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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빛을!
독일의 문호였던 괴테가 마지막 죽기 전에 유언처럼 했던 말이 있습니다. “조금 더 빛을!” 누워있는 자리가 너무 어두워서 태양빛을 더 보고 싶다는 말도 되고,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빛을 그리워하면서 철학적인 언어로 토해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육체의 갈급함으로 나타나고 육체의 갈급함 또한 영혼의 갈급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보면 악마를 가장한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합니다. 이 ‘메피스토펠레스’라는 말은 ‘메’라고 하는 ‘아니오’라는 말과 ‘포스’라고 하는 ‘빛’이라는 말과 ‘필로스’라고 하는 ‘사랑하는 자’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해 보면 ‘빛을 사랑하지 않는 자’, ‘빛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책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미끼의 말을 던집니다.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일세. 푸르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지. 네게 젊음을 다시 회복시켜 줄 테니 네 영혼을 내게 파시게.”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습니다. 파우스트는 젊음을 얻었지만 그의 영혼을 팔아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이 다가왔을 때 파우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이 자유와 생명을 너무도 쉽게 악마에게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리따운 여인 그리고 순전한 여인이었던 그레트헨으로 말미암아 그는 구원을 얻게 되고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이 책은 마지막을 이런 글로 끝내고 있습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고지순의 사랑을 염원했던 괴테의 속마음처럼 보입니다. 괴테는 죽음 앞에서 더 많은 빛, 그리고 사랑의 빛을 갈구하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빛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태양빛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양빛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과 자외선처럼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으로 구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태양빛은 그 전체로 우리 인간의 몸에 자양분처럼 귀한 것들을 가져다줍니다. 태양빛은 신체의 신경화학 물질과 호르몬을 조절하며 신체의 자연적인 리듬을 만들어갑니다. 또한 태양빛이 부족할 때 우리의 몸에는 면역체계의 약화가 나타나며 몸에 불균형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의기소침해지는 정신적인 침체와 정신적인 질병이 발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 몸에 비타민과 영양분이 있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과 영혼과 육체에도 최소한의 햇빛 요구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빛은 심장박동과 혈압, 혈당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인내심, 스트레스 조절능력,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원기 같은 것도 이 태양빛과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빛이십니다. 당신이 빛이시면서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땅에 햇빛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육체를 위한 햇빛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빛까지 비추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빛이시고 성령님께서도 진리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도 그들에게 자신의 빛의 모습을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내 어두운 길을 등불처럼 비추시고 빛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곧 빛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8)
여기 보면 우리가 본래 어둠속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become이 아니라 be동사입니다. 이미 빛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때에도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 되라”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속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인줄 알고 한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빛의 자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내속에 있는 어둠이 너무 커서 내게 빛이 없는 것 같다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내속의 어둠이 나를 억누르고 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둠은 어둠으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어둠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빛이 있어야 쫓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빛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인가? 예수님만이 내 생명과 소망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결정적인 은혜의 빛이신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빛의 자리로 들어오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아무리 내속의 어둠을 쫓아내려고 해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내 가슴으로 받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매일 몰려오는 어둠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분의 나의 생명수로 삼으십시오
이때 우리는 신앙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극복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한번 영접하면, 우리가 빛으로 한번 들어가면 그 빛이 이제는 쇠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나는 저절로 빛의 자녀답게 살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땅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무성한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믿으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서 내 신앙도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신앙이 될 거야.’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시도도 안합니다. 어떤 도전도 안합니다. 어떤 노력과 모험과 훈련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빛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스스로를 나무랍니다. 때로는 자포자기를 합니다. 패배주의적 사고 속에서 들어가기도 합니다. 자신의 무능을 탓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세상이 빛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나는 빛의 자녀가 아니야.’ 라고 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세상의 빛이라고, 너는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절하고 있는 나 자신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싹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줄기가 뻗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씨앗은 우선 살아있는 생명의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그 씨앗을 펄펄 끓는 물에 담가놓았다가 꺼내면 그 씨앗을 아무리 뿌려도 자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싹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속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의 생명이어야 우리가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와 더불어 계시지 않으면 내 속에서 영적인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화초를 키워보셨습니까? 화초는 매일매일 물을 주어야합니다. 때로는 며칠마다 주어야합니다. 때로는 햇빛을 쬐어줘야 합니다. 들판에 핀 나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자라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를 기다립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속깊이 물기가 있는 곳까지 뿌리를 뻗어나갑니다. 그리고 모든 나뭇잎들은 해를 향해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물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생명수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살아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말씀도 읽지 않으면서 ‘내 신앙은 왜 이래? 왜 내 신앙은 이 모양 이 꼴이야?’ 라며 스스로를 탓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내속에 있는 어둠만을 탓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할 것입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의 세계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속에 계속 머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얘야. 정욕과 타락의 어둠에서 언젠가는 네가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떠나가지 마라. 지금은 조금 더 즐겨보아라. 지금은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이 쾌락이 너를 재미있게 하지 않는가? 거기에 조금만 더 머물러 있어라.” 하고 우리를 꼬드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탄의 꼬드김에 우리 또한 맞장구를 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까지 이렇게 합니다. “주님, 저는 이 어둠의 구덩이에서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능력을 주지 않아서 저는 주님 앞에 나가고 싶지만 지금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스스로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한발은 빛의 자리에, 한발은 어둠의 자리에 들여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둠의 자리를 즐기면서 “주님, 지금은 아닙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라고 핑계대지는 않습니까?
성 어거스틴도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기에 접어들어 육체적인 쾌락에 빠졌을 때 그는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순결하기를 원했습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빛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도하면서도 어둠의 골짜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가 쓴 고백록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역설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에게 순결과 절제를 허락하옵소서. 하오나 지금은 마옵소서.” 그러면서 그는 다음절에 이 기도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내 기도를 빨리 들어 주사 당신이 나를 정욕이라는 병에서 빨리 고쳐주실까 두려웠음이니라. 나는 정욕의 불이 꺼져가는 것보다는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더 소원했나이다.” 라고 자신의 그때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탄식하는 기도가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내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야 하나이까? 왜 지금은 할 수 없나이까? 왜 지금 이 시간 나의 치욕이 끝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했습니다. 이때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린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디론가부터 책을 펴서 읽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구절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이 말씀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정욕을 위해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낮에와 같이, 빛의 자녀와 같이 행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모든 것을 벗어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것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나아오면서 그는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으로 나아오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어둠은 무엇입니까? 그 어둠을 벗어내고 빛으로 나아와야합니다. 그리고 빛의 역사를 내 가슴으로 받아야 합니다. 태양은 달을 비추고 있습니다. 태양은 발광체이고 달은 반사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광체이고 우리는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계십니다. 내가 어둠속에 있을 때에도 나를 비추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보름달의 모습으로 환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점점 그믐달이 되어갑니다.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 속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어둠을 향해서 자꾸만 나아갑니다. 돌아와야 됩니다. 초승달에서 다시 보름달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우리에게 어둠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 하겠다고, 모레 하겠다고, 때가 되면 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을 놓치면 영원히 회개할 수 없는 그 날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5:14)
주님께서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속에서, 어둠속에서 주저앉아있으면 예수님께서 비추는 빛이 우리의 삶에 역동적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빛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비록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주님과 더불어 세상에 빛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우리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5: 8 ~ 14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조금 더 빛을!
독일의 문호였던 괴테가 마지막 죽기 전에 유언처럼 했던 말이 있습니다. “조금 더 빛을!” 누워있는 자리가 너무 어두워서 태양빛을 더 보고 싶다는 말도 되고,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빛을 그리워하면서 철학적인 언어로 토해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육체의 갈급함으로 나타나고 육체의 갈급함 또한 영혼의 갈급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보면 악마를 가장한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합니다. 이 ‘메피스토펠레스’라는 말은 ‘메’라고 하는 ‘아니오’라는 말과 ‘포스’라고 하는 ‘빛’이라는 말과 ‘필로스’라고 하는 ‘사랑하는 자’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해 보면 ‘빛을 사랑하지 않는 자’, ‘빛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책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미끼의 말을 던집니다.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일세. 푸르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지. 네게 젊음을 다시 회복시켜 줄 테니 네 영혼을 내게 파시게.”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습니다. 파우스트는 젊음을 얻었지만 그의 영혼을 팔아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이 다가왔을 때 파우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이 자유와 생명을 너무도 쉽게 악마에게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리따운 여인 그리고 순전한 여인이었던 그레트헨으로 말미암아 그는 구원을 얻게 되고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이 책은 마지막을 이런 글로 끝내고 있습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고지순의 사랑을 염원했던 괴테의 속마음처럼 보입니다. 괴테는 죽음 앞에서 더 많은 빛, 그리고 사랑의 빛을 갈구하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빛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태양빛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양빛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과 자외선처럼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으로 구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태양빛은 그 전체로 우리 인간의 몸에 자양분처럼 귀한 것들을 가져다줍니다. 태양빛은 신체의 신경화학 물질과 호르몬을 조절하며 신체의 자연적인 리듬을 만들어갑니다. 또한 태양빛이 부족할 때 우리의 몸에는 면역체계의 약화가 나타나며 몸에 불균형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의기소침해지는 정신적인 침체와 정신적인 질병이 발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 몸에 비타민과 영양분이 있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과 영혼과 육체에도 최소한의 햇빛 요구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빛은 심장박동과 혈압, 혈당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인내심, 스트레스 조절능력,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원기 같은 것도 이 태양빛과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빛이십니다. 당신이 빛이시면서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땅에 햇빛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육체를 위한 햇빛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빛까지 비추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빛이시고 성령님께서도 진리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도 그들에게 자신의 빛의 모습을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내 어두운 길을 등불처럼 비추시고 빛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곧 빛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8)
여기 보면 우리가 본래 어둠속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become이 아니라 be동사입니다. 이미 빛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때에도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 되라”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속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인줄 알고 한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빛의 자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내속에 있는 어둠이 너무 커서 내게 빛이 없는 것 같다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내속의 어둠이 나를 억누르고 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둠은 어둠으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어둠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빛이 있어야 쫓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빛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인가? 예수님만이 내 생명과 소망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결정적인 은혜의 빛이신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빛의 자리로 들어오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아무리 내속의 어둠을 쫓아내려고 해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내 가슴으로 받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매일 몰려오는 어둠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분의 나의 생명수로 삼으십시오
이때 우리는 신앙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극복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한번 영접하면, 우리가 빛으로 한번 들어가면 그 빛이 이제는 쇠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나는 저절로 빛의 자녀답게 살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땅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무성한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믿으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서 내 신앙도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신앙이 될 거야.’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시도도 안합니다. 어떤 도전도 안합니다. 어떤 노력과 모험과 훈련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빛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스스로를 나무랍니다. 때로는 자포자기를 합니다. 패배주의적 사고 속에서 들어가기도 합니다. 자신의 무능을 탓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세상이 빛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나는 빛의 자녀가 아니야.’ 라고 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세상의 빛이라고, 너는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절하고 있는 나 자신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싹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줄기가 뻗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씨앗은 우선 살아있는 생명의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그 씨앗을 펄펄 끓는 물에 담가놓았다가 꺼내면 그 씨앗을 아무리 뿌려도 자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싹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속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의 생명이어야 우리가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와 더불어 계시지 않으면 내 속에서 영적인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화초를 키워보셨습니까? 화초는 매일매일 물을 주어야합니다. 때로는 며칠마다 주어야합니다. 때로는 햇빛을 쬐어줘야 합니다. 들판에 핀 나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자라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를 기다립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속깊이 물기가 있는 곳까지 뿌리를 뻗어나갑니다. 그리고 모든 나뭇잎들은 해를 향해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물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생명수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살아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말씀도 읽지 않으면서 ‘내 신앙은 왜 이래? 왜 내 신앙은 이 모양 이 꼴이야?’ 라며 스스로를 탓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내속에 있는 어둠만을 탓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할 것입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의 세계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속에 계속 머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얘야. 정욕과 타락의 어둠에서 언젠가는 네가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떠나가지 마라. 지금은 조금 더 즐겨보아라. 지금은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이 쾌락이 너를 재미있게 하지 않는가? 거기에 조금만 더 머물러 있어라.” 하고 우리를 꼬드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탄의 꼬드김에 우리 또한 맞장구를 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까지 이렇게 합니다. “주님, 저는 이 어둠의 구덩이에서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능력을 주지 않아서 저는 주님 앞에 나가고 싶지만 지금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스스로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한발은 빛의 자리에, 한발은 어둠의 자리에 들여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둠의 자리를 즐기면서 “주님, 지금은 아닙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라고 핑계대지는 않습니까?
성 어거스틴도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기에 접어들어 육체적인 쾌락에 빠졌을 때 그는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순결하기를 원했습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빛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도하면서도 어둠의 골짜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가 쓴 고백록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역설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에게 순결과 절제를 허락하옵소서. 하오나 지금은 마옵소서.” 그러면서 그는 다음절에 이 기도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내 기도를 빨리 들어 주사 당신이 나를 정욕이라는 병에서 빨리 고쳐주실까 두려웠음이니라. 나는 정욕의 불이 꺼져가는 것보다는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더 소원했나이다.” 라고 자신의 그때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탄식하는 기도가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내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야 하나이까? 왜 지금은 할 수 없나이까? 왜 지금 이 시간 나의 치욕이 끝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했습니다. 이때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린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디론가부터 책을 펴서 읽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구절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이 말씀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정욕을 위해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낮에와 같이, 빛의 자녀와 같이 행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모든 것을 벗어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것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나아오면서 그는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으로 나아오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어둠은 무엇입니까? 그 어둠을 벗어내고 빛으로 나아와야합니다. 그리고 빛의 역사를 내 가슴으로 받아야 합니다. 태양은 달을 비추고 있습니다. 태양은 발광체이고 달은 반사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광체이고 우리는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계십니다. 내가 어둠속에 있을 때에도 나를 비추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보름달의 모습으로 환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점점 그믐달이 되어갑니다.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 속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어둠을 향해서 자꾸만 나아갑니다. 돌아와야 됩니다. 초승달에서 다시 보름달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우리에게 어둠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 하겠다고, 모레 하겠다고, 때가 되면 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을 놓치면 영원히 회개할 수 없는 그 날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5:14)
주님께서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속에서, 어둠속에서 주저앉아있으면 예수님께서 비추는 빛이 우리의 삶에 역동적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빛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비록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주님과 더불어 세상에 빛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우리를 세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