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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 16 ~ 20

김지철 목사

2010.04.11

우리는 예수님의 매력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사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뽐내고 싶어 합니다. 최근 애플사에서 아이폰이 나왔습니다. 아이폰을 산 사람들마다 기능이 많고 예쁘다고 자랑을 합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인 삼성과 엘지가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긴장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의 전도사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폰에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식당을 가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 다음에는 누군가에게 소개를 합니다. 골목길에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꼭 한번 먹어보라고 말합니다. 영화나 뮤지컬도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 안에 매력적인 것이 담겨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목사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매력적인 것인가? 기독교 신앙이 매력적인 것인가? 우리의 예배가 매력적인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매력 때문에, 예수님의 소중한 이름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에 실망합니다

예수님의 매력은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매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자신을 되돌아볼 때, 때로는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나는 왜 이런 모습인가? 나는 왜 똑같은 회개를 반복적으로 하는가? 나는 왜 결심하고 나서 결심을 자주 망가뜨리는가?’ 이렇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차가울 수가 있단 말인가? 저 사람은 어쩌면 인생을 저렇게 무관심하게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저것은 신앙이 아니라 타성에 젖은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몸이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으면, 마음속에 하나님 없이도 풍족하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건방지게 기도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나는 나의 길을 가겠습니다.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내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아주 위급할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마치 보험금을 내듯이 헌금을 드립니다. 결정적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달라고 예배에 참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완벽하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잘 다니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보면서 조소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너무 과격하게 믿어. 저 사람은 예수에 미쳐 있는 것 같아. 저 사람은 기도할 때 왜 저렇게 큰 소리로 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거부감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세상에서의 모습이 교회에서의 모습과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란 종교적인 위선자들의 모임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정치 유명인들, 사회 유명인사들, 연예계 인사들이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는 예배드린다고 경건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는 규칙과 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남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낙심하게 됩니다. 자기는 세상에서 더 큰 악을 행하면서 남의 잘못은 시시콜콜 정죄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아도 예수를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회의하며 실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런 우리를 택하셔서 놀라우신 예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복음 28:17)

그들은 가룟 유다를 뺀 열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모든 것을 맡기려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셨을까요? ‘이들에게 복음을 맡길 수가 있을까?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길 수가 있을까?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의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갈팡질팡하면서 열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 완벽한 믿음이 없는 부족한 사람들을 친히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늘 기대하십니다. 어제보다 오늘, 나를 사랑하는 자리에 더 가까이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오늘보다 내일,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기쁨을 더욱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축복일까요? 제자들은 믿음과 의심이 교차하는 삶을 살면서도 한 가지만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버려둔 채 도망가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좋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만족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기뻤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만족함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들을 때 가슴이 설레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받은 믿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인생을 사는 목적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분을 받았어도, 10년, 20년, 5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내 가슴이 설레지 않고, 내 안에 만족함이 없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은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사람은 학식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용기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달란트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열망하는 사람을 제자로 세우시기 원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빌라도와 헤롯 왕 앞에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들과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 그러면서도 두려움 반, 믿음 반으로 마음속에서 갈피를 못 잡는 제자들을 향해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외로운 삶에 동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면서 오늘이 축복의 날인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나의 영혼을 되돌려 주옵소서. 그러면 오늘이 보너스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너스를 얻은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서른 살이 못 되셔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겨우 쉰다섯을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제 인생은 축복이요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곱절 이상을 살았고, 어머니보다도 더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33살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 마음속에는 이런 고백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33살보다 더 살게 되는 인생은 모두 제게 보너스 인생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보너스의 인생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그러면 불평이 멈춰 서게 됩니다.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남의 탓을 하지 않게 됩니다. 어제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 아침에 찬란한 태양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주님께 예배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께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보너스 인생에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너스 인생이기 때문에 다시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비전을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를 허락해주십니다. “지금까지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느냐? 이제는 네 시야를 넓혀보아라. 네 지경을 넓혀보아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도 멋진 삶입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가정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중한 자신을 학대하고, 자기 연민 속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소중한 줄 알고, 가정이 소중한 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격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승용차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조금 높은 지프차로 드라이브를 하게 되면 갑자기 앞이 시원해집니다. 한 10cm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전하기가 편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한번 타보면 10cm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높고 낮음이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얼굴이 조금 잘난 것과 못난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의 지경과 시야를 넓히지 못해서 생기는 아픔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 자신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계를 향해서 꿈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만 들여다보던 눈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와 로마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야가 넓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비전과 꿈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진 이름, 고귀한 이름, 아름다운 이름, 멋진 이름, 능력의 이름, 자유하게 하는 이름, 진리의 이름, 지혜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놀라운 이름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처럼 매력 있는 이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어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내가 네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제는 용서받은 자로 살아가라.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살아가라.”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인생인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담담히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아니,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세계, 생명의 은총을 허락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에 나아가십시오

기독교의 매력은 예수님의 매력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예수님의 매력입니다. 내가 지식이 많아서 멋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멋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멋져서,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다워서, 예수님이 매력 있어서, 그 예수님을 믿는 내가 멋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소망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 예수님의 매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매력을, 구원의 매력을, 생명의 매력을, 죄 용서의 매력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도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도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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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 16 ~ 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매력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사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뽐내고 싶어 합니다. 최근 애플사에서 아이폰이 나왔습니다. 아이폰을 산 사람들마다 기능이 많고 예쁘다고 자랑을 합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인 삼성과 엘지가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긴장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의 전도사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폰에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식당을 가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 다음에는 누군가에게 소개를 합니다. 골목길에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꼭 한번 먹어보라고 말합니다. 영화나 뮤지컬도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 안에 매력적인 것이 담겨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목사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매력적인 것인가? 기독교 신앙이 매력적인 것인가? 우리의 예배가 매력적인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매력 때문에, 예수님의 소중한 이름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에 실망합니다

예수님의 매력은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매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자신을 되돌아볼 때, 때로는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나는 왜 이런 모습인가? 나는 왜 똑같은 회개를 반복적으로 하는가? 나는 왜 결심하고 나서 결심을 자주 망가뜨리는가?’ 이렇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차가울 수가 있단 말인가? 저 사람은 어쩌면 인생을 저렇게 무관심하게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저것은 신앙이 아니라 타성에 젖은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몸이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으면, 마음속에 하나님 없이도 풍족하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건방지게 기도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나는 나의 길을 가겠습니다.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내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아주 위급할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마치 보험금을 내듯이 헌금을 드립니다. 결정적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달라고 예배에 참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완벽하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잘 다니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보면서 조소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너무 과격하게 믿어. 저 사람은 예수에 미쳐 있는 것 같아. 저 사람은 기도할 때 왜 저렇게 큰 소리로 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거부감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세상에서의 모습이 교회에서의 모습과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란 종교적인 위선자들의 모임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정치 유명인들, 사회 유명인사들, 연예계 인사들이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는 예배드린다고 경건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는 규칙과 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남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낙심하게 됩니다. 자기는 세상에서 더 큰 악을 행하면서 남의 잘못은 시시콜콜 정죄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아도 예수를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회의하며 실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런 우리를 택하셔서 놀라우신 예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복음 28:17)

그들은 가룟 유다를 뺀 열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모든 것을 맡기려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셨을까요? ‘이들에게 복음을 맡길 수가 있을까?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길 수가 있을까?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의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갈팡질팡하면서 열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 완벽한 믿음이 없는 부족한 사람들을 친히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늘 기대하십니다. 어제보다 오늘, 나를 사랑하는 자리에 더 가까이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오늘보다 내일,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기쁨을 더욱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축복일까요? 제자들은 믿음과 의심이 교차하는 삶을 살면서도 한 가지만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버려둔 채 도망가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좋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만족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기뻤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만족함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들을 때 가슴이 설레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받은 믿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인생을 사는 목적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분을 받았어도, 10년, 20년, 5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내 가슴이 설레지 않고, 내 안에 만족함이 없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은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사람은 학식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용기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달란트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열망하는 사람을 제자로 세우시기 원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빌라도와 헤롯 왕 앞에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들과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 그러면서도 두려움 반, 믿음 반으로 마음속에서 갈피를 못 잡는 제자들을 향해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외로운 삶에 동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면서 오늘이 축복의 날인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나의 영혼을 되돌려 주옵소서. 그러면 오늘이 보너스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너스를 얻은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서른 살이 못 되셔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겨우 쉰다섯을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제 인생은 축복이요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곱절 이상을 살았고, 어머니보다도 더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33살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 마음속에는 이런 고백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33살보다 더 살게 되는 인생은 모두 제게 보너스 인생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보너스의 인생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그러면 불평이 멈춰 서게 됩니다.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남의 탓을 하지 않게 됩니다. 어제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 아침에 찬란한 태양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주님께 예배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께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보너스 인생에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너스 인생이기 때문에 다시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비전을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를 허락해주십니다. “지금까지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느냐? 이제는 네 시야를 넓혀보아라. 네 지경을 넓혀보아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도 멋진 삶입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가정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중한 자신을 학대하고, 자기 연민 속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소중한 줄 알고, 가정이 소중한 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격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승용차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조금 높은 지프차로 드라이브를 하게 되면 갑자기 앞이 시원해집니다. 한 10cm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전하기가 편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한번 타보면 10cm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높고 낮음이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얼굴이 조금 잘난 것과 못난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의 지경과 시야를 넓히지 못해서 생기는 아픔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 자신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계를 향해서 꿈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만 들여다보던 눈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와 로마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야가 넓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비전과 꿈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진 이름, 고귀한 이름, 아름다운 이름, 멋진 이름, 능력의 이름, 자유하게 하는 이름, 진리의 이름, 지혜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놀라운 이름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처럼 매력 있는 이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어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내가 네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제는 용서받은 자로 살아가라.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살아가라.”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인생인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담담히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아니,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세계, 생명의 은총을 허락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에 나아가십시오

기독교의 매력은 예수님의 매력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예수님의 매력입니다. 내가 지식이 많아서 멋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멋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멋져서,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다워서, 예수님이 매력 있어서, 그 예수님을 믿는 내가 멋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소망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 예수님의 매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매력을, 구원의 매력을, 생명의 매력을, 죄 용서의 매력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도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도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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