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로마서 6: 1 ~ 5

김지철 목사

2016.10.02

소망교회가 39번째 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10월의 첫 번째 주일이자 소망교회가 39주년 생일을 맞는 주일입니다. 생일이 무엇입니까? 태어난 날입니다. 즉, 존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육체는 삼분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라나는 시기, 멈춰서는 시기, 그리고 서서히 늙어가는 시기입니다. 어릴 때의 특징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란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청년이 되면 어느 순간 자라는 것이 멈춥니다. 그리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늙음의 자리에 들어섭니다.
몸이 자라나고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이 새롭습니다. 자기 자신이 새로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새롭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라남이 멈추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몸이 늙어가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새로움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익숙한 것만 남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옛것과 지난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선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싱싱하던 것들이 조금씩 시들어 가고, 새로움이 멀어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움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로움은 다시 안 오는 것일까요?
39살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무슨 의미일까요? 청년의 자리에서 장년, 중년의 자리로 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나이 듦의 분수령에 도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었다고 하기에는 젊고, 그렇다고 젊다고 하기에는 인생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가 내년에 4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내년은 또한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라는 주제로 그해를 맞이하려 합니다. 지난 4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50년, 80년을 새롭게 나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갈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새로워지는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새로워짐의 축복입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세상에서의 위치와 상관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새로워지기 위한 이 노력은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도 새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고, 새 자동차를 사서 드라이브를 합니다. 새 옷을 사고, 새로 산 가방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합니다. 핸드폰, 카메라, 오디오 등 새로운 상품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 새로움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새것에 대한 집착인 셈입니다.
그런데 새것이 주는 기쁨이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몇 달이 못 가서, 아니 며칠이 못 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싫증이 납니다. 그러면 또 어디에 새것이 있는지 두리번대면서 또 다른 새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구약의 기자가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를 쓴 사람입니다. 솔로몬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데 이름이 정확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누리면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지막에 토해 내는 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구나.” 왜일까요? 자신이 반복되는 인생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전도서 1:9)

모든 것을 해 보았지만 결국 과거에 있었던 일이 오늘 있고, 오늘 있었던 일이 다시 내일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습을 보면서, ‘해 아래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구나. 새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전도서의 이 구절은 제 삶에 매우 깊게 들어와 박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제 신앙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정말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면 어디에 새 것이 있을까? 해 아래 새것이 없다면,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것에 새것이 없다면, 해 위의 것으로부터 새것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해를 만드신 분,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내게 다가오시면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100여명의 성도들이 입교를 하거나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가장 어린 친구는 16살이고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85세입니다. 두 사람의 나이가 이렇게 차이가 나도 주님 안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두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늘 위에 계신 분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축복입니다.

새로움을 향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가르칩니다. 새로워지려면 새로움의 근거이고 새로움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새로워지고 싶습니까? 거룩해지고 싶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거룩하신 분, 새로움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내 마음과 몸을 만지시면 내가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온 이유도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4)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는 본래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속에 머리를 다 담그면 몇 분 동안 견딜 수 있습니까? 만약 10분 동안 물속에 있는다고 하면, 죽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내가 나의 옛 아담적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 제 속에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정욕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제 안에 걱정과 불안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겠습니다.” 무거운 짐, 수고로운 짐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책감 갖지 말라. 더 이상 근심하고 불안해하지 말라. 더 이상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용서하고 내가 너를 나의 아들과 딸로 세우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다시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 6:3)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만하고 못된 나의 옛 자아가 주님과 함께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새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부터 올라오실 때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1)

이 땅에 있는 것들이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움을 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그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뒤집어쓰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죽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셨다. 이제 너는 내 안에서 죽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신 것처럼 너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예수님에게만 전적인 새로움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로부터 온 계시적인 새로움, 곧 생명, 길과 진리, 평안, 자유, 거룩함입니다.
새로움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것과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옛 아담적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곧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내 인생의 주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능동적인 주권자로 인정하고, 나는 수동적인 주권자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가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서 억압을 당하고 있다면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쳐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연합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자랑이자 우리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와 죄의 용서와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되는 길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길이 열렸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내가 당신의 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부르며 이 놀라운 특권을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로마서 6: 1 ~ 5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소망교회가 39번째 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10월의 첫 번째 주일이자 소망교회가 39주년 생일을 맞는 주일입니다. 생일이 무엇입니까? 태어난 날입니다. 즉, 존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육체는 삼분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라나는 시기, 멈춰서는 시기, 그리고 서서히 늙어가는 시기입니다. 어릴 때의 특징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란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청년이 되면 어느 순간 자라는 것이 멈춥니다. 그리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늙음의 자리에 들어섭니다.
몸이 자라나고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이 새롭습니다. 자기 자신이 새로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새롭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라남이 멈추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몸이 늙어가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새로움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익숙한 것만 남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옛것과 지난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선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싱싱하던 것들이 조금씩 시들어 가고, 새로움이 멀어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움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로움은 다시 안 오는 것일까요?
39살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무슨 의미일까요? 청년의 자리에서 장년, 중년의 자리로 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나이 듦의 분수령에 도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었다고 하기에는 젊고, 그렇다고 젊다고 하기에는 인생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가 내년에 4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내년은 또한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라는 주제로 그해를 맞이하려 합니다. 지난 4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50년, 80년을 새롭게 나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갈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새로워지는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새로워짐의 축복입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세상에서의 위치와 상관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새로워지기 위한 이 노력은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도 새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고, 새 자동차를 사서 드라이브를 합니다. 새 옷을 사고, 새로 산 가방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합니다. 핸드폰, 카메라, 오디오 등 새로운 상품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 새로움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새것에 대한 집착인 셈입니다.
그런데 새것이 주는 기쁨이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몇 달이 못 가서, 아니 며칠이 못 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싫증이 납니다. 그러면 또 어디에 새것이 있는지 두리번대면서 또 다른 새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구약의 기자가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를 쓴 사람입니다. 솔로몬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데 이름이 정확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누리면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지막에 토해 내는 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구나.” 왜일까요? 자신이 반복되는 인생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전도서 1:9)

모든 것을 해 보았지만 결국 과거에 있었던 일이 오늘 있고, 오늘 있었던 일이 다시 내일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습을 보면서, ‘해 아래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구나. 새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전도서의 이 구절은 제 삶에 매우 깊게 들어와 박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제 신앙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정말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면 어디에 새 것이 있을까? 해 아래 새것이 없다면,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것에 새것이 없다면, 해 위의 것으로부터 새것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해를 만드신 분,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내게 다가오시면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100여명의 성도들이 입교를 하거나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가장 어린 친구는 16살이고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85세입니다. 두 사람의 나이가 이렇게 차이가 나도 주님 안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두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늘 위에 계신 분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축복입니다.

새로움을 향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가르칩니다. 새로워지려면 새로움의 근거이고 새로움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새로워지고 싶습니까? 거룩해지고 싶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거룩하신 분, 새로움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내 마음과 몸을 만지시면 내가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온 이유도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4)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는 본래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속에 머리를 다 담그면 몇 분 동안 견딜 수 있습니까? 만약 10분 동안 물속에 있는다고 하면, 죽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내가 나의 옛 아담적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 제 속에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정욕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제 안에 걱정과 불안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제 속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겠습니다.” 무거운 짐, 수고로운 짐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책감 갖지 말라. 더 이상 근심하고 불안해하지 말라. 더 이상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용서하고 내가 너를 나의 아들과 딸로 세우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다시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 6:3)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만하고 못된 나의 옛 자아가 주님과 함께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새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부터 올라오실 때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1)

이 땅에 있는 것들이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움을 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그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뒤집어쓰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죽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셨다. 이제 너는 내 안에서 죽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신 것처럼 너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예수님에게만 전적인 새로움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로부터 온 계시적인 새로움, 곧 생명, 길과 진리, 평안, 자유, 거룩함입니다.
새로움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것과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옛 아담적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곧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내 인생의 주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능동적인 주권자로 인정하고, 나는 수동적인 주권자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가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서 억압을 당하고 있다면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쳐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연합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자랑이자 우리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와 죄의 용서와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되는 길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길이 열렸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내가 당신의 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부르며 이 놀라운 특권을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85, 50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롬 6:1-5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10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은 소망교회 창립 39주년이 되는 생일입니다. 생일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존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내년에 4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또한 내년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주제를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로 정하려고 합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새로워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도 새로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물품도 사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은 얼마 못가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싫증나고 지루해지고 시들해집니다.

구약의 전도서 기자는 모든 것을 누리며 호화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그가 토해낸 말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고백입니다. 해 아래 보이는 것과 만지는 것, 경험하는 것에는 새 것이라 주장할 만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 1:9)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으니 해 위에 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새로움의 근원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 하늘의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을 새롭게 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축복의 시간입니다. 성경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새로움의 길이라 말씀합니다.(롬 6:4) 예수님과 함께 내가 옛 자아를 죽이는 겁니다. 내 속에 교만함, 정욕, 죄책감, 미움과 분노, 걱정과 불안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받는 겁니다. 무겁고 수고로운 짐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다시 부활의 생명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 6:3)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다시 부활하고 생명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됩니다. 예수님께 생명이 있고, 예수님께만 적적인 새로움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적인 새로움입니다. 생명, 길과 진리, 평안함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입니다.

새로움의 목표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례 받으라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5:17)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되는 길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자랑하는 겁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누기
1. 내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경험하게 되는 새로움의 은혜가 있다면 무엇일지 서로 나눠봅시다.
3.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되는 특권을 경험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습이 무엇일지 생각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우리의 옛 자아를 죽게 하시고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워지는 것, 거룩해지는 경험들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