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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이 참 배움의 비결입니다.
SBS에 ‘영재 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뛰어난 어린아이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수학의 영재, 그림, 피아노, 작곡 등 예술 분야의 영재, 영어, 한자 등 어학 분야의 영재, 탁구, 체조 등 체육 분야의 영재들을 발굴하고 조명합니다.
한번은 자동차의 모든 종류를 꿰뚫는 아이가 출현한 적 있습니다. 뺑소니 차량을 잡는 경찰과 시합을 했는데, 이 어린아이가 차량의 부분 부분을 관찰하면서 뺑소니 차량을 경찰보다 더 정확하게 잡아냈습니다. 이에 경찰이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도 포착되었습니다. 한편 그렇게 열심을 내며 무언가에 몰두하는 영재들에게 PD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아침부터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게 힘들지는 않아요?” 그러자 한결같은 대답이 나옵니다. “너무 재밌어요. 즐거워서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무언가에 몰입하고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영재의 달란트가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단 내 아이와 직접 비교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얘야, 쟤 좀 봐라. 근데 너는 왜 저런 재주가 없니? 누구를 닮아서 그러니?”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정확히 답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엄마 닮아서 그래요.” “아빠 닮아서 그래요.”
한편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자의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논어』의 옹아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즐겁게 일하는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배움의 모습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도 몰입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취미 생활이든, 공부든, 연애의 기억이든 너무 좋아서, 또 너무 즐거워서 몰입했던 경험 말입니다. 이처럼 삶을 즐겁게 사는 것만큼 멋지고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낙지자(樂之者)의 대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낙지자(樂之者)’의 삶을 보여주신 원조가 누구일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진정한 낙지자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행위를 하실 때마다 너무 기뻐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일을 매우 즐거워하셨습니다. 일 자체도 즐기셨고, 그에 대한 결과를 보시면서도 “보기에 참 좋구나.”라고 경탄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깊은 울림을 경험합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처럼 내가 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까? 아니면 이만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어떤 일입니까?
구약에서는 지혜를 인격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잠언에 이러한 묘사와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예수님으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잠언 8장 30~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나’를 지혜 혹은 예수님으로, ‘그’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30~31)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창조 행위를 하며 즐거워하고, 사람들을 보며 기뻐했다고 표현합니다. 즉 지혜자이신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태초에 함께하셨으며, 심지어 그분이 이 땅에 내려와 인간들을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즐거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누가복음 10:21)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연약한 자, 아픈 자, 소외된 자와 함께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쁨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즐거움과 감사로 이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증언하십니다.
일과 노동이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저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 예수님의 기쁨이 내 안에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공부와 배움이 수단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가 되고, 이후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게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제 마음의 즐거움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큰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너무 벅차진 않을까? 정말 이 많은 사역들을 바르게 행해 갈 수 있을까?’라고 수없이 고민하며 되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섰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그 자체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말씀 증거하는 설교가 어느새 제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가장 즐겁고 감사한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목회와 설교는 기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 삶의 고뇌가 들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두려움과 떨림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쁨이 저를 이끌었고, 여기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혹시 그와는 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간 적은 없습니까? 삶의 짐에 억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너무 척박하고 치열해서 억눌려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런 세상 속에서도 즐거워하라는 것이 너무 사치스러운 소리처럼 들리진 않습니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항의하고 싶은 적은 없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삶을 산 적이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밥벌이 차원에서 노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 내가 일을 합니다. 노동을 합니다. 정신적인 노동, 육체적인 노동도 합니다. 이 노동이 내게 기쁨이 되는지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묻고 질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다시금 발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노동이란 고역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즐거움입니까? 더 거칠게 표현한다면, 노동이란 저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까?
노동의 가치와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 이전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노동의 본래 가치를 회복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놀이터로 초청하셨습니다. 싸움터나 전쟁터로 인간을 내몬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battle field가 아니라 play ground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으로 삶을 누리는 곳이 에덴동산이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모습을 다시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를 라틴어 ‘호모루덴스(Homo Ludens)’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호모(Homo)’는 인간을, ‘루덴스(Ludens)’는 놀이를 가리키므로, ‘호모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단지 쾌락의 존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놀이처럼 즐기는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관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성경에 이미 주어진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도 나처럼 창조하면서 즐거워해라. 이 땅에서 일하면서 네가 만든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해라. 내가 네게 맡긴 창조세계를 즐겁게 관리하고 운영하고 경영해라.” 이는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중)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든 모든 창조물을 네게 맡기겠다. 이제는 네가 내 심정으로 우주 만물을 다스려라. 네가 나의 창조의 즐거움에 동참해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동식물에게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입니다. 때문에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해 먹거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초식 동물이나 육식 동물 가릴 것 없이 치열하게 먹을거리를 놓고 다툽니다. 두 번째로 짝짓기가 있습니다.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짝짓기를 시도합니다. 동물의 세계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이 두 내용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도 위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생존과 번식의 욕구가 인간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더불어 주신 명령이 있는데, 바로 ‘노동’입니다. 노동을 통해 삶을 멋지게 가꾸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통해 창조의 기쁨, 삶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저 놀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놀되 일하며 놀고, 놀면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작하다’는 말은 밭을 갈고 뒤엎으면서 육체적으로 수고하며 땀 흘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일이 기쁨이 되고 놀이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국 축구 대표 팀을 맡은 외국 감독이 늘 지적하는 게 있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이 기술도 좋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똑똑하고 명민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수들은 승리하는 법만 배우는 것 같다고 합니다. 즉 축구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 즐기는 법을 배우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자녀들에게 승리만 가르치지는 않습니까? 성적이 올라가길, 1등하길,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까? 왜 공부해야 하는지, 공부하면 어떤 기쁨이 있고, 공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또 공부해야 할 이유와 목표를 가르치기보다는 무조건 경쟁해서 이기라고, 우승하라고만 가르치진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괴로움이 되고, 고역이 되며, 자녀들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어른 세대들의 사고방식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온 삶의 형편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해방 이후엔 가난과 빈곤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이겨야 했습니다. 치열하게 투쟁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고, 즐기는 것은 일종의 죄악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놀고 즐기는 건 게으른 자들, 못된 자들, 한량들이나 하는 잘못된 일이라 치부했습니다. 학생이 되면 공부에 목을 매야 했고, 직장에 들어가면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밤새 노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입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이 오늘날 같은 기적적인 경제 발전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축복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부모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아버지 시대의 일이에요. 우리 시대는 달라요. 우리에겐 수고하고 노동하는 것 대신 즐기는 게 필요해요. 놀이도 필요하고 여행도 가야 되고 문화생활도 즐겨야 해요.” 때론 거기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움을 갈구하는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모습은 소중한 것입니다.
즐거움에 사명을 더할 때, 에덴의 삶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고역처럼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여기에 즐거움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본래 하나님도 우리의 삶을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저 즐거움만으로 남게 되면 게으름으로 점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 ‘사명감’을 더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 중 16~1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음대로 활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 금하신 게 있으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피조물일 뿐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롭듯이 인간인 우리도 인간의 모습일 때 가장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선을 넘어서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껏 누리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공자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명에 대한 말씀 말입니다.
樂之者 不如使命者(낙지자 불여사명자)
즐거워하는 것은 사명 받은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과 노동을 즐거워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조부를 맡으신 분들, 차량부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예배를 감당하시는 분들, 교사로서 헌신하시는 분들, 찬양대에서 수고하시는 분들 모두가 묵묵히 섬김을 감당하십니다. 만약 강제로 했다면 고역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위임이요, 사명임을 알기에, 겸손히 감사함으로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주부의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그렇습니다. 직장생활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분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사명을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 움직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게 된다면, 감사가 배가됩니다.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 한 즐겁게 일하며 살아가겠노라고 고백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play ground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battle field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것은 놀이터입니다. 이 세계를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셨고, 위임하셨습니다. 기쁨으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2: 15 ~ 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몰입이 참 배움의 비결입니다.
SBS에 ‘영재 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뛰어난 어린아이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수학의 영재, 그림, 피아노, 작곡 등 예술 분야의 영재, 영어, 한자 등 어학 분야의 영재, 탁구, 체조 등 체육 분야의 영재들을 발굴하고 조명합니다.
한번은 자동차의 모든 종류를 꿰뚫는 아이가 출현한 적 있습니다. 뺑소니 차량을 잡는 경찰과 시합을 했는데, 이 어린아이가 차량의 부분 부분을 관찰하면서 뺑소니 차량을 경찰보다 더 정확하게 잡아냈습니다. 이에 경찰이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도 포착되었습니다. 한편 그렇게 열심을 내며 무언가에 몰두하는 영재들에게 PD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아침부터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게 힘들지는 않아요?” 그러자 한결같은 대답이 나옵니다. “너무 재밌어요. 즐거워서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무언가에 몰입하고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영재의 달란트가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단 내 아이와 직접 비교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얘야, 쟤 좀 봐라. 근데 너는 왜 저런 재주가 없니? 누구를 닮아서 그러니?”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정확히 답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엄마 닮아서 그래요.” “아빠 닮아서 그래요.”
한편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자의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논어』의 옹아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즐겁게 일하는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배움의 모습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도 몰입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취미 생활이든, 공부든, 연애의 기억이든 너무 좋아서, 또 너무 즐거워서 몰입했던 경험 말입니다. 이처럼 삶을 즐겁게 사는 것만큼 멋지고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낙지자(樂之者)의 대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낙지자(樂之者)’의 삶을 보여주신 원조가 누구일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진정한 낙지자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행위를 하실 때마다 너무 기뻐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일을 매우 즐거워하셨습니다. 일 자체도 즐기셨고, 그에 대한 결과를 보시면서도 “보기에 참 좋구나.”라고 경탄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깊은 울림을 경험합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처럼 내가 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까? 아니면 이만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어떤 일입니까?
구약에서는 지혜를 인격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잠언에 이러한 묘사와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예수님으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잠언 8장 30~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나’를 지혜 혹은 예수님으로, ‘그’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30~31)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창조 행위를 하며 즐거워하고, 사람들을 보며 기뻐했다고 표현합니다. 즉 지혜자이신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태초에 함께하셨으며, 심지어 그분이 이 땅에 내려와 인간들을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즐거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누가복음 10:21)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연약한 자, 아픈 자, 소외된 자와 함께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쁨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즐거움과 감사로 이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증언하십니다.
일과 노동이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저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 예수님의 기쁨이 내 안에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공부와 배움이 수단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가 되고, 이후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게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제 마음의 즐거움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큰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너무 벅차진 않을까? 정말 이 많은 사역들을 바르게 행해 갈 수 있을까?’라고 수없이 고민하며 되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섰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그 자체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말씀 증거하는 설교가 어느새 제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가장 즐겁고 감사한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목회와 설교는 기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 삶의 고뇌가 들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두려움과 떨림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쁨이 저를 이끌었고, 여기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혹시 그와는 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간 적은 없습니까? 삶의 짐에 억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너무 척박하고 치열해서 억눌려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런 세상 속에서도 즐거워하라는 것이 너무 사치스러운 소리처럼 들리진 않습니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항의하고 싶은 적은 없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삶을 산 적이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밥벌이 차원에서 노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 내가 일을 합니다. 노동을 합니다. 정신적인 노동, 육체적인 노동도 합니다. 이 노동이 내게 기쁨이 되는지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묻고 질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다시금 발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노동이란 고역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즐거움입니까? 더 거칠게 표현한다면, 노동이란 저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까?
노동의 가치와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 이전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노동의 본래 가치를 회복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놀이터로 초청하셨습니다. 싸움터나 전쟁터로 인간을 내몬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battle field가 아니라 play ground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으로 삶을 누리는 곳이 에덴동산이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모습을 다시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를 라틴어 ‘호모루덴스(Homo Ludens)’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호모(Homo)’는 인간을, ‘루덴스(Ludens)’는 놀이를 가리키므로, ‘호모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단지 쾌락의 존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놀이처럼 즐기는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관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성경에 이미 주어진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도 나처럼 창조하면서 즐거워해라. 이 땅에서 일하면서 네가 만든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해라. 내가 네게 맡긴 창조세계를 즐겁게 관리하고 운영하고 경영해라.” 이는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중)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든 모든 창조물을 네게 맡기겠다. 이제는 네가 내 심정으로 우주 만물을 다스려라. 네가 나의 창조의 즐거움에 동참해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동식물에게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입니다. 때문에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해 먹거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초식 동물이나 육식 동물 가릴 것 없이 치열하게 먹을거리를 놓고 다툽니다. 두 번째로 짝짓기가 있습니다.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짝짓기를 시도합니다. 동물의 세계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이 두 내용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도 위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생존과 번식의 욕구가 인간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더불어 주신 명령이 있는데, 바로 ‘노동’입니다. 노동을 통해 삶을 멋지게 가꾸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통해 창조의 기쁨, 삶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저 놀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놀되 일하며 놀고, 놀면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작하다’는 말은 밭을 갈고 뒤엎으면서 육체적으로 수고하며 땀 흘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일이 기쁨이 되고 놀이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국 축구 대표 팀을 맡은 외국 감독이 늘 지적하는 게 있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이 기술도 좋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똑똑하고 명민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수들은 승리하는 법만 배우는 것 같다고 합니다. 즉 축구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 즐기는 법을 배우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자녀들에게 승리만 가르치지는 않습니까? 성적이 올라가길, 1등하길,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까? 왜 공부해야 하는지, 공부하면 어떤 기쁨이 있고, 공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또 공부해야 할 이유와 목표를 가르치기보다는 무조건 경쟁해서 이기라고, 우승하라고만 가르치진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괴로움이 되고, 고역이 되며, 자녀들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어른 세대들의 사고방식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온 삶의 형편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해방 이후엔 가난과 빈곤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이겨야 했습니다. 치열하게 투쟁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고, 즐기는 것은 일종의 죄악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놀고 즐기는 건 게으른 자들, 못된 자들, 한량들이나 하는 잘못된 일이라 치부했습니다. 학생이 되면 공부에 목을 매야 했고, 직장에 들어가면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밤새 노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입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이 오늘날 같은 기적적인 경제 발전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축복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부모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아버지 시대의 일이에요. 우리 시대는 달라요. 우리에겐 수고하고 노동하는 것 대신 즐기는 게 필요해요. 놀이도 필요하고 여행도 가야 되고 문화생활도 즐겨야 해요.” 때론 거기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움을 갈구하는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모습은 소중한 것입니다.
즐거움에 사명을 더할 때, 에덴의 삶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고역처럼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여기에 즐거움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본래 하나님도 우리의 삶을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저 즐거움만으로 남게 되면 게으름으로 점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 ‘사명감’을 더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 중 16~1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음대로 활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 금하신 게 있으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피조물일 뿐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롭듯이 인간인 우리도 인간의 모습일 때 가장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선을 넘어서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껏 누리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공자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명에 대한 말씀 말입니다.
樂之者 不如使命者(낙지자 불여사명자)
즐거워하는 것은 사명 받은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과 노동을 즐거워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조부를 맡으신 분들, 차량부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예배를 감당하시는 분들, 교사로서 헌신하시는 분들, 찬양대에서 수고하시는 분들 모두가 묵묵히 섬김을 감당하십니다. 만약 강제로 했다면 고역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위임이요, 사명임을 알기에, 겸손히 감사함으로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주부의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그렇습니다. 직장생활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분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사명을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 움직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게 된다면, 감사가 배가됩니다.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 한 즐겁게 일하며 살아가겠노라고 고백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play ground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battle field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것은 놀이터입니다. 이 세계를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셨고, 위임하셨습니다. 기쁨으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3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노동 : 하나님 사랑의 사명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07장, 38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2:15~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영재라고 평가되는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들을 재밌어 하며, 즐거워합니다. 공자(논어)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즐기며 행하고 있습니까?
설교의 요약
즐겁게 일을 했던 분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창1:31).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마다 너무나 좋아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쁨으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눅10:21).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 삶에 억지로 하는 것은 없습니까? 기쁨이 우리의 삶을 붙들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점검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노동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노동은 고역인가? 아니면 즐거운 놀이인가? 노동은 저주일까? 축복일까? 본문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을 싸움터나 전쟁터(battle ground)가 아닌 놀이터(play ground)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을 놀이처럼 즐기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들은 어떻게 짝짓기하며 번식할 것인가에 모든 초점이 맞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멋진지를 스스로 느끼면서 행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첫 인간에게 일/노동을 부탁하셨습니다(창2:15). 창2:15절에서 ‘경작한다’는 것은 육체로 땀을 흘리는 수고를 의미하며, ‘지키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인들은 이기는 법만 배우지, 일 자체를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일을 고역으로 여기지 말고 즐거움을 더해야 합니다(창2:16). 그러나 즐기려고만 하면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즐거움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감을 더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한 존재, 즐거움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위대한 존재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며, 피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일과 노동이 기쁨의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을 때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을 때 억지로 행하는 노동은 고역이지만, 자발적인 노동은 놀이가 되며 사명이 들어가면 즐거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다시금 수정해 봅니다.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여 낙지자, 낙지자 불여 사명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樂之者不如使命者)”.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주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명으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것, 움직일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으로 여길 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play ground를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이것이 battle ground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선물로 주었으니 우리에게 ‘다스리고 관리하며 만들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쁨으로 그것들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오늘 내가 기쁘고 즐겁게 행하는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십시오.
2. 나의 즐거움을 빼앗는 원인들이 있다면 무엇일까?
억지로 행함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겼던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십시오.
3.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부여하신 사명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 사명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기쁨과 감사가 아니라 억지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동이 고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사명감으로 감당하게 하며, 그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