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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131: 1 ~ 3

김지철 목사

2008.05.25

어머니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사랑으로 헌신합니다.

얼마 전 중국 쓰촨성(四川)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마음에 아픔을 주면서 동시에 감동을 주는 사건의 보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무너진 가옥에서 구조대원들이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가슴에 품고 엎드려 있는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엄마의 품에 안겨있던 젖먹이는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던 의료진은 포대기 안에서 휴대전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메세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의사들은 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한 젊음 여성이 윗옷을 머리위로 벗어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덮었고 자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생후 백일 가량 된 딸아이를 가슴에 안고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불그스레한 얼굴로 죽은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 있었습니다.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엄마는 자기가 죽더라도 얼마동안은 아이가 젖을 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지진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구조작업이 진행되면서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식을 지켜낸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은 다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머니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집니다.

다윗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기와 같도다”(시편 133:2)

다윗은 엄마 품에 안겼던 자신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엄마 품에 안겨있던 것을 아련하게 떠올릴 뿐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시편을 썼을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아기의 얼굴에서 평온함과 만족감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엄마의 품속에만 있으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깨닫고 평안을 누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아이라고 하지 않고 젖을 다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엄마의 품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자리인 엄마 품에 안겨만 있으면 만족과 기쁨을 얻는 모습을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젖을 빠는 아이와 젖을 뗀 아이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 두 가지의 단계가 있었던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던 단계입니다. 엄마에게 젖을 좀 달라고 요청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무조건 하나님께 달라고 떼쓰기도 하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면 원망하던 신앙의 초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젖을 다 뗀 후라는 것입니다. 젖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품안에 있는 사랑과 평안을 누리면서 엄마와 함께 있는 모습을 자랑하는 다윗의 두 번째 신앙단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편 131:1)

이 구절만 읽으면 무언가 힘이 없고 무기력하고 마음에 야망과 욕심이 다 사라진 인물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갖고 있던 모습의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 눈이 오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함부로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제까지의 모습은 그 반대였습니다. 다윗의 역설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이것은 뒤집어 보아야 다윗이 본래 가지고 있던 본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이와 같은 고백의 반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나의 마음은 교만했습니다.
어제까지 나의 눈은 오만했습니다.
어제까지 큰일을 한다고 뛰어다녔습니다.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해보겠다고 우쭐대며 덤벼댔습니다. 그래서 뭔가 이 땅위에서 업적을 만들어 보려고 모든 것에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젖을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소소한 욕망까지 다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내 위대한 야망도 다 성취 시켜야 하는 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바로 내가 주인처럼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젖먹이가 젖을 주지 않는 엄마가 불필요하다고 소리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 않고 응답해주시기 않으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젖을 먹고 빠는 어린아이와 같은 억지 요구만 해왔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이제는 젖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젖 뗀 아이처럼 어머니의 품속에 앉아서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욕망을 다 제해버리라는 것일까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욕망이 없으면 인간은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발전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족할 줄 모르고 더 큰 욕망과 야망으로 나가게 될 때는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속에 만족감과 기쁨이 사라지는 초조함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의 야망과 탐욕만이 인간을 지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인간의 욕구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를 한 매슬로우(Abraham Maslow)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맨 밑 단계에서부터 위의 단계까지 피라미드로 되어있습니다. 그는 1단계에서부터 4단계까지는 인간의 하위적인 욕망이고, 5단계가 상위적인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전이 된 20세기 이론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용한 이론입니다.
첫 번째, 인간에게는 맨 밑바닥에 있는 최하위의 단계 욕구가 있는데 생리적인 욕구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로 먹고 마시는 욕망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과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욕구입니다. 배부르면 되고 등 따뜻하면 된다는 욕구로 가장 기초적인 최하위의 욕구입니다.
이런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두 번째로 인간에게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신체가 안전하고 감정과 정신세계가 안전해지도록 스스로 보호하려는 욕구입니다. 돈을 갖게 되면 여러 가지 보험에 가입하고 자녀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노후대책을 위해서도 투자합니다. 질병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의료계에 있는 누군가를 알고 싶어 하고 사귀고 싶어 합니다. 안되면 의사 사위라도 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법에 대한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판검사 며느리나 사위를 보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소속감과 애정에 대한 욕구입니다. 친구와 애인이 필요하고, 아내와 남편과 자식이 필요한 욕구입니다. 어떤 집단에 들어가서 친구들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싶은 집단 소유나 소속에 대한 욕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서 상류계층의 사람들과 사귀기를 원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가입되어 자부심을 느껴보려고도 합니다. 특수한 취미클럽에 참여해서 보통 사람들은 달지 않는 배지를 달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랑해보려는 합니다.
네 번째는 자기존중의 욕구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익명의 일반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없으면 걱정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남의 것이 더 많으면 분노하고, 남의 것이 더 적으면 좋아서 우쭐대며 오만해지는 욕구입니다. 여기까지는 하위적인 욕구입니다.

다윗은 자기실현의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매슬로우는 성공한 사람들은 다섯 번째 최고의 욕구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기실현의 욕구입니다. 나의 능력을 개발하는 욕구, 꿈을 성취하는 욕구입니다.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시키면서 자아를 완성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돈이나 사회적인 명예나 권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자신을 분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욕구를 가지고 어떤 욕구에 만족하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다윗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은 이런 욕구들보다 더 위에 있는 마음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욕구와 즐거움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행동, 수많은 업적의 결과 때문에 만족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축복을 말합니다.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의 기쁨과 만족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기쁨과 만족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젖을 빨고 있는 아이는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요? 무절제한 야망과 유아적인 의존감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친 자만성이 있습니다. 떼를 쓰고 억지를 쓰는 습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젖을 빨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젖을 못 먹으면 아이는 기를 쓰고 서럽게 통곡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울어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녀에게 조종당합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압니다. 1년이 되어도 아니 6개월이 되어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신앙도 젖을 빠는 어린 아이와 같이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종하고 내 마음대로 부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처럼 살려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엄마가 젖을 떼는 것처럼 우리의 젖을 떼려고 시도하십니다. 세살, 다섯 살 된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고 있다면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엄마는 젖을 뗍니다. 그때 아이는 울며 거절과 상실의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젖을 떼야 합니다. 아이가 엄마 자체로 만족하게 해야지 엄마의 젖 때문에 만족하는 것은 멈추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젖을 빨지 않아도 엄마가 좋은 것처럼 때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만으로도 만족하는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젖을 떼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기쁨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많기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복주의 신앙에서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한 단계를 더 뛰어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을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인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 신앙이 성숙하고 멋져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가슴으로 알면서 내 옆에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게 고백하는 신앙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처음 젖을 떼었을 때는 못 참아서 울고 발버둥치지만 젖을 떼고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는 엄마의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온 세계를 다 얻은 것처럼 느낍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만 연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젖을 떼려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기뻐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선물에만 집착했던 우리의 신앙을 바꿔 놓으려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더 좋아하며 내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의 역사를 가슴으로 깨달으면서 기뻐합시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평안함과 만족감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불안하고 답답합니까? 아직도 편안하지 못하고 무언가 억눌린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낍니까? 그것은 아직 우리 안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교만하고 오만하며 행하지 못할 것에 연연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찾아오십니다. 이제는 생각과 가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슴으로 품고 함께 계신 것을 스스로 깨닫고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뻐하는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에게 평안과 만족감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일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때 감사하고 즐기며 찬양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젖 뗀 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 품 안에서 기뻐하고 만족하며 감사하는 축복을 경험하는 복된 신앙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엄마의 젖을 빠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이것저것 달라고 보챘던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주시면 감사하고 안주시면 분노하고 원망했던 우리였습니다. 주님,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만족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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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 1 ~ 3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 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어머니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사랑으로 헌신합니다.

얼마 전 중국 쓰촨성(四川)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마음에 아픔을 주면서 동시에 감동을 주는 사건의 보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무너진 가옥에서 구조대원들이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가슴에 품고 엎드려 있는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엄마의 품에 안겨있던 젖먹이는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던 의료진은 포대기 안에서 휴대전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메세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의사들은 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한 젊음 여성이 윗옷을 머리위로 벗어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덮었고 자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생후 백일 가량 된 딸아이를 가슴에 안고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불그스레한 얼굴로 죽은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 있었습니다.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엄마는 자기가 죽더라도 얼마동안은 아이가 젖을 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지진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구조작업이 진행되면서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식을 지켜낸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은 다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머니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집니다.

다윗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기와 같도다”(시편 133:2)

다윗은 엄마 품에 안겼던 자신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엄마 품에 안겨있던 것을 아련하게 떠올릴 뿐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시편을 썼을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아기의 얼굴에서 평온함과 만족감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엄마의 품속에만 있으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깨닫고 평안을 누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아이라고 하지 않고 젖을 다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엄마의 품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자리인 엄마 품에 안겨만 있으면 만족과 기쁨을 얻는 모습을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젖을 빠는 아이와 젖을 뗀 아이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 두 가지의 단계가 있었던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던 단계입니다. 엄마에게 젖을 좀 달라고 요청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무조건 하나님께 달라고 떼쓰기도 하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면 원망하던 신앙의 초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젖을 다 뗀 후라는 것입니다. 젖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품안에 있는 사랑과 평안을 누리면서 엄마와 함께 있는 모습을 자랑하는 다윗의 두 번째 신앙단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편 131:1)

이 구절만 읽으면 무언가 힘이 없고 무기력하고 마음에 야망과 욕심이 다 사라진 인물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갖고 있던 모습의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 눈이 오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함부로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제까지의 모습은 그 반대였습니다. 다윗의 역설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이것은 뒤집어 보아야 다윗이 본래 가지고 있던 본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이와 같은 고백의 반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나의 마음은 교만했습니다.
어제까지 나의 눈은 오만했습니다.
어제까지 큰일을 한다고 뛰어다녔습니다.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해보겠다고 우쭐대며 덤벼댔습니다. 그래서 뭔가 이 땅위에서 업적을 만들어 보려고 모든 것에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젖을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소소한 욕망까지 다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내 위대한 야망도 다 성취 시켜야 하는 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바로 내가 주인처럼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젖먹이가 젖을 주지 않는 엄마가 불필요하다고 소리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 않고 응답해주시기 않으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젖을 먹고 빠는 어린아이와 같은 억지 요구만 해왔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이제는 젖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젖 뗀 아이처럼 어머니의 품속에 앉아서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욕망을 다 제해버리라는 것일까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욕망이 없으면 인간은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발전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족할 줄 모르고 더 큰 욕망과 야망으로 나가게 될 때는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속에 만족감과 기쁨이 사라지는 초조함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의 야망과 탐욕만이 인간을 지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인간의 욕구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를 한 매슬로우(Abraham Maslow)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맨 밑 단계에서부터 위의 단계까지 피라미드로 되어있습니다. 그는 1단계에서부터 4단계까지는 인간의 하위적인 욕망이고, 5단계가 상위적인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전이 된 20세기 이론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용한 이론입니다.
첫 번째, 인간에게는 맨 밑바닥에 있는 최하위의 단계 욕구가 있는데 생리적인 욕구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로 먹고 마시는 욕망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과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욕구입니다. 배부르면 되고 등 따뜻하면 된다는 욕구로 가장 기초적인 최하위의 욕구입니다.
이런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두 번째로 인간에게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신체가 안전하고 감정과 정신세계가 안전해지도록 스스로 보호하려는 욕구입니다. 돈을 갖게 되면 여러 가지 보험에 가입하고 자녀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노후대책을 위해서도 투자합니다. 질병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의료계에 있는 누군가를 알고 싶어 하고 사귀고 싶어 합니다. 안되면 의사 사위라도 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법에 대한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판검사 며느리나 사위를 보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소속감과 애정에 대한 욕구입니다. 친구와 애인이 필요하고, 아내와 남편과 자식이 필요한 욕구입니다. 어떤 집단에 들어가서 친구들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싶은 집단 소유나 소속에 대한 욕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서 상류계층의 사람들과 사귀기를 원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가입되어 자부심을 느껴보려고도 합니다. 특수한 취미클럽에 참여해서 보통 사람들은 달지 않는 배지를 달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랑해보려는 합니다.
네 번째는 자기존중의 욕구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익명의 일반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없으면 걱정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남의 것이 더 많으면 분노하고, 남의 것이 더 적으면 좋아서 우쭐대며 오만해지는 욕구입니다. 여기까지는 하위적인 욕구입니다.

다윗은 자기실현의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매슬로우는 성공한 사람들은 다섯 번째 최고의 욕구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기실현의 욕구입니다. 나의 능력을 개발하는 욕구, 꿈을 성취하는 욕구입니다.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시키면서 자아를 완성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돈이나 사회적인 명예나 권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자신을 분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욕구를 가지고 어떤 욕구에 만족하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다윗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은 이런 욕구들보다 더 위에 있는 마음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욕구와 즐거움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행동, 수많은 업적의 결과 때문에 만족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축복을 말합니다.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의 기쁨과 만족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기쁨과 만족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젖을 빨고 있는 아이는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요? 무절제한 야망과 유아적인 의존감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친 자만성이 있습니다. 떼를 쓰고 억지를 쓰는 습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젖을 빨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젖을 못 먹으면 아이는 기를 쓰고 서럽게 통곡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울어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녀에게 조종당합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압니다. 1년이 되어도 아니 6개월이 되어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신앙도 젖을 빠는 어린 아이와 같이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종하고 내 마음대로 부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처럼 살려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엄마가 젖을 떼는 것처럼 우리의 젖을 떼려고 시도하십니다. 세살, 다섯 살 된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고 있다면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엄마는 젖을 뗍니다. 그때 아이는 울며 거절과 상실의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젖을 떼야 합니다. 아이가 엄마 자체로 만족하게 해야지 엄마의 젖 때문에 만족하는 것은 멈추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젖을 빨지 않아도 엄마가 좋은 것처럼 때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만으로도 만족하는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젖을 떼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기쁨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많기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복주의 신앙에서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한 단계를 더 뛰어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을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인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 신앙이 성숙하고 멋져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가슴으로 알면서 내 옆에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게 고백하는 신앙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처음 젖을 떼었을 때는 못 참아서 울고 발버둥치지만 젖을 떼고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는 엄마의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온 세계를 다 얻은 것처럼 느낍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만 연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젖을 떼려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기뻐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선물에만 집착했던 우리의 신앙을 바꿔 놓으려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더 좋아하며 내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의 역사를 가슴으로 깨달으면서 기뻐합시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평안함과 만족감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불안하고 답답합니까? 아직도 편안하지 못하고 무언가 억눌린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낍니까? 그것은 아직 우리 안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교만하고 오만하며 행하지 못할 것에 연연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찾아오십니다. 이제는 생각과 가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슴으로 품고 함께 계신 것을 스스로 깨닫고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뻐하는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에게 평안과 만족감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일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때 감사하고 즐기며 찬양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젖 뗀 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 품 안에서 기뻐하고 만족하며 감사하는 축복을 경험하는 복된 신앙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엄마의 젖을 빠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이것저것 달라고 보챘던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주시면 감사하고 안주시면 분노하고 원망했던 우리였습니다. 주님,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만족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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