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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3:10~4:4:

김지철 목사

2016.07.17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지난 목요일 교회 장로님들과 군 선교회부 회원들과 함께 전방 7보병사단을 방문하여 휴전선 GOP에 세워진 소망교회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1979년에 소망교회의 도움으로 지어진 교회인데, 너무 낙후되어서 헐고 새 교회를 다시 예쁘게 세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사랑 속에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멀리 있는 북한 초소에서도 밤이 되면 빨간 십자가를 볼 수 있고, 종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함께 간 성도님들과 제가 큰 감명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7사단 5연대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장 험준한 지형을 맡고 있는 독수리연대의 연대장입니다. 보통은 소위 ‘사단장이 뜬다’고 하면, 수하에 있는 지휘관들과 장병들은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지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반대로 지휘관들과 장병들이 사단장 곁으로 다가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단장은, 장병들이 전역을 할 때면 한 사람씩 불러 스카프를 손에 매 주면서, “세상에 나가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이것으로 닦아 주라”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저도 사단장에게 배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태극기와 칠성부대의 마크가 있고, 그 아래에는 ‘Never, never, never give up!’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인생 지표로 삼게 된 것은,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통해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그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위문할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거두게 된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며 음료수나 초콜릿 등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쓰이는 상품들을 ‘절절포(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 위문품’이라고 했습니다.
GOP가 어떤 곳입니까? 최전방의 초소 근무처 아닙니까? GOP에 들어가면 약 3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게 됩니다. 마치 인생이 막힌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기 위해 사단장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1달러 카드’입니다. 실제 1달러가 든 카드를 모든 장병들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달러의 꿈. 1달러의 꿈은 칠성부대 장병들이 세계로 나아가 더 큰 세상을 경험하여 대한민국의 대표리더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사단장의 마음입니다.’ 그는 이 카드를 주면서 “지금은 GOP를 담당하고 있는 장병이지만, 전역을 하게 되면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라. 그곳에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 꿈을 믿음 가운데서 꾸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 지휘관으로서, 또 교회의 장로로서 자신의 신앙을 장병들에게 전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는 ‘죽어도 예배드리고, 굶어도 말씀 읽고, 쓰러져도 새벽기도 드리고, 힘들어도 십일조 드린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칠성부대’답게, 7개의 별을 다양한 방법으로 장병들과 간부들에게 주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격, 두 번째는 체력인데, 이것이 특급 전사 선발 기준에 해당될 만큼 우수하면 별 하나씩을 달도록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자원봉사, 3개월 이상 금연, 주요 고지를 등정, GOP 전 구간 답사, 경연 우승, 자격증 취득 등을 기준으로 별들을 주고, 7개의 별을 모두 받는 장병과 간부의 가슴에는 배지를 달아 주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장병들에게 책을 읽도록 해서 독후감을 제출하면 별 하나를 주었고, 병장으로 전역하기 전에 진급을 하게 되면 또 별 하나를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단호하면서도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군 지휘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임을 삶으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고집을 꺾는 대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요나를 보면, 바로 전에 나눈 사단장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요나는 자신만 아는 존재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요나를 생각하면, 미소를 지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보다는 하나님 앞에서도 심술궂은 표정으로 화를 내는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요나서 4장에 들어가면, 요나서가 구약에서 복음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사랑이 많고, 은혜가 풍성하며, 오래 참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을 듣고 니느웨의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통회하며 자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보시며 처음에 계획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요나 4:2)

“하나님, 제가 니느웨로 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하나님은 너무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세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가 없다니, 참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요나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 4:2)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나 같은 죄인도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을 요나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자신에게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백성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불평과 원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망해야 합니다.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살리십니까? 왜 은혜를 베푸십니까?”
심지어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모른 척하시는 하나님께,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 4:3)

죽는 것이 낫다니, 예언자가 할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의 이 말은, 자살충동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에 체념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의도는 하나님을 향한 저항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결정이 싫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싫습니다. 이제 제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저를 데려가십시오!” 하나님을 상대로 담판을 짓고자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든지, 하나님의 예언자인 나를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서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태도로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 민족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 4:4)

“요나야, 네가 화를 내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계속 화를 내야 되겠느냐? 그것이 합당한 일이냐?” 하나님은 화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나에게 되물으십니다.
요나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떠오릅니다. 집 나갔던 동생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돌아온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런 나쁜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잔치라니 웬 말입니까? 용서를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받아 주신다고요?” 아무런 야단도 없이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보며 첫째 아들은 요나처럼 화를 냈습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누가복음 15:28)

동생이 돌아왔으니 아버지로부터 받게 될 자신의 지분이 줄어들게 될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내키는 대로 살던 부류와는 어울리기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한 고급 교육공무원의 “민중은 개돼지와도 같다”는 취중발언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입니까?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게 되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회입니까? 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힘을 갖게 되고, 그래서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사회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보이는 사회, 부모는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그 자녀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열리는 사회입니까? 부모 세대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어도 그 다음 세대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 사회입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는 살벌한 사회입니다. 변화와 기회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회가 되도록 모든 국민이 노력하는 것이 좋은 사회로 향하는 걸음입니다.

때로는 화를 내는 것이 복이 됩니다.

성경은 요나가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또한 화를 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인생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화는 자신을 보호하라는 경보음입니다. ‘지금 네 자아가 깨지고 있어. 네 가치관이 위협을 받고 있어. 네가 무시당하고 있어. 네가 억울한 상황이야!’ 나에게 소중한 것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도구로써 화를 내는 것입니다. 마치 칼에 찔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갑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화를 너무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화를 통제하기만 하다가 가슴이 멍들고, 속에 응어리가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화병을 앓게 되는 것이지요. 때로는 화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화내는 것이 축복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화내는 것이 화가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절제가 무너지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향해서 독을 품게 될 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드러운 내면세계가 사라져서 삶 전체가 황폐해질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도 일종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긍휼이 없는 열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인간을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화를 낸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점입니다. 나는 감정을 느끼는 존재이며,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억제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화를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화를 낼 때 기억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우선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 화난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전에 그대로 표출하게 되면, 화를 내는 당사자도 망가지고 상대방도 망가집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면,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내 속에 있는 말을 상대방에게 정당하게 알릴 수 있습니다. 거절하고 싶은 제안은 왜 거절하는지,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를 놓쳤거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시 화를 낼 수 없었던 일들이 마음속에 쌓이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화를 하나님께 쏟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감정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네가 화가 났구나. 그런데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만약 그 질문 앞에서 마음속에 ‘네, 옳습니다’라는 답이 나온다면, 계속 화를 내셔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형편없는 것, 쓸데없는 것 때문에 화를 냈네요. 지금 보니까 별것 아니네요’라고 깨달아진다면 화내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치유의 역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치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나와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는 화를 내고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분노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거룩한 분노인지 바르게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인간적인 분노에 멈추게 되면, 요나처럼 속 좁고 못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향한 거룩한 분노는 나의 잘못된 모습을 바꿉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분노는 세상의 악에 맞서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분노는 사랑만큼 힘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분노 에너지를 가졌습니다. 시대의 악,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민과 분노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입니까?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에 기반을 둔 인간적인 분노입니까?
오늘도 주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인간적인 분노를 멈추게 하시고 거룩한 분노를 품게 하소서. 그래서 이 땅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쓰임받게 하시옵소서.” 이러한 결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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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3:10~4:4: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지난 목요일 교회 장로님들과 군 선교회부 회원들과 함께 전방 7보병사단을 방문하여 휴전선 GOP에 세워진 소망교회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1979년에 소망교회의 도움으로 지어진 교회인데, 너무 낙후되어서 헐고 새 교회를 다시 예쁘게 세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사랑 속에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멀리 있는 북한 초소에서도 밤이 되면 빨간 십자가를 볼 수 있고, 종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함께 간 성도님들과 제가 큰 감명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7사단 5연대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장 험준한 지형을 맡고 있는 독수리연대의 연대장입니다. 보통은 소위 ‘사단장이 뜬다’고 하면, 수하에 있는 지휘관들과 장병들은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지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반대로 지휘관들과 장병들이 사단장 곁으로 다가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단장은, 장병들이 전역을 할 때면 한 사람씩 불러 스카프를 손에 매 주면서, “세상에 나가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이것으로 닦아 주라”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저도 사단장에게 배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태극기와 칠성부대의 마크가 있고, 그 아래에는 ‘Never, never, never give up!’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인생 지표로 삼게 된 것은,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통해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그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위문할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거두게 된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며 음료수나 초콜릿 등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쓰이는 상품들을 ‘절절포(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 위문품’이라고 했습니다.
GOP가 어떤 곳입니까? 최전방의 초소 근무처 아닙니까? GOP에 들어가면 약 3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게 됩니다. 마치 인생이 막힌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기 위해 사단장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1달러 카드’입니다. 실제 1달러가 든 카드를 모든 장병들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달러의 꿈. 1달러의 꿈은 칠성부대 장병들이 세계로 나아가 더 큰 세상을 경험하여 대한민국의 대표리더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사단장의 마음입니다.’ 그는 이 카드를 주면서 “지금은 GOP를 담당하고 있는 장병이지만, 전역을 하게 되면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라. 그곳에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 꿈을 믿음 가운데서 꾸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 지휘관으로서, 또 교회의 장로로서 자신의 신앙을 장병들에게 전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는 ‘죽어도 예배드리고, 굶어도 말씀 읽고, 쓰러져도 새벽기도 드리고, 힘들어도 십일조 드린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칠성부대’답게, 7개의 별을 다양한 방법으로 장병들과 간부들에게 주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격, 두 번째는 체력인데, 이것이 특급 전사 선발 기준에 해당될 만큼 우수하면 별 하나씩을 달도록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자원봉사, 3개월 이상 금연, 주요 고지를 등정, GOP 전 구간 답사, 경연 우승, 자격증 취득 등을 기준으로 별들을 주고, 7개의 별을 모두 받는 장병과 간부의 가슴에는 배지를 달아 주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장병들에게 책을 읽도록 해서 독후감을 제출하면 별 하나를 주었고, 병장으로 전역하기 전에 진급을 하게 되면 또 별 하나를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단호하면서도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군 지휘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임을 삶으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고집을 꺾는 대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요나를 보면, 바로 전에 나눈 사단장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요나는 자신만 아는 존재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요나를 생각하면, 미소를 지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보다는 하나님 앞에서도 심술궂은 표정으로 화를 내는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요나서 4장에 들어가면, 요나서가 구약에서 복음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사랑이 많고, 은혜가 풍성하며, 오래 참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을 듣고 니느웨의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통회하며 자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보시며 처음에 계획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요나 4:2)

“하나님, 제가 니느웨로 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하나님은 너무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세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가 없다니, 참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요나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 4:2)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나 같은 죄인도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을 요나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자신에게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백성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불평과 원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망해야 합니다.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살리십니까? 왜 은혜를 베푸십니까?”
심지어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모른 척하시는 하나님께,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 4:3)

죽는 것이 낫다니, 예언자가 할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의 이 말은, 자살충동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에 체념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의도는 하나님을 향한 저항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결정이 싫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싫습니다. 이제 제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저를 데려가십시오!” 하나님을 상대로 담판을 짓고자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든지, 하나님의 예언자인 나를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서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태도로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 민족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 4:4)

“요나야, 네가 화를 내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계속 화를 내야 되겠느냐? 그것이 합당한 일이냐?” 하나님은 화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나에게 되물으십니다.
요나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떠오릅니다. 집 나갔던 동생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돌아온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런 나쁜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잔치라니 웬 말입니까? 용서를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받아 주신다고요?” 아무런 야단도 없이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보며 첫째 아들은 요나처럼 화를 냈습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누가복음 15:28)

동생이 돌아왔으니 아버지로부터 받게 될 자신의 지분이 줄어들게 될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내키는 대로 살던 부류와는 어울리기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한 고급 교육공무원의 “민중은 개돼지와도 같다”는 취중발언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입니까?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게 되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회입니까? 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힘을 갖게 되고, 그래서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사회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보이는 사회, 부모는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그 자녀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열리는 사회입니까? 부모 세대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어도 그 다음 세대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 사회입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는 살벌한 사회입니다. 변화와 기회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회가 되도록 모든 국민이 노력하는 것이 좋은 사회로 향하는 걸음입니다.

때로는 화를 내는 것이 복이 됩니다.

성경은 요나가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또한 화를 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인생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화는 자신을 보호하라는 경보음입니다. ‘지금 네 자아가 깨지고 있어. 네 가치관이 위협을 받고 있어. 네가 무시당하고 있어. 네가 억울한 상황이야!’ 나에게 소중한 것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도구로써 화를 내는 것입니다. 마치 칼에 찔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갑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화를 너무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화를 통제하기만 하다가 가슴이 멍들고, 속에 응어리가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화병을 앓게 되는 것이지요. 때로는 화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화내는 것이 축복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화내는 것이 화가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절제가 무너지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향해서 독을 품게 될 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드러운 내면세계가 사라져서 삶 전체가 황폐해질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도 일종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긍휼이 없는 열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인간을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화를 낸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점입니다. 나는 감정을 느끼는 존재이며,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억제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화를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화를 낼 때 기억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우선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 화난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전에 그대로 표출하게 되면, 화를 내는 당사자도 망가지고 상대방도 망가집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면,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내 속에 있는 말을 상대방에게 정당하게 알릴 수 있습니다. 거절하고 싶은 제안은 왜 거절하는지,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를 놓쳤거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시 화를 낼 수 없었던 일들이 마음속에 쌓이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화를 하나님께 쏟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감정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네가 화가 났구나. 그런데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만약 그 질문 앞에서 마음속에 ‘네, 옳습니다’라는 답이 나온다면, 계속 화를 내셔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형편없는 것, 쓸데없는 것 때문에 화를 냈네요. 지금 보니까 별것 아니네요’라고 깨달아진다면 화내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치유의 역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치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나와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는 화를 내고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분노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거룩한 분노인지 바르게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인간적인 분노에 멈추게 되면, 요나처럼 속 좁고 못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향한 거룩한 분노는 나의 잘못된 모습을 바꿉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분노는 세상의 악에 맞서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분노는 사랑만큼 힘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분노 에너지를 가졌습니다. 시대의 악,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민과 분노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입니까?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에 기반을 둔 인간적인 분노입니까?
오늘도 주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인간적인 분노를 멈추게 하시고 거룩한 분노를 품게 하소서. 그래서 이 땅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쓰임받게 하시옵소서.” 이러한 결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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