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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의 가족인가?

마가복음 3: 31 ~ 35

김지철 목사

2015.11.22

많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가족’을 이야기합니다.

카피라이터 정철이 쓴 『인생의 목적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가는 2,820명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를 말해 보라고 한 후, 그 단어들을 모아 순위를 매겼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로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이 책에 따르면, 첫 번째는 가족, 두 번째는 사랑, 세 번째는 나, 네 번째는 엄마, 다섯 번째는 꿈입니다. 그리고 행복, 친구, 사람, 믿음, 우리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10위 안에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여섯 개에서 일곱 개 정도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는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이란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쉽게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가슴 깊이 박힙니다. 그런데 또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그 깊이 박혔던 상처를 쉽게 아물게 하기도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나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족이란 영어 같아. 마음에는 있는데 표현이 잘 안 돼.”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겠지 싶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속마음입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몇 마디만으로도 서로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괜찮아. 다시 한 번 해 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내 마음에는 늘 네가 있어.’ 이런 짧은 말로도 가정은 살아납니다. 억눌리고 상처 받은 마음들이 회복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가족이란 내게 공기와도 같아.” 우리가 숨 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기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기에게 감사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존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소중해도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고, 의존하며 살면서도 고맙다고 하지 않고, 생명과도 같은 존재임에도 마치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가족이 없는 삶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란 생명체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살아 있을 동안에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힘이 났습니까? 좌절하고 낙심했을 때 가족의 존재가 얼마나 큰 용기를 주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는 둥 마는 둥 가족을 대합니다. 그러다가 가족의 손이 차가워진 후에야 ‘내가 더 사랑할 걸…’ 하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이란 외로움이다”라고 말합니다. 함께 있는데도 외롭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 때로는 삶의 저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외로움이 삶의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외로움이 저주가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나는 인생의 무대에서 엑스트라야.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어.’ 외로움이 내면에 침잠하게 되면 세상은 슬픔의 자리가 됩니다. 스스로를 외톨이나 소외된 존재로 여기며 삶의 많은 부분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나 자신이 사라지면 곁에 있는 가족들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외로움을 저주로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외로움도 방향을 바꾸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내면의 조명을 통해 ‘나는 이 땅에 홀로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면, 절대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나는 혼자구나, 인생에는 한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로움을 통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세상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로 여겨지고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확인하면서 ‘나를 통해 이 세상이 어떤 축복을 받을까’ 하는 기대가 생깁니다. 또한, 내가 소중하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웃이 힘들어하는 것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묻게 되고 내게 있는 사명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외로움은 단지 슬픔이나 저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확인시키는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이 전환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매일 격려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특별한 가족 공동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가족, 즉 말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는 손자와 손녀가 없습니다. 언제나 아들과 딸뿐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혈연적인 촌수 관계가 사라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갖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혈연 공동체보다 더 강력하고 소중한 공동체가 탄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마가복음 3:31∼32)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31절의 ‘밖에 서서’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예수님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예수님 곁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밖에 선 사람과 안에서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밖에 선 사람들은 예수님의 혈연 공동체인 어머니와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심리적인 거부입니다. 나는 저 속에 끼기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그 현장에 참여하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혈연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교회에 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믿음의 모임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서 구경꾼 노릇을 합니다. 한마디로 관망자로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3인칭의 지식이나 정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3인칭은 영원히 격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란, 내가 그 속에 들어가야 깨달아집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믿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모험을 시작해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시는지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말씀과 씨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3인칭에 머물러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리에 직접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며 신앙의 현장에 참여해야 합니다.

영적 공동체는 혈연 공동체를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혈연 공동체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의 자녀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는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4∼35)

예수님은 둘러앉은 자들에게 밖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소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에게 “너희가 내 어머니고 내 동생들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의 인격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친근성의 표시입니다. 당시 랍비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앞에 다가와 앉아 경청했습니다. 스승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거기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젊은이와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이방인도 있었고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별 없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벽들, 장애물들을 과감히 깨부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느냐?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느냐?” 그러면서 새로운 하나님 가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혈연에 의해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맺어진 공동체 말입니다.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이는 공동체, 영적인 믿음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예배시간에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출신지가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다른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우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얼마나 무서워합니까? 자녀가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한다면, 그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어렵게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래서 감사하며 나도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좋은 자녀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워 떨며 도망가는 경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신다” 선포하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콤플렉스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또 제 동생이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제 콤플렉스에 시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나와는 어떤 관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서 말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예수님을 맏아들로 세우셨다고 하니, 나 같은 사람은 한참 뒤에 있는 아들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어느 날 “예수 형님” 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때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종종 그렇게 불렀습니다. “예수 형님, 이것 어떻게 해야 해요? 제게 지혜를 좀 주세요.” 여성분들의 경우, ‘예수 오빠’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그만큼 친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한 가족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 멀리 계신 분처럼 여기지 말고 내게 가까이 계신 분으로 하나님을 대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됨의 복을 누리며 삽시다.

집에 들어가면, 특히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가는 남성분들이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밥’입니다. 가족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밥 먹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족을, 먹을 식(食), 입 구(口)를 써서 ‘식구’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까? 먹는 것을 빼면 가족 간에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이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꾸준히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허기진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에도 함께 먹고 마시면서 당신의 삶을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그만큼 먹고 마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가정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수다. 마셔라. 내가 생명의 떡, 생명의 빵이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축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소중하고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로 마감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에게 믿음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주칠 때마다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악수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기쁨을 표현해 보십시오. 그리고 봉사할 때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족 공동체 됨의 축복을 누리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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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 31 ~ 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가족’을 이야기합니다.

카피라이터 정철이 쓴 『인생의 목적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가는 2,820명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를 말해 보라고 한 후, 그 단어들을 모아 순위를 매겼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로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이 책에 따르면, 첫 번째는 가족, 두 번째는 사랑, 세 번째는 나, 네 번째는 엄마, 다섯 번째는 꿈입니다. 그리고 행복, 친구, 사람, 믿음, 우리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10위 안에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여섯 개에서 일곱 개 정도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는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이란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쉽게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가슴 깊이 박힙니다. 그런데 또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그 깊이 박혔던 상처를 쉽게 아물게 하기도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나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족이란 영어 같아. 마음에는 있는데 표현이 잘 안 돼.”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겠지 싶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속마음입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몇 마디만으로도 서로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괜찮아. 다시 한 번 해 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내 마음에는 늘 네가 있어.’ 이런 짧은 말로도 가정은 살아납니다. 억눌리고 상처 받은 마음들이 회복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가족이란 내게 공기와도 같아.” 우리가 숨 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기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기에게 감사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존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소중해도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고, 의존하며 살면서도 고맙다고 하지 않고, 생명과도 같은 존재임에도 마치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가족이 없는 삶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란 생명체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살아 있을 동안에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힘이 났습니까? 좌절하고 낙심했을 때 가족의 존재가 얼마나 큰 용기를 주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는 둥 마는 둥 가족을 대합니다. 그러다가 가족의 손이 차가워진 후에야 ‘내가 더 사랑할 걸…’ 하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이란 외로움이다”라고 말합니다. 함께 있는데도 외롭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 때로는 삶의 저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외로움이 삶의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외로움이 저주가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나는 인생의 무대에서 엑스트라야.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어.’ 외로움이 내면에 침잠하게 되면 세상은 슬픔의 자리가 됩니다. 스스로를 외톨이나 소외된 존재로 여기며 삶의 많은 부분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나 자신이 사라지면 곁에 있는 가족들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외로움을 저주로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외로움도 방향을 바꾸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내면의 조명을 통해 ‘나는 이 땅에 홀로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면, 절대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나는 혼자구나, 인생에는 한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로움을 통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세상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로 여겨지고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확인하면서 ‘나를 통해 이 세상이 어떤 축복을 받을까’ 하는 기대가 생깁니다. 또한, 내가 소중하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웃이 힘들어하는 것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묻게 되고 내게 있는 사명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외로움은 단지 슬픔이나 저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확인시키는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이 전환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매일 격려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특별한 가족 공동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가족, 즉 말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는 손자와 손녀가 없습니다. 언제나 아들과 딸뿐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혈연적인 촌수 관계가 사라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갖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혈연 공동체보다 더 강력하고 소중한 공동체가 탄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마가복음 3:31∼32)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31절의 ‘밖에 서서’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예수님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예수님 곁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밖에 선 사람과 안에서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밖에 선 사람들은 예수님의 혈연 공동체인 어머니와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심리적인 거부입니다. 나는 저 속에 끼기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그 현장에 참여하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혈연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교회에 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믿음의 모임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서 구경꾼 노릇을 합니다. 한마디로 관망자로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3인칭의 지식이나 정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3인칭은 영원히 격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란, 내가 그 속에 들어가야 깨달아집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믿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모험을 시작해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시는지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말씀과 씨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3인칭에 머물러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리에 직접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며 신앙의 현장에 참여해야 합니다.

영적 공동체는 혈연 공동체를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혈연 공동체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의 자녀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는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4∼35)

예수님은 둘러앉은 자들에게 밖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소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에게 “너희가 내 어머니고 내 동생들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의 인격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친근성의 표시입니다. 당시 랍비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앞에 다가와 앉아 경청했습니다. 스승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거기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젊은이와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이방인도 있었고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별 없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벽들, 장애물들을 과감히 깨부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느냐?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느냐?” 그러면서 새로운 하나님 가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혈연에 의해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맺어진 공동체 말입니다.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이는 공동체, 영적인 믿음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예배시간에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출신지가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다른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우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얼마나 무서워합니까? 자녀가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한다면, 그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어렵게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래서 감사하며 나도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좋은 자녀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워 떨며 도망가는 경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신다” 선포하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콤플렉스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또 제 동생이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제 콤플렉스에 시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나와는 어떤 관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서 말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예수님을 맏아들로 세우셨다고 하니, 나 같은 사람은 한참 뒤에 있는 아들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어느 날 “예수 형님” 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때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종종 그렇게 불렀습니다. “예수 형님, 이것 어떻게 해야 해요? 제게 지혜를 좀 주세요.” 여성분들의 경우, ‘예수 오빠’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그만큼 친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한 가족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 멀리 계신 분처럼 여기지 말고 내게 가까이 계신 분으로 하나님을 대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됨의 복을 누리며 삽시다.

집에 들어가면, 특히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가는 남성분들이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밥’입니다. 가족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밥 먹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족을, 먹을 식(食), 입 구(口)를 써서 ‘식구’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까? 먹는 것을 빼면 가족 간에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이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꾸준히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허기진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에도 함께 먹고 마시면서 당신의 삶을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그만큼 먹고 마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가정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수다. 마셔라. 내가 생명의 떡, 생명의 빵이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축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소중하고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로 마감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에게 믿음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주칠 때마다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악수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기쁨을 표현해 보십시오. 그리고 봉사할 때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족 공동체 됨의 축복을 누리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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