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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 제1계명 –

신명기 5: 1 ~ 7

김지철 목사

2009.01.18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오바마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를 합니다. 이런 기독교적인 틀이 미국 헌법정신의 위반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지만 미국의 신앙적인 전통에 따라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인들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슴에 어떤 하나님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모습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21세기 미국인의 신앙을 미국 베일러대학교 종교연구소가 갤럽에 의뢰해서 2006년 12월에 얻은 결과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설문지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을 중심으로 29개의 문항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사의 개인적인 삶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시는지 그 정도에 따라 강약을 표시하게 했습니다. 또 다른 질문 중 하나는 인간이 지은 악과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진노하며 징계하고 계신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나온 결과는 응답자의 약 3분의 1정도가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개입하실 뿐만 아니라 불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권위주의적인 하나님(Authoritarian God), 엄정하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이것과는 반대로 약 4분의 1정도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기는 하셨지만 이제는 손을 떼시고 멀리 떨어져 바라만보고 계시는 하나님(Distant God)의 모습에 동조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절대적인 표준을 만들어 놓으셨지만 그 표준에 미달해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Benenolent God)으로 이해했습니다.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대답을 한 것은 엄정한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진노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정말 징계하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한번 세상을 만들어놓으시고는 저 멀리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인가요? 우리의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다정하고 친밀한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때로 무섭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권위는 막강합니다. 때로 심술궂은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이 폭군처럼 명령을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하나님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떠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일계명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신명기 5:7)

이것은 아주 강력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서 마음속에 괜한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받지 않으면 야단을 맞거나 징계를 받을까봐 체념하면서 두려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명령만하시고 우리에게는 순종만 원하는 분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종교가 없던 애굽 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바로라는 독재적인 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십계명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자유자다. 자유자이기 때문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여러분, 자유가 무엇일까요? 자유는 인간이 지닌 모든 욕망을 마음대로 분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자유란 욕망에 대한 자기절제이고 선택입니다. 자기 결단의 과정이 없는 욕망이란 인간을 파괴시킬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능력과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기다리시며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선택과 결단을 박탈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이 세상에 등장한 독재자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독재자들」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오버리라는 사람이 지난 20세기에 등장했던 가장 악한 독재자 두 사람 히틀러와 스탈린을 연구해서 책을 썼습니다. 독재자는 개인숭배를 통해서 자기 영광을 취하기에 국민의 개인특권은 사라집니다. 다만 자기가 만든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집단만이 존재하게 만듭니다. 개인의 선택과 결단의 권리를 박탈합니다. 이것을 강제로 시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력을 쓰고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키는 독재자들의 모습을 책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이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뿌리 깊은 미움과 증오심입니다. 뿌리 깊은 분노로 그들은 생명력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는 이런 것을 이용해서 전쟁까지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독재자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운동은 중세 역사 속에서 한때 잘못된 이데올로기 종교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본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하는 마틴 루터 같은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개인이 소중합니다. 기독교는 집단을 말하지만 개인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적대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포용력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오래 참으십니다. 인간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리처드 오버리는 책에서 기독교는 레닌과 스탈린이 주도했던 소련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나치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와도 양립할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십계명은 기독교 윤리가 아니라 자유와 축복의 헌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을까요?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시내산이라는 곳에 임재하면서 모세에게 주시는 십계명의 내용이 마치 중계하듯이 그려 있습니다. 신명기 5장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다가 이제 가나안을 눈앞에 보면서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자유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지 가르친 것입니다.
십계명은 자유자가 되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말씀하는 자유에로의 헌장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독교 윤리가 아닙니다. 자유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축복의 헌장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앞에 자유자가 되려면 마음속에 선택하고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의견을 명백히 표출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 원하십니다. 거짓된 것에 더 이상 시달리지 말고, 진리의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십니다. 노예로 억압당하면서 가짜 우상에게 붙잡히지 말고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 자유자로 나와 자녀답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유한 사람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선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단해야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상태를 취해서는 자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에는 결정적인 사건,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싫고 옳음을 결정해야 참된 자유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결정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음으로 시간과 정열이 얼마나 낭비되었는지 모릅니다. 노예란 결단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자라고 부르면서 결정권을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

하나님은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십니다. “나 외에”라는 말씀에는 “내 면전에서”, “내 눈앞에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런 의미입니다. “자신을 노예로 삼지 말라. 자기를 희생양이라고 비하하면서 살지 말라. 자기를 종속된 존재라고 비굴하게 살지 말라. 하나님 아닌 것이 우상이 되어 내 안에 들어올 때 분노하고 내쫓으라.”
삶은 선택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목표를 선택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목표가 정확해야 동기부여가 됩니다. 목표가 있어야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화되고 긍정적인 자아정체성이 확립됩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 내가 참 자유자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아니면 썩어질 것, 사라질 것, 무너질 것에 인생의 목표를  걸고 살고 있느냐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인생은 낭비요, 결단하지 않는 인생은 소중한 삶을 다 쓰레기통에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신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왕이라는 독재자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은 자유의 하나님,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멀리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음과 탄식을 들으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끊임없이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옆에서 나를 돕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시편 145:18)

사랑이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운명으로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와 가까이 있어 다른 헛된 것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생명과 구원,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걸어가자고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십계명의 제 1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3:13)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리까” (시편 89:6)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과 맞수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려는 모든 시도는 다 헛된 수고에 불과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탄의 억압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느 누구와 하나님을 비교할 자가 있겠느냐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2:8)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4:6)

인간이 거짓우상에게 붙잡히는 한 자유가 없고 노예의 삶을 살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입니다. 거짓 우상들에게 붙잡히는 것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억압과 노예의 삶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유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속할 때만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애굽땅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나만 섬기라. 나와 동행해라.”
하나님은 당연히 요구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으시는 엄청난 모험을 하셨습니다. 극단적인 위험도 감당하시며 수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수고하며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루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별 것 아닌 사소한 사이가 아닙니다. 열정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세상에 어떤 연인보다도 더 가깝고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시면서 호되게 질책하십니다. “네가 간음을 행했구나. 네가 간통한 자구나.”
이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깊은 애정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남편처럼 질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축복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재자가 되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해방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려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열정과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거짓 주인에서 참된 주인으로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라는 사탄의 왕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의 고백을 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에게는 나뿐이야. 나 좀 봐. 나밖에 없어.”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있잖아.” 하나님의 표현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 생명과 자유의 축복이 있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을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학을 하면서 제 신앙이 흔들리고 마음이 낙심되고 고통이 다가와 슬플 때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너는 다른데를 보지 말라.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말라. 너는 나를 위하여 인생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내가 네게 모든 것으로 주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좌절하고 의심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첫 번째 십계명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데 보지 말고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며 받아주실 것입니다. “내가 네게 자유와 생명을 주겠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네게 맡기겠다. 이것이 네 인생의 새로운 지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거짓우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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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5: 1 ~ 7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7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오바마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를 합니다. 이런 기독교적인 틀이 미국 헌법정신의 위반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지만 미국의 신앙적인 전통에 따라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인들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슴에 어떤 하나님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모습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21세기 미국인의 신앙을 미국 베일러대학교 종교연구소가 갤럽에 의뢰해서 2006년 12월에 얻은 결과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설문지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을 중심으로 29개의 문항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사의 개인적인 삶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시는지 그 정도에 따라 강약을 표시하게 했습니다. 또 다른 질문 중 하나는 인간이 지은 악과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진노하며 징계하고 계신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나온 결과는 응답자의 약 3분의 1정도가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개입하실 뿐만 아니라 불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권위주의적인 하나님(Authoritarian God), 엄정하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이것과는 반대로 약 4분의 1정도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기는 하셨지만 이제는 손을 떼시고 멀리 떨어져 바라만보고 계시는 하나님(Distant God)의 모습에 동조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절대적인 표준을 만들어 놓으셨지만 그 표준에 미달해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Benenolent God)으로 이해했습니다.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대답을 한 것은 엄정한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진노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정말 징계하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한번 세상을 만들어놓으시고는 저 멀리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인가요? 우리의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다정하고 친밀한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때로 무섭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권위는 막강합니다. 때로 심술궂은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이 폭군처럼 명령을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하나님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떠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일계명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신명기 5:7)

이것은 아주 강력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서 마음속에 괜한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받지 않으면 야단을 맞거나 징계를 받을까봐 체념하면서 두려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명령만하시고 우리에게는 순종만 원하는 분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종교가 없던 애굽 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바로라는 독재적인 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십계명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자유자다. 자유자이기 때문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여러분, 자유가 무엇일까요? 자유는 인간이 지닌 모든 욕망을 마음대로 분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자유란 욕망에 대한 자기절제이고 선택입니다. 자기 결단의 과정이 없는 욕망이란 인간을 파괴시킬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능력과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기다리시며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선택과 결단을 박탈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이 세상에 등장한 독재자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독재자들」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오버리라는 사람이 지난 20세기에 등장했던 가장 악한 독재자 두 사람 히틀러와 스탈린을 연구해서 책을 썼습니다. 독재자는 개인숭배를 통해서 자기 영광을 취하기에 국민의 개인특권은 사라집니다. 다만 자기가 만든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집단만이 존재하게 만듭니다. 개인의 선택과 결단의 권리를 박탈합니다. 이것을 강제로 시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력을 쓰고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키는 독재자들의 모습을 책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이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뿌리 깊은 미움과 증오심입니다. 뿌리 깊은 분노로 그들은 생명력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는 이런 것을 이용해서 전쟁까지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독재자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운동은 중세 역사 속에서 한때 잘못된 이데올로기 종교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본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하는 마틴 루터 같은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개인이 소중합니다. 기독교는 집단을 말하지만 개인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적대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포용력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오래 참으십니다. 인간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리처드 오버리는 책에서 기독교는 레닌과 스탈린이 주도했던 소련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나치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와도 양립할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십계명은 기독교 윤리가 아니라 자유와 축복의 헌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을까요?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시내산이라는 곳에 임재하면서 모세에게 주시는 십계명의 내용이 마치 중계하듯이 그려 있습니다. 신명기 5장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다가 이제 가나안을 눈앞에 보면서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자유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지 가르친 것입니다.
십계명은 자유자가 되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말씀하는 자유에로의 헌장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독교 윤리가 아닙니다. 자유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축복의 헌장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앞에 자유자가 되려면 마음속에 선택하고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의견을 명백히 표출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 원하십니다. 거짓된 것에 더 이상 시달리지 말고, 진리의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십니다. 노예로 억압당하면서 가짜 우상에게 붙잡히지 말고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 자유자로 나와 자녀답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유한 사람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선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단해야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상태를 취해서는 자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에는 결정적인 사건,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싫고 옳음을 결정해야 참된 자유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결정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음으로 시간과 정열이 얼마나 낭비되었는지 모릅니다. 노예란 결단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자라고 부르면서 결정권을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

하나님은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십니다. “나 외에”라는 말씀에는 “내 면전에서”, “내 눈앞에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런 의미입니다. “자신을 노예로 삼지 말라. 자기를 희생양이라고 비하하면서 살지 말라. 자기를 종속된 존재라고 비굴하게 살지 말라. 하나님 아닌 것이 우상이 되어 내 안에 들어올 때 분노하고 내쫓으라.”
삶은 선택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목표를 선택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목표가 정확해야 동기부여가 됩니다. 목표가 있어야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화되고 긍정적인 자아정체성이 확립됩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 내가 참 자유자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아니면 썩어질 것, 사라질 것, 무너질 것에 인생의 목표를  걸고 살고 있느냐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인생은 낭비요, 결단하지 않는 인생은 소중한 삶을 다 쓰레기통에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신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왕이라는 독재자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은 자유의 하나님,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멀리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음과 탄식을 들으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끊임없이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옆에서 나를 돕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시편 145:18)

사랑이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운명으로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와 가까이 있어 다른 헛된 것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생명과 구원,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걸어가자고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십계명의 제 1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3:13)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리까” (시편 89:6)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과 맞수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려는 모든 시도는 다 헛된 수고에 불과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탄의 억압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느 누구와 하나님을 비교할 자가 있겠느냐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2:8)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4:6)

인간이 거짓우상에게 붙잡히는 한 자유가 없고 노예의 삶을 살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입니다. 거짓 우상들에게 붙잡히는 것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억압과 노예의 삶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유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속할 때만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애굽땅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나만 섬기라. 나와 동행해라.”
하나님은 당연히 요구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으시는 엄청난 모험을 하셨습니다. 극단적인 위험도 감당하시며 수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수고하며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루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별 것 아닌 사소한 사이가 아닙니다. 열정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세상에 어떤 연인보다도 더 가깝고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시면서 호되게 질책하십니다. “네가 간음을 행했구나. 네가 간통한 자구나.”
이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깊은 애정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남편처럼 질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축복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재자가 되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해방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려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열정과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거짓 주인에서 참된 주인으로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라는 사탄의 왕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의 고백을 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에게는 나뿐이야. 나 좀 봐. 나밖에 없어.”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있잖아.” 하나님의 표현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 생명과 자유의 축복이 있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을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학을 하면서 제 신앙이 흔들리고 마음이 낙심되고 고통이 다가와 슬플 때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너는 다른데를 보지 말라.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말라. 너는 나를 위하여 인생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내가 네게 모든 것으로 주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좌절하고 의심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첫 번째 십계명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데 보지 말고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며 받아주실 것입니다. “내가 네게 자유와 생명을 주겠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네게 맡기겠다. 이것이 네 인생의 새로운 지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거짓우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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