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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양육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가정에 아들이 있습니까? 아들을 가지신 분들은 아들을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아들을 양육할 때 특별히 어렵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을 다 좋아합니다. 나의 유전자를 닮은 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들이 당혹스러워할 때가 많습니다. 아들이 어려서 “우리 아버지가 최고야.” 라고 하며 마치 영웅처럼 아버지를 추켜세울 때는 아들 앞에 서는 것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커가면서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들은 겁을 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입에서 “우리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 있네? 아버지 하고는 대화가 잘 안되네?”라고 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나올까봐 아버지들은 때로 자식 만나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토마스와 스티븐 제임스가 쓴 「아들을 공부하라」라는 책을 보면 아들의 성장 시기를 몇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만 9세~12세까지의 아들은 독립기의 아들입니다.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이때는 남성적인 특성이 나타납니다. 수치심에 민감하고 자아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감정의 폭풍우가 몰아쳐서 스스로 감정을 억지하지 못하고 고립되기도 합니다. 이때는 자기 앞에 나타난 어른들을 자신의 적으로 인식하고 대합니다. 13세~17세의 아들은 방황기의 아들입니다. 이때는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이거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고 하는 보호구역을 치면 칠수록 거기에서부터 탈출하려고 합니다.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아빠가 밉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때는 간섭하는 엄마, 아빠가 주무실 때예요.” 나에게 뭔가 얘기하는 말들을 그냥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세요. 그런데요, 내게 좀 가까이 다가와서 나를 봐주세요.’ 이 두 가지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좀 가까이 다가서면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그렇게 난리를 칩니다. 사춘기 아들의 방을 노크 없이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소리를 고래고래 칩니다. 그때마다 부모는 ‘아, 이제 내 자식이 아닌 거 같다’하는 마음의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면 또 이제는 무관심하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내버려두면 무능력한 부모라고 하면서 원망하기도 합니다. 18세~22세의 아들은 전투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전사가 되는 때입니다. 이제 세상으로 막 발을 딛고 나가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육체적 성장은 멈추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열정을 발산하고 흥미를 쏟아 부을 대상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부모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롤 모델(role model)이 되는 멘토(mentor)를 요청합니다. 모든 남자 아이들은 그들이 존경할만한 남성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자녀에게는 훈육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런 아들들을 키우는 게 부모들에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요? 헬라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통제력이 없는 탓에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다루기가 힘든 존재다.” 남자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아들은 예외이다. 아들의 마음속에는 난폭하고 짓궂고 기상천외한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이 괴물을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는 사랑으로 키워야 하지만 괴물이 그 속에서 아들을 요동치게 만들 때에는 그 괴물을 훈계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젊을 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이 괴물이 계속 남자들 속에 들어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이 되어야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는가? 첫째는 할아버지의 재력, 둘째는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셋째는 아버지의 무관심. 자조 섞인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절반은 진리이고 절반은 거짓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했을 때 성적이 조금은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정신 상태는 공황상태가 됩니다. 가치관이 무너집니다. 어떨 때 내가 나아가야 하고, 어떨 때 멈춰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규범을 훈련받는 축복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녀 교육에 관심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들인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적절한 때를 놓쳐서 훈육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아들은 아버지와 적대자가 되고 맙니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물어봅니다. “아버지를 좋아하나요?” 그러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아니요. 저는 아버지가 싫어요. 아버지는 내게 관심이 없어요. 아버지는 나를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래요.” 이런 아들들의 하소연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의 가정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생애를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든 자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아들을 양육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물론 자업자득의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재물을 가졌고 권력도 가졌습니다. 왕으로서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치명적인 악을 행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의 남편까지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하게 보시고 그에게 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죄악이 남긴 엄청난 흔적은 가정에 그대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들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은 다윗의 간음죄가 맏아들 암몬에게 전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살인죄가 압살롬이라는 아들에게 전수되었고, 이 아들은 자기의 이복형인 암몬을 쳐 죽이는 악한 일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맏아들 암몬은 사랑을 핑계로 자기의 이복여동생인 다말을 겁탈합니다. 강제적으로 근친상간의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엄정히 금하는 악이었습니다. 자기의 이복여동생을 육체적인 정욕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다말의 친오빠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의 동생이 슬피 우는 것을 보면서 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무려 2년 동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잔치를 베풀어달라고 아버지 다윗 왕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왕자들이 모여 있을 때 압살롬이 이복형인 암몬을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윗의 가정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불신과 적대감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가문은 슬픔과 수치와 아픔의 가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이 이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아들들의 이런 비행과 만행을 예방할 수는 없었을까? 아니, 첫 번째 아들의 잘못된 사건만으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들들을 사랑했지만 맹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이 멀고 아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꾸중다운 꾸중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불러놓고 야단을 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징계다운 징계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순간에 다윗을 거역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도니아였습니다. 다윗은 반역한 아도니아를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이 어떻게 아들들을 대했는가를 표현하는 내용이 열왕기상 1장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그의 아들들을 양육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열왕기상 1:6)
아도니아도 그랬습니다. 그도 다윗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섭섭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권위의 채찍을 내려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왜 못된 짓을 하느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이미 맏아들 암몬의 악한 행위를 다윗이 묵과한 것과 똑같은 맥락입니다. 자기 딸 다말을 성폭행한 일로 야단치고 불러다가 꾸중하고 네가 어떻게 왕위를 이어받을 첫 번째 아들에 품격이 있느냐? 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무엘하 13장 21절에 이렇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사무엘하 13:21)
그냥 화를 냈습니다. 아들을 불러다가 화를 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혼자 화를 내고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타락하고 못된 아들의 잘못을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들은 잘못했을 때 반드시 징계가 필요합니다. 회초리를 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아들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적절한 때 징계하지 않으면 자녀를 망치게 됩니다
다윗은 왜 아들의 엄청난 죄악을 보면서도 꾸중하지 않았을까요? 자기도 비슷한 비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약점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악하게 했는데 저 녀석도 그렇게 하는구나.’ 그냥 포기해버립니다. 자신의 죄책이 주저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들의 모습 속에서 부전자전의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면 좋게 생각해서 다윗이 아들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키울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못되고 악한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더 큰 악을 초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지도자들이 특별히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엘리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자기 아들들은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의 슬픔이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사무엘상 3:13)
엘리는 아들이 방자하게 되었을 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말씀에 어긋나게 행했을 때 그대로 방치해두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악을 향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모들이 자녀를 키울 때 때로는 자녀들에게 아첨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섭섭하게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얘가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얘가 엄마 잘못이야, 아빠 잘못이야 하고 대들면 어떻게 하나? 얘가 영원히 나의 품에서부터 떠나가면 얼마나 힘들까?’하는 것들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아이가 나를 싫어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우리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확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 안에, 특별히 아들 안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야단을 쳐야 합니다.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적절한 때 징계를 하지 아니하면 망나니가 되고 맙니다. 자기 멋대로 삽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했는데 부모의 품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오히려 엄격하게 자녀를 키운 부모가 자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자녀를 비인격적으로 모독하면서 억지로 징계를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다움을 소중히 생각하고, 격려하고, 잘못되고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 것에 대해서는 엄히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이복형을 죽였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어떤 인물입니까? 사무엘하 14장 25절을 보면 압살롬은 정말 탁월한 외모와 능력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사무엘하 14:25)
우월한 남성상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형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불러다 야단을 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적미적 세월이 가도록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들을 불러다 눈물로 키스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난 후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제부터는 면죄부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 대적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 말하십시오
이 아들 때문에 다윗이 얼마나 쫓겨 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아들이 죽게 됩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가 압살롬이라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외친 소리가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사무엘하 18:33)
이 한 구절에 “내 아들아”란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이 말을 어릴 때 했어야 합니다. 어릴 때 내 아들아 하고 껴안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릴 때 이것을 포기하니까 그 후부터는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 속에 자기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오늘까지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부모님의 은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들과 대화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너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한번 부르십시오. 그리고 같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관심이 적었던 것들을 이야기하세요. 그래도 너는 내게 최고의 소중한 아들이요, 소중한 딸이라고 이야기하세요.
여러분, 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잘났건, 못났건 상관없이 아버지에게 마지막까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듣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불러서 그 말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한 경쟁자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경쟁자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처럼 적대자로 바뀌느냐, 경쟁자이긴 하지만 영원한 친구가 되느냐는 여기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어도 다시 찾아오셔서 내 아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서 우리의 가정에 찾아가 다시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모든 부모들과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18: 28 ~ 33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들을 양육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가정에 아들이 있습니까? 아들을 가지신 분들은 아들을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아들을 양육할 때 특별히 어렵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을 다 좋아합니다. 나의 유전자를 닮은 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들이 당혹스러워할 때가 많습니다. 아들이 어려서 “우리 아버지가 최고야.” 라고 하며 마치 영웅처럼 아버지를 추켜세울 때는 아들 앞에 서는 것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커가면서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들은 겁을 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입에서 “우리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 있네? 아버지 하고는 대화가 잘 안되네?”라고 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나올까봐 아버지들은 때로 자식 만나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토마스와 스티븐 제임스가 쓴 「아들을 공부하라」라는 책을 보면 아들의 성장 시기를 몇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만 9세~12세까지의 아들은 독립기의 아들입니다.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이때는 남성적인 특성이 나타납니다. 수치심에 민감하고 자아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감정의 폭풍우가 몰아쳐서 스스로 감정을 억지하지 못하고 고립되기도 합니다. 이때는 자기 앞에 나타난 어른들을 자신의 적으로 인식하고 대합니다. 13세~17세의 아들은 방황기의 아들입니다. 이때는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이거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고 하는 보호구역을 치면 칠수록 거기에서부터 탈출하려고 합니다.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아빠가 밉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때는 간섭하는 엄마, 아빠가 주무실 때예요.” 나에게 뭔가 얘기하는 말들을 그냥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세요. 그런데요, 내게 좀 가까이 다가와서 나를 봐주세요.’ 이 두 가지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좀 가까이 다가서면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그렇게 난리를 칩니다. 사춘기 아들의 방을 노크 없이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소리를 고래고래 칩니다. 그때마다 부모는 ‘아, 이제 내 자식이 아닌 거 같다’하는 마음의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면 또 이제는 무관심하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내버려두면 무능력한 부모라고 하면서 원망하기도 합니다. 18세~22세의 아들은 전투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전사가 되는 때입니다. 이제 세상으로 막 발을 딛고 나가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육체적 성장은 멈추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열정을 발산하고 흥미를 쏟아 부을 대상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부모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롤 모델(role model)이 되는 멘토(mentor)를 요청합니다. 모든 남자 아이들은 그들이 존경할만한 남성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자녀에게는 훈육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런 아들들을 키우는 게 부모들에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요? 헬라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통제력이 없는 탓에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다루기가 힘든 존재다.” 남자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아들은 예외이다. 아들의 마음속에는 난폭하고 짓궂고 기상천외한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이 괴물을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는 사랑으로 키워야 하지만 괴물이 그 속에서 아들을 요동치게 만들 때에는 그 괴물을 훈계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젊을 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이 괴물이 계속 남자들 속에 들어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이 되어야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는가? 첫째는 할아버지의 재력, 둘째는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셋째는 아버지의 무관심. 자조 섞인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절반은 진리이고 절반은 거짓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했을 때 성적이 조금은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정신 상태는 공황상태가 됩니다. 가치관이 무너집니다. 어떨 때 내가 나아가야 하고, 어떨 때 멈춰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규범을 훈련받는 축복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녀 교육에 관심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들인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적절한 때를 놓쳐서 훈육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아들은 아버지와 적대자가 되고 맙니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물어봅니다. “아버지를 좋아하나요?” 그러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아니요. 저는 아버지가 싫어요. 아버지는 내게 관심이 없어요. 아버지는 나를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래요.” 이런 아들들의 하소연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의 가정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생애를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든 자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아들을 양육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물론 자업자득의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재물을 가졌고 권력도 가졌습니다. 왕으로서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치명적인 악을 행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의 남편까지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하게 보시고 그에게 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죄악이 남긴 엄청난 흔적은 가정에 그대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들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은 다윗의 간음죄가 맏아들 암몬에게 전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살인죄가 압살롬이라는 아들에게 전수되었고, 이 아들은 자기의 이복형인 암몬을 쳐 죽이는 악한 일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맏아들 암몬은 사랑을 핑계로 자기의 이복여동생인 다말을 겁탈합니다. 강제적으로 근친상간의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엄정히 금하는 악이었습니다. 자기의 이복여동생을 육체적인 정욕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다말의 친오빠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의 동생이 슬피 우는 것을 보면서 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무려 2년 동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잔치를 베풀어달라고 아버지 다윗 왕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왕자들이 모여 있을 때 압살롬이 이복형인 암몬을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윗의 가정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불신과 적대감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가문은 슬픔과 수치와 아픔의 가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이 이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아들들의 이런 비행과 만행을 예방할 수는 없었을까? 아니, 첫 번째 아들의 잘못된 사건만으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들들을 사랑했지만 맹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이 멀고 아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꾸중다운 꾸중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불러놓고 야단을 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징계다운 징계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순간에 다윗을 거역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도니아였습니다. 다윗은 반역한 아도니아를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이 어떻게 아들들을 대했는가를 표현하는 내용이 열왕기상 1장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그의 아들들을 양육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열왕기상 1:6)
아도니아도 그랬습니다. 그도 다윗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섭섭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권위의 채찍을 내려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왜 못된 짓을 하느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이미 맏아들 암몬의 악한 행위를 다윗이 묵과한 것과 똑같은 맥락입니다. 자기 딸 다말을 성폭행한 일로 야단치고 불러다가 꾸중하고 네가 어떻게 왕위를 이어받을 첫 번째 아들에 품격이 있느냐? 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무엘하 13장 21절에 이렇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사무엘하 13:21)
그냥 화를 냈습니다. 아들을 불러다가 화를 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혼자 화를 내고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타락하고 못된 아들의 잘못을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들은 잘못했을 때 반드시 징계가 필요합니다. 회초리를 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아들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적절한 때 징계하지 않으면 자녀를 망치게 됩니다
다윗은 왜 아들의 엄청난 죄악을 보면서도 꾸중하지 않았을까요? 자기도 비슷한 비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약점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악하게 했는데 저 녀석도 그렇게 하는구나.’ 그냥 포기해버립니다. 자신의 죄책이 주저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들의 모습 속에서 부전자전의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면 좋게 생각해서 다윗이 아들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키울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못되고 악한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더 큰 악을 초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지도자들이 특별히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엘리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자기 아들들은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의 슬픔이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사무엘상 3:13)
엘리는 아들이 방자하게 되었을 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말씀에 어긋나게 행했을 때 그대로 방치해두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악을 향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모들이 자녀를 키울 때 때로는 자녀들에게 아첨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섭섭하게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얘가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얘가 엄마 잘못이야, 아빠 잘못이야 하고 대들면 어떻게 하나? 얘가 영원히 나의 품에서부터 떠나가면 얼마나 힘들까?’하는 것들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아이가 나를 싫어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우리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확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 안에, 특별히 아들 안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야단을 쳐야 합니다.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적절한 때 징계를 하지 아니하면 망나니가 되고 맙니다. 자기 멋대로 삽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했는데 부모의 품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오히려 엄격하게 자녀를 키운 부모가 자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자녀를 비인격적으로 모독하면서 억지로 징계를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다움을 소중히 생각하고, 격려하고, 잘못되고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 것에 대해서는 엄히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이복형을 죽였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어떤 인물입니까? 사무엘하 14장 25절을 보면 압살롬은 정말 탁월한 외모와 능력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사무엘하 14:25)
우월한 남성상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형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불러다 야단을 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적미적 세월이 가도록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들을 불러다 눈물로 키스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난 후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제부터는 면죄부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 대적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 말하십시오
이 아들 때문에 다윗이 얼마나 쫓겨 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아들이 죽게 됩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가 압살롬이라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외친 소리가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사무엘하 18:33)
이 한 구절에 “내 아들아”란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이 말을 어릴 때 했어야 합니다. 어릴 때 내 아들아 하고 껴안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릴 때 이것을 포기하니까 그 후부터는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 속에 자기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오늘까지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부모님의 은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들과 대화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너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한번 부르십시오. 그리고 같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관심이 적었던 것들을 이야기하세요. 그래도 너는 내게 최고의 소중한 아들이요, 소중한 딸이라고 이야기하세요.
여러분, 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잘났건, 못났건 상관없이 아버지에게 마지막까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듣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불러서 그 말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한 경쟁자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경쟁자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처럼 적대자로 바뀌느냐, 경쟁자이긴 하지만 영원한 친구가 되느냐는 여기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어도 다시 찾아오셔서 내 아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서 우리의 가정에 찾아가 다시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모든 부모들과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