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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올림픽 대회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여 경기에 임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특히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싱글에서 우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모든 국민들은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며 환호했습니다.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김연아 선수는 눈물을 흘렸는데, 경기 후에 기자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김연아는 연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보면서 그 느낌이 어떨까 궁금했는데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경기 후 너무 기뻤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김연아가 쓴 에세이를 보면 13년 동안 훈련하면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엉덩방아를 많이 찧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음판 위에 주저앉아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거쳐서 지금의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지나왔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드디어 그 결실을 맺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어린 선수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결실을 맺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눈물’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렇기에 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유대 랍비들은 눈물을 아주 흥미롭게 해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롭고 슬플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눈물을 쏟아냄으로 그 고통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신앙의 시인이었던 김현승 씨는 ‘눈물’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눈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에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김현승 씨는 웃음을 잠시 피었다가 지는 삶의 꽃으로 비유하면서, 눈물은 그 꽃이 만들어내는 멋진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눈물이 주는 역설입니다. 인간은 기쁨과 고통, 웃음과 울음이 함께 역동적으로 섞이면서 성숙해갑니다. 인간이 흘린 눈물은 사람의 영혼을 말갛게 하고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눈물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사도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흘린 눈물은 거룩한 눈물이었고, 사람을 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원래 바울은 눈물과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바울은 아주 사납고 딱딱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점과 약점이 발견되면 무자비하게 지적하고 몰아붙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율법적인 기준을 따라서 엄격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산 자신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남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기준대로 정의의 칼을 뽑아들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냉엄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그에게 영광스럽게 다가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유대적인 인물에서 바울이라는 보편적인 인물로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문을 꽉 닫아걸었던 폐쇄적인 인물이었는데, 하늘 문을 향해 열려진 넉넉한 인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라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남의 연약함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고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눈물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과 허물만 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 이 백성도 용서해주옵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알고 나처럼 새롭게 변화되게 하옵소서!”
바울이 변화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친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픔이 그의 가슴에 깊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통곡소리도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파하는 아픔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 가운데 나도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눈물과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무슨 눈물을 흘리시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아파하시겠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예레미야 14:17)
하나님께서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통곡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파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상처가 너무 도져서 부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경배하기보다는 자기 육체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는 이스라엘, 그래서 스스로 교만해진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탄식하며 통곡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눈물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물도 목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으로 초청하시는데도 그 초청장을 찢어버리고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처절한 아픔의 눈물을 쏟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보낸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따뜻한 품으로 오라는 것처럼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생명과 구원과 소망이 있다. 나에게로 오라. 내 품 안으로 오라!” 그러나 그토록 초청을 해도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깨닫게 된 예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만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성령님께서도 안타까운 탄식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바울은 이 성령님의 탄식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안타까운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가슴에 품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눈물로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눈물을 목격하면서 자신도 눈물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서 3:18)
바울이 자기 생명을 바쳐 세운 빌립보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성도들이 이제는 이단의 사설을 듣고 복음의 자리에서부터 떠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이제 다시 예수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해보니까 이제는 내가 완성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해졌습니다. 믿음 없이 나의 노력과 업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하며 말합니다. “네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있구나! 다시 돌아오라.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라.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라!” 이것이 바울의 눈물 속에서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했다”라고 기록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키울 때, 자녀가 한 번 불순종했다고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이가 잘못할 때는 그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말합니다. “얘야, 이렇게 해야지. 얘야, 너는 내 아들이어야지.” 그런데도 말괄량이 아이는 계속해서 도망가고 부모의 말을 거역합니다. 그 때 어머니는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보면서 내가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말했는데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눈물 속에는 사랑의 열정이 담겨있습니다. 열정이 없는 자리에 눈물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믿음으로 양육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눈물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눈물 속에는 변화를 기대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다시 돋아납니다. 눈물이 있는 아버지와 눈물이 있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 가정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는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는 사회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눈물입니다. 눈물로 애통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속에서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눈물로 그들을 양육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눈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올해 3.1절은 3.1 운동 91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신앙의 순국열사들이 생명을 걸고 눈물을 쏟으며 대한민국을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오늘날까지 인도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장로였습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변화 받아 그의 삶 전부를 교육에 쏟아 붓게 됩니다. 도산 안창호는 남강 이승훈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작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우리가 먼저 깨어야하고, 동포를 깨울 인재를 길러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구하는 첫 번째 길이다.”
남강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 연설을 들었을 때가 1907년 봄이었는데, 그 해가 넘어가기 전 1907년 12월에 이승훈은 평북 전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입학생은 7명이었습니다. 이승훈은 3.1운동 33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학교를 세우면서 학생들과 교직원들 사이에 선포합니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나라가 다시 살아날 길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교육의 열의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우리가 다시 위기분기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 민족이 다시 세계무대에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꺼져갈 것인가 결정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단순히 지성만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민족을 생각하면서 가슴에 눈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와 경제를 보면서 눈물의 영성을 갖고 내 모든 것을 투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눈물의 영성을 가지고 이 나라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시금 이 민족은 세계 열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런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눈물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대와 비전이 있고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성령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품고 현장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 땅위에 이루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4:1:
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올림픽 대회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여 경기에 임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특히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싱글에서 우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모든 국민들은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며 환호했습니다.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김연아 선수는 눈물을 흘렸는데, 경기 후에 기자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김연아는 연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보면서 그 느낌이 어떨까 궁금했는데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경기 후 너무 기뻤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김연아가 쓴 에세이를 보면 13년 동안 훈련하면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엉덩방아를 많이 찧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음판 위에 주저앉아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거쳐서 지금의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지나왔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드디어 그 결실을 맺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어린 선수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결실을 맺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눈물’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렇기에 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유대 랍비들은 눈물을 아주 흥미롭게 해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롭고 슬플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눈물을 쏟아냄으로 그 고통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신앙의 시인이었던 김현승 씨는 ‘눈물’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눈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에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김현승 씨는 웃음을 잠시 피었다가 지는 삶의 꽃으로 비유하면서, 눈물은 그 꽃이 만들어내는 멋진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눈물이 주는 역설입니다. 인간은 기쁨과 고통, 웃음과 울음이 함께 역동적으로 섞이면서 성숙해갑니다. 인간이 흘린 눈물은 사람의 영혼을 말갛게 하고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눈물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사도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흘린 눈물은 거룩한 눈물이었고, 사람을 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원래 바울은 눈물과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바울은 아주 사납고 딱딱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점과 약점이 발견되면 무자비하게 지적하고 몰아붙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율법적인 기준을 따라서 엄격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산 자신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남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기준대로 정의의 칼을 뽑아들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냉엄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그에게 영광스럽게 다가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유대적인 인물에서 바울이라는 보편적인 인물로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문을 꽉 닫아걸었던 폐쇄적인 인물이었는데, 하늘 문을 향해 열려진 넉넉한 인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라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남의 연약함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고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눈물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과 허물만 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 이 백성도 용서해주옵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알고 나처럼 새롭게 변화되게 하옵소서!”
바울이 변화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친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픔이 그의 가슴에 깊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통곡소리도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파하는 아픔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 가운데 나도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눈물과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무슨 눈물을 흘리시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아파하시겠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예레미야 14:17)
하나님께서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통곡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파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상처가 너무 도져서 부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경배하기보다는 자기 육체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는 이스라엘, 그래서 스스로 교만해진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탄식하며 통곡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눈물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물도 목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으로 초청하시는데도 그 초청장을 찢어버리고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처절한 아픔의 눈물을 쏟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보낸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따뜻한 품으로 오라는 것처럼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생명과 구원과 소망이 있다. 나에게로 오라. 내 품 안으로 오라!” 그러나 그토록 초청을 해도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깨닫게 된 예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만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성령님께서도 안타까운 탄식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바울은 이 성령님의 탄식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안타까운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가슴에 품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눈물로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눈물을 목격하면서 자신도 눈물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서 3:18)
바울이 자기 생명을 바쳐 세운 빌립보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성도들이 이제는 이단의 사설을 듣고 복음의 자리에서부터 떠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이제 다시 예수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해보니까 이제는 내가 완성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해졌습니다. 믿음 없이 나의 노력과 업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하며 말합니다. “네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있구나! 다시 돌아오라.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라.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라!” 이것이 바울의 눈물 속에서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했다”라고 기록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키울 때, 자녀가 한 번 불순종했다고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이가 잘못할 때는 그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말합니다. “얘야, 이렇게 해야지. 얘야, 너는 내 아들이어야지.” 그런데도 말괄량이 아이는 계속해서 도망가고 부모의 말을 거역합니다. 그 때 어머니는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보면서 내가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말했는데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눈물 속에는 사랑의 열정이 담겨있습니다. 열정이 없는 자리에 눈물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믿음으로 양육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눈물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눈물 속에는 변화를 기대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다시 돋아납니다. 눈물이 있는 아버지와 눈물이 있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 가정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는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는 사회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눈물입니다. 눈물로 애통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속에서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눈물로 그들을 양육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눈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올해 3.1절은 3.1 운동 91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신앙의 순국열사들이 생명을 걸고 눈물을 쏟으며 대한민국을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오늘날까지 인도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장로였습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변화 받아 그의 삶 전부를 교육에 쏟아 붓게 됩니다. 도산 안창호는 남강 이승훈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작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우리가 먼저 깨어야하고, 동포를 깨울 인재를 길러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구하는 첫 번째 길이다.”
남강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 연설을 들었을 때가 1907년 봄이었는데, 그 해가 넘어가기 전 1907년 12월에 이승훈은 평북 전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입학생은 7명이었습니다. 이승훈은 3.1운동 33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학교를 세우면서 학생들과 교직원들 사이에 선포합니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나라가 다시 살아날 길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교육의 열의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우리가 다시 위기분기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 민족이 다시 세계무대에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꺼져갈 것인가 결정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단순히 지성만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민족을 생각하면서 가슴에 눈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와 경제를 보면서 눈물의 영성을 갖고 내 모든 것을 투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눈물의 영성을 가지고 이 나라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시금 이 민족은 세계 열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런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눈물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대와 비전이 있고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성령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품고 현장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 땅위에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