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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마가복음 10: 46 ~ 52

김지철 목사

2011.07.31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실로암 안과병원의 원장이신 김선태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10살 때 6.25 전쟁을 맞았습니다. 부모님은 전쟁 중에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폭발물에 의해 두 눈을 실명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소년거지가 되어 쓰라린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친척으로부터 받았던 구박을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앞 못 보는 사람은 살 필요가 없다. 소는 눈이 있어서 일을 하고 개는 눈이 있어서 집을 지키는데, 너는 이제 살 필요도 이유도 없는 거야. 내 집에 있지 말고 멀리 떠나서 웅덩이에 빠져죽던지 매에 맞아 죽던지 총에 맞아 죽던지 당장 죽어버려라. 집안에 너같이 눈먼 사람이 있으면 재수도 없고 동네사람에게 창피하다.” 그는 매일매일 “벼락 맞아 죽을 놈”, “염병 앓다가 죽을 놈” 등 세상에 있는 모든 욕은 욕대로 먹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쓴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라는 책 서두에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두 눈도 잃었고 친구도 잃었다. 친척도 잃었고 건강도 잃었으니 희망도 재산도 잃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은 것들을 모두 잃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하늘을 찾을 수 있었다. 땅을 잃은 대신 내가 얻은 제일 큰 기쁨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특권이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을 찾아서 땅의 문제까지 해결한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자리를 겪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든 삶속에서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가정을 꾸몄습니다. 두 딸도 낳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병원장이자 목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사랑의 개안수술을 통해서 수만 명의 시각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7년에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까지 탔습니다. 그는 맹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본문은 2000년 전의 한 맹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던 맹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부름을 받은 귀한 존재가 됩니다. 당시의 맹인은 지금보다 더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저 질병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야. 저 사람은 분명 무슨 죄를 많이 지었을 거야. 저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나 조상이 범죄 했기 때문에 저런 탈이 생긴 걸 거야.” 그 당시는 이렇게 맹인이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행한 이웃의 행패는 아마 더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본래 맹인은 자생능력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막혔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는 사람의 자선을 구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맹인은 거지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지만 그 앞에 수식어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맹인, 그리고 거지라고 말합니다. ‘바디매오’라는 말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바’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아주 중요한 회원이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복음 10:52)

예수님께서는 이 맹인의 모습을 칭찬하셨습니다. “네가 믿음이 있구나. 네 믿음이 너를 이렇게 구원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가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은 가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길에서 쫒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쫓았다”는 것은 잠시 쫒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적을 옆에서 지켜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열망해서 그를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사람은 아무에게도 기대를 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가장 큰 아픔인 질병이 치유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엄청난 삶의 변화가 있었던 인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장애에 함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여리고 변두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사람들에게 적선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맹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어려움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해방의 욕구가 있었습니다. 눈은 보지 못하고, 막혀있지만 귀가 뚫리고 입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장애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픔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우리의 속에는 힘들고 어려운 질병들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겉모습도 그렇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안보이기도하고, 귀가 안 들리기도 하고, 이가 상해서 치과를 다니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물어보면 “내게도 이런 장애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스스로를 가로막기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귀와 입은 열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이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그만 장애 때문에 스스로를 막아두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속에 있는 것이 열등감이 되고, 그것이 내속에 스트레스가 되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남이 침범해오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단단한 벽을 칩니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은 점점 오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장애가 나에게 제한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바디매오에게 들렸던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시려고 하던 찰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래! 예수님이 메시아래!” 그때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10:47)

여기 보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들음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맹인은 보지 못했으나 듣는데 예민했습니다. 내면적인 열망이 있었습니다.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귀를 기울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지나가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직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장애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관심 있는 나사렛 예수, 바로 다윗의 자손, 이 땅에 오실 메시아가 자기 옆에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한 메시아의 다른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분이 오시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어! 그분 앞에 어떻게든 내가 서야해. 그분과 만나고 싶어. 그분과 대화하고 싶어!’ 그런데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딘가 계신 것 같은데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멀리 떨어져있는 그분을 향해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듣는 귀,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입을 열어서 가능한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내게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이런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의 외침은 바로 우리의 내면세계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할수록 방해하는 세력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예수님 앞에 나가려고했더니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적인 장애물은 벗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꽉 닫아두려고 했던 것은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의 가까이 갈 때까지 너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제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마가복음 10:48)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연거푸 두 번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 쓰여 있지만 아마도 예수님이 들으실 때까지 여러 번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제지합니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너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다. 너 같은 사람이 메시아인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면서 그를 더 멀리 쫓아내려고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고 하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하면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사람일 때도 있고 환경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훼방꾼이 자꾸 나타납니다. 우리가 세상의 흘러가는 조류 속에서 그냥 살려고 하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새롭게 결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보려고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꿈과 비전대로 살려고 하면 사람들이 자꾸 흔들어놓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넘어서야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맹인은 자기 안에 있는 열등감과 자기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소리가 가로막습니다. 그것은 비난과 조롱이었습니다. 따가운 눈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넘어서서 다시 소리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맹인의 외침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시도하려할 때마다 회의적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안 해봤는데 괜찮을까?’ 옆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조롱하고 윽박지릅니다. “너 그것 해봐야 절대 안 돼. 왜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느냐?” 이런 방해는 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연연하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들음과 들음이 만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본문을 보면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들음과 들음이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내뿜는 소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맹인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한 개인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와도 견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출애굽기 2:23~24上)

성경에는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소리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적절할 때에,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바로 그 적절한 때에 예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가시던 길을 멈추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간절한 소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마가복음 10:50)

예수님께서 그를 불렀을 때 맹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평소 같으면 주저앉은 채로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입고 있었던 겉옷까지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내어던져 버렸습니다. 이 맹인이 갖고 있었던 절박한 소원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는 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넘어섰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겉옷조차도 내던졌습니다. 겉옷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에는 이슬이 내리기 때문에 거지들은 겉옷을 이불 대신으로 사용했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면 베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그것을 입고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했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뒤로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맹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51)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눈을 못 뜨는 것을 알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바라느냐?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왜 그랬을까요? 맹인스스로가 자기 속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내면 깊은 속에 내가 목숨 걸고 이것을 추구할만한 것이 내게 있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바디매오는 그것을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야만 스스로의 억눌림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억압에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잠시 자유롭다가 다시 억눌릴 뿐입니다. 잠시 기쁘다가 다시 슬퍼질 뿐입니다. 잠시 즐겁다가 다시 우울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확인하기 원하셨습니다. “정말 네가 모든 것을 걸고 원하는 것이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질문하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얘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글쎄요, 좀 생각해봐야겠는데요? 며칠간은 이것저것 확인해봐야겠는데요?” 여러분, 이것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는 나의 실존 전체를 걸고 나아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성신학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시대의 영성의 최악의 문제가 무엇인가? 믿기는 믿는데 피상적으로 믿는 것이다.” 믿기는 믿는데 얄팍한 영성을 가지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을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기에 맹인은 자기의 삶 전체를 걸었습니다. 그는 흐리멍덩하지 않았습니다.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요청합니다. “나는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사는 것, 명예와 권력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놀랍게도 본문 앞의 36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곱과 요한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구할테니 좀 들어달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맹인에게 했던 질문을 그들에게 똑같이 합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그때 야곱과 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영광중에 오실 때 나를 오른편에, 내 동생을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그건 참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을 보면 솔로몬의 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놀랍게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것 하나면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네가 본질을 알고 있구나! 네가 신앙의 핵심을 꿰뚫고 있구나! 네가 한 민족과 나라의 지도자로서 무엇이 첫 번째로 필요한지를 알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듣는 마음뿐만 아니라 지혜와 능력과 부와 존귀와 장수 모두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기도제목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 실존 전체를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다른 것은 다 안주셔도 괜찮습니다. 이것 하나면 내가 만족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변화와 축복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도, 흐리멍덩한 기도, 얄팍한 신앙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신앙의 축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맹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처럼 우리도 나아가야합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힘 있게 달려가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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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 46 ~ 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실로암 안과병원의 원장이신 김선태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10살 때 6.25 전쟁을 맞았습니다. 부모님은 전쟁 중에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폭발물에 의해 두 눈을 실명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소년거지가 되어 쓰라린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친척으로부터 받았던 구박을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앞 못 보는 사람은 살 필요가 없다. 소는 눈이 있어서 일을 하고 개는 눈이 있어서 집을 지키는데, 너는 이제 살 필요도 이유도 없는 거야. 내 집에 있지 말고 멀리 떠나서 웅덩이에 빠져죽던지 매에 맞아 죽던지 총에 맞아 죽던지 당장 죽어버려라. 집안에 너같이 눈먼 사람이 있으면 재수도 없고 동네사람에게 창피하다.” 그는 매일매일 “벼락 맞아 죽을 놈”, “염병 앓다가 죽을 놈” 등 세상에 있는 모든 욕은 욕대로 먹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쓴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라는 책 서두에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두 눈도 잃었고 친구도 잃었다. 친척도 잃었고 건강도 잃었으니 희망도 재산도 잃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은 것들을 모두 잃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하늘을 찾을 수 있었다. 땅을 잃은 대신 내가 얻은 제일 큰 기쁨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특권이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을 찾아서 땅의 문제까지 해결한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자리를 겪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든 삶속에서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가정을 꾸몄습니다. 두 딸도 낳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병원장이자 목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사랑의 개안수술을 통해서 수만 명의 시각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7년에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까지 탔습니다. 그는 맹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본문은 2000년 전의 한 맹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던 맹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부름을 받은 귀한 존재가 됩니다. 당시의 맹인은 지금보다 더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저 질병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야. 저 사람은 분명 무슨 죄를 많이 지었을 거야. 저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나 조상이 범죄 했기 때문에 저런 탈이 생긴 걸 거야.” 그 당시는 이렇게 맹인이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행한 이웃의 행패는 아마 더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본래 맹인은 자생능력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막혔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는 사람의 자선을 구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맹인은 거지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지만 그 앞에 수식어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맹인, 그리고 거지라고 말합니다. ‘바디매오’라는 말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바’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아주 중요한 회원이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복음 10:52)

예수님께서는 이 맹인의 모습을 칭찬하셨습니다. “네가 믿음이 있구나. 네 믿음이 너를 이렇게 구원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가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은 가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길에서 쫒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쫓았다”는 것은 잠시 쫒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적을 옆에서 지켜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열망해서 그를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사람은 아무에게도 기대를 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가장 큰 아픔인 질병이 치유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엄청난 삶의 변화가 있었던 인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장애에 함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여리고 변두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사람들에게 적선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맹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어려움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해방의 욕구가 있었습니다. 눈은 보지 못하고, 막혀있지만 귀가 뚫리고 입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장애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픔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우리의 속에는 힘들고 어려운 질병들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겉모습도 그렇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안보이기도하고, 귀가 안 들리기도 하고, 이가 상해서 치과를 다니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물어보면 “내게도 이런 장애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스스로를 가로막기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귀와 입은 열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이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그만 장애 때문에 스스로를 막아두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속에 있는 것이 열등감이 되고, 그것이 내속에 스트레스가 되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남이 침범해오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단단한 벽을 칩니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은 점점 오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장애가 나에게 제한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바디매오에게 들렸던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시려고 하던 찰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래! 예수님이 메시아래!” 그때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10:47)

여기 보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들음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맹인은 보지 못했으나 듣는데 예민했습니다. 내면적인 열망이 있었습니다.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귀를 기울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지나가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직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장애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관심 있는 나사렛 예수, 바로 다윗의 자손, 이 땅에 오실 메시아가 자기 옆에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한 메시아의 다른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분이 오시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어! 그분 앞에 어떻게든 내가 서야해. 그분과 만나고 싶어. 그분과 대화하고 싶어!’ 그런데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딘가 계신 것 같은데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멀리 떨어져있는 그분을 향해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듣는 귀,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입을 열어서 가능한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내게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이런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의 외침은 바로 우리의 내면세계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할수록 방해하는 세력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예수님 앞에 나가려고했더니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적인 장애물은 벗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꽉 닫아두려고 했던 것은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의 가까이 갈 때까지 너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제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마가복음 10:48)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연거푸 두 번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 쓰여 있지만 아마도 예수님이 들으실 때까지 여러 번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제지합니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너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다. 너 같은 사람이 메시아인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면서 그를 더 멀리 쫓아내려고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고 하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하면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사람일 때도 있고 환경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훼방꾼이 자꾸 나타납니다. 우리가 세상의 흘러가는 조류 속에서 그냥 살려고 하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새롭게 결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보려고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꿈과 비전대로 살려고 하면 사람들이 자꾸 흔들어놓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넘어서야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맹인은 자기 안에 있는 열등감과 자기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소리가 가로막습니다. 그것은 비난과 조롱이었습니다. 따가운 눈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넘어서서 다시 소리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맹인의 외침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시도하려할 때마다 회의적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안 해봤는데 괜찮을까?’ 옆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조롱하고 윽박지릅니다. “너 그것 해봐야 절대 안 돼. 왜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느냐?” 이런 방해는 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연연하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들음과 들음이 만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본문을 보면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들음과 들음이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내뿜는 소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맹인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한 개인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와도 견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출애굽기 2:23~24上)

성경에는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소리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적절할 때에,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바로 그 적절한 때에 예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가시던 길을 멈추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간절한 소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마가복음 10:50)

예수님께서 그를 불렀을 때 맹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평소 같으면 주저앉은 채로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입고 있었던 겉옷까지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내어던져 버렸습니다. 이 맹인이 갖고 있었던 절박한 소원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는 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넘어섰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겉옷조차도 내던졌습니다. 겉옷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에는 이슬이 내리기 때문에 거지들은 겉옷을 이불 대신으로 사용했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면 베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그것을 입고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했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뒤로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맹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51)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눈을 못 뜨는 것을 알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바라느냐?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왜 그랬을까요? 맹인스스로가 자기 속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내면 깊은 속에 내가 목숨 걸고 이것을 추구할만한 것이 내게 있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바디매오는 그것을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야만 스스로의 억눌림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억압에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잠시 자유롭다가 다시 억눌릴 뿐입니다. 잠시 기쁘다가 다시 슬퍼질 뿐입니다. 잠시 즐겁다가 다시 우울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확인하기 원하셨습니다. “정말 네가 모든 것을 걸고 원하는 것이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질문하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얘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글쎄요, 좀 생각해봐야겠는데요? 며칠간은 이것저것 확인해봐야겠는데요?” 여러분, 이것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는 나의 실존 전체를 걸고 나아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성신학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시대의 영성의 최악의 문제가 무엇인가? 믿기는 믿는데 피상적으로 믿는 것이다.” 믿기는 믿는데 얄팍한 영성을 가지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을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기에 맹인은 자기의 삶 전체를 걸었습니다. 그는 흐리멍덩하지 않았습니다.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요청합니다. “나는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사는 것, 명예와 권력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놀랍게도 본문 앞의 36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곱과 요한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구할테니 좀 들어달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맹인에게 했던 질문을 그들에게 똑같이 합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그때 야곱과 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영광중에 오실 때 나를 오른편에, 내 동생을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그건 참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을 보면 솔로몬의 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놀랍게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것 하나면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네가 본질을 알고 있구나! 네가 신앙의 핵심을 꿰뚫고 있구나! 네가 한 민족과 나라의 지도자로서 무엇이 첫 번째로 필요한지를 알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듣는 마음뿐만 아니라 지혜와 능력과 부와 존귀와 장수 모두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기도제목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 실존 전체를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다른 것은 다 안주셔도 괜찮습니다. 이것 하나면 내가 만족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변화와 축복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도, 흐리멍덩한 기도, 얄팍한 신앙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신앙의 축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맹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처럼 우리도 나아가야합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힘 있게 달려가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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