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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침과 순종

마태복음 21: 23 ~ 32

김지철 목사

2008.09.28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며 질문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또 다시 종교개혁의 당위성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본문은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적대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으시고 성전을 정화시키는 모습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기득권을 뺏어가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보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소?”이것은 결코 호기심에 찬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배우려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흠집을 내어 예수님을 비난하고 제거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받으시면서 거꾸로 질문을 하십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람으로 왔다고 생각하는가?”
순간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하면 왜 세례요한의 말을 믿지 않고 뒤에 온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으로부터 온 권위라고 말하면 온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다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백성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다가 예수님께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지만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오늘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네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때 첫째 아들이 아주 싹싹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가서 일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안 가겠다고 말한 후에 자기가 한 말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는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가르치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의 생각에는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것 같으냐?” 답은 명백히 둘째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간다고 하고 가지 않은 첫째 아들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들이고 또 하나는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종교회의 산헤드린의 중심인물로 예수님을 향해서 가장 무섭게 비난하고 조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율법 정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개혁교회는 생각하며 도전하는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여름 독일의 종교 개혁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마틴 루터가 목회했던 비텐베르크교회에도 가보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루터와 멜랑히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바깥에 커다란 현수막이 달려있었습니다. 그 현수막에는 루터의 96개 조항이라고 하면서 현수막이 붙어있었습니다. 본래 루터가 1517년 거대했던 로마 카톨릭에 저항하면서 붙였던 조항은 95개 조항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수막에 96개의 조항이라고 써 붙인 이유는 구십 여섯 번째의 조항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결코 멈추지 말아라! 생각하며 도전하는 것을!”(Hoere nie auf, quer zu denken)

이것은 우리의 변화와 개혁이 일회성으로 멈추는 것을 심각하게 자문자답하는 문구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끝나고 부패와 타락 속에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다시 변화와 개혁을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려는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들, 고정관념에 붙잡힌 사람들에게 결코 멈추지 말고 도전하며 생각하라는 부탁입니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지기도 하지만 변화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제 안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더 지혜롭고 현명해질까? 공부를 많이 하면 더 깊어지고 포옹력이 넓어지는 것일까?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더 열려진 사고를 할까?’ 이것에 대한 질문은 명백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노하우와 지혜가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레위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레위기 19:32)

나이가 드신 어른들이 존경받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어른들의 인생 연륜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풍성하게 섭렵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말하는 이유도 한 가지라도 더 아는 것이 인생을 승리하며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변화하기 원하는 것이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제의 신앙보다 오늘의 신앙이, 오늘의 신앙보다 내일의 신앙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나이가 들면서 더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더 독선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고착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나이가 드는 것은 몸이 굳어지는 것처럼 정신세계를 굳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에 대해서 저항합니다. 세대차이가 나면서 젊은이들의 생각, 창조적인 자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기회를 상실하고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드는 것을 몇 살 기준으로 봐야 할까요? 저는 40살이 나이가 드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40대부터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새것을 싫어하고 옛것에 대해서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흔이 되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이유도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대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십대가 되면 가능성이 열 가지 이내로 줄어듭니다. 삼십대에 가능성은 기껏해야 두세 가지 정도입니다. 사십대가 되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십에 바뀌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십대는 기존의 가졌던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져야 바뀝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바뀝니다. 인간의 나이라는 것은 인간을 족쇄처럼 매어둡니다.
공부를 하고 지식이 쌓이면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교만하게 하기도 합니다. 오만하게 자신만을 자랑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공부한 사람만이 갖는 병폐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축복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지 않고 화를 냈습니다.

본문에 보면 자기의 생각과 아집을 키워나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이름으로 펴는 독선적인 교리와 율법주의를 끊임없이 타파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탈을 벗어버리고 새것으로 바꿔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앨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의 눈이 무서웠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오늘날의 교회 직분으로 표현으로 하면 목사들입니다. 또한 백성의 장로들은 오늘날의 교회 직분으로 볼 때 장로들입니다. 신앙적으로 가장 위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아니라 직분을 받은 목사와 장로가 가장 위기에 처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쉽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때로는 체면과 고정관념 때문에, 때로는 지금까지 쌓아온 기득권과 열등감 때문에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의 익숙한 습관을 버리고 변화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니고 살았던 가치관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려면 익숙했던 삶의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새로운 변화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가진 것만큼, 배운 것만큼, 누리는 것만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평가를 받아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죄악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의 한 원형입니다. 고인물이 썩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집단과 공동체에서 회장을 일 년 혹은 이 년마다 새로 뽑습니다. 국회의원을 4년마다, 그리고 대통령을 5년마다 다시 선출합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는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제도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변화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인 자리이고 교회의 자리입니다.
한번 목사가 되고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면 영원히 위임목사입니다. 한번 장로가 되면 은퇴할 때까지 장로입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끊임없이 한다면 굉장히 귀한 목사이고 장로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왜 목사가 교회를 사유화 하고 있는가? 왜 장로가 교회를 지주처럼 자기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교만하고 방자해 지는 순간부터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직분을 맡은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특별히 목사와 장로들에게 있습니다. 물론 목사와 장로가 사랑으로 협력하며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한국교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쏟아 붓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사들은 장로들이 목사의 발목을 시도 때도 없이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로들은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전횡을 하며 교회를 사유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고통을 야기 시킵니다. 변화가 되지 않는 많은 문제가 교회의 아픔을 야기 시킵니다.
언젠가 당회를 열면서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해결하기 어려울 때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6년마다 한 번씩 신임 투표를 받으면 어떨까요? 담임목사인 저도 신임을 받고 우리 장로님들도 받으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어떤 장로님께서 그것은 총회헌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도 신임투표를 받자고 말하면 한국교회 모든 목사님들이 펄쩍 뛰면서 반대할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회는 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세계 어느 장로교회가 시무하는 위임목사를 신임투표 하는 교회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저에게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임투표를 하자는 주장은 장로님들도 모두 걱정하는 생각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교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목사와 장로의 아킬레스건인 신임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서로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요즘 새롭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건설하려는 젊은 목회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감하게 신임 투표제를 도입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목회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겸손하게 목회를 감당하다가 잘못되었다고 평가되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분들입니다. 목사와 장로에게 행하는 신임제도를 행하는 교회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가 보다 겸손해지는 것이 한국교회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목사와 장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와 장로를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본래 장로교회는 교회 민주화를 위해 장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교회는 장로에 대한 임기제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둘째 아들처럼 뉘우치고 순종할 때 새로워질 것입니다.

저는 소망교회에 오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교회를 주님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한국교회에서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가 바로서는 것이 저의 기도이자 소망입니다. 목사가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세워져야 할 모습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안 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결단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자기의 만족과 욕심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입니다.
삶에서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뉘우침이 있을 때 변화와 성숙이 나타납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란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보임으로, 그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가 말씀을 펼쳐 읽을 때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하는가?’ 를 생각해 볼 때 거기에 목사와 장로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갈등이 있을 때 목사 편에 서는 것도 아니고 장로 편에 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자리,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근본적인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책임이자 목표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귀를 닫는 순간 우리는 고집쟁이가 되어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속을 보지 않고 겉만 보면서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째아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 때문에 둘째 아들은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직분을 맡은 사람들, 그리고 교회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합시다. 우리의 탐심을 내어놓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받으실 영광이 목표가 될 때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다시 새롭게 영적인 능력과 부흥의 역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있는 부끄러운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 앞에 서서 잘못되었으면 고치게 하시고 회개할 것이 있으면 뉘우치게 하옵소서. 우리 속에 있는 아픔을 사랑으로 싸매어 주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복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교회,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의 모습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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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 23 ~ 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며 질문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또 다시 종교개혁의 당위성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본문은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적대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으시고 성전을 정화시키는 모습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기득권을 뺏어가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보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소?”이것은 결코 호기심에 찬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배우려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흠집을 내어 예수님을 비난하고 제거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받으시면서 거꾸로 질문을 하십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람으로 왔다고 생각하는가?”
순간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하면 왜 세례요한의 말을 믿지 않고 뒤에 온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으로부터 온 권위라고 말하면 온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다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백성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다가 예수님께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지만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오늘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네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때 첫째 아들이 아주 싹싹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가서 일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안 가겠다고 말한 후에 자기가 한 말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는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가르치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의 생각에는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것 같으냐?” 답은 명백히 둘째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간다고 하고 가지 않은 첫째 아들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들이고 또 하나는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종교회의 산헤드린의 중심인물로 예수님을 향해서 가장 무섭게 비난하고 조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율법 정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개혁교회는 생각하며 도전하는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여름 독일의 종교 개혁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마틴 루터가 목회했던 비텐베르크교회에도 가보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루터와 멜랑히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바깥에 커다란 현수막이 달려있었습니다. 그 현수막에는 루터의 96개 조항이라고 하면서 현수막이 붙어있었습니다. 본래 루터가 1517년 거대했던 로마 카톨릭에 저항하면서 붙였던 조항은 95개 조항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수막에 96개의 조항이라고 써 붙인 이유는 구십 여섯 번째의 조항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결코 멈추지 말아라! 생각하며 도전하는 것을!”(Hoere nie auf, quer zu denken)

이것은 우리의 변화와 개혁이 일회성으로 멈추는 것을 심각하게 자문자답하는 문구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끝나고 부패와 타락 속에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다시 변화와 개혁을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려는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들, 고정관념에 붙잡힌 사람들에게 결코 멈추지 말고 도전하며 생각하라는 부탁입니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지기도 하지만 변화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제 안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더 지혜롭고 현명해질까? 공부를 많이 하면 더 깊어지고 포옹력이 넓어지는 것일까?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더 열려진 사고를 할까?’ 이것에 대한 질문은 명백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노하우와 지혜가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레위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레위기 19:32)

나이가 드신 어른들이 존경받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어른들의 인생 연륜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풍성하게 섭렵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말하는 이유도 한 가지라도 더 아는 것이 인생을 승리하며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변화하기 원하는 것이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제의 신앙보다 오늘의 신앙이, 오늘의 신앙보다 내일의 신앙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나이가 들면서 더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더 독선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고착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나이가 드는 것은 몸이 굳어지는 것처럼 정신세계를 굳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에 대해서 저항합니다. 세대차이가 나면서 젊은이들의 생각, 창조적인 자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기회를 상실하고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드는 것을 몇 살 기준으로 봐야 할까요? 저는 40살이 나이가 드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40대부터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새것을 싫어하고 옛것에 대해서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흔이 되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이유도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대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십대가 되면 가능성이 열 가지 이내로 줄어듭니다. 삼십대에 가능성은 기껏해야 두세 가지 정도입니다. 사십대가 되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십에 바뀌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십대는 기존의 가졌던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져야 바뀝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바뀝니다. 인간의 나이라는 것은 인간을 족쇄처럼 매어둡니다.
공부를 하고 지식이 쌓이면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교만하게 하기도 합니다. 오만하게 자신만을 자랑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공부한 사람만이 갖는 병폐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축복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지 않고 화를 냈습니다.

본문에 보면 자기의 생각과 아집을 키워나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이름으로 펴는 독선적인 교리와 율법주의를 끊임없이 타파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탈을 벗어버리고 새것으로 바꿔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앨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의 눈이 무서웠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오늘날의 교회 직분으로 표현으로 하면 목사들입니다. 또한 백성의 장로들은 오늘날의 교회 직분으로 볼 때 장로들입니다. 신앙적으로 가장 위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아니라 직분을 받은 목사와 장로가 가장 위기에 처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쉽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때로는 체면과 고정관념 때문에, 때로는 지금까지 쌓아온 기득권과 열등감 때문에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의 익숙한 습관을 버리고 변화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니고 살았던 가치관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려면 익숙했던 삶의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새로운 변화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가진 것만큼, 배운 것만큼, 누리는 것만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평가를 받아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죄악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의 한 원형입니다. 고인물이 썩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집단과 공동체에서 회장을 일 년 혹은 이 년마다 새로 뽑습니다. 국회의원을 4년마다, 그리고 대통령을 5년마다 다시 선출합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는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제도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변화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인 자리이고 교회의 자리입니다.
한번 목사가 되고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면 영원히 위임목사입니다. 한번 장로가 되면 은퇴할 때까지 장로입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끊임없이 한다면 굉장히 귀한 목사이고 장로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왜 목사가 교회를 사유화 하고 있는가? 왜 장로가 교회를 지주처럼 자기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교만하고 방자해 지는 순간부터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직분을 맡은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특별히 목사와 장로들에게 있습니다. 물론 목사와 장로가 사랑으로 협력하며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한국교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쏟아 붓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사들은 장로들이 목사의 발목을 시도 때도 없이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로들은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전횡을 하며 교회를 사유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고통을 야기 시킵니다. 변화가 되지 않는 많은 문제가 교회의 아픔을 야기 시킵니다.
언젠가 당회를 열면서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해결하기 어려울 때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6년마다 한 번씩 신임 투표를 받으면 어떨까요? 담임목사인 저도 신임을 받고 우리 장로님들도 받으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어떤 장로님께서 그것은 총회헌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도 신임투표를 받자고 말하면 한국교회 모든 목사님들이 펄쩍 뛰면서 반대할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회는 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세계 어느 장로교회가 시무하는 위임목사를 신임투표 하는 교회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저에게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임투표를 하자는 주장은 장로님들도 모두 걱정하는 생각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교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목사와 장로의 아킬레스건인 신임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서로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요즘 새롭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건설하려는 젊은 목회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감하게 신임 투표제를 도입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목회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겸손하게 목회를 감당하다가 잘못되었다고 평가되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분들입니다. 목사와 장로에게 행하는 신임제도를 행하는 교회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가 보다 겸손해지는 것이 한국교회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목사와 장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와 장로를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본래 장로교회는 교회 민주화를 위해 장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교회는 장로에 대한 임기제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둘째 아들처럼 뉘우치고 순종할 때 새로워질 것입니다.

저는 소망교회에 오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교회를 주님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한국교회에서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가 바로서는 것이 저의 기도이자 소망입니다. 목사가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세워져야 할 모습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안 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결단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자기의 만족과 욕심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입니다.
삶에서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뉘우침이 있을 때 변화와 성숙이 나타납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란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보임으로, 그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가 말씀을 펼쳐 읽을 때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하는가?’ 를 생각해 볼 때 거기에 목사와 장로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갈등이 있을 때 목사 편에 서는 것도 아니고 장로 편에 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자리,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근본적인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책임이자 목표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귀를 닫는 순간 우리는 고집쟁이가 되어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속을 보지 않고 겉만 보면서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째아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 때문에 둘째 아들은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직분을 맡은 사람들, 그리고 교회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합시다. 우리의 탐심을 내어놓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받으실 영광이 목표가 될 때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다시 새롭게 영적인 능력과 부흥의 역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있는 부끄러운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 앞에 서서 잘못되었으면 고치게 하시고 회개할 것이 있으면 뉘우치게 하옵소서. 우리 속에 있는 아픔을 사랑으로 싸매어 주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복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교회,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의 모습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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