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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자녀를 낳아서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부모들의 마음에는 소원이 하나 생깁니다. ‘얘야,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보다 좋은 환경과 보다 좋은 여건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원하는 직업을 얻고 이 땅에서 명예도 얻었으면 좋겠구나.’ 부모들은 누구나 자신의 자녀들이 멋진 아들, 예쁜 딸로 자라나기를 마음으로 소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겪어온 가난을 물려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나는 공부를 못해서 너는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교육에 열심을 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아픔을 겪는 부모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성품이 올바르지 않아서 너는 나보다 좋은 성품을 가졌으면 하고 바랬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나와 똑같은 성품을 갖고 있는 자녀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들에게 더 큰 풍요를 주기 원하고 더 넓은 교육의 기회를 얻게 해주기 원합니다. 또한 넉넉한 삶의 네트워킹을 위하여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들을 넓혀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들의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웁니다
그런데 부모들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무엇을 남겨줘야 하는가? 무엇을 남겨줘야 자녀들이 이 땅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부모가 된 사람들은 이것을 늘 염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외지에 출타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재산을 관할하는 탐욕스럽고 영특한 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사이에 재산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유서를 썼습니다. 유언장은 좀 이상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이 종에게 물려주겠다. 그리고 멀리 나가있는 아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단 한 가지만 물려주겠다.” 이 유언장을 본 종은 아주 기뻤습니다. 이제 주인의 재산이 전부 자신의 것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아들이 올 때까지 그 재산을 잘 관리했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왔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보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재산을 전부 종에게 주고 자기에게는 한 가지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고민 끝에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아버지는 정말 지혜로운 분이구만.” 그러면서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자네는 한 가지만 고를 수 있다고? 그러면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을 갖겠다고 말하면 되겠군.” 그래서 결국 이 아들은 모든 재산을 다시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만 자녀들에게 줄 수 있다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기독교교육학자였던 호레이스 부쉬넬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부모들의 목적이 어린아이들의 목적이 된다. 부모들의 삶과 정신이 자녀들의 인격을 형성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자녀들은 인생을 사는 노하우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자녀들의 생각이 부모의 생각과 비슷해집니다. 부모의 말투까지도 닮습니다. 부모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모가 갖고 있는 행동양식 하나하나를 습득해갑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부모님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의 부모를 보며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로 자라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가지로 다 설명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특히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은 실망합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현격하게 다른 것을 볼 때 그러합니다. 부모님은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재물과 명예와 출세가 우선인 것을 보면서 자녀들은 종종 부모의 신앙에 대해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는 부모들의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제게 다시 한 번 자녀를 양육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녀교육에 정성을 쏟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자녀를 사랑하지 못할 만큼 나이가 드는 때는 없습니다.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녀는 여전히 자녀입니다. 자녀를 여전히 사랑한다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치십시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신명기 4:9上)
여기 보면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에게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본 대로, 내가 들은 대로, 내가 경험한 대로, 내 마음속에 깨달은 대로, 내 마음이 기쁜 대로, 내 마음이 감격한 대로 하나님이 너에게 하신 그 일들을 기억하고 잊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은 부모의 마음속에서부터 먼저 시작됩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고, 하나님이 내가 사랑하는 분인 것을 내 마음속에 확인해야 자녀들이 아빠의 신앙, 엄마의 신앙을 본받아서 뒤따라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신앙을 잊어버리면 자녀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신앙이란 전승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신명기 4:9下 )
그 다음은 아들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은 또 그 아들들과 딸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신앙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기쁨,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역사를 우리의 자녀들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가치관을 그들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교육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물질세계보다 정신세계가 더 앞선다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이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정신세계가 어긋나면 끝입니다. 정신세계 중에서도 영적인 세계에 대한 명백한 확신이 부모들에게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각양각색의 모습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부모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쟤가 알아서 잘 크겠지. 나는 그저 의식주와 기본적인 교육환경만 잘 제공해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자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기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탐욕이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살려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란 자녀들은 말합니다. “우리 엄마아빠는 나를 내버려뒀어요. 내게 관심이 없어요. 이제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겁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자녀들이 내가 기대한 대로 가지 않고 내 생각과 반대로 가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게 됩니다.
또한 이런 부모들도 있습니다. “누구 좀 내 아이를 맡아줄 사람 없나요?” 라고 소리치는 부모입니다. 때로는 ‘좋은 장난감만 주면 잘 자라겠지’, ‘최고의 시설을 갖춘 어린이집에 보내면 안심이지’, ‘가장 좋은 과외를 시키기만 하면 되지’, ‘교회학교에 맡겨놓기만 놓으면 자녀들이 알아서 신앙생활 잘 할 수 있겠지’ 하며 자신이 책임지지 않고 남에게 맡기려는 부모들입니다. 때로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어도 바뀌지 않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군대에 가면 사람이 되서 돌아온다는데 너 한번 군대에 가봐라” 군대에 자녀들을 맡기는 부모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사랑받는 자녀가 아니라 마치 물건과도 같이 비인격적인 존재로구나.’ ‘부모님은 나와 직접 대화하기 원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자꾸 나를 맡기기만 하는구나.’ 그렇게 마음속에 버림받은 아픔을 지니게 됩니다.
세 번째 부모들은 이런 부모들입니다. “야,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너무 바쁘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와 마주앉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해야 네 등록금도 내주고 과외도 시켜주지. 내가 직장에서 빨리 승진해야 네 뒷바라지를 해주지.’ 이렇게 생각하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내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 돈을 더 좋아하나봐. 나보다 일을 더 좋아하는 거야. 나는 열외야.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부모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가슴이 멍이 든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네 번째 부모가 있습니다. 아주 엄중한 부모입니다. 철저하게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밥 먹을 때도, 공부할 때도, 외출할 때도, 옷 입을 때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실 이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웬만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합니다. 자신은 목표하지 않았으나 부모의 목표 때문에 그 위치까지 가게 되는 자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자녀들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주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나중에 자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한 것까지는 고마워요. 그러나 성공은 했지만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마음에 기쁨이 없었어요. 제가 저의 자녀를 키운다면 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자녀를 키우지는 않을 거예요.”
자녀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자녀에게 사랑한다 말하십시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왕도라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녀를 가르치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녀에 대한 소유욕을 버려야합니다. ‘내 새끼, 내 자식,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에게 쏟아 부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부모들은 이런 마음부터 버려야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들과 딸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승격시켜야 합니다. ‘내 아들’과 ‘내 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우리의 자녀들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얘야, 너는 내 아들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딸이야.” 여러분, 이것은 자녀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멋진 엄마, 멋진 아빠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고, 내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그런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마음속의 기쁨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잠시 자녀를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자녀가 어느 정도 크면 다 떠나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자녀를 서른, 마흔, 쉰 살까지 껴안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은 맡겨진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멋지게 키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로 키우려하기보다 내 아들딸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부모의 소유물로 억압되어 살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들어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안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부모의 마음에도 듭니다. 거꾸로 뒤집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나이가 들어서도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녀들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말로 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 때문에 내가 자랑스럽구나.” 그런데 이 말 다음에 더 크게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너를 더욱 좋아하신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너를 더 사랑하신단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너를 기뻐하신단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믿음 안에서의 자존감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고난과 실패를 당했을 때에도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배우기를 열망하십시오
세 번째입니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배우기를 열망하라는 말입니다. 배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 선생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고 어떻게 배우기를 열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교회학교 선생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를 맡길 때마다 선생님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선생님들께 감사하다고 말씀하십시오. 그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사대학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사대학에 참석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된다는 것,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배우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님들에게도 소중하고 자녀들에게도 소중한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교회는 망하는 교회입니다. 배우지 않는 가정은 망하는 가정입니다. 배움이 없는 학교는 망하는 학교입니다. 유대전통의 모든 것들은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지혜를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능력을 배웁니다. 이것이 부모들이 자녀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야할 내용입니다.
자녀의 스승이 되십시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음세대를 양육하려고 하면 성도님들 모두가 자녀들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스승, 몸으로 사랑하는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이제 스승이 될 수 없다고요? 아니요. 부모가 된 분들은 전부 스승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배움의 기초입니다. 사랑 없는 배움, 사랑 없는 가르침은 배움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요즘은 핸드폰을 다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또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문자 기능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루에 한 번씩 내가 읽은 성경 한절만 타이핑 연습한다고 치시고 치세요. 그리고 느낌 한마디를 적으십시오. “내가 너 사랑한다.” “내가 널 위해서 기도한다.” 한 가지만 쓰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우리 엄마아빠가 왜 그러신가?’ 하고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제가 어떤 분 얘기를 들으니까 일 년 동안 보내셨대요. 응답하지 않았대요. 근데 어느 날 바빠서 2,3일 빼먹었대요. 그랬더니 자녀가 응답이 왔대요. “엄마 왜 안 보내?” 그때 자녀와의 대화가 시작되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3월이 되면 다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조그만 묵상집도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자녀들에게 문자를 써서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한 주일에 한 번씩은 20~30분 정도 자녀들과 묵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너는 그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니?” “감사할 제목이 있니?” “깨달은 것이 있니?” 그리고 들으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냥 들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우리는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무엇으로? 사랑으로.
신앙이란 전승입니다. 이 전승이 깨어지면 교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세워나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명기 4: 9 ~ 14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자녀를 낳아서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부모들의 마음에는 소원이 하나 생깁니다. ‘얘야,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보다 좋은 환경과 보다 좋은 여건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원하는 직업을 얻고 이 땅에서 명예도 얻었으면 좋겠구나.’ 부모들은 누구나 자신의 자녀들이 멋진 아들, 예쁜 딸로 자라나기를 마음으로 소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겪어온 가난을 물려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나는 공부를 못해서 너는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교육에 열심을 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아픔을 겪는 부모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성품이 올바르지 않아서 너는 나보다 좋은 성품을 가졌으면 하고 바랬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나와 똑같은 성품을 갖고 있는 자녀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들에게 더 큰 풍요를 주기 원하고 더 넓은 교육의 기회를 얻게 해주기 원합니다. 또한 넉넉한 삶의 네트워킹을 위하여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들을 넓혀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들의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웁니다
그런데 부모들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무엇을 남겨줘야 하는가? 무엇을 남겨줘야 자녀들이 이 땅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부모가 된 사람들은 이것을 늘 염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외지에 출타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재산을 관할하는 탐욕스럽고 영특한 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사이에 재산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유서를 썼습니다. 유언장은 좀 이상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이 종에게 물려주겠다. 그리고 멀리 나가있는 아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단 한 가지만 물려주겠다.” 이 유언장을 본 종은 아주 기뻤습니다. 이제 주인의 재산이 전부 자신의 것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아들이 올 때까지 그 재산을 잘 관리했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왔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보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재산을 전부 종에게 주고 자기에게는 한 가지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고민 끝에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아버지는 정말 지혜로운 분이구만.” 그러면서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자네는 한 가지만 고를 수 있다고? 그러면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을 갖겠다고 말하면 되겠군.” 그래서 결국 이 아들은 모든 재산을 다시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만 자녀들에게 줄 수 있다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기독교교육학자였던 호레이스 부쉬넬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부모들의 목적이 어린아이들의 목적이 된다. 부모들의 삶과 정신이 자녀들의 인격을 형성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자녀들은 인생을 사는 노하우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자녀들의 생각이 부모의 생각과 비슷해집니다. 부모의 말투까지도 닮습니다. 부모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모가 갖고 있는 행동양식 하나하나를 습득해갑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부모님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의 부모를 보며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로 자라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가지로 다 설명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특히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은 실망합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현격하게 다른 것을 볼 때 그러합니다. 부모님은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재물과 명예와 출세가 우선인 것을 보면서 자녀들은 종종 부모의 신앙에 대해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는 부모들의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제게 다시 한 번 자녀를 양육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녀교육에 정성을 쏟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자녀를 사랑하지 못할 만큼 나이가 드는 때는 없습니다.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녀는 여전히 자녀입니다. 자녀를 여전히 사랑한다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치십시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신명기 4:9上)
여기 보면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에게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본 대로, 내가 들은 대로, 내가 경험한 대로, 내 마음속에 깨달은 대로, 내 마음이 기쁜 대로, 내 마음이 감격한 대로 하나님이 너에게 하신 그 일들을 기억하고 잊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은 부모의 마음속에서부터 먼저 시작됩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고, 하나님이 내가 사랑하는 분인 것을 내 마음속에 확인해야 자녀들이 아빠의 신앙, 엄마의 신앙을 본받아서 뒤따라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신앙을 잊어버리면 자녀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신앙이란 전승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신명기 4:9下 )
그 다음은 아들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은 또 그 아들들과 딸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신앙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기쁨,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역사를 우리의 자녀들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가치관을 그들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교육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물질세계보다 정신세계가 더 앞선다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이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정신세계가 어긋나면 끝입니다. 정신세계 중에서도 영적인 세계에 대한 명백한 확신이 부모들에게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각양각색의 모습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부모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쟤가 알아서 잘 크겠지. 나는 그저 의식주와 기본적인 교육환경만 잘 제공해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자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기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탐욕이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살려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란 자녀들은 말합니다. “우리 엄마아빠는 나를 내버려뒀어요. 내게 관심이 없어요. 이제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겁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자녀들이 내가 기대한 대로 가지 않고 내 생각과 반대로 가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게 됩니다.
또한 이런 부모들도 있습니다. “누구 좀 내 아이를 맡아줄 사람 없나요?” 라고 소리치는 부모입니다. 때로는 ‘좋은 장난감만 주면 잘 자라겠지’, ‘최고의 시설을 갖춘 어린이집에 보내면 안심이지’, ‘가장 좋은 과외를 시키기만 하면 되지’, ‘교회학교에 맡겨놓기만 놓으면 자녀들이 알아서 신앙생활 잘 할 수 있겠지’ 하며 자신이 책임지지 않고 남에게 맡기려는 부모들입니다. 때로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어도 바뀌지 않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군대에 가면 사람이 되서 돌아온다는데 너 한번 군대에 가봐라” 군대에 자녀들을 맡기는 부모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사랑받는 자녀가 아니라 마치 물건과도 같이 비인격적인 존재로구나.’ ‘부모님은 나와 직접 대화하기 원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자꾸 나를 맡기기만 하는구나.’ 그렇게 마음속에 버림받은 아픔을 지니게 됩니다.
세 번째 부모들은 이런 부모들입니다. “야,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너무 바쁘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와 마주앉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해야 네 등록금도 내주고 과외도 시켜주지. 내가 직장에서 빨리 승진해야 네 뒷바라지를 해주지.’ 이렇게 생각하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내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 돈을 더 좋아하나봐. 나보다 일을 더 좋아하는 거야. 나는 열외야.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부모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가슴이 멍이 든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네 번째 부모가 있습니다. 아주 엄중한 부모입니다. 철저하게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밥 먹을 때도, 공부할 때도, 외출할 때도, 옷 입을 때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실 이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웬만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합니다. 자신은 목표하지 않았으나 부모의 목표 때문에 그 위치까지 가게 되는 자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자녀들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주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나중에 자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한 것까지는 고마워요. 그러나 성공은 했지만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마음에 기쁨이 없었어요. 제가 저의 자녀를 키운다면 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자녀를 키우지는 않을 거예요.”
자녀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자녀에게 사랑한다 말하십시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왕도라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녀를 가르치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녀에 대한 소유욕을 버려야합니다. ‘내 새끼, 내 자식,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에게 쏟아 부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부모들은 이런 마음부터 버려야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들과 딸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승격시켜야 합니다. ‘내 아들’과 ‘내 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우리의 자녀들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얘야, 너는 내 아들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딸이야.” 여러분, 이것은 자녀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멋진 엄마, 멋진 아빠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고, 내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그런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마음속의 기쁨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잠시 자녀를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자녀가 어느 정도 크면 다 떠나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자녀를 서른, 마흔, 쉰 살까지 껴안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은 맡겨진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멋지게 키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로 키우려하기보다 내 아들딸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부모의 소유물로 억압되어 살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들어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안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부모의 마음에도 듭니다. 거꾸로 뒤집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나이가 들어서도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녀들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말로 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 때문에 내가 자랑스럽구나.” 그런데 이 말 다음에 더 크게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너를 더욱 좋아하신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너를 더 사랑하신단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너를 기뻐하신단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믿음 안에서의 자존감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고난과 실패를 당했을 때에도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배우기를 열망하십시오
세 번째입니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배우기를 열망하라는 말입니다. 배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 선생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고 어떻게 배우기를 열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교회학교 선생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를 맡길 때마다 선생님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선생님들께 감사하다고 말씀하십시오. 그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사대학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사대학에 참석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된다는 것,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배우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님들에게도 소중하고 자녀들에게도 소중한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교회는 망하는 교회입니다. 배우지 않는 가정은 망하는 가정입니다. 배움이 없는 학교는 망하는 학교입니다. 유대전통의 모든 것들은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지혜를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능력을 배웁니다. 이것이 부모들이 자녀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야할 내용입니다.
자녀의 스승이 되십시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음세대를 양육하려고 하면 성도님들 모두가 자녀들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스승, 몸으로 사랑하는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이제 스승이 될 수 없다고요? 아니요. 부모가 된 분들은 전부 스승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배움의 기초입니다. 사랑 없는 배움, 사랑 없는 가르침은 배움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요즘은 핸드폰을 다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또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문자 기능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루에 한 번씩 내가 읽은 성경 한절만 타이핑 연습한다고 치시고 치세요. 그리고 느낌 한마디를 적으십시오. “내가 너 사랑한다.” “내가 널 위해서 기도한다.” 한 가지만 쓰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우리 엄마아빠가 왜 그러신가?’ 하고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제가 어떤 분 얘기를 들으니까 일 년 동안 보내셨대요. 응답하지 않았대요. 근데 어느 날 바빠서 2,3일 빼먹었대요. 그랬더니 자녀가 응답이 왔대요. “엄마 왜 안 보내?” 그때 자녀와의 대화가 시작되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3월이 되면 다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조그만 묵상집도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자녀들에게 문자를 써서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한 주일에 한 번씩은 20~30분 정도 자녀들과 묵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너는 그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니?” “감사할 제목이 있니?” “깨달은 것이 있니?” 그리고 들으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냥 들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우리는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무엇으로? 사랑으로.
신앙이란 전승입니다. 이 전승이 깨어지면 교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세워나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