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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열심히 노력해서 결실을 맺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복된 측면이 있는 반면 위험성도 내포돼 있습니다.
성공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성공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축복입니다. 반면, 성공의 축복에만 안주하면 삶 전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의 나락에 빠져 드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몇 해 전 사울 왕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 스티븐 버글래스(Steven Berglas)의 저서 『성공증후군』에 나온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이 네 가지 A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를 ‘4A’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는 Arrogance입니다. 교만, 오만방자라는 뜻입니다. 즉, 성공한 사람들이 교만하고 오만방자해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Aloneness, 외로움입니다. 성공만을 추구하다 고립주의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대화를 기피하고 자기 안에 함몰됩니다. 세 번째는 Adventure seeking. 즉, 파괴적인 모험만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Adultery, 간음입니다. 성적인 쾌락에 자기를 매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이 네 가지 바이러스 중 세 가지에 감염되었습니다. 처음 왕위에 오를 때만 해도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오만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무시할 정도로 방자해졌습니다. 그러자 대화 나눌 참모들도 그의 곁을 떠나갑니다. 왕위에 있던 내내 다윗이라는 청년에게 시기심이 발동해 모든 권력을 이용해 그를 없애 버리려고도 했습니다. 추풍낙엽처럼 몰락의 길에 들어선 사울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어땠을까요? 다윗은 이 세 가지 A, 즉 교만, 외로움, 파괴적인 모험을 잘 극복한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간음이라는 부분에서는 실패했습니다. 본래 그는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장 신실한 부하 중의 하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맙니다. 이후 다윗의 집안과 왕권도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일들이 과거 왕들만의 이야기일까요? 혹시 지금도 힘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까요? 재력을 가진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까?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의 광야 체험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갖고 있던 위험성을 철저히 막아내고 씻겨내십니다. 모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길, 그릇된 길을 잘 극복해 나가길 바라셨습니다. 때때로 모세는 교만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해체시키길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모세가 가졌던 교만을 꺾으십니다. 40년 동안 광야로 내몰아 그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모세 혼자 품은 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비전이란 너 홀로 꾸는 꿈이 아니라 내가 네게 주는 것이란다. 내가 네게 주는 진정한 비전과 사명을 받기를 원한다.” 또, 하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멸시하지도 말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독선적인 인간관계 태도를 변화시키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은 모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이끌며 섬기는 지도자 모세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지닌 트라우마를 벗겨내십니다. 첫 번째 트라우마는 자기 정체성에 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출생의 비밀이 그 안에 있습니다. ‘내가 히브리인일까, 애굽인일까?’ 하는 정체성 혼돈의 트라우마입니다. 두 번째 트라우마는 자신을 외면한 동족에 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자신이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자처했는데, 동족이 자신을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배반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광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의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는 자리로 삼으셨습니다. 고독의 훈련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야 체험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광야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을 낮추게 하셨습니다. 겸손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단련하셨습니다. 광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광야란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시며,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명기 32:10)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처럼 백성을 지키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하셨습니다. 광야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교회에 돈과 재물이 많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식도 많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셨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그분들과 대화해 보면, 그분들에게도 광야 체험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 작은 존재구나. 그동안 내가 참 교만했구나. 이 무상한 세상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붙잡아야 할 게 무엇이겠는가?’라고 고뇌하며,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경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능력과 힘이 바로 광야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야 새 삶이 열립니다.
광야란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반복해서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를 마음에 두고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부르시면서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분을 눈으로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자신 앞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러면서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신을 벗으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익숙해 있던 삶에서 탈출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열등감에 빠져 있었고, 때로는 자기 연민에 취해 있었던 너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 신을 과감하게 벗고 새로운 도전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모세의 삶에 딱 달라붙어 있던 죄책감, 열등감, 미움과 분노, 모세를 억압했던 악령과도 같은 트라우마에서 이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산산조각 내고 해체시키란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가 지속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지도자가 되면, 혼자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면,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으로 뒤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거짓 지도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네 안에 있는 교만, 열등감, 감정의 찌꺼기들과 응어리들을 해체시키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거듭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함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모세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나와는 다른 분이구나. 하나님은 절대자시구나.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왜 이렇게 거룩함을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을까요? 거룩함을 깨달아야 인간이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알아야 인간이 외로움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깨달아야 성적인 유혹도 넘어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했습니다. 이젠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내 이름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가 나를 몰라줘도 괜찮고, 홀로 있어도 견뎌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시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 남을 정성껏 섬겨도 비굴해지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세에게 권력과 힘을 맡겨도 내 욕심만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모세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더욱이 겸손한 지도자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늘 나보다 더 큰 힘과 능력, 권세를 지닌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입 사원은 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임원진들은 사장이 어떤 비전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서 생깁니까? 자기가 그 분야의 정점에 올랐을 때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의 대표가 되고, 공동체의 장이 되고, 국가의 장관과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엔 항상 내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결정한 후에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은 외롭습니다. 책임도 막중합니다. 동시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그 길을 걸어 나가야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도자가 될 때는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업가 즉 CEO가 되면 가장 두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비자입니다. 소비자가 외면하면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는 국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들을 외면하면, 기업도 정치가도 그 어떤 권력자도 아무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귀하고 두려운 분이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바라보고 계시며 지켜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내가 가진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도 하나의 권력을 가진 것입니다. 가장이 하나의 권력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권력입니까? 가족과 가정을 위한 권력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권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오만하고 교만한 지도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중)
그런데 이 말씀은 뒤바꿔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밟는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모세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거룩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씀 드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이 내게 있으면 내가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가 밟는 땅이 거룩해진다.” 내가 만지는 것이 거룩해지고, 내가 꿈꾸는 꿈이 거룩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내게 말씀 주실 때, 나를 만지실 때,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실 때, 우리에게 사명감이 생기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신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으로 나아갑시다.
지금 우리를 억압하는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분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트라우마를 깨뜨려야 합니다. 성령님의 이름으로 악령과도 같은 내 교만과 열등감을 해체시켜야 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트라우마가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교만해질 수 없고, 더 이상 열등감과 자기 연민에 우리 인생을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분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분께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저를 얽어맸던 모든 신을 벗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나가겠습니다. 내가 밟는 땅이 거룩하게 되고 내가 꾸는 꿈이 거룩한 꿈이 되도록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맡겨진 일들을 책임 있게 감당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또한 그 지도자 역할을 우리가 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주의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함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3: 4 ~ 5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성공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열심히 노력해서 결실을 맺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복된 측면이 있는 반면 위험성도 내포돼 있습니다.
성공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성공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축복입니다. 반면, 성공의 축복에만 안주하면 삶 전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의 나락에 빠져 드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몇 해 전 사울 왕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 스티븐 버글래스(Steven Berglas)의 저서 『성공증후군』에 나온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이 네 가지 A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를 ‘4A’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는 Arrogance입니다. 교만, 오만방자라는 뜻입니다. 즉, 성공한 사람들이 교만하고 오만방자해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Aloneness, 외로움입니다. 성공만을 추구하다 고립주의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대화를 기피하고 자기 안에 함몰됩니다. 세 번째는 Adventure seeking. 즉, 파괴적인 모험만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Adultery, 간음입니다. 성적인 쾌락에 자기를 매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이 네 가지 바이러스 중 세 가지에 감염되었습니다. 처음 왕위에 오를 때만 해도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오만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무시할 정도로 방자해졌습니다. 그러자 대화 나눌 참모들도 그의 곁을 떠나갑니다. 왕위에 있던 내내 다윗이라는 청년에게 시기심이 발동해 모든 권력을 이용해 그를 없애 버리려고도 했습니다. 추풍낙엽처럼 몰락의 길에 들어선 사울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어땠을까요? 다윗은 이 세 가지 A, 즉 교만, 외로움, 파괴적인 모험을 잘 극복한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간음이라는 부분에서는 실패했습니다. 본래 그는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장 신실한 부하 중의 하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맙니다. 이후 다윗의 집안과 왕권도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일들이 과거 왕들만의 이야기일까요? 혹시 지금도 힘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까요? 재력을 가진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까?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의 광야 체험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갖고 있던 위험성을 철저히 막아내고 씻겨내십니다. 모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길, 그릇된 길을 잘 극복해 나가길 바라셨습니다. 때때로 모세는 교만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해체시키길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모세가 가졌던 교만을 꺾으십니다. 40년 동안 광야로 내몰아 그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모세 혼자 품은 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비전이란 너 홀로 꾸는 꿈이 아니라 내가 네게 주는 것이란다. 내가 네게 주는 진정한 비전과 사명을 받기를 원한다.” 또, 하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멸시하지도 말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독선적인 인간관계 태도를 변화시키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은 모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이끌며 섬기는 지도자 모세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지닌 트라우마를 벗겨내십니다. 첫 번째 트라우마는 자기 정체성에 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출생의 비밀이 그 안에 있습니다. ‘내가 히브리인일까, 애굽인일까?’ 하는 정체성 혼돈의 트라우마입니다. 두 번째 트라우마는 자신을 외면한 동족에 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자신이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자처했는데, 동족이 자신을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배반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광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의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는 자리로 삼으셨습니다. 고독의 훈련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야 체험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광야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을 낮추게 하셨습니다. 겸손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단련하셨습니다. 광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광야란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시며,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명기 32:10)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처럼 백성을 지키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하셨습니다. 광야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교회에 돈과 재물이 많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식도 많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셨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그분들과 대화해 보면, 그분들에게도 광야 체험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 작은 존재구나. 그동안 내가 참 교만했구나. 이 무상한 세상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붙잡아야 할 게 무엇이겠는가?’라고 고뇌하며,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경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능력과 힘이 바로 광야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야 새 삶이 열립니다.
광야란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반복해서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를 마음에 두고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부르시면서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분을 눈으로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자신 앞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러면서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신을 벗으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익숙해 있던 삶에서 탈출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열등감에 빠져 있었고, 때로는 자기 연민에 취해 있었던 너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 신을 과감하게 벗고 새로운 도전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모세의 삶에 딱 달라붙어 있던 죄책감, 열등감, 미움과 분노, 모세를 억압했던 악령과도 같은 트라우마에서 이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산산조각 내고 해체시키란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가 지속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지도자가 되면, 혼자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면,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으로 뒤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거짓 지도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네 안에 있는 교만, 열등감, 감정의 찌꺼기들과 응어리들을 해체시키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거듭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함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모세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나와는 다른 분이구나. 하나님은 절대자시구나.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왜 이렇게 거룩함을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을까요? 거룩함을 깨달아야 인간이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알아야 인간이 외로움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깨달아야 성적인 유혹도 넘어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했습니다. 이젠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내 이름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가 나를 몰라줘도 괜찮고, 홀로 있어도 견뎌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시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 남을 정성껏 섬겨도 비굴해지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세에게 권력과 힘을 맡겨도 내 욕심만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모세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더욱이 겸손한 지도자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늘 나보다 더 큰 힘과 능력, 권세를 지닌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입 사원은 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임원진들은 사장이 어떤 비전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서 생깁니까? 자기가 그 분야의 정점에 올랐을 때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의 대표가 되고, 공동체의 장이 되고, 국가의 장관과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엔 항상 내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결정한 후에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은 외롭습니다. 책임도 막중합니다. 동시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그 길을 걸어 나가야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도자가 될 때는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업가 즉 CEO가 되면 가장 두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비자입니다. 소비자가 외면하면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는 국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들을 외면하면, 기업도 정치가도 그 어떤 권력자도 아무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귀하고 두려운 분이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바라보고 계시며 지켜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내가 가진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도 하나의 권력을 가진 것입니다. 가장이 하나의 권력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권력입니까? 가족과 가정을 위한 권력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권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오만하고 교만한 지도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중)
그런데 이 말씀은 뒤바꿔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밟는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모세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거룩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씀 드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이 내게 있으면 내가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가 밟는 땅이 거룩해진다.” 내가 만지는 것이 거룩해지고, 내가 꿈꾸는 꿈이 거룩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내게 말씀 주실 때, 나를 만지실 때,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실 때, 우리에게 사명감이 생기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신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으로 나아갑시다.
지금 우리를 억압하는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분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트라우마를 깨뜨려야 합니다. 성령님의 이름으로 악령과도 같은 내 교만과 열등감을 해체시켜야 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트라우마가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교만해질 수 없고, 더 이상 열등감과 자기 연민에 우리 인생을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분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분께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저를 얽어맸던 모든 신을 벗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나가겠습니다. 내가 밟는 땅이 거룩하게 되고 내가 꾸는 꿈이 거룩한 꿈이 되도록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맡겨진 일들을 책임 있게 감당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또한 그 지도자 역할을 우리가 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주의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함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