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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 12 ~ 14

김지철 목사

2016.11.20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간증이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대화하고 소통하길 원하십니다.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도 깊어져 갑니다. 이것이 만남의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그 만남을 고백하는 간증이 소중하고 복된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어떤 아들과 딸이 마음에 듭니까? 부모가 사랑과 온 정성을 쏟아 키웠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괜찮을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편히 주무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직장에 나가서도 부모님을 생각하며 “오늘은 몸이 괜찮으세요?” 하고 문자 한마디 보내주는 자녀가 있다면,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사랑은 소통과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12)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께 “엄마, 아빠!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너무 감사해요. 내가 평생 더 잘할게요.”라고 말할 줄 안다면, 그 자녀는 최고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내가 어떻게 보답할까요?” 하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면, 이 또한 최고의 신앙인입니다.

시인은 고난 중에도 감사 고백을 드립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모든 것이 넉넉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하고 풍족해서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무덤의 자리까지 내려간 시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지금 죽음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 입구까지 내려갔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왜 고난을 당한 뒤에야 성숙해 지는 것일까요? 고난당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잘 풀리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해 보십시오. 감기 몸살 하나로 앓아누워도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습니까? 병상에 누워 보면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비로소 고백하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 감사의 문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는 언제 시작될까요? 감사는 기도하면서 시작됩니다.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 116:2)

내 평생의 삶 전체가 기도로 채워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를 발가벗겨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나 자신을 발가벗길 용기가 없다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체면의 옷을 둘러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옷, 재산의 옷, 명예의 옷, 교만의 옷을 겹겹으로 입고 있으면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고 꾸중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폼 잡고 체면 차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식, 명예, 교만으로 가득차서 하나님마저도 이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은 신앙인이 아니다. 너희들은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너희들은 형식적인 종교인일 뿐이다.” 하고 지적하십니다.
내 마음 가운데 기도할 마음이 있다는 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감사한다는 표지입니다. “하나님, 내 발가벗은 모습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안의 거짓과 불의, 사특함을 주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속에 탄식과 절망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벗겨놓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내 오장육부를 아시니, 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들통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 굽이굽이마다 동행하시며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나를 선대하시며 인자와 자비로 베푸신 그분의 사랑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시인도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편 116:5)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구나!’ 기도하면서 그가 이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건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기억, 하나님과의 추억 만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기억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추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한 카톡 방이 있습니다. 제 믿음의 친구들인 목사들과 함께하는 카톡 방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마음이 울적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제 아버지는 지금 많이 편찮으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라고 올렸습니다. 그렇게 다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마디씩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올렸습니다.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으니까….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려고 해도 아무런 추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가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억 속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아, 나는 행복한 사람이네요.” “오늘 부모님과 추억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한다는 게 무엇일까요?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게 뭘까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것 역시 사랑의 추억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줄 아는 존재가 됩니다.

감사하면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요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와 반대이진 않습니까? 너무 쉽게 슬퍼하고 우울해 합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고 탄식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시인을 보십시오. 시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상황과 여건이 좋아진 게 아닙니다. 절망의 수렁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격려하기 시작합니다. 7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편 116:7)

자기 영혼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실망하고 있느냐? 왜 그렇게 낙심하느냐? 왜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회복하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는 시인입니다.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추억과 기억들을 회상하자는 의지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대하지 않았냐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지 않으셨냐고, 그러니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격려하는 것은 귀한 신앙의 태도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격려할 줄 알아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외칠 줄 알아야 우리 인생도 밝아집니다.
우울증이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일까요? 감사입니다. 우리 몸 안의 암세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힘들고 어렵고 감사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을 때, 또 몸이 아프고 질병이 들어서 감사할 수가 없을 때, 다시 감사의 제목을 찾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감사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감사하면 ‘의미’를 찾게 됩니다. 무의미성에 갇혀 있던 내 삶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아침에 감사 고백을 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 지난밤 잠들어 있을 때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셨네요. 또 다시 제게 생명을 허락하셨네요.”라고 고백하셨습니까? 아침밥을 먹으면서 “하나님, 제게 귀한 식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화도 잘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오늘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 주의 날 이렇게 교회에 나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감사할 줄 알면 내 삶의 순간순간이 의미를 얻게 됩니다. 내 삶의 시간과 사건이 유의미하게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감사가 소중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그저 허무하게 인생이 흘러가 버립니다. 그런데 감사하면, 인생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인도 마지막 결론부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116:17)

하나님과의 추억,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회복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어떤 추억을 갖고 계십니까? 어떤 감사의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기도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응답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조롱 받고 비판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까? 말씀을 증거하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뻐 노래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다시 그 추억을 회복합시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같이 놀아요.” 아빠가 대답합니다. “얘야, 지금은 바쁘단다. 나중에.”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같이 축구해요.” 아빠는 “얘야, 아빠가 지금 너무 시간이 없단다. 나중에.”라고 대답합니다. 대학생이 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빠, 같이 여행 가요.” 그러자 아빠는 “아들아, 지금 쉴 틈이 없구나. 나중에.”라고 답합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빠도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은퇴 후 시간이 남아돕니다. 아들 생각이 나 전화를 겁니다. “아들아, 지금 만날 수 있느냐?” 장성한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빠, 저 지금 너무너무 바쁘거든요. 나중에.”
이러한 인생, 얼마나 가슴 아픕니까? 바쁘다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바쁘다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런 추억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과 만나 밥도 먹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너무 고맙다.”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당신, 얼마나 힘들었어요?”라고 위로하고 사랑해 줘야 추억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군요. 제가 그동안엔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셨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과 우리의 추억이 생깁니다.
결혼하는 예비부부에게 저는 이런 부탁을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올 때 손 붙잡고 데이트하면서 오라고, 하지만 교회 오면 손 놓고 하나님과 데이트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배 끝나면 다시 손 붙잡고 둘이 데이트하라고, 그렇게 가정생활도 기쁘게 하고 신앙생활도 기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실천 방안을 하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가족 카톡 방을 하나 만드십시오. 아버지가 만들면 가장 좋은데, 만약 그게 어렵다면 어머니가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말씀 한 구절만 매일 올려 보세요. 새벽 기도에서 들었던 말씀, 주일날 들었던 말씀을 한 구절 올리고 가족들을 축복하세요. 가족들의 이름을 불러 가며 “내가 널 사랑한다. 축복한다. 오늘도 건강해라.” 이렇게 한마디만 올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응답하지 않았던 남편도, 자녀들도 점차 응답을 할 것입니다. 축복의 메시지를 이어가는 아내와 엄마에게 “고마워요, 엄마! 나도 엄마가 좋아요.”,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아빠가 너무 좋아요.” 이렇게 답해 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게 인생 아닐까요? 바로 이런 게 사랑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추억이 만들어지잖아요. 여러분, 하나님과 무슨 추억이 있습니까? 제가 왜 새벽 영성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까? 하나님과 나만의 사건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추억을 쌓이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감사할 줄 알면 그게 바로 갚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 바쁜 것 조금 내려놓고, 내 옆의 사랑하는 사람 손도 잡고 산책도 하고 밥도 먹어 보고 같이 놀아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축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가족과의 사랑의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그렇게 우리의 삶을 새롭게 열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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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6: 12 ~ 14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간증이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대화하고 소통하길 원하십니다.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도 깊어져 갑니다. 이것이 만남의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그 만남을 고백하는 간증이 소중하고 복된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어떤 아들과 딸이 마음에 듭니까? 부모가 사랑과 온 정성을 쏟아 키웠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괜찮을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편히 주무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직장에 나가서도 부모님을 생각하며 “오늘은 몸이 괜찮으세요?” 하고 문자 한마디 보내주는 자녀가 있다면,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사랑은 소통과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12)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께 “엄마, 아빠!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너무 감사해요. 내가 평생 더 잘할게요.”라고 말할 줄 안다면, 그 자녀는 최고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내가 어떻게 보답할까요?” 하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면, 이 또한 최고의 신앙인입니다.

시인은 고난 중에도 감사 고백을 드립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모든 것이 넉넉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하고 풍족해서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무덤의 자리까지 내려간 시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지금 죽음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 입구까지 내려갔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왜 고난을 당한 뒤에야 성숙해 지는 것일까요? 고난당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잘 풀리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해 보십시오. 감기 몸살 하나로 앓아누워도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습니까? 병상에 누워 보면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비로소 고백하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 감사의 문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는 언제 시작될까요? 감사는 기도하면서 시작됩니다.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 116:2)

내 평생의 삶 전체가 기도로 채워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를 발가벗겨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나 자신을 발가벗길 용기가 없다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체면의 옷을 둘러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옷, 재산의 옷, 명예의 옷, 교만의 옷을 겹겹으로 입고 있으면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고 꾸중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폼 잡고 체면 차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식, 명예, 교만으로 가득차서 하나님마저도 이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은 신앙인이 아니다. 너희들은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너희들은 형식적인 종교인일 뿐이다.” 하고 지적하십니다.
내 마음 가운데 기도할 마음이 있다는 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감사한다는 표지입니다. “하나님, 내 발가벗은 모습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안의 거짓과 불의, 사특함을 주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속에 탄식과 절망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벗겨놓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내 오장육부를 아시니, 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들통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 굽이굽이마다 동행하시며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나를 선대하시며 인자와 자비로 베푸신 그분의 사랑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시인도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편 116:5)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구나!’ 기도하면서 그가 이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건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기억, 하나님과의 추억 만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기억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추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한 카톡 방이 있습니다. 제 믿음의 친구들인 목사들과 함께하는 카톡 방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마음이 울적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제 아버지는 지금 많이 편찮으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라고 올렸습니다. 그렇게 다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마디씩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올렸습니다.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으니까….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려고 해도 아무런 추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가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억 속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아, 나는 행복한 사람이네요.” “오늘 부모님과 추억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한다는 게 무엇일까요?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게 뭘까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것 역시 사랑의 추억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줄 아는 존재가 됩니다.

감사하면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요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와 반대이진 않습니까? 너무 쉽게 슬퍼하고 우울해 합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고 탄식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시인을 보십시오. 시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상황과 여건이 좋아진 게 아닙니다. 절망의 수렁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격려하기 시작합니다. 7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편 116:7)

자기 영혼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실망하고 있느냐? 왜 그렇게 낙심하느냐? 왜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회복하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는 시인입니다.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추억과 기억들을 회상하자는 의지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대하지 않았냐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지 않으셨냐고, 그러니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격려하는 것은 귀한 신앙의 태도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격려할 줄 알아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외칠 줄 알아야 우리 인생도 밝아집니다.
우울증이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일까요? 감사입니다. 우리 몸 안의 암세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힘들고 어렵고 감사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을 때, 또 몸이 아프고 질병이 들어서 감사할 수가 없을 때, 다시 감사의 제목을 찾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감사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감사하면 ‘의미’를 찾게 됩니다. 무의미성에 갇혀 있던 내 삶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아침에 감사 고백을 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 지난밤 잠들어 있을 때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셨네요. 또 다시 제게 생명을 허락하셨네요.”라고 고백하셨습니까? 아침밥을 먹으면서 “하나님, 제게 귀한 식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화도 잘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오늘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 주의 날 이렇게 교회에 나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감사할 줄 알면 내 삶의 순간순간이 의미를 얻게 됩니다. 내 삶의 시간과 사건이 유의미하게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감사가 소중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그저 허무하게 인생이 흘러가 버립니다. 그런데 감사하면, 인생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인도 마지막 결론부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116:17)

하나님과의 추억,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회복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어떤 추억을 갖고 계십니까? 어떤 감사의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기도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응답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조롱 받고 비판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까? 말씀을 증거하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뻐 노래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다시 그 추억을 회복합시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같이 놀아요.” 아빠가 대답합니다. “얘야, 지금은 바쁘단다. 나중에.”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같이 축구해요.” 아빠는 “얘야, 아빠가 지금 너무 시간이 없단다. 나중에.”라고 대답합니다. 대학생이 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빠, 같이 여행 가요.” 그러자 아빠는 “아들아, 지금 쉴 틈이 없구나. 나중에.”라고 답합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빠도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은퇴 후 시간이 남아돕니다. 아들 생각이 나 전화를 겁니다. “아들아, 지금 만날 수 있느냐?” 장성한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빠, 저 지금 너무너무 바쁘거든요. 나중에.”
이러한 인생, 얼마나 가슴 아픕니까? 바쁘다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바쁘다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런 추억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과 만나 밥도 먹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너무 고맙다.”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당신, 얼마나 힘들었어요?”라고 위로하고 사랑해 줘야 추억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군요. 제가 그동안엔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셨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과 우리의 추억이 생깁니다.
결혼하는 예비부부에게 저는 이런 부탁을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올 때 손 붙잡고 데이트하면서 오라고, 하지만 교회 오면 손 놓고 하나님과 데이트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배 끝나면 다시 손 붙잡고 둘이 데이트하라고, 그렇게 가정생활도 기쁘게 하고 신앙생활도 기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실천 방안을 하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가족 카톡 방을 하나 만드십시오. 아버지가 만들면 가장 좋은데, 만약 그게 어렵다면 어머니가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말씀 한 구절만 매일 올려 보세요. 새벽 기도에서 들었던 말씀, 주일날 들었던 말씀을 한 구절 올리고 가족들을 축복하세요. 가족들의 이름을 불러 가며 “내가 널 사랑한다. 축복한다. 오늘도 건강해라.” 이렇게 한마디만 올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응답하지 않았던 남편도, 자녀들도 점차 응답을 할 것입니다. 축복의 메시지를 이어가는 아내와 엄마에게 “고마워요, 엄마! 나도 엄마가 좋아요.”,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아빠가 너무 좋아요.” 이렇게 답해 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게 인생 아닐까요? 바로 이런 게 사랑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추억이 만들어지잖아요. 여러분, 하나님과 무슨 추억이 있습니까? 제가 왜 새벽 영성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까? 하나님과 나만의 사건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추억을 쌓이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감사할 줄 알면 그게 바로 갚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 바쁜 것 조금 내려놓고, 내 옆의 사랑하는 사람 손도 잡고 산책도 하고 밥도 먹어 보고 같이 놀아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축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가족과의 사랑의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그렇게 우리의 삶을 새롭게 열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6년 11월 2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0, 42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시 116:12-14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부어도 전혀 응답이 없는 자녀보다는, 부모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하는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이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고, 신뢰와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요약

본문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고백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주님께 어떻게 보답할까라고 고백하면 최고의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감사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거나 편안해서 드리는 감사 찬양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자기 실존이 무덤의 자리까지 내려갔다고 고백합니다. 죽음 앞에, 무덤의 어두움까지 내려가서 슬프고 아픕니다.(3절) 그런데 자기 삶을 돌아보니 찬양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진정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모든 인생이 돌아가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절)라고 고백하며 내 삶이 곧 기도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기도란 나 자신을 발가벗기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체면의 옷, 지식의 옷, 재산의 옷, 명예의 옷, 교만의 옷을 겹겹으로 입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잘 되면 자기가 잘 난 것으로 뽐내려 하고, 잘 안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합니다. 그 영혼 속에 기쁨도 감사도 사라집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최상의 경배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곧 예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벌거벗었음을, 내 속에 있는 거짓과 불의와 사특함을 아신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내 속에 있는 탄식과 절망의 소리를 알고 계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을 해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대하시고 이끄셨던 삶의 내용이 기억나기 시작합니다.(5절) 지금까지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예배를 통해 기억력이 살아납니다.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과 나와의 수많은 추억들이 발생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추억을 만드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추억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지닌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명령합니다. “평안함을 되찾아라!” (7절) 자신의 영혼을 향해 권면하고, 자기를 위로합니다. 감사를 시작하면 삶의 연약함이 회복됩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감사는 지나간 삶을 활력 있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알면 내 삶이 은혜로 가득 차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인생이 허무하게 흘러가고 사라지고 맙니다. 감사하면 내 인생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17절에서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감사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들어가며 감사함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누기
1.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감사의 고백을 서로 나눠봅시다.
2. 신앙생활하며 갖게 된 하나님과의 추억 중 서로에게 나누고픈 은혜가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3. 가족과 사랑의 추억을 만들고 서로에게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가족 카톡방에 관한 실천방안도 들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이야기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들게 하시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추억을 만들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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