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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많은 칭호와 정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던진 물음이었고, 그분을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천 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이 등장할 때도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가는 양극단이었습니다.
아마 그분처럼 각양각색의 칭호를 얻으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미친 사람이다.” 이는 예수님의 친척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신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탐식가이자 음주가다.” 당대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말입니다. “당신은 로마의 평화인 팍스 로마나를 방해하는 정치 선동가다.” 당대 정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신성모독자다” 당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반대되는 칭호도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의 선포입니다. “저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본 로마의 백부장에게서 나온 고백입니다. “예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억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전파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어떻게 고백합니까? 예수님만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분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정치혁명가다.”, “예수는 고독한 명상가다.”, “예수는 기득권을 뒤집어엎는 과격한 반동분자다.”, “예수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예수는 자아도취적인 마법의 능력을 가진 자다.”, “예수는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신비한 지도자다.”, “예수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도덕가이자 윤리적인 성인이다.” 이처럼 다양한 고백과 내용을 예수님의 이름에 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외형이나 외모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피부색이 어떤지, 눈동자 색은 어떤지, 키는 어느 정도인지, 체격은 건장했는지 아닌지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내가 누구다’라는 말을 아끼셨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사람들, 민중들, 제자들에게 요청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경험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아라. 내가 누구인지 면밀히 조사해 보아라. 너희가 나를 파악하고 경험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오늘도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그분이 내게 어떤 존재로 다가오시는지,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등 세상에는 위대한 스승이 많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존경할 만한 스승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분도 위대한 스승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스승 그 이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환히 비추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당대에 도덕가이자 윤리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윤리가 그 이상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늘의 계시와 지혜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때 진정한 신앙이 형성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도시에는 대 헤롯이 지은 ‘판(Pan)’이라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빌립이 황제(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가이사’와 자기 이름 ‘빌립’을 가져와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곳에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고, 황제 숭배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은 누구냐? 진짜 주님은 누구냐?’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상의 왕인 가이사와 하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맞대결하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복음 8:27)
예수님이 가이샤라 빌립보를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나 세상에 심판과 정의를 선포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부릅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물리쳤던 그 엘리야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같다고도 부릅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며 탄식했던 예레미야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지 않았느냐? 내가 하는 것, 말하는 것을 너희가 듣고 보지 않았느냐? 너희는 무슨 마음을 품고 나를 따랐느냐?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나를 따랐느냐?” 즉 주님은 3인칭의 물음을 이제 2인칭의 물음으로 바꾸시며 제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복음 8:29 중)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변화되는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이는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물음입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이히 운트 에스(Ich und Es)’에서 ‘이히 운트 두(Ich und Du)’로, 즉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에서 ‘나와 너’라는 관계, 물질의 관계를 뛰어넘는 인격적, 대화적 관계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질문을 예수님이 던지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는데,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러분, 2인칭의 대답은 구경꾼의 대답일 수 없습니다. 실존을 걸고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도 “너의 인격, 생명, 실존을 걸고 대답해 보아라.”고 물으십니다. 즉 “내게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나에게 다 쏟아부을 수 있겠느냐?”와 같은 질문입니다. 존재 자체가 대답 속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머리만 움직이면 됩니다. 타인의 하나님이 내 가슴까지 전달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네 삶을, 실존을, 감정을, 지성을, 의지를 다 바치면서 나를 믿는 신앙에 들어올 수 있느냐?” 그래서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구경꾼에게는 용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도약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론 누군가 내게 전해준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엄마 품속에서 듣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내 삶을 움직이는 신앙 이야기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때문에 전율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방황합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될 때, 친구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될 때, 누군가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감격과 감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이 성경을 펴고 읽으며 회심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 넘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고백이 자신의 신앙고백이 되면서, 그는 그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믿음과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타락과 끊임없는 지성적 물음, 인생의 쓰라린 경험과 실패, 낙담을 거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던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보면, ‘아, 우리의 신앙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게 이처럼 힘들고 어렵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가끔 저는 청년들에게 묻습니다. “언제 예수님을 믿을래?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래?” 그러면 어거스틴을 아는 청년들이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믿기는 믿겠는데, 어거스틴처럼 믿겠습니다.” 이 말은, 젊은 때는 좀 놀고 방황도 하다가 하나님이 어느 날 부르시면 어거스틴처럼 회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때마다 제가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얘야, 어거스틴이 아무나 되는 줄 아느냐? 젊을 때 방탕한 길을 가다가 지금도 감옥에 처박혀서 인생을 끝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내가 깨닫기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하고 초청하셨으니, 바로 지금 결단하며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셨다. 그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주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확인해 보면 ‘당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You’라고 부른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단순한 위인이나 영웅, 윤리적인 이상가가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고백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당신이 받으실 수난 예고도 시작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다음에 다가올 고난도 제자들이 이겨나갈 수 있기에, 이 고백 위에 참된 신앙을 세울 수 있기에 주님이 그토록 이 고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쉘던 배너켄(Sheldon Vanauken)이란 사람이 저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할 따름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믿게 되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믿어도 의심이 있습니다. 다만 의심하면서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를까요? 의심이 더 크면 계속 의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의심보다 믿음이 좀 더 크면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아마도 당신이 찾던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가짜 하나님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에 비례해서 그분을 알게 된다. 그분을 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그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자들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믿음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볼 때까지 꼼짝하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믿음의 발자국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플러스의 삶을 삽시다.
우리가 진리와 생명을 찾는 여정에 잠시 잠깐 무신론에 머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무신론은 인생의 파멸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의심하면서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의심을 아우릅니다. 더 큰 믿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에 부딪혀 나아가며 더 큰 믿음으로 향합니다. “예수님 내가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펴서 읽겠습니다. 당신이 진리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생명이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진리가 아니면 언제든지 포기하겠습니다.” 이렇게 담대히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언하며 나아갑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어머니의 하나님!” 그런 뒤 어떻게 고백해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그들이 만났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며,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의 신앙의 여정에도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믿음을 찾기 위해 그토록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본회퍼(Bonhoeffer)의 글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믿으면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안 생기면 반대로 해 보아라. 행동하면 믿게 될 것이다.” 저는 그때부터 신앙의 행동인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먼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을 다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안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물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진리입니까? 당신이 생명이십니까?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까? 그러면 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내 인생의 소중한 분인 것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면서 의심과 고통을 가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우리에게 위기와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늘이 내게 주시는 하늘의 평안,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누구로 다가오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의 메시아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 최고의 대답이 그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내 중심으로만 살았다면, 이제는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을 바꾸어 나가겠다고 결단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해석학적인 전환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님이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 안에 이와 같은 해석학적 전환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진리와 길로 오셨습니다. 평안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 인생은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면서 우리 인생이 플러스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결론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시작도 안 되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해하고, 믿으면서도 두려워하고, 믿으면서도 움츠러들고, 믿으면서도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수님이 내 인생의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플러스의 삶의 자리가 열릴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8: 27 ~ 34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에 대한 많은 칭호와 정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던진 물음이었고, 그분을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천 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이 등장할 때도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가는 양극단이었습니다.
아마 그분처럼 각양각색의 칭호를 얻으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미친 사람이다.” 이는 예수님의 친척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신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탐식가이자 음주가다.” 당대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말입니다. “당신은 로마의 평화인 팍스 로마나를 방해하는 정치 선동가다.” 당대 정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신성모독자다” 당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반대되는 칭호도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의 선포입니다. “저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본 로마의 백부장에게서 나온 고백입니다. “예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억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전파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어떻게 고백합니까? 예수님만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분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정치혁명가다.”, “예수는 고독한 명상가다.”, “예수는 기득권을 뒤집어엎는 과격한 반동분자다.”, “예수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예수는 자아도취적인 마법의 능력을 가진 자다.”, “예수는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신비한 지도자다.”, “예수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도덕가이자 윤리적인 성인이다.” 이처럼 다양한 고백과 내용을 예수님의 이름에 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외형이나 외모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피부색이 어떤지, 눈동자 색은 어떤지, 키는 어느 정도인지, 체격은 건장했는지 아닌지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내가 누구다’라는 말을 아끼셨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사람들, 민중들, 제자들에게 요청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경험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아라. 내가 누구인지 면밀히 조사해 보아라. 너희가 나를 파악하고 경험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오늘도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그분이 내게 어떤 존재로 다가오시는지,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등 세상에는 위대한 스승이 많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존경할 만한 스승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분도 위대한 스승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스승 그 이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환히 비추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당대에 도덕가이자 윤리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윤리가 그 이상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늘의 계시와 지혜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때 진정한 신앙이 형성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도시에는 대 헤롯이 지은 ‘판(Pan)’이라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빌립이 황제(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가이사’와 자기 이름 ‘빌립’을 가져와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곳에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고, 황제 숭배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은 누구냐? 진짜 주님은 누구냐?’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상의 왕인 가이사와 하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맞대결하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복음 8:27)
예수님이 가이샤라 빌립보를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나 세상에 심판과 정의를 선포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부릅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물리쳤던 그 엘리야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같다고도 부릅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며 탄식했던 예레미야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지 않았느냐? 내가 하는 것, 말하는 것을 너희가 듣고 보지 않았느냐? 너희는 무슨 마음을 품고 나를 따랐느냐?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나를 따랐느냐?” 즉 주님은 3인칭의 물음을 이제 2인칭의 물음으로 바꾸시며 제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복음 8:29 중)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변화되는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이는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물음입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이히 운트 에스(Ich und Es)’에서 ‘이히 운트 두(Ich und Du)’로, 즉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에서 ‘나와 너’라는 관계, 물질의 관계를 뛰어넘는 인격적, 대화적 관계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질문을 예수님이 던지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는데,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러분, 2인칭의 대답은 구경꾼의 대답일 수 없습니다. 실존을 걸고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도 “너의 인격, 생명, 실존을 걸고 대답해 보아라.”고 물으십니다. 즉 “내게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나에게 다 쏟아부을 수 있겠느냐?”와 같은 질문입니다. 존재 자체가 대답 속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머리만 움직이면 됩니다. 타인의 하나님이 내 가슴까지 전달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네 삶을, 실존을, 감정을, 지성을, 의지를 다 바치면서 나를 믿는 신앙에 들어올 수 있느냐?” 그래서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구경꾼에게는 용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도약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론 누군가 내게 전해준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엄마 품속에서 듣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내 삶을 움직이는 신앙 이야기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때문에 전율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방황합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될 때, 친구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될 때, 누군가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감격과 감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이 성경을 펴고 읽으며 회심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 넘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고백이 자신의 신앙고백이 되면서, 그는 그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믿음과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타락과 끊임없는 지성적 물음, 인생의 쓰라린 경험과 실패, 낙담을 거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던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보면, ‘아, 우리의 신앙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게 이처럼 힘들고 어렵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가끔 저는 청년들에게 묻습니다. “언제 예수님을 믿을래?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래?” 그러면 어거스틴을 아는 청년들이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믿기는 믿겠는데, 어거스틴처럼 믿겠습니다.” 이 말은, 젊은 때는 좀 놀고 방황도 하다가 하나님이 어느 날 부르시면 어거스틴처럼 회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때마다 제가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얘야, 어거스틴이 아무나 되는 줄 아느냐? 젊을 때 방탕한 길을 가다가 지금도 감옥에 처박혀서 인생을 끝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내가 깨닫기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하고 초청하셨으니, 바로 지금 결단하며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셨다. 그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주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확인해 보면 ‘당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You’라고 부른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단순한 위인이나 영웅, 윤리적인 이상가가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고백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당신이 받으실 수난 예고도 시작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다음에 다가올 고난도 제자들이 이겨나갈 수 있기에, 이 고백 위에 참된 신앙을 세울 수 있기에 주님이 그토록 이 고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쉘던 배너켄(Sheldon Vanauken)이란 사람이 저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할 따름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믿게 되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믿어도 의심이 있습니다. 다만 의심하면서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를까요? 의심이 더 크면 계속 의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의심보다 믿음이 좀 더 크면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아마도 당신이 찾던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가짜 하나님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에 비례해서 그분을 알게 된다. 그분을 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그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자들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믿음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볼 때까지 꼼짝하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믿음의 발자국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플러스의 삶을 삽시다.
우리가 진리와 생명을 찾는 여정에 잠시 잠깐 무신론에 머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무신론은 인생의 파멸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의심하면서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의심을 아우릅니다. 더 큰 믿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에 부딪혀 나아가며 더 큰 믿음으로 향합니다. “예수님 내가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펴서 읽겠습니다. 당신이 진리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생명이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진리가 아니면 언제든지 포기하겠습니다.” 이렇게 담대히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언하며 나아갑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어머니의 하나님!” 그런 뒤 어떻게 고백해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그들이 만났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며,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의 신앙의 여정에도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믿음을 찾기 위해 그토록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본회퍼(Bonhoeffer)의 글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믿으면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안 생기면 반대로 해 보아라. 행동하면 믿게 될 것이다.” 저는 그때부터 신앙의 행동인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먼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을 다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안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물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진리입니까? 당신이 생명이십니까?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까? 그러면 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내 인생의 소중한 분인 것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면서 의심과 고통을 가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우리에게 위기와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늘이 내게 주시는 하늘의 평안,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누구로 다가오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의 메시아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 최고의 대답이 그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내 중심으로만 살았다면, 이제는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을 바꾸어 나가겠다고 결단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해석학적인 전환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님이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 안에 이와 같은 해석학적 전환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진리와 길로 오셨습니다. 평안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 인생은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면서 우리 인생이 플러스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결론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시작도 안 되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해하고, 믿으면서도 두려워하고, 믿으면서도 움츠러들고, 믿으면서도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수님이 내 인생의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플러스의 삶의 자리가 열릴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첨부파일 : [20181202] 2018년 12월 2일 주일말씀 구역(가정)예배 교안.hwp
2018년 12월 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베드로3)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0장, 28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8:27~3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누구나 예수님을 처음 대하면서 갖는 물음입니다. 2000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을 때 당시 사람들이 지녔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일까? 아니 당시에 누구였을까?
설교의 요약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해서 명백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가’를 찾아보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빌립이 황제(가이사)를 위해 자기 이름을 따서 세운 곳입니다. 로마 황제 신전이 있고, 황제 숭배가 있던 곳에서 진짜 주님이 누구인가를 질문하십니다(27절). 제자들은 민중들의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그리고 3년을 따라다닌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직접 물으셨습니다(29절).
예수님의 질문은 3인칭이 아닌 2인칭의 질문으로 정보가 아니라, 직접 경험의 대답을 원하셨습니다. 2인칭의 질문은 내 실존 전체, 내 존재가 그 대답 속에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타인의 하나님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만남으로서의 신앙을 얻으려면 내 입으로, 내 말로, 내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지정의(知情意)가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용기와 결단 그리고 자기 질문을 곁들여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하나의 커다란 도약을 할 때 어려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친구의 신앙 혹은 어머니의 품속에서부터 듣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의 이야기로 바뀔 때 감격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다.” 더 이상 위인이나 영웅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의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듣기 원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예수님이 없어진 후에라도 신앙의 고백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어머니/아버지의 신앙으로부터 나의 신앙(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어야만 합니다. 필립 얀시는 “나는 예수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면서 의심과 고통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제 더 이상 우리 삶에서 이 질문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더 이상 이 질문을 무시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최대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죄 용서로 오신 예수, 구원자로 오신 예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의 대한 세상의 평가는 다양한 대답들입니다. 어떤 대답들이 있을까요? 함께 나눠보세요.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질문하신다면,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3.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보내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도록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이 정말 내 인생의 주인이신가? 예수님이 정말 세상을 구원하신 메시아이신가? 예수님 안에 진리와 생명과 평강과 은혜가 있는 것인가? 예수님에게 내 전적인 것을 맡기는 신앙의 용기를 갖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