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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골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국민들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던 신지애 선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작년 한해 신인상과 상금왕, 다승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녀가 어렸을 때 훈련받았던 이야기가 기록된 기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담력 훈련을 쌓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박세리 언니가 담력을 키우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연습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력을 키운다고 새벽2시에 일어나 두 차례나 공동묘지에 갔었다. 하지만 너무나 무서워서 크게 찬양을 불렀던 기억이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과거의 시절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들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국민에게 한 연설 중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바로 그 두려움 자체입니다.”
이것은 당시 경기침체에 빠졌던 미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그 이면에 계속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공포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여섯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통의 두려움입니다. 어딘가에 부딪혀 아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아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집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현실감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연약함의 두려움입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됩니다. 노력해도 안 됩니다. 무언가 목표를 가질 때마다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이 때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다섯 번째는 외로움의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혼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여섯 번째는 혼돈의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혼돈 속에 뒤엉켜져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들을 해보셨거나 주위에서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렇게 건강했는데 갑자기 질병에 걸립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해보니까 암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기도해주고 돌보아주지만, 결국 고통 받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뿐인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깊은 외로움의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 모두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두려움을 부정하는 문화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기초 교육을 받습니다. “얘야, 두려움이란 모든 좋은 것을 훼방하는 못된 감정이란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두려움을 멀리 떨쳐버리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거나, 말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오직 겁쟁이들과 비겁자들만이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두려움은 용기와 담대함이 부족한 것이며 능력이 없는 장애물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쓸 데 없는 것, 버려야 할 것, 버리지 못하면 깊숙한 곳에 감춰둬야 할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아주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인 아이드리언 리치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한다. 그러나 만일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흥분하게 되고, 오만불손하며, 자기 파괴적이게 된다.”
사실 두려움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잘났던 나, 뽐내고 싶었던 나, 자신만만했던 내가 어느 날 두려움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내게 다가오시는 영원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적대국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신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기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징계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진정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인 공황, 영적인 두려움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두려움이 속에 침전되면 우울증이 됩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토해내면 분노가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면 신앙의 축복으로 승화됩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용기일까요? 담대함일까요? 자기 훈련일까요? 아닙니다. 용기를 가지겠다고 다짐한다 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담대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사랑이란 인생을 사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진실의 초석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사랑하면 담대해집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설령 그것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용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도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무서움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움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충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조건들이 있습니까? 조건 있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속임수를 써가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랑이 너무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향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하고 낙담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노심초사합니다. 사랑을 얻어도 오래갈 수 있을지 두려워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처음에는 “야곱아” 라고 부르십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꿈치를 잡는 자, 움켜쥐는 자, 빼앗는 자, 자기 탐욕을 지닌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왜 야곱이라고 불렀을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 네 연약한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 네가 부족해도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는 내게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이라는 이름을 부르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또 한 번은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야곱이지만 이스라엘이 될 사람이다. 나와 싸워 이긴 자가 아니냐? 너는 멋진 인물이다. 너는 보배로운 존재다. 너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다. 내가 야곱의 모습도 사랑하지만, 너는 이스라엘이 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귀히 여기시면서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으로 깨달을 때, 우리는 인생을 포기하게 될 만큼 두렵고 무서운 공포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이 살맛나는 소중한 현장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여러분, 사랑해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네 전체가 나에게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 전체가 네게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와 너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절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은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려고 약속하십니다.
나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놓여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뿐입니다.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하며 위축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두려움을 하나님 없이 내 안에만 쌓아두면 나를 우울증으로 몰아가 불안해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 없이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터트리면 분노가 되어 공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것을 그대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두려움 없이 주님과 더불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환경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환경을 지배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눈에 보배로다. 내 눈에 소중하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가던지 불 가운데로 지나가던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 함께 새로운 삶의 역사를 이룩하자.”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신 이 약속을 가슴에 새기면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올 한 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 43: 1 ~ 7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골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국민들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던 신지애 선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작년 한해 신인상과 상금왕, 다승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녀가 어렸을 때 훈련받았던 이야기가 기록된 기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담력 훈련을 쌓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박세리 언니가 담력을 키우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연습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력을 키운다고 새벽2시에 일어나 두 차례나 공동묘지에 갔었다. 하지만 너무나 무서워서 크게 찬양을 불렀던 기억이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과거의 시절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들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국민에게 한 연설 중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바로 그 두려움 자체입니다.”
이것은 당시 경기침체에 빠졌던 미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그 이면에 계속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공포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여섯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통의 두려움입니다. 어딘가에 부딪혀 아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아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집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현실감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연약함의 두려움입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됩니다. 노력해도 안 됩니다. 무언가 목표를 가질 때마다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이 때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다섯 번째는 외로움의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혼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여섯 번째는 혼돈의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혼돈 속에 뒤엉켜져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들을 해보셨거나 주위에서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렇게 건강했는데 갑자기 질병에 걸립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해보니까 암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기도해주고 돌보아주지만, 결국 고통 받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뿐인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깊은 외로움의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 모두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두려움을 부정하는 문화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기초 교육을 받습니다. “얘야, 두려움이란 모든 좋은 것을 훼방하는 못된 감정이란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두려움을 멀리 떨쳐버리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거나, 말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오직 겁쟁이들과 비겁자들만이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두려움은 용기와 담대함이 부족한 것이며 능력이 없는 장애물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쓸 데 없는 것, 버려야 할 것, 버리지 못하면 깊숙한 곳에 감춰둬야 할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아주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인 아이드리언 리치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한다. 그러나 만일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흥분하게 되고, 오만불손하며, 자기 파괴적이게 된다.”
사실 두려움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잘났던 나, 뽐내고 싶었던 나, 자신만만했던 내가 어느 날 두려움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내게 다가오시는 영원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적대국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신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기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징계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진정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인 공황, 영적인 두려움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두려움이 속에 침전되면 우울증이 됩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토해내면 분노가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면 신앙의 축복으로 승화됩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용기일까요? 담대함일까요? 자기 훈련일까요? 아닙니다. 용기를 가지겠다고 다짐한다 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담대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사랑이란 인생을 사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진실의 초석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사랑하면 담대해집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설령 그것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용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도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무서움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움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충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조건들이 있습니까? 조건 있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속임수를 써가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랑이 너무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향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하고 낙담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노심초사합니다. 사랑을 얻어도 오래갈 수 있을지 두려워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처음에는 “야곱아” 라고 부르십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꿈치를 잡는 자, 움켜쥐는 자, 빼앗는 자, 자기 탐욕을 지닌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왜 야곱이라고 불렀을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 네 연약한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 네가 부족해도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는 내게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이라는 이름을 부르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또 한 번은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야곱이지만 이스라엘이 될 사람이다. 나와 싸워 이긴 자가 아니냐? 너는 멋진 인물이다. 너는 보배로운 존재다. 너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다. 내가 야곱의 모습도 사랑하지만, 너는 이스라엘이 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귀히 여기시면서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으로 깨달을 때, 우리는 인생을 포기하게 될 만큼 두렵고 무서운 공포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이 살맛나는 소중한 현장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여러분, 사랑해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네 전체가 나에게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 전체가 네게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와 너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절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은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려고 약속하십니다.
나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놓여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뿐입니다.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하며 위축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두려움을 하나님 없이 내 안에만 쌓아두면 나를 우울증으로 몰아가 불안해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 없이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터트리면 분노가 되어 공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것을 그대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두려움 없이 주님과 더불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환경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환경을 지배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눈에 보배로다. 내 눈에 소중하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가던지 불 가운데로 지나가던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 함께 새로운 삶의 역사를 이룩하자.”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신 이 약속을 가슴에 새기면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올 한 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