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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대의 영, 환대의 영? – 성령과 악령 18 –

히브리서 13: 1 ~ 2

김지철 목사

2017.10.22

누구나 냉대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냉대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푸대접 받고 냉대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고, 내게 상처 준 말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특히 부모님에게서 들은 부정적인 말들은 지금까지도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릅니다.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네가 웬일이냐? 공부를 다 하게!”, “너는 커서 도대체 뭐가 될래? 넌 누구를 닮아서 그러니?” 등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존감이 무너졌습니다. 의욕이 꺾이고 자신감도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부모님이라지만, 저항하고 반항하고 싶게 만든 말들입니다.
사실 부모님은 그저 화가 나서 툭 던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자녀들의 가슴에 상처로 박혔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냉대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자존심도 뭉개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은 거부당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딸은 천대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환대 받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의 어머니와 선조들이 삶을 이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반대 경향이 눈에 띕니다. 요새 젊은 부부들에게 물어보면, 딸부터 낳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한편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도 냉대 받으며 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을 잘 아실 것입니다. 쌍둥이 형제 중 동생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만을 예뻐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눈물 나게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아껴주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빠의 인정과 칭찬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까닭입니다. 어머니의 배려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가 바로 이 자존감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고투하며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아들입니다. 물론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둘째도 아들입니다. 괜찮습니다. 셋째도 아들입니다. 참을 만합니다. 그러나 넷째도, 다섯째도 아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섯째도, 일곱째도 아들입니다. 이후 여덟 번째로 다윗이 태어난 것입니다. 당시 선지자 사무엘이 아버지, 이새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가 당신의 아들 중에 있다며, 아들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이새가 어떻게 했습니까? 여덟 아들 중 일곱만 보여줬습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아들이 더 없느냐?”라고 물어보자, 그제야 “들판에 양 치러 간 막내아들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삼상16:11). 즉 이새가 다윗을 아예 없는 아들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어린 시절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귀한 존재로 여김 받지 못했던 다윗입니다.

냉대의 경험이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그토록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마 큰 이유 중 하나가 냉대 받은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형들도 자신을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졌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정해 주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삶의 순간마다 자신을 환대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평생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찬양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시편 중 상당수가 다윗의 찬가와 고백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그의 고백이 있습니다. 물론 다윗의 인생에 굴곡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넘치는 축복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위기와 고통의 순간마다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자기 삶을 맡기며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 무엇일까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질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렇게 느끼는 것, 그게 가장 큰 불행입니다.” 즉 ‘나는 쓸모없어.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게 큰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냉대는 버림받음입니다. 냉대란 다른 게 아닙니다. 내 곁의 타자를 이웃의 목록에서 삭제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내 이웃이 아니야. 너와 함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 더는 내 곁에서 얼쩡거리지 마. 너 같은 인간은 필요 없어.”라고 타인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수모와 냉대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최악의 냉대를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냉대를 받으셨습니다. 헤롯의 핍박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 왕이 지상 왕에게 박해 받은 것입니다. 또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을 따뜻하게 영접한 이가 드뭅니다. 목자들 외에는 없었습니다. 탄생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했습니다. 냉대 받고, 적대 받고, 박해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다른 사람을 환대하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낯섦에 자신을 개방해야 환대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히13:2). 이는 구약의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환대하며 대접했는데, 그들이 천사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중엔 하나님도 계셨습니다. 이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묘사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2)

낯선 손님을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천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쓰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마음씨가 넉넉해야 합니다. 너무 자기 것만을 챙기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지 않으면, 하나님도 쓰시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명하신 것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르신 것인데, 자기 욕심만 부려서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하나님이 귀히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환대가 쉽지 않은 것일까요? 환대란 낯선 것에 마음을 열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낯선 것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생깁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따뜻하게 대해야 하는데,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따뜻하게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 인심도 따뜻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만남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얘야, 낯선 사람이 친절을 베푼다고 해서 따라가면 안 된다.” 이렇게 경계와 의심을 가르칩니다. 환대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깨고 있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불안,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무의식적으로 이웃을 적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공동체 사회가 두려움의 사회가 되면 무엇이 제일 힘들까요? 갈등이 빚어지고 미움의 사회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남에게 공격 받기 전에 먼저 치명타를 날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 사회에 이미 수많은 저주의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악성댓글들이 달립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방어막을 치고 익명성에 의지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더욱이 두려움을 나르시시즘이라는 틀에 가두고, 거기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르시시즘이란 건강한 자기애가 아닙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타자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이웃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애에 함몰돼 이웃이나 타인을 소멸시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상대가 있어야 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한자로 ‘人’은 사람 둘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양입니다. 네가 있어야 나도 있고, 서로 협력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네가 잘 되어야 내가 잘 되고 네가 복을 받아야 나도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다움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 인간다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의 차이가 나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낯선 것에 열려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이를 만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위축돼 있습니다. 자신을 개방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무엇이 차 있기 때문입니까?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5절에,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는 그의 대답도 기록돼 있습니다. 즉 그는 한 달란트를 감추기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땅’이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기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남을 향한 개방성을 잃어버린 비겁한 마음입니다. 그는 마음의 문을 꽉 닫아 걸었습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가로막고는 ‘이건 나만 가질 수 있는 거야.’ 하고 자기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다음과 같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론 종아! 그것은 인생을 사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다가서고, 바라보고, 부르시며 우리를 환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가장 큰 냉대와 적대를 받으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동시에 냉대와 적대를 일삼는 인간을 가장 긍휼히 여기며 환대하신 분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환대 방식을 함께 배워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또 그분이 어떻게 자신을 개방하며 타자를 환대하셨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가섬’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다가서셨습니다. 먼저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마음이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인 분은 먼저 다가서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을 향해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다가서고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는데 가만있을 부모가 있을까요? ‘가만있으면 돌아오겠지.’ 하고 마음 놓을 수 없습니다. 일단 찾아 나설 것입니다. 왜입니까? 자녀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4)

하나님께는 한 자녀 한 자녀가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청하셨습니다. 찾아가심과 초청,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환대를 베푸시는 방식입니다. 초청하시면서 찾아가시고, 찾아가시면서 초청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환대하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두 번째는 ‘바라봄’ 곧 ‘시선’입니다. 바라봄이란 환대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면 가슴이 뜁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어릴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걱정이 됩니다. 반면 부모님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때,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어디를 보고 대화합니까? 얼굴을 보며 대화합니다. 눈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해야 ‘아, 이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대화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혹여 상대가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바라봄이란 하나님이 주신 환대의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마음이 끓어오르셨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예수님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시편 27편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10)

설령 부모가 나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만은 나를 살피시며 인도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환대와 사랑에 대한 시인의 고백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방법 중 하나가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베드로야”, “마르다야”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음성 안에 예수님의 사랑, 긍휼,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양이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은 양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함께 길을 갑니다. 이처럼 주님의 양인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도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면서 함께 걷습니다. 즉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위로와 신뢰를 얻습니다. 그분에게서 친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환대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만지시고, 식탁 교제를 나누시며 우리를 환대합니다.

네 번째는 ‘만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지셨습니다. 그들을 터치하며 위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나병환자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안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마가복음 1:41)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는데, 예수님만이 가까이 가셔서 그를 만져 주셨습니다. 또 “네가 깨끗이 될 것이다.”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만 터치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 여인도 예수님을 터치했습니다.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가복음 5장 27~28절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마가복음 5:27~28)

주님이 자신의 몸을 만지기만 해도 치료 받을 것이란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터치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준 경험이 없다며 허전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머니에게 안긴 기억이 없어 애정 결핍을 호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있다면 만져 줘야 합니다. 안아 주고 쓰다듬어 줘야 합니다. 터치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스킨십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몇 년쯤 되셨습니까?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집에 들어가면 남편을, 아내를 포옹해 주십니까? 남편이 바깥에서 들어오면 따뜻하게 안아 주면서 애썼다고 격려해 주십니까? 이러한 터치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확인이자 환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터치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우리 영혼에 기쁨과 감사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환대의 하나님이신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환대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환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최고의 환대의 표현은 ‘식탁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밥상 공동체를 나누셨습니다. 더불어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환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환대의 최고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늘 함께 먹고 마시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장소가 환대의 자리가 됩니다. 집에서 식탁 교제를 나누지 않고 늘 밖에서 먹고 들어오면, 그 가정은 뭐가 됩니까? 기숙사입니까? 자녀들은 하숙생입니까? 가정에서 먹고 마셔야 그 안에 사랑이 깃들고 마음도 풍성해집니다. 예수님도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천국 비유 말씀을 하실 때도 먹고 마시는 비유를 그렇게 많이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배는 예수님의 환대에 초청 받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도 드립니다. 예배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주님이 나를 영접하시고,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기쁨 충만, 사랑 충만해 질 때,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예배 공동체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후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족을 환대하고 이웃들을 환대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은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환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시간을 내고, 손을 펴고, 발걸음을 내딛어 이웃을 환대할 차례입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내 것이라 움켜쥐던 것을 놓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돈과 재물, 달란트를 나 혼자 쓰다가 죽으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사용한다면, 그것만큼 축복된 삶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환대 받았으니,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도 이웃을 환대하는 믿음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가 됩시다. 주님 안에서 먹고 마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이러한 귀한 역사를 만들어 가며, 그 속에서 기쁨과 감사를 발견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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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 1 ~ 2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누구나 냉대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냉대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푸대접 받고 냉대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고, 내게 상처 준 말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특히 부모님에게서 들은 부정적인 말들은 지금까지도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릅니다.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네가 웬일이냐? 공부를 다 하게!”, “너는 커서 도대체 뭐가 될래? 넌 누구를 닮아서 그러니?” 등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존감이 무너졌습니다. 의욕이 꺾이고 자신감도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부모님이라지만, 저항하고 반항하고 싶게 만든 말들입니다.
사실 부모님은 그저 화가 나서 툭 던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자녀들의 가슴에 상처로 박혔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냉대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자존심도 뭉개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은 거부당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딸은 천대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환대 받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의 어머니와 선조들이 삶을 이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반대 경향이 눈에 띕니다. 요새 젊은 부부들에게 물어보면, 딸부터 낳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한편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도 냉대 받으며 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을 잘 아실 것입니다. 쌍둥이 형제 중 동생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만을 예뻐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눈물 나게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아껴주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빠의 인정과 칭찬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까닭입니다. 어머니의 배려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가 바로 이 자존감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고투하며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아들입니다. 물론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둘째도 아들입니다. 괜찮습니다. 셋째도 아들입니다. 참을 만합니다. 그러나 넷째도, 다섯째도 아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섯째도, 일곱째도 아들입니다. 이후 여덟 번째로 다윗이 태어난 것입니다. 당시 선지자 사무엘이 아버지, 이새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가 당신의 아들 중에 있다며, 아들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이새가 어떻게 했습니까? 여덟 아들 중 일곱만 보여줬습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아들이 더 없느냐?”라고 물어보자, 그제야 “들판에 양 치러 간 막내아들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삼상16:11). 즉 이새가 다윗을 아예 없는 아들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어린 시절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귀한 존재로 여김 받지 못했던 다윗입니다.

냉대의 경험이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그토록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마 큰 이유 중 하나가 냉대 받은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형들도 자신을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졌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정해 주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삶의 순간마다 자신을 환대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평생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찬양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시편 중 상당수가 다윗의 찬가와 고백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그의 고백이 있습니다. 물론 다윗의 인생에 굴곡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넘치는 축복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위기와 고통의 순간마다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자기 삶을 맡기며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 무엇일까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질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렇게 느끼는 것, 그게 가장 큰 불행입니다.” 즉 ‘나는 쓸모없어.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게 큰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냉대는 버림받음입니다. 냉대란 다른 게 아닙니다. 내 곁의 타자를 이웃의 목록에서 삭제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내 이웃이 아니야. 너와 함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 더는 내 곁에서 얼쩡거리지 마. 너 같은 인간은 필요 없어.”라고 타인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수모와 냉대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최악의 냉대를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냉대를 받으셨습니다. 헤롯의 핍박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 왕이 지상 왕에게 박해 받은 것입니다. 또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을 따뜻하게 영접한 이가 드뭅니다. 목자들 외에는 없었습니다. 탄생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했습니다. 냉대 받고, 적대 받고, 박해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다른 사람을 환대하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낯섦에 자신을 개방해야 환대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히13:2). 이는 구약의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환대하며 대접했는데, 그들이 천사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중엔 하나님도 계셨습니다. 이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묘사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2)

낯선 손님을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천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쓰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마음씨가 넉넉해야 합니다. 너무 자기 것만을 챙기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지 않으면, 하나님도 쓰시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명하신 것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르신 것인데, 자기 욕심만 부려서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하나님이 귀히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환대가 쉽지 않은 것일까요? 환대란 낯선 것에 마음을 열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낯선 것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생깁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따뜻하게 대해야 하는데,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따뜻하게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 인심도 따뜻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만남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얘야, 낯선 사람이 친절을 베푼다고 해서 따라가면 안 된다.” 이렇게 경계와 의심을 가르칩니다. 환대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깨고 있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불안,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무의식적으로 이웃을 적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공동체 사회가 두려움의 사회가 되면 무엇이 제일 힘들까요? 갈등이 빚어지고 미움의 사회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남에게 공격 받기 전에 먼저 치명타를 날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 사회에 이미 수많은 저주의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악성댓글들이 달립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방어막을 치고 익명성에 의지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더욱이 두려움을 나르시시즘이라는 틀에 가두고, 거기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르시시즘이란 건강한 자기애가 아닙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타자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이웃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애에 함몰돼 이웃이나 타인을 소멸시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상대가 있어야 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한자로 ‘人’은 사람 둘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양입니다. 네가 있어야 나도 있고, 서로 협력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네가 잘 되어야 내가 잘 되고 네가 복을 받아야 나도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다움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 인간다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의 차이가 나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낯선 것에 열려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이를 만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위축돼 있습니다. 자신을 개방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무엇이 차 있기 때문입니까?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5절에,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는 그의 대답도 기록돼 있습니다. 즉 그는 한 달란트를 감추기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땅’이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기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남을 향한 개방성을 잃어버린 비겁한 마음입니다. 그는 마음의 문을 꽉 닫아 걸었습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가로막고는 ‘이건 나만 가질 수 있는 거야.’ 하고 자기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다음과 같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론 종아! 그것은 인생을 사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다가서고, 바라보고, 부르시며 우리를 환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가장 큰 냉대와 적대를 받으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동시에 냉대와 적대를 일삼는 인간을 가장 긍휼히 여기며 환대하신 분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환대 방식을 함께 배워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또 그분이 어떻게 자신을 개방하며 타자를 환대하셨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가섬’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다가서셨습니다. 먼저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마음이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인 분은 먼저 다가서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을 향해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다가서고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는데 가만있을 부모가 있을까요? ‘가만있으면 돌아오겠지.’ 하고 마음 놓을 수 없습니다. 일단 찾아 나설 것입니다. 왜입니까? 자녀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4)

하나님께는 한 자녀 한 자녀가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청하셨습니다. 찾아가심과 초청,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환대를 베푸시는 방식입니다. 초청하시면서 찾아가시고, 찾아가시면서 초청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환대하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두 번째는 ‘바라봄’ 곧 ‘시선’입니다. 바라봄이란 환대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면 가슴이 뜁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어릴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걱정이 됩니다. 반면 부모님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때,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어디를 보고 대화합니까? 얼굴을 보며 대화합니다. 눈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해야 ‘아, 이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대화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혹여 상대가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바라봄이란 하나님이 주신 환대의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마음이 끓어오르셨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예수님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시편 27편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10)

설령 부모가 나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만은 나를 살피시며 인도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환대와 사랑에 대한 시인의 고백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방법 중 하나가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베드로야”, “마르다야”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음성 안에 예수님의 사랑, 긍휼,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양이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은 양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함께 길을 갑니다. 이처럼 주님의 양인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도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면서 함께 걷습니다. 즉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위로와 신뢰를 얻습니다. 그분에게서 친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환대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만지시고, 식탁 교제를 나누시며 우리를 환대합니다.

네 번째는 ‘만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지셨습니다. 그들을 터치하며 위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나병환자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안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마가복음 1:41)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는데, 예수님만이 가까이 가셔서 그를 만져 주셨습니다. 또 “네가 깨끗이 될 것이다.”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만 터치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 여인도 예수님을 터치했습니다.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가복음 5장 27~28절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마가복음 5:27~28)

주님이 자신의 몸을 만지기만 해도 치료 받을 것이란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터치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준 경험이 없다며 허전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머니에게 안긴 기억이 없어 애정 결핍을 호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있다면 만져 줘야 합니다. 안아 주고 쓰다듬어 줘야 합니다. 터치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스킨십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몇 년쯤 되셨습니까?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집에 들어가면 남편을, 아내를 포옹해 주십니까? 남편이 바깥에서 들어오면 따뜻하게 안아 주면서 애썼다고 격려해 주십니까? 이러한 터치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확인이자 환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터치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우리 영혼에 기쁨과 감사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환대의 하나님이신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환대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환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최고의 환대의 표현은 ‘식탁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밥상 공동체를 나누셨습니다. 더불어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환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환대의 최고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늘 함께 먹고 마시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장소가 환대의 자리가 됩니다. 집에서 식탁 교제를 나누지 않고 늘 밖에서 먹고 들어오면, 그 가정은 뭐가 됩니까? 기숙사입니까? 자녀들은 하숙생입니까? 가정에서 먹고 마셔야 그 안에 사랑이 깃들고 마음도 풍성해집니다. 예수님도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천국 비유 말씀을 하실 때도 먹고 마시는 비유를 그렇게 많이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배는 예수님의 환대에 초청 받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도 드립니다. 예배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주님이 나를 영접하시고,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기쁨 충만, 사랑 충만해 질 때,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예배 공동체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후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족을 환대하고 이웃들을 환대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은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환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시간을 내고, 손을 펴고, 발걸음을 내딛어 이웃을 환대할 차례입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내 것이라 움켜쥐던 것을 놓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돈과 재물, 달란트를 나 혼자 쓰다가 죽으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사용한다면, 그것만큼 축복된 삶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환대 받았으니,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도 이웃을 환대하는 믿음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가 됩시다. 주님 안에서 먹고 마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이러한 귀한 역사를 만들어 가며, 그 속에서 기쁨과 감사를 발견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10월 2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냉대의 영, 환대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07, 22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히 13:1-2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누군가에게 냉대를 받았던 경험들이 있으십니까? 특히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그런 대우를 받았던 적이 있으신지요?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 ‘네가 웬일로 공부를 다 하냐?’ ‘너 커서 도대체 뭐가 될래?’ ‘넌 누구를 닮아서 이 모양이냐?’ 가슴에 못이 박히는 말들입니다. 냉대를 받는 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설교의 요약

성경에도 냉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야곱은 아빠의 사랑을 못 받고, 늘 아빠의 인정과 칭찬을 필요로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땠나요? 사무엘 앞에 모인 이새의 일곱 아들들 중에 다윗은 없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에게 여덟째아들인 다윗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환경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 것은 아닐까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최악의 냉대를 받았던 분이십니다(요1:10-11). 태어나실 때부터 헤롯 대왕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질병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하며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환대란, 낯선 것에 대한 열린 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감추려는 마음에서 자기 방어를 합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속에 자기를 파묻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전형적인 두려움과 나르시시즘을 보여 줍니다. ‘(내가)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25:25).’

예수님은 그렇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가장 큰 사랑으로 환대를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심지어 먼저 다가가시는 분이십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눅15:4). 더불어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부르십니다(마11:28). 음성으로 우리를 환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부르십니다. 친구의 음성이며 천상의 소리입니다. 위로와 신뢰의 음성입니다. 또한 경청하심으로 환대를 보여 주십니다. 맹인 바디매오와의 만남이 그러했습니다(막9:47). 불쌍히 여겨 달라는 그의 부르짖음을 경청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서로 대화하며 소통합니다. 환대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몸으로 환대를 표현하십니다. 나병환자의 그 썩어 문드러진 살을 손을 내밀어 대시고 고쳐 주십니다(막2:41). 혈루증 여인의 경우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환대는 바로 천국비유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 나라의 ‘밥상 공동체’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십니다. 천국은 우리가 환대를 받는 곳입니다(계3:20).

예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아들, 딸로 세워 집니다. 예배를 통해 환대를 경험합니다. 말씀충만, 성령충만, 기쁨충만, 사랑충만으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환대받은 자로서, 가족들을 향해, 그리고 버려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손을 내밀고, 발걸음을 옮기며,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누군가에게서 냉대를 받아 가슴에 박혀 버린 상처가 있다면 함께 나누고, 치유의 은혜를 구합시다.

2. 내가 누군가를 냉대하며 상처를 주었던 경험들이 있다면 회개하며 함께 나눠 봅시다.

3. 누군가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아, 기쁨과 감사의 은혜를 누렸었던 기억을 함께 나눕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환대하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전하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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