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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기적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오늘은 성경주제 세 번째 시간으로 ‘기적’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목사로서 기적이라는 주제는 가장 많이 나누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주저하게 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앙은 개인의 체험보다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이 있어야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둘째, 기적의 경험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기독교 신앙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을 중심으로 내세우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검증시대에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물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마치 제 영혼을 향한 꾸중처럼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본래 신앙이 기적이 아니더냐. 하늘과 땅을 만들고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이 아니시더냐. 모세를 통해 종 되었던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그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니냐. 가장 약하고 작았던 이스라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 작은 민족을 하나님이 약속의 백성으로 세우신 것이 기적이 아니더냐. 그래서 하나님은 강한 자, 권력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한 자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인 것을 보여준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더냐. 세상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어느 신이 이렇게 뒤바꿔 놓은 적이 있느냐.”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귀신들을 내쫒으시고, 질병 들린 자들을 치유하신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의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의 재림주와 심판주로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신 것이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는 실제적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어떤 교회의 삼일 저녁예배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말씀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들어가게 될 때, 평생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동냥하는 거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6)
베드로는 구걸하는 거지를 손으로 붙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선포합니다. 그러자 거지가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기적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이 본문을 영적인 차원으로만 해석하셨습니다. 죄악으로 묶여 있는 인간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전하셨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으니 제 마음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맞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성경 말씀은 본래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인데 그렇게만 해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던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거기에서 영적인 변화, 정신적인 변화, 육체적인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목회현장에서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 후로 무려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도 아침에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장로님이 기도할 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가 성도님들의 가슴에 찬양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성도님들이 아멘으로 받게 하시고, 자기 안에 있던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쏟아지게 하시고, 그 기도들이 해결되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네 믿음이 하나님의 용서를 네 것으로 만들게 했다.’ 친히 말씀하시는 생명의 사건이 예배 안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기적을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도대체 기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기적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기적 행하기를 가능한 한 절제하셨습니다. 아니, 아예 안 하려고 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특별히 인간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기적을 예수님은 전적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사탄이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라고 부추기며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러 다가옵니다. “예수야, 너 배고프지? 저 광야에 있는 돌들을 보아라. 빵 조각으로 보이지? 저 돌들을 빵 조각으로 바꾸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환호하겠냐. 백성들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지도자가 할 일 아니냐? 그러니 네가 저 돌들을 떡과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왕으로 세우자고 몰려 들 거야!”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성전 위에 끌고 올라가서 유혹합니다. “여기서 뛰어 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가 너를 받쳐 주지 않겠니?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안전하게 내려온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칠 거야. 이런 기적을 행하는 자를 우리의 왕으로 삼자고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한 번 해보자.”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아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만을 주장하셨습니다.
사탄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인가? 그럼 표적을 보이라. 무엇인가 기적을 만들어 우리가 믿게 해라. 우리가 보고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해라.” 그들은 예수님께 기적 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2:39)
“나에게 기적과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 아니냐? 내가 너희에게 보일 표적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부활한 이 표적 밖에 없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러분,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까요? 기적을 경험하면 믿음이 커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드는 것이지, 기적을 보았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기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도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들이 본 것으로 믿느냐? 아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되도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기적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까? 예수님의 인격에 근거합니까? 그렇다면 그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되고, 기적을 만드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기적을 거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을 통제했던 기적도 있습니다. 파도를 향해서 잠잠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아정체성을 깨뜨리는 귀신을 향해 “물러가라!” 소리치시며 쫓아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질병 들린 사람을 친히 만지시며 그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기적을 거부하시면서 동시에 기적을 이토록 많이 행하셨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시대가 불만족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마주한 현실이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보신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던 인간의 존엄성은 파괴당하고 있었습니다. 억압당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곡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통해서 사람이 사람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열등감, 분열된 사고, 흐린 판단력 등이 사람들을 분열증환자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강박증에 눌려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 또한 인간의 실존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이나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그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곤궁함입니다.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인간이 억압받는 역사입니다. 동시에 그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거절하시면서도, 인간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에 가슴 아파하시며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란 기존 현실 세계에 대한 도전이며,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붓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현실, 악하고 음란한 현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현실, 즉 인간을 못살게 구는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에게 이 기적을 향해 나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도록 초청된 것입니다.
맹인은 다가오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기적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분이 메시아인가 봐. 저 분이 우리의 불쌍함을 받아주시는 분인가 봐.” 사람들은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한 맹인도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난 기회였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 기회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맹인이면서 거지였던 이 사람, 마가복음을 보면 그의 이름은 바디메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곁에 오신다는 소식에 예수님이 들으실 수 있도록 소리 내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8:38)
목소리에 모든 힘을 더했습니다. 자기의 실존 전체가, 생명 전체가 걸려 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 예수’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아 칭호의 한 표현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구원할 자이고, 나를 구원할 자입니다.” 그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처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실존을 당신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 맹인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던 존재였습니다. 맹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용납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맹인을 향해서 엄하게 꾸짖습니다. “야, 조용히 해! 시끄러우니 떠들지 마. 좀 잠잠해라.”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피해가 무엇일까요? 장애인들이 받는 어려움이 무엇일까요? 물질의 부족일까요? 그럴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일까요?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부당하고 있다는 고통이고, 외로움이며, 절망입니다. 어쩌면 내가 존재하는 것조차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자괴감입니다.
이 맹인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꾸짖은 것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실존 전체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소리를 크게 내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실존 전체가 걸린 것이 믿음 아닐까요? 신앙이 무엇일까요? 내 인생 전체를 걸고, 내 몸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 아닐까요?
맹인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그를 받으십니다. 용납하십니다. 그의 마음을 채워 주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믿음이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18:41)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네 문제를 알고 있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네 스스로 문제를 확인하고, 그 문제를 내게 맡기는 것 맞지?”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실 때, 물으셨고 말씀하셨고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 함께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물음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의 심정을 안다. 내가 네 편이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네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지금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는데, 너도 네 편이 되어야 한다. 너도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받아들여라. 너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지녀라. 다른 사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너는 너를 싫어하고, 너를 거부하지 마라. 타인이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욕하는 것도 서러운데 네가 너를 욕되게 한다면 어떻게 네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너는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그동안 생각을 안 해봤는데, 오늘 저녁까지 참아주시면 안 됩니까?” 혹은 “일주일동안 제가 연구 좀 해 보겠습니다.” 한다면,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맹인은 주님이 물으시면 언제든지 대답할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것이 내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이것이 나를 억압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을 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저의 이 문제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세요.”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바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맛보는 삶을 꿈꾸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네 문제를 다 내 앞에 내려놓고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당신 자신을 높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높여 주시려는 사건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이 기적 사건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다음처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2∼24)
산에게 “바다에 던져지라!” 말하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아뢰면 그대로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산처럼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들이 무엇입니까? 내 육체를 아프게 하고,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내 속에 이런 무거운 산이 있습니다. 내가 바다에 던지겠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이 산을 바다에 내던지겠습니다. 내 육체를 아프게 하는 것, 내 안에서 나를 쏘는 것들을 바다에 던지겠습니다.”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기적보다 더 큰 하나님, 내 믿음과 사랑의 대상인 예수님께 모든 문제들을 맡기고 우리에게 주신 삶을 주님과 함께 새롭게 열어가는 것, 또한 기적을 맛보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며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네 믿음이 너를 회복했다.”
누가복음 18: 35 ~ 43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성경은 기적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오늘은 성경주제 세 번째 시간으로 ‘기적’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목사로서 기적이라는 주제는 가장 많이 나누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주저하게 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앙은 개인의 체험보다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이 있어야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둘째, 기적의 경험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기독교 신앙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을 중심으로 내세우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검증시대에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물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마치 제 영혼을 향한 꾸중처럼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본래 신앙이 기적이 아니더냐. 하늘과 땅을 만들고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이 아니시더냐. 모세를 통해 종 되었던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그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니냐. 가장 약하고 작았던 이스라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 작은 민족을 하나님이 약속의 백성으로 세우신 것이 기적이 아니더냐. 그래서 하나님은 강한 자, 권력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한 자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인 것을 보여준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더냐. 세상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어느 신이 이렇게 뒤바꿔 놓은 적이 있느냐.”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귀신들을 내쫒으시고, 질병 들린 자들을 치유하신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의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의 재림주와 심판주로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신 것이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는 실제적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어떤 교회의 삼일 저녁예배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말씀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들어가게 될 때, 평생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동냥하는 거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6)
베드로는 구걸하는 거지를 손으로 붙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선포합니다. 그러자 거지가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기적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이 본문을 영적인 차원으로만 해석하셨습니다. 죄악으로 묶여 있는 인간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전하셨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으니 제 마음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맞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성경 말씀은 본래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인데 그렇게만 해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던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거기에서 영적인 변화, 정신적인 변화, 육체적인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목회현장에서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 후로 무려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도 아침에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장로님이 기도할 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가 성도님들의 가슴에 찬양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성도님들이 아멘으로 받게 하시고, 자기 안에 있던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쏟아지게 하시고, 그 기도들이 해결되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네 믿음이 하나님의 용서를 네 것으로 만들게 했다.’ 친히 말씀하시는 생명의 사건이 예배 안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기적을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도대체 기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기적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기적 행하기를 가능한 한 절제하셨습니다. 아니, 아예 안 하려고 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특별히 인간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기적을 예수님은 전적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사탄이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라고 부추기며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러 다가옵니다. “예수야, 너 배고프지? 저 광야에 있는 돌들을 보아라. 빵 조각으로 보이지? 저 돌들을 빵 조각으로 바꾸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환호하겠냐. 백성들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지도자가 할 일 아니냐? 그러니 네가 저 돌들을 떡과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왕으로 세우자고 몰려 들 거야!”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성전 위에 끌고 올라가서 유혹합니다. “여기서 뛰어 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가 너를 받쳐 주지 않겠니?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안전하게 내려온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칠 거야. 이런 기적을 행하는 자를 우리의 왕으로 삼자고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한 번 해보자.”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아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만을 주장하셨습니다.
사탄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인가? 그럼 표적을 보이라. 무엇인가 기적을 만들어 우리가 믿게 해라. 우리가 보고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해라.” 그들은 예수님께 기적 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2:39)
“나에게 기적과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 아니냐? 내가 너희에게 보일 표적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부활한 이 표적 밖에 없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러분,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까요? 기적을 경험하면 믿음이 커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드는 것이지, 기적을 보았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기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도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들이 본 것으로 믿느냐? 아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되도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기적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까? 예수님의 인격에 근거합니까? 그렇다면 그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되고, 기적을 만드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기적을 거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을 통제했던 기적도 있습니다. 파도를 향해서 잠잠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아정체성을 깨뜨리는 귀신을 향해 “물러가라!” 소리치시며 쫓아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질병 들린 사람을 친히 만지시며 그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기적을 거부하시면서 동시에 기적을 이토록 많이 행하셨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시대가 불만족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마주한 현실이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보신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던 인간의 존엄성은 파괴당하고 있었습니다. 억압당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곡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통해서 사람이 사람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열등감, 분열된 사고, 흐린 판단력 등이 사람들을 분열증환자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강박증에 눌려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 또한 인간의 실존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이나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그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곤궁함입니다.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인간이 억압받는 역사입니다. 동시에 그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거절하시면서도, 인간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에 가슴 아파하시며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란 기존 현실 세계에 대한 도전이며,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붓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현실, 악하고 음란한 현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현실, 즉 인간을 못살게 구는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에게 이 기적을 향해 나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도록 초청된 것입니다.
맹인은 다가오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기적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분이 메시아인가 봐. 저 분이 우리의 불쌍함을 받아주시는 분인가 봐.” 사람들은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한 맹인도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난 기회였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 기회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맹인이면서 거지였던 이 사람, 마가복음을 보면 그의 이름은 바디메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곁에 오신다는 소식에 예수님이 들으실 수 있도록 소리 내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8:38)
목소리에 모든 힘을 더했습니다. 자기의 실존 전체가, 생명 전체가 걸려 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 예수’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아 칭호의 한 표현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구원할 자이고, 나를 구원할 자입니다.” 그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처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실존을 당신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 맹인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던 존재였습니다. 맹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용납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맹인을 향해서 엄하게 꾸짖습니다. “야, 조용히 해! 시끄러우니 떠들지 마. 좀 잠잠해라.”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피해가 무엇일까요? 장애인들이 받는 어려움이 무엇일까요? 물질의 부족일까요? 그럴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일까요?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부당하고 있다는 고통이고, 외로움이며, 절망입니다. 어쩌면 내가 존재하는 것조차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자괴감입니다.
이 맹인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꾸짖은 것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실존 전체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소리를 크게 내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실존 전체가 걸린 것이 믿음 아닐까요? 신앙이 무엇일까요? 내 인생 전체를 걸고, 내 몸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 아닐까요?
맹인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그를 받으십니다. 용납하십니다. 그의 마음을 채워 주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믿음이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18:41)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네 문제를 알고 있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네 스스로 문제를 확인하고, 그 문제를 내게 맡기는 것 맞지?”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실 때, 물으셨고 말씀하셨고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 함께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물음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의 심정을 안다. 내가 네 편이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네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지금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는데, 너도 네 편이 되어야 한다. 너도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받아들여라. 너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지녀라. 다른 사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너는 너를 싫어하고, 너를 거부하지 마라. 타인이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욕하는 것도 서러운데 네가 너를 욕되게 한다면 어떻게 네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너는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그동안 생각을 안 해봤는데, 오늘 저녁까지 참아주시면 안 됩니까?” 혹은 “일주일동안 제가 연구 좀 해 보겠습니다.” 한다면,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맹인은 주님이 물으시면 언제든지 대답할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것이 내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이것이 나를 억압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을 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저의 이 문제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세요.”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바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맛보는 삶을 꿈꾸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네 문제를 다 내 앞에 내려놓고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당신 자신을 높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높여 주시려는 사건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이 기적 사건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다음처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2∼24)
산에게 “바다에 던져지라!” 말하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아뢰면 그대로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산처럼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들이 무엇입니까? 내 육체를 아프게 하고,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내 속에 이런 무거운 산이 있습니다. 내가 바다에 던지겠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이 산을 바다에 내던지겠습니다. 내 육체를 아프게 하는 것, 내 안에서 나를 쏘는 것들을 바다에 던지겠습니다.”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기적보다 더 큰 하나님, 내 믿음과 사랑의 대상인 예수님께 모든 문제들을 맡기고 우리에게 주신 삶을 주님과 함께 새롭게 열어가는 것, 또한 기적을 맛보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며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네 믿음이 너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