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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새로운 자아의 발견입니다.
2016년을 시작하며 믿음과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자기 신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습니까? 간혹 이 물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뜻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네 자아라고 생각했던 옛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살아가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자기 신뢰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자기 신뢰란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며 결국 교만과 자기 자랑으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기 신뢰는 양날의 칼처럼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한편으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기 집착에 머물게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나 같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해서 나도 나를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해답은 아닙니다.
론다 번이 쓴 『시크릿』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우주의 비밀을 보여 주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읽어 보면 결국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소개합니다. 생각이 곧 삶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은 긍정적인 실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얻게 되고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은 부정적인 실체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고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돈을 생각하면 부자가 되고 건강한 나를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세 가지 단계를 제시합니다. 먼저 간절히 원하고, 종교처럼 믿으며, 받으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암시를 확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신뢰를 증폭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병이 든 사람에게 처음에는 제대로 된 약을 처방해 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일반적인 소화제 같은 것을 줘도 ‘플라시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자기 존중’과 이 책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비슷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다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도덕적인 판단’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긍정적인 사고가 최고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인생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는 자신이 진리가 되고, 진실이 되는 독단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두 번째는 현실에 대해서 빨리 외면하는 것입니다. 삶이 얼마나 처절한 진흙탕 싸움인지를 망각합니다. 이 땅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것을 상실하게 합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끌어당김의 법칙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절의 순간 탈출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할 때,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 보려 하다가도 거대한 장벽 앞에서 부정적인 생각에 멈춰서게 됩니다.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면서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자기비하에 빠져 스스로를 억압하게 됩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나타납니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38분마다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한 해에 1만4천 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만 명당 29명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셈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순간 긍정적인 생각으로 인생을 살려고 했을까요. 그런데 현실이 따라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남보다 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버림받음의 상처로 우울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성경에서 두 사람 뽑는다면, 모세와 솔로몬일 것입니다. 한 사람은 민족의 지도자였고 한 사람은 최고 지혜자라고 일컬음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먼저 모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히 대면한 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온유한 자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을까요? 아니요.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겁이 많고 일종의 우울증을 앓는 인물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무엇보다 그에게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일찍 알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아들들을 다 죽이라는 바로 왕의 명령 때문에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유모로 들어온 친어머니에게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버림받음의 경험은 인생에서 무척 아프고 슬픈 경험입니다. 그중에서도 부모로부터의 버림받음은 가장 큰 아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고아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처절하게 낮아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청년이 돼서야 자신의 민족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는지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이 유대인들을 때리고 채찍질할 때 과감하게 나가서 그 애굽인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랑스러운 민족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대인들조차도 그를 지도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그가 경험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못난이야.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형편없는 존재야.’ 우울증에 빠진 겁먹은 인간으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려고 할 때도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내게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내가 무슨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입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로 왕이라는 거대한 권력자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도대체 어떻게 이 백성을 인도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난 못 합니다. 나는 말도 잘 못해요. 지도자가 될 만한 자격이 없어요.” 그의 삶을 덮었던 어두운 그림자와 가슴에 맺혀있던 부끄러움이 그를 억눌렀습니다.
솔로몬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와는 아주 정반대의 인물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도취형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서 지혜와 총명의 인물로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전임자가 위대한 다윗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억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위대함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아버지와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버지보다 더 큰일을 해야겠다는 야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다윗이 짓지 못했던 성전을 과감하게 짓고, 이런저런 사업을 수없이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몰락이었습니다. 허무였습니다.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전도서 2장 4절 이하에 보면 그의 독백이 나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이야기합니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전도서 2:4∼8)
그가 사업도 벌이고 일도 많이 하고 보배와 금과 은도 끊임없이 모아들인 것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인물인지, 자신이 아버지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목적과 활동의 동기가 모두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에게 집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거두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면서 육체적인 쾌락에 몰입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어두운 그림자인 열등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 뒷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는지, 자기집착에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도 나타나듯이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하면서 영혼의 만족감을 잃어버린 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우리 속에는 모세의 모습과 솔로몬의 모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나를 숨기고 싶고, 또 어떤 때는 나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집착증 환자처럼 하나에 몰입하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굽니다. 하나님이나 이웃이나 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며 달립니다.
하나님께 나의 어두운 모습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42편은 바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먼저 친구가 되라”고 말입니다. 네 자신과 화해하고 친밀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이 한 것처럼 세 가지를 해야 됩니다. 첫째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가진 최고의 축복입니다. 여기에서의 질문은 질책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라는 뜻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 (시편 42:5)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향해서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회개입니다. 내면의 상처가 자신을 위협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문제를 노출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 괜찮은 인물로 여기기보다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옛 자아를 부인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내가 가진 거짓된 자아상을 거절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자신에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은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회개가 시작되고, 그로 인해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두 번째는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42:3)
고통과 슬픔을 다시 인식하는 것,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던 삶의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옛 모습은 외로움과 상처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탈진 상태입니다.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웅덩이에 빠져서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를 뛰어넘으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어둡고 비참한 그림자조차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세상에는 소망을 둘 데가 없지 않느냐. 너 자신에게도 소망을 둘 수 없지 않느냐. 네 모습을 네가 알지 않느냐.”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를 만드신 창조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여기에 보내셨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시인은 두 가지 변화와 결심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내가 나를 격려하고 위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건 위로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은, 나를 학대하고 비하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끄러운 부분과 연약한 점까지 위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공과 업적을 향해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기로 다짐합시다.
우리도 모세처럼 버림받았다고 여겨졌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아픈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나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모세의 생애였습니다. 또한 솔로몬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성공을 향한 집착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doing)로 나의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being)만으로도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하며 달려왔다면, 이제 그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복덩이이자 축복의 통로로 세우십니다. 그러니 나도 안달복달하던 것을 멈추고, 붙잡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기쁨과 감사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간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나의 복덩이다. 내가 너를 축복의 통로로 세우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으로만 만족하며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42: 1 ~ 5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새로운 자아의 발견입니다.
2016년을 시작하며 믿음과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자기 신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습니까? 간혹 이 물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뜻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네 자아라고 생각했던 옛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살아가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자기 신뢰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자기 신뢰란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며 결국 교만과 자기 자랑으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기 신뢰는 양날의 칼처럼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한편으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기 집착에 머물게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나 같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해서 나도 나를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해답은 아닙니다.
론다 번이 쓴 『시크릿』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우주의 비밀을 보여 주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읽어 보면 결국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소개합니다. 생각이 곧 삶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은 긍정적인 실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얻게 되고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은 부정적인 실체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고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돈을 생각하면 부자가 되고 건강한 나를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세 가지 단계를 제시합니다. 먼저 간절히 원하고, 종교처럼 믿으며, 받으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암시를 확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신뢰를 증폭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병이 든 사람에게 처음에는 제대로 된 약을 처방해 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일반적인 소화제 같은 것을 줘도 ‘플라시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자기 존중’과 이 책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비슷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다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도덕적인 판단’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긍정적인 사고가 최고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인생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는 자신이 진리가 되고, 진실이 되는 독단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두 번째는 현실에 대해서 빨리 외면하는 것입니다. 삶이 얼마나 처절한 진흙탕 싸움인지를 망각합니다. 이 땅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것을 상실하게 합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끌어당김의 법칙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절의 순간 탈출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할 때,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 보려 하다가도 거대한 장벽 앞에서 부정적인 생각에 멈춰서게 됩니다.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면서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자기비하에 빠져 스스로를 억압하게 됩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나타납니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38분마다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한 해에 1만4천 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만 명당 29명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셈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순간 긍정적인 생각으로 인생을 살려고 했을까요. 그런데 현실이 따라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남보다 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버림받음의 상처로 우울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성경에서 두 사람 뽑는다면, 모세와 솔로몬일 것입니다. 한 사람은 민족의 지도자였고 한 사람은 최고 지혜자라고 일컬음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먼저 모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히 대면한 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온유한 자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을까요? 아니요.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겁이 많고 일종의 우울증을 앓는 인물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무엇보다 그에게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일찍 알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아들들을 다 죽이라는 바로 왕의 명령 때문에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유모로 들어온 친어머니에게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버림받음의 경험은 인생에서 무척 아프고 슬픈 경험입니다. 그중에서도 부모로부터의 버림받음은 가장 큰 아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고아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처절하게 낮아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청년이 돼서야 자신의 민족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는지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이 유대인들을 때리고 채찍질할 때 과감하게 나가서 그 애굽인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랑스러운 민족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대인들조차도 그를 지도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그가 경험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못난이야.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형편없는 존재야.’ 우울증에 빠진 겁먹은 인간으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려고 할 때도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내게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내가 무슨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입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로 왕이라는 거대한 권력자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도대체 어떻게 이 백성을 인도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난 못 합니다. 나는 말도 잘 못해요. 지도자가 될 만한 자격이 없어요.” 그의 삶을 덮었던 어두운 그림자와 가슴에 맺혀있던 부끄러움이 그를 억눌렀습니다.
솔로몬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와는 아주 정반대의 인물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도취형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서 지혜와 총명의 인물로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전임자가 위대한 다윗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억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위대함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아버지와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버지보다 더 큰일을 해야겠다는 야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다윗이 짓지 못했던 성전을 과감하게 짓고, 이런저런 사업을 수없이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몰락이었습니다. 허무였습니다.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전도서 2장 4절 이하에 보면 그의 독백이 나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이야기합니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전도서 2:4∼8)
그가 사업도 벌이고 일도 많이 하고 보배와 금과 은도 끊임없이 모아들인 것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인물인지, 자신이 아버지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목적과 활동의 동기가 모두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에게 집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거두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면서 육체적인 쾌락에 몰입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어두운 그림자인 열등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 뒷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는지, 자기집착에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도 나타나듯이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하면서 영혼의 만족감을 잃어버린 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우리 속에는 모세의 모습과 솔로몬의 모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나를 숨기고 싶고, 또 어떤 때는 나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집착증 환자처럼 하나에 몰입하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굽니다. 하나님이나 이웃이나 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며 달립니다.
하나님께 나의 어두운 모습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42편은 바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먼저 친구가 되라”고 말입니다. 네 자신과 화해하고 친밀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이 한 것처럼 세 가지를 해야 됩니다. 첫째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가진 최고의 축복입니다. 여기에서의 질문은 질책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라는 뜻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 (시편 42:5)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향해서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회개입니다. 내면의 상처가 자신을 위협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문제를 노출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 괜찮은 인물로 여기기보다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옛 자아를 부인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내가 가진 거짓된 자아상을 거절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자신에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은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회개가 시작되고, 그로 인해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두 번째는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42:3)
고통과 슬픔을 다시 인식하는 것,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던 삶의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옛 모습은 외로움과 상처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탈진 상태입니다.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웅덩이에 빠져서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를 뛰어넘으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어둡고 비참한 그림자조차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세상에는 소망을 둘 데가 없지 않느냐. 너 자신에게도 소망을 둘 수 없지 않느냐. 네 모습을 네가 알지 않느냐.”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를 만드신 창조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여기에 보내셨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시인은 두 가지 변화와 결심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내가 나를 격려하고 위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건 위로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은, 나를 학대하고 비하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끄러운 부분과 연약한 점까지 위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공과 업적을 향해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기로 다짐합시다.
우리도 모세처럼 버림받았다고 여겨졌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아픈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나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모세의 생애였습니다. 또한 솔로몬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성공을 향한 집착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doing)로 나의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being)만으로도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하며 달려왔다면, 이제 그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복덩이이자 축복의 통로로 세우십니다. 그러니 나도 안달복달하던 것을 멈추고, 붙잡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기쁨과 감사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간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나의 복덩이다. 내가 너를 축복의 통로로 세우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으로만 만족하며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