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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잠언 31: 1 ~ 9

김지철 목사

2008.05.04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녀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한 달 전에 저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제 며느리가 예쁜 손녀를 낳았는데 제 아들이 어렸을 때랑 너무나 꼭 닮아서 아주 신기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기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러 생각이 제 마음에 교차 되었습니다. 옛날에 첫아이를 가졌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 가득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건강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물로 키워나갈 수 있을까 고민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어디 다른 기쁨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고, 자녀교육을 생각하면서 많은 부모들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아주 당혹해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결국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건강하고 바르게 키울 수가 있을까? 또한 자녀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인물로 키울 수가 있을까?’ 이를 위해서 부모들은 내가 좋은 엄마이고 좋은 아빠인가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자녀를 잘 교육하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우리 옛 성현들도 자녀교육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천원 권 지폐에 초상이 있는 퇴계 이황은 자녀교육을 말하면서 무엇보다 책 읽기가 중요하다는 말합니다. 퇴계가 아들 준에게 쓴 편지입니다. “독서에 어찌 장소를 택해서 하랴? 향리에 있거나 서울에 있거나, 오직 뜻을 세움이 어떠한가에 있을 따름이다. 마땅히 십분 스스로 채찍질하고 힘써야 할 것이며,  남을 다투어 부지런히 공부하고 한가하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너는 최근에는 무슨 책을 일고 있느냐? 학업을 그만두고 게으름을 피우며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으냐?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단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자녀에게 용기를 주며 독서를 가르쳤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양수리에 가면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데 그의 어록을 곳곳에 붙여놓았습니다. 가정에 어린 자녀들과 청소년들이 있다면 한번쯤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나이 30대 후반-50대 중반까지 아버지로서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를 유배지에 가서 보냅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혀버린 아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써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 살게 하였다면,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자녀들을 시골에서 낳았어도 도시로 보내고 싶은 부모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교육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약용은 자녀들에게 문명과 문화의 세계를 결코 떠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특히 그는 자녀에게 반드시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문명, 문화적인 삶의 세계와 접해야 성숙할 수 있고 자기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장 열악한 삶의 내용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배우며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정약용의 글입니다.
“이제 너희들은 몰락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잘 처신하여 처음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지 않겠느냐? 폐족으로서 바르게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의 갈 길인 벼슬길이 막혀버린 아들에게 책을 멀리 하지 말고 독서를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육만이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고 더 높은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열심히 교육하는 것도 이러한 선비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몰두하는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할 수 있으며, 지혜도 생기고 업적도 세울 수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쓰임 받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옛 선현들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날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하나님과 이 시대와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옛 선현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잠언 격언입니다. 르무엘이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왕이 어머니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가르쳐준 말씀이라며 말해주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를 아들에게 어머니는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올바른 리더쉽을 가지고 백성들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자궁에서난 내 아들아 내가 기도하면서 난 내 아들아”
이 어머니는 아주 대단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뱃속에 품고 열 달 동안 고통 받으면서 난 아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약속받은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열달 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자녀를 낳습니다. 내 살과 피가 섞여 낳은 내 자식입니다. 바로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엄청난 친밀성과 사랑을 갖고 부르는 이름이 바로 어머니들이 부르는 내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아들에게 어떤 좋은 표현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들은 아들만 생각하면 내 아들이라는 고백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되면 언제나 부르고 싶은 이름이 바로 내 아들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 배운 것, 경험한 것을 아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런 경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먹고 자라난다.”
아이들은 사랑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마음 전체를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내 아들아’라는 소리를 자꾸 들은 자녀들은 마음이 풍성하고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아이의 마음에도 미움이 생깁니다. 엄마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면 자녀의 마음에도 분노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들은 쉽게 이렇게 생각하며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불행하지만 너는 행복해라.”
이것은 말이나 심정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은 자녀를 키우면서 불행한데 결코 자녀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자녀의 가슴속에 주입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행복하다. 나는 너를 가져서 행복하다. 나는 너의 어머니가 된 것이 행복하다. 네가 내 아들, 내 딸이 된 것이 내게는 축복이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이런 기쁨과 감사가 있을 때 자녀에게 기쁨과 감사가 생깁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과 공치사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부모로서 사랑과 공치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부모를 거부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너무 공치사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입니다. 부모들은 때로 자신이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애쓰는가를 자녀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서 생색을 내고 싶어 합니다. 어떤 엄마의 말입니다. “애야, 내가 너를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음식을 만든단다.”
이 어머니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계속 반복해서 듣다보면 자녀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생깁니다. ‘아, 내가 어머니에게 귀찮은 존재구나.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또 어떤 엄마들은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만 아니면 내가 네 아빠랑 헤어지는 건데. 내가 네 아빠와 헤어지지 않고 아직까지 사는 것은 네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서 그렇단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바로 너 때문이란다.” 자녀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엄마로부터 자꾸만 떨어지고 싶습니다. 엄마가 마치 나를 보면서 ‘너는 귀찮은 존재야. 너만 없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공치사 때문에 고통 받습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공치사를 잘못하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 자체가 부모 된 우리에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감사의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자녀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뻐했습니까? 자녀 때문에 얼마나 웃었습니까? 방긋 웃는 얼굴 한번 보며 얼마나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다 잊고 자녀가 귀찮아지고 골치 아프게 한 것, 말썽부렸던 것만 생각나서 때로는 자녀들 때문에 누린 축복의 역사를 불평의 역사로 바꿔놓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이미 효도를 받았습니다.

이솝 이야기에 ‘나그네와 플라타나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나그네가  불볕더위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더워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늘에서 쉴 곳이 있나 봤더니 저쪽에 잎이 무성한 플라타나스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나무에 등을 대고 편안히 쉬었습니다. 그러자 더위가 어느 정도 사라진 두 사람은 플라타나스를 올려다보면서 한가롭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단 말이야.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나무야.” 기껏 그늘에서 편안히 더위를 식히고 나서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나무라고 타박하는 것이 우리의 못된 습성입니다.
우리에게 지나쳐 간 사람들 중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배우고 깨닫게 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우리 자녀들은 이미 자라나면서 우리에게 효도를 다했습니다. 자녀로서 한번 웃어줄 때, 처음 ‘아빠, 엄마’라는 말 한마디를 들었을 때 이미 우리의 가슴이 떨리지 않았습니까? 부모로서 정말 효도를 받고 싶으면 효도 받고 싶은 생각을 끊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 자체가 좋아. 네가 내 아들, 딸이 되고 내가 네 아버지, 어머니가 된 것이 참 감사하다.”
이 말 한마디만 있으면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수고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모 된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모든 목을 매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대로 자녀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한대로 자녀들은 다른 사람을 축복해줄 것입니다.

사랑과 축복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자녀의 몫입니다. 내가 바라는 몫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맡겨주는 몫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편지로 써서 표현해 보십시오.

르무엘의 어머니처럼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입으로 다정하게 부르기가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달에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부르며 편지로 써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러나 자녀를 키우면서 얼마나 많이 염려하기도 했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렇지만 자녀를 사랑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십시오. 자녀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써 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 자녀들이 감격스럽게 우리를 안아줄 것입니다.
“엄마, 아빠! 나는 엄마 아빠의 아들, 딸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으로 감사한 것이 있다면 제 아들, 딸이 일 년에 두 번씩 저와 아내에게 편지를 써 주었던 일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그때마다 편지를 읽고 있으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아들, 딸이 엄마, 아빠를 사랑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에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 아들, 딸에게 부모인 저 역시 일 년에 한번정도는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일이면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이번 한 달 동안 아니 이번 주 안에 몇 자를 적어도 좋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편지로 쓴 글을 통해서 자녀들은 마음에 받았던 상처들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또 시간이 허락한다면 자녀들과 데이트를 해보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아버지는 아들과 어머니는 딸과 데이트를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의 여유가 조금 더 있다면 아침에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오거나 일박 이일정도 부자간에 모녀간에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인생의 멋이며 축복입니다.
평생 살면서 사랑을 표현해보지 못했다면 한번 해 보십시오.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새로운 아버지, 새로운 어머니를 느낄 것이고, 부모는 새로운 아들, 딸의 모습을 느낄 것입니다. 주도권은 자녀에게 맡겨 두십시오.

지도자가 될 자녀에게 자기 절제와 사랑을 배우게 하십시오.

르므엘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말을 합니다. “두 가지를 간직해라. 자신을 절제해라. 주색을 삼가라. 에너지를 쏟을 것에 쏟아라. 여자에게 에너지를 다 쏟지 말아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부탁을 해야 합니다. 여자가 중요하지만 여자에게 목을 걸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딸들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남자가 중요하지만 남자에게 목을 걸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자기 인생을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르므엘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에너지를 쏟아야할 때 쏟으라고 가르칩니다. 술 취해서 분별력을 잃지 말고 옳고 그른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주고, 너는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슬플 때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 외로울 때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 외로울 때 외로움을 벗어날 능력이 사라집니다. 슬플 때 그것에 도전하고 부딪칠 능력이 사라집니다. 슬플 때, 근심할 때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쁠 때, 축하할 때 한두 잔의 포도주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고 외롭고 답답할 때 술을 먹으면 술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인생을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절제를 배우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힘든 사람, 곤고한 사람, 궁핍한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그들을 세워나갈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자기 절제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꼭 가르치십시오.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자기 절제가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자기 절제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연약한 사람을 도울 줄 알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세워나갈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 된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만 목을 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자녀들은 떠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의 어버이가 되셔서 자녀들을 일으켜주시고 세워주시며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며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받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 친히 어버이가 되셔서 이끌어 주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자녀의 어버이가 되어 주시고, 우리 자녀들을 키워주시고 세워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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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1: 1 ~ 9

1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2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4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5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6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8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녀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한 달 전에 저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제 며느리가 예쁜 손녀를 낳았는데 제 아들이 어렸을 때랑 너무나 꼭 닮아서 아주 신기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기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러 생각이 제 마음에 교차 되었습니다. 옛날에 첫아이를 가졌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 가득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건강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물로 키워나갈 수 있을까 고민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어디 다른 기쁨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고, 자녀교육을 생각하면서 많은 부모들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아주 당혹해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결국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건강하고 바르게 키울 수가 있을까? 또한 자녀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인물로 키울 수가 있을까?’ 이를 위해서 부모들은 내가 좋은 엄마이고 좋은 아빠인가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자녀를 잘 교육하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우리 옛 성현들도 자녀교육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천원 권 지폐에 초상이 있는 퇴계 이황은 자녀교육을 말하면서 무엇보다 책 읽기가 중요하다는 말합니다. 퇴계가 아들 준에게 쓴 편지입니다. “독서에 어찌 장소를 택해서 하랴? 향리에 있거나 서울에 있거나, 오직 뜻을 세움이 어떠한가에 있을 따름이다. 마땅히 십분 스스로 채찍질하고 힘써야 할 것이며,  남을 다투어 부지런히 공부하고 한가하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너는 최근에는 무슨 책을 일고 있느냐? 학업을 그만두고 게으름을 피우며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으냐?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단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자녀에게 용기를 주며 독서를 가르쳤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양수리에 가면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데 그의 어록을 곳곳에 붙여놓았습니다. 가정에 어린 자녀들과 청소년들이 있다면 한번쯤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나이 30대 후반-50대 중반까지 아버지로서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를 유배지에 가서 보냅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혀버린 아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써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 살게 하였다면,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자녀들을 시골에서 낳았어도 도시로 보내고 싶은 부모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교육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약용은 자녀들에게 문명과 문화의 세계를 결코 떠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특히 그는 자녀에게 반드시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문명, 문화적인 삶의 세계와 접해야 성숙할 수 있고 자기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장 열악한 삶의 내용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배우며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정약용의 글입니다.
“이제 너희들은 몰락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잘 처신하여 처음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지 않겠느냐? 폐족으로서 바르게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의 갈 길인 벼슬길이 막혀버린 아들에게 책을 멀리 하지 말고 독서를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육만이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고 더 높은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열심히 교육하는 것도 이러한 선비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몰두하는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할 수 있으며, 지혜도 생기고 업적도 세울 수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쓰임 받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옛 선현들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날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하나님과 이 시대와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옛 선현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잠언 격언입니다. 르무엘이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왕이 어머니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가르쳐준 말씀이라며 말해주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를 아들에게 어머니는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올바른 리더쉽을 가지고 백성들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자궁에서난 내 아들아 내가 기도하면서 난 내 아들아”
이 어머니는 아주 대단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뱃속에 품고 열 달 동안 고통 받으면서 난 아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약속받은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열달 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자녀를 낳습니다. 내 살과 피가 섞여 낳은 내 자식입니다. 바로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엄청난 친밀성과 사랑을 갖고 부르는 이름이 바로 어머니들이 부르는 내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아들에게 어떤 좋은 표현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들은 아들만 생각하면 내 아들이라는 고백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되면 언제나 부르고 싶은 이름이 바로 내 아들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 배운 것, 경험한 것을 아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런 경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먹고 자라난다.”
아이들은 사랑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마음 전체를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내 아들아’라는 소리를 자꾸 들은 자녀들은 마음이 풍성하고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아이의 마음에도 미움이 생깁니다. 엄마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면 자녀의 마음에도 분노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들은 쉽게 이렇게 생각하며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불행하지만 너는 행복해라.”
이것은 말이나 심정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은 자녀를 키우면서 불행한데 결코 자녀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자녀의 가슴속에 주입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행복하다. 나는 너를 가져서 행복하다. 나는 너의 어머니가 된 것이 행복하다. 네가 내 아들, 내 딸이 된 것이 내게는 축복이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이런 기쁨과 감사가 있을 때 자녀에게 기쁨과 감사가 생깁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과 공치사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부모로서 사랑과 공치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부모를 거부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너무 공치사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입니다. 부모들은 때로 자신이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애쓰는가를 자녀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서 생색을 내고 싶어 합니다. 어떤 엄마의 말입니다. “애야, 내가 너를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음식을 만든단다.”
이 어머니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계속 반복해서 듣다보면 자녀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생깁니다. ‘아, 내가 어머니에게 귀찮은 존재구나.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또 어떤 엄마들은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만 아니면 내가 네 아빠랑 헤어지는 건데. 내가 네 아빠와 헤어지지 않고 아직까지 사는 것은 네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서 그렇단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바로 너 때문이란다.” 자녀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엄마로부터 자꾸만 떨어지고 싶습니다. 엄마가 마치 나를 보면서 ‘너는 귀찮은 존재야. 너만 없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공치사 때문에 고통 받습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공치사를 잘못하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 자체가 부모 된 우리에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감사의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자녀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뻐했습니까? 자녀 때문에 얼마나 웃었습니까? 방긋 웃는 얼굴 한번 보며 얼마나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다 잊고 자녀가 귀찮아지고 골치 아프게 한 것, 말썽부렸던 것만 생각나서 때로는 자녀들 때문에 누린 축복의 역사를 불평의 역사로 바꿔놓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이미 효도를 받았습니다.

이솝 이야기에 ‘나그네와 플라타나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나그네가  불볕더위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더워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늘에서 쉴 곳이 있나 봤더니 저쪽에 잎이 무성한 플라타나스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나무에 등을 대고 편안히 쉬었습니다. 그러자 더위가 어느 정도 사라진 두 사람은 플라타나스를 올려다보면서 한가롭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단 말이야.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나무야.” 기껏 그늘에서 편안히 더위를 식히고 나서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나무라고 타박하는 것이 우리의 못된 습성입니다.
우리에게 지나쳐 간 사람들 중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배우고 깨닫게 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우리 자녀들은 이미 자라나면서 우리에게 효도를 다했습니다. 자녀로서 한번 웃어줄 때, 처음 ‘아빠, 엄마’라는 말 한마디를 들었을 때 이미 우리의 가슴이 떨리지 않았습니까? 부모로서 정말 효도를 받고 싶으면 효도 받고 싶은 생각을 끊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 자체가 좋아. 네가 내 아들, 딸이 되고 내가 네 아버지, 어머니가 된 것이 참 감사하다.”
이 말 한마디만 있으면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수고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모 된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모든 목을 매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대로 자녀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한대로 자녀들은 다른 사람을 축복해줄 것입니다.

사랑과 축복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자녀의 몫입니다. 내가 바라는 몫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맡겨주는 몫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편지로 써서 표현해 보십시오.

르무엘의 어머니처럼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입으로 다정하게 부르기가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달에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부르며 편지로 써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러나 자녀를 키우면서 얼마나 많이 염려하기도 했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렇지만 자녀를 사랑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십시오. 자녀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써 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 자녀들이 감격스럽게 우리를 안아줄 것입니다.
“엄마, 아빠! 나는 엄마 아빠의 아들, 딸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으로 감사한 것이 있다면 제 아들, 딸이 일 년에 두 번씩 저와 아내에게 편지를 써 주었던 일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그때마다 편지를 읽고 있으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아들, 딸이 엄마, 아빠를 사랑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에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 아들, 딸에게 부모인 저 역시 일 년에 한번정도는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일이면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이번 한 달 동안 아니 이번 주 안에 몇 자를 적어도 좋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편지로 쓴 글을 통해서 자녀들은 마음에 받았던 상처들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또 시간이 허락한다면 자녀들과 데이트를 해보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아버지는 아들과 어머니는 딸과 데이트를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의 여유가 조금 더 있다면 아침에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오거나 일박 이일정도 부자간에 모녀간에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인생의 멋이며 축복입니다.
평생 살면서 사랑을 표현해보지 못했다면 한번 해 보십시오.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새로운 아버지, 새로운 어머니를 느낄 것이고, 부모는 새로운 아들, 딸의 모습을 느낄 것입니다. 주도권은 자녀에게 맡겨 두십시오.

지도자가 될 자녀에게 자기 절제와 사랑을 배우게 하십시오.

르므엘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말을 합니다. “두 가지를 간직해라. 자신을 절제해라. 주색을 삼가라. 에너지를 쏟을 것에 쏟아라. 여자에게 에너지를 다 쏟지 말아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부탁을 해야 합니다. 여자가 중요하지만 여자에게 목을 걸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딸들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남자가 중요하지만 남자에게 목을 걸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자기 인생을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르므엘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에너지를 쏟아야할 때 쏟으라고 가르칩니다. 술 취해서 분별력을 잃지 말고 옳고 그른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주고, 너는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슬플 때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 외로울 때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 외로울 때 외로움을 벗어날 능력이 사라집니다. 슬플 때 그것에 도전하고 부딪칠 능력이 사라집니다. 슬플 때, 근심할 때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쁠 때, 축하할 때 한두 잔의 포도주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고 외롭고 답답할 때 술을 먹으면 술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인생을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절제를 배우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힘든 사람, 곤고한 사람, 궁핍한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그들을 세워나갈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자기 절제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꼭 가르치십시오.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자기 절제가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자기 절제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연약한 사람을 도울 줄 알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세워나갈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 된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만 목을 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자녀들은 떠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의 어버이가 되셔서 자녀들을 일으켜주시고 세워주시며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며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받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 친히 어버이가 되셔서 이끌어 주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자녀의 어버이가 되어 주시고, 우리 자녀들을 키워주시고 세워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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