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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보다 의롭다(다윗의 생애 4)

사무엘상 24: 16 ~ 22

김지철 목사

2011.10.09

정신적, 영적 블랙홀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천체 물리학에 블랙홀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블랙홀이 어떻게 생겼고 왜 생겼는가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많지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블랙홀의 끌어당기는 중력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별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기에 검게 보일 수밖에 없어서 블랙홀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블랙홀에 한번 빨려 들어가면 영원히 갇혀 있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 블랙홀 이론이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인 세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적인 블랙홀, 또는 정신적, 영적인 블랙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 고정되면 모든 생각이 마비됩니다. 생각이 그냥 까맣게 멈춰서고 맙니다. 한 가지에만 절대적으로 집착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적인 블랙홀에 빠진 사람은 맹목적이 됩니다. 한번 머리에 입력한 것은 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편견이 생깁니다. 고정관념이 생겨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맙니다.
또한 정신적인 블랙홀에 빠지게 되면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부정적인 안경을 쓰고 모든 사물을 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내 탓이라고도 말하지만 동시에 남의 탓이라고 여기고 탄식하며 우울해합니다. 때로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영적인 블랙홀은 어떨까요? 여기에 빠지면 판단력이 멈춰섭니다. 원리주의자가 됩니다. 무서운 독선주의에 빠지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이름으로 영적인 블랙홀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위험한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블랙홀에 빠졌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들도 알게 모르게 블랙홀의 위험성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먼저 배운 지식, 먼저 들은 소문이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내 중심에 어느 정도 쌓아두면 다른 지식, 다른 소문이 내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때는 기득권자가 되고 맙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성숙과 성장을 거절합니다. 언제 그러할까요? 내 마음속에 수용성이 쪼그라들고 생각이 유치해질 때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어느 날 사울 왕이 청년 다윗을 만났습니다. 괜찮은 친구 같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가진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반역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사고는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다윗을 없애야 내가 안전할 것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집착으로 그에게 남았습니다.
사울 왕의 불행은 다른 곳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없애려는 생각에 붙잡혔을 때부터 그에게 불행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때로는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쭉 읽다 보면 그것은 일시적인 탄식에서 나온 방편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블랙홀에 빠질 위험성은 사울 왕에게만 있었을까요? 다윗에게도 이런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쫒기는 신세였습니다. 도망자의 심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도망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도피자가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외롭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를 쫓는 자에게 더 이상 쫓김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쫒아 오는 그 사람을 만나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 도망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윗에게도 그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드디어 이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게 됩니다. 다윗의 군대는 오합지졸의 군대 400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군대는 정예군사 3000명이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굴에 도피하고 있었을 때 사울 왕의 군대가 그를 추격해 온 것입니다. 비교해보면 거의 10대 1에 가까운 차이입니다. 다윗의 군대는 열세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순간에 역전의 상황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역전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운동경기를 볼 때에도 역전을 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지금 고달프다면 역전을 기대할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놀라운 반전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사해 서쪽 중앙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엔게디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광야면서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가파른 절벽 쪽으로는 샘이 솟아나는데 아주 장관입니다. 거기에는 굴도 있고 물도 흐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사울 왕이 단독으로 엔게디 계곡에 있는 굴에 들어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담백하게 써놓고 있습니다. 그가 용변을 보러 그 굴속에 혼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용변을 보기 위해서 겉옷을 옆에 놓았을 것입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극장에 들어가면 한 2~3분 동안은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어둠속에서 어둠이 익숙했던 인물들, 바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혼자 그 굴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에게 속삭입니다. “절호의 찬스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당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저 사울 왕을 없앨 때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던 순간에 찬스가 다가왔습니다. 부하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상 24:4上)

“바로 지금이 그날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당신 손에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면 정말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건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그를 힘들게 뒤따라왔던 부하들이 권면합니다. “지금 결정적 한방이면 사울의 생이 끝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광야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들으면서 아마도 지난 과거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아, 이제 도망자의 신세를 끝낼 수 있겠구나.’ 도망자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요?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삶이 모두 의문투성이였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분노하고 싶었고 아니, 하나님에게마저 분노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구나. 하나님이 싫고 밉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인가?’ 신앙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이 밉고, 왜 이 어려움을 그대로 놔두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런 다윗의 마음이 녹아져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왕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거짓말입니까? 내가 왕 되겠다고 나섰던 것도 아니고, 일개 목동이었던 나를 굳이 왕으로 삼겠다고 하셨으면서 왜 이렇게 내 삶을 어렵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깨닫기까지 그는 엔게디의 광야학교에서 철저히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광야가 있습니까? 광야생활이란 무엇일까요? 그곳은 황폐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사람이 그냥 살 수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수 없는 곳, 그런 곳이라면 모두 광야일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광야처럼 허덕이는 것입니다. 꿈을 가졌는데 그 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달이 나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리가 광야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광야가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광야를 경험합니다. 인간관계가 배신당하면 광야를 경험합니다. 직장에서 쫓겨나면 광야를 경험합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도 아주 널려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힘든 그 자리에서 새롭게 역전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은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내려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지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나의 미래를 가다듬는 시험무대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내려치는 손을 붙잡았습니다.
만약 그 때 사울 왕을 단칼에 내려치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역사는 가정법이 없지만, 우리는 가정법으로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빨리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빨리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파별로 나누어진, 특별히 남북에 나누어진 지파들을 통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북 통일왕국의 왕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왕으로서 세움을 받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의 이마에는 흔적 아닌 흔적이 늘 사람들에게 보였을 것입니다. 자기 군주를 배반한 사람, 그것도 살해한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그는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윗은 그때 내리치려던 칼을 멈춥니다. 그리고는 사울 왕이 옆에 두었던 겉옷의 끝자락을 칼로 몰래 베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자기 이익대로 했으면 벌써 칼로 내리쳤을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이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벌써 사울 왕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든 그 시간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내가 될까?’ 다윗은 그런 올바른 판단력을 되찾았습니다. 6절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무엘상 24:6)

다윗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멸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몇 가지의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자기의 군주였습니다. 자기는 신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장인이었습니다. 자기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사울 왕은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버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울 왕을 죽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권력은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내려치는 것이 인류 역사상 권력자들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다음을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과 이익을 위해서 단칼에 사울 왕을 베려던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 왕의 옷 끝자락을 칼로 베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5)

양심에 가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비겁해 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과 싸우면 질 것 같아서 겁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용사였습니다.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자기가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 왕을 살리면 언젠가 또 자기를 죽이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보면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것을 각오하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뒤집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열망하니까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용변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경고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불러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주었다고 말하며 그의 옷자락만 벤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보니 정말 자기의 옷자락이 베어져있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울면서 소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잘한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헛일을 했구나.’ 17절에 사울 왕은 다윗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사무엘상 24:17)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나는 너를 학대하고 죽이려고 했는데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살려줬구나. 네가 나보다 한 수 위로다. 아니, 나는 악하고 너는 선하구나!” 그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일상의 영성을 지녔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참으로 놀랄만합니다. 다윗의 생애에는 기적이 없었습니다. 치열한 삶만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만날 때에도 치열하게 대항했습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움할 때도 치열하게 싸워 승리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쫒기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때에도 다윗은 기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요행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삶에 충성스러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면 그냥 순종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는 일상의 영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매일의 삶속에 충만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나타납니다만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기적이 없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이고 하나는 다윗입니다. 요셉은 꿈 하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형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가게 됩니다. 그때 화가 나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한으로 오래 붙잡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음속에 슬픔과 분노가 있었지만 그것을 앙심처럼 가슴에 묻어두고 원한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셨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들의 삶속에 나타났습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우리에게도 앞이 안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있습니다. 큰 장벽이 나타나서 어떤 길로 가야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내가 죽느냐 상대방이 죽느냐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길을 주십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때 앙심으로 오래 간직하지 마십시오. 원한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한 맺힘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다 풀어놓으십시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음단계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것을 보여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너무 빨리 포기하지도 말고, 너무 빨리 분노하지도 말고, 너무 오래 분노를 가슴에 품지도 마십시오. 그 모든 것들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 땅위에 친히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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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 16 ~ 22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정신적, 영적 블랙홀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천체 물리학에 블랙홀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블랙홀이 어떻게 생겼고 왜 생겼는가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많지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블랙홀의 끌어당기는 중력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별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기에 검게 보일 수밖에 없어서 블랙홀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블랙홀에 한번 빨려 들어가면 영원히 갇혀 있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 블랙홀 이론이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인 세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적인 블랙홀, 또는 정신적, 영적인 블랙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 고정되면 모든 생각이 마비됩니다. 생각이 그냥 까맣게 멈춰서고 맙니다. 한 가지에만 절대적으로 집착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적인 블랙홀에 빠진 사람은 맹목적이 됩니다. 한번 머리에 입력한 것은 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편견이 생깁니다. 고정관념이 생겨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맙니다.
또한 정신적인 블랙홀에 빠지게 되면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부정적인 안경을 쓰고 모든 사물을 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내 탓이라고도 말하지만 동시에 남의 탓이라고 여기고 탄식하며 우울해합니다. 때로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영적인 블랙홀은 어떨까요? 여기에 빠지면 판단력이 멈춰섭니다. 원리주의자가 됩니다. 무서운 독선주의에 빠지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이름으로 영적인 블랙홀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위험한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블랙홀에 빠졌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들도 알게 모르게 블랙홀의 위험성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먼저 배운 지식, 먼저 들은 소문이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내 중심에 어느 정도 쌓아두면 다른 지식, 다른 소문이 내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때는 기득권자가 되고 맙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성숙과 성장을 거절합니다. 언제 그러할까요? 내 마음속에 수용성이 쪼그라들고 생각이 유치해질 때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어느 날 사울 왕이 청년 다윗을 만났습니다. 괜찮은 친구 같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가진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반역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사고는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다윗을 없애야 내가 안전할 것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집착으로 그에게 남았습니다.
사울 왕의 불행은 다른 곳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없애려는 생각에 붙잡혔을 때부터 그에게 불행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때로는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쭉 읽다 보면 그것은 일시적인 탄식에서 나온 방편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블랙홀에 빠질 위험성은 사울 왕에게만 있었을까요? 다윗에게도 이런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쫒기는 신세였습니다. 도망자의 심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도망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도피자가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외롭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를 쫓는 자에게 더 이상 쫓김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쫒아 오는 그 사람을 만나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 도망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윗에게도 그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드디어 이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게 됩니다. 다윗의 군대는 오합지졸의 군대 400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군대는 정예군사 3000명이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굴에 도피하고 있었을 때 사울 왕의 군대가 그를 추격해 온 것입니다. 비교해보면 거의 10대 1에 가까운 차이입니다. 다윗의 군대는 열세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순간에 역전의 상황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역전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운동경기를 볼 때에도 역전을 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지금 고달프다면 역전을 기대할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놀라운 반전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사해 서쪽 중앙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엔게디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광야면서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가파른 절벽 쪽으로는 샘이 솟아나는데 아주 장관입니다. 거기에는 굴도 있고 물도 흐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사울 왕이 단독으로 엔게디 계곡에 있는 굴에 들어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담백하게 써놓고 있습니다. 그가 용변을 보러 그 굴속에 혼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용변을 보기 위해서 겉옷을 옆에 놓았을 것입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극장에 들어가면 한 2~3분 동안은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어둠속에서 어둠이 익숙했던 인물들, 바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혼자 그 굴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에게 속삭입니다. “절호의 찬스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당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저 사울 왕을 없앨 때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던 순간에 찬스가 다가왔습니다. 부하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상 24:4上)

“바로 지금이 그날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당신 손에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면 정말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건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그를 힘들게 뒤따라왔던 부하들이 권면합니다. “지금 결정적 한방이면 사울의 생이 끝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광야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들으면서 아마도 지난 과거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아, 이제 도망자의 신세를 끝낼 수 있겠구나.’ 도망자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요?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삶이 모두 의문투성이였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분노하고 싶었고 아니, 하나님에게마저 분노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구나. 하나님이 싫고 밉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인가?’ 신앙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이 밉고, 왜 이 어려움을 그대로 놔두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런 다윗의 마음이 녹아져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왕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거짓말입니까? 내가 왕 되겠다고 나섰던 것도 아니고, 일개 목동이었던 나를 굳이 왕으로 삼겠다고 하셨으면서 왜 이렇게 내 삶을 어렵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깨닫기까지 그는 엔게디의 광야학교에서 철저히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광야가 있습니까? 광야생활이란 무엇일까요? 그곳은 황폐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사람이 그냥 살 수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수 없는 곳, 그런 곳이라면 모두 광야일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광야처럼 허덕이는 것입니다. 꿈을 가졌는데 그 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달이 나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리가 광야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광야가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광야를 경험합니다. 인간관계가 배신당하면 광야를 경험합니다. 직장에서 쫓겨나면 광야를 경험합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도 아주 널려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힘든 그 자리에서 새롭게 역전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은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내려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지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나의 미래를 가다듬는 시험무대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내려치는 손을 붙잡았습니다.
만약 그 때 사울 왕을 단칼에 내려치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역사는 가정법이 없지만, 우리는 가정법으로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빨리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빨리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파별로 나누어진, 특별히 남북에 나누어진 지파들을 통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북 통일왕국의 왕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왕으로서 세움을 받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의 이마에는 흔적 아닌 흔적이 늘 사람들에게 보였을 것입니다. 자기 군주를 배반한 사람, 그것도 살해한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그는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윗은 그때 내리치려던 칼을 멈춥니다. 그리고는 사울 왕이 옆에 두었던 겉옷의 끝자락을 칼로 몰래 베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자기 이익대로 했으면 벌써 칼로 내리쳤을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이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벌써 사울 왕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든 그 시간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내가 될까?’ 다윗은 그런 올바른 판단력을 되찾았습니다. 6절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무엘상 24:6)

다윗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멸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몇 가지의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자기의 군주였습니다. 자기는 신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장인이었습니다. 자기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사울 왕은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버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울 왕을 죽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권력은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내려치는 것이 인류 역사상 권력자들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다음을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과 이익을 위해서 단칼에 사울 왕을 베려던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 왕의 옷 끝자락을 칼로 베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5)

양심에 가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비겁해 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과 싸우면 질 것 같아서 겁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용사였습니다.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자기가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 왕을 살리면 언젠가 또 자기를 죽이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보면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것을 각오하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뒤집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열망하니까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용변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경고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불러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주었다고 말하며 그의 옷자락만 벤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보니 정말 자기의 옷자락이 베어져있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울면서 소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잘한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헛일을 했구나.’ 17절에 사울 왕은 다윗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사무엘상 24:17)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나는 너를 학대하고 죽이려고 했는데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살려줬구나. 네가 나보다 한 수 위로다. 아니, 나는 악하고 너는 선하구나!” 그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일상의 영성을 지녔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참으로 놀랄만합니다. 다윗의 생애에는 기적이 없었습니다. 치열한 삶만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만날 때에도 치열하게 대항했습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움할 때도 치열하게 싸워 승리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쫒기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때에도 다윗은 기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요행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삶에 충성스러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면 그냥 순종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는 일상의 영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매일의 삶속에 충만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나타납니다만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기적이 없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이고 하나는 다윗입니다. 요셉은 꿈 하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형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가게 됩니다. 그때 화가 나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한으로 오래 붙잡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음속에 슬픔과 분노가 있었지만 그것을 앙심처럼 가슴에 묻어두고 원한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셨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들의 삶속에 나타났습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우리에게도 앞이 안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있습니다. 큰 장벽이 나타나서 어떤 길로 가야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내가 죽느냐 상대방이 죽느냐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길을 주십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때 앙심으로 오래 간직하지 마십시오. 원한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한 맺힘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다 풀어놓으십시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음단계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것을 보여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너무 빨리 포기하지도 말고, 너무 빨리 분노하지도 말고, 너무 오래 분노를 가슴에 품지도 마십시오. 그 모든 것들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 땅위에 친히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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