는 것입니다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말씀을 통해서 내 생각이 변화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거기에는 말씀과의 소통이 있고내 삶의 끊임없는 변화의 성숙이 있습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것하나님이 내 인생에 첫 번째이며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고백해야만 합니다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나누기

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단절을 명령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에게 어떠한 단절을 명령하고 있습니까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 사랑의 우선순위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무엇입니까함께 나눠보세요.

3.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랑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는 순종을 삶을 살아가도록 서로를 축복하며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에 첫 번째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힌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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